제비원의 돌부처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채 보름이 못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오랜 세월동안 당파싸움을 일삼으며 안일하게 살아온 썩은 선비들은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나라 걱정에 앞서 식솔을 거느리고 줄행랑치기에 바빴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는 어처구니없는 구호를 들고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는 단걸음에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그중 일군의 왜병들이 안동 제비원을 막 지나칠 무렵이었다.
요란한 말발굽소리에 먼지를 날리며 질풍같이 달리던 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왜장이 놀라 칼등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렸으나 말은 몸만 꿈틀할 뿐 움직이질 않았다.
다른 말들도 말굽이 떨어지지 않는 듯 버둥대기만 했다.
수십 명의 장졸들이 채찍을 휘둘러보고 내려서 말고삐를 잡아당겨 보기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잘 달리던 말들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다니 패병들은 기가 막혔다.
「여봐라, 말들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아는 자가 없느냐?」
왜장은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왜졸들은 연신 땀을 흘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알았다. 이건 필시 조선 놈들이 쓴 마술의 장난일 것이다.
너희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생쥐 한마리라도 남기지 말고 잡아오너라.」
「핫! 왜졸들은 칼을 빼어들고 숲 속으로 흩어져 사방팔방으로 주위를 이 잡듯 뒤졌다.
오른쪽 언덕 위 푸른 숲 사이로 암자 하나가 보일 뿐 주위는 고요했다.
왜졸들은 우르르 암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람에 흔들리는 법당 추녀 끝 풍경소리와 스님의 염불소리가 숲속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왜장은 곧 부하들을 이끌고 암자로 올라갔다.
밝은 단청에 퇴색한 작은 절이었으나 경내는 조촐하고 깨끗했다.
왜졸들은 맨발로 법당에 뛰어들어 염불하던 스님을 오라줄로 묶었다.
왜장은 스님을 마치 죄인 다루듯 법당 섬돌 아래 잡아 앉히고 자기는 법당 마루에 거만스럽게 앉았다. 「네 이놈, 바른대로 말하거라.」
「허허, 장수의 말버릇이 너무 무례 하구려」
「뭣이라구? 감히 조선국을 평정하러온 일본군 장수보고 무례하다니‥‥너는 어적하여 우리 군사를 못 가게 방해했느냐?」
스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말없는 스님의 미소에 왜장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숨지 말고 어서 마술을 풀어 말을 움직이게 해라 만약 명을 거역하면, 이 칼이 당장 네 목을 칠 것이다.」
스님은 이번에도 역시 미소를 지었다.
왜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네 이놈, 진정 칼 맛을 보고 싶으냐? 이 칼은 일본 제일의 명도로 무쇠도 물 베듯 하는 칼이다. 내말 알겠느냐? 앙-.」
스님은 그제 서야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칼을 거두시오.」
「핫하, 그래 마술을 풀겠단 말이냐?」
스님이 말을 시작하자 왜장은 기고만장했다.
「마술이라니? 그런 헛된 술수는 섬나라에나 있을까 우리 조선국에는 없소. 특히 불제자는 그런 사술은 모르오. 내 모르긴 모르되 지금 그대의 군사들이 요지부동 한 것은 필시 부처님의 뜻일 것이오.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께서 그대들의 이유 없는 살생을 막기 위해 그 뜻을 넌지시 시현하신 듯하니 어서 병마를 거둬 돌아가시오.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을 외면한 까닭으로 병마가 성치 못할 것이오. 나무관세음보살 」
왜장은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미친 듯 길길이 뛰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게 마술 하는 거냐?
좋다 부처님이 우릴 멸망시킨다면 부처고 뭐고 그냥 놔두지를 않겠다.」하고 엄포를 놓았다.
이를 응시한 스님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칼로 생업 하는 자, 그 칼이 자기 목을 칠 것이오. 내 부처님 뜻에 필히 살생을 원치 않으므로 그대 목숨 상할 것이 걱정되어 이르노니 어서 마음을 돌리시오.」
왜장은 마치 포효하는 맹수처럼 이빨을 내놓고 으르렁 거렸다.
「네 이놈, 내 지금 당장 네 목을 베고 싶으나, 그 부처의 목을 베기 전에 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참는 것이니 목을 길게 늘이고 순서를 기다려라.」
이때 왜졸들이 달려왔다.
「대장님, 저기 산마루에 돌부처가 있습니다.」
「돌부처가? 가자. 너희들은 저놈을 끌고 따라와라 내 단칼에 그 돌부처의 목을 칠 것이니라.』살기등등한 왜장은 칼을 들고 뒷산으로 내달았다. 이윽고 왜장은 돌부처 앞에 싫다「네 이놈, 네가 마술을 부렸지?』왜장은 돌부처에서 서너 걸음 물러서서 호흡을 가다듬더니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야아잇!」
기압소리와 함께 미륵불의 목이 동강나 땅바닥에 뒹굴었다.
자신의 놀라운 검술에 통쾌하게 웃던 왜장은 갑자기 낯이 파랗게 질했다.
그의 머리위로 붉은 피가 뿌려지고 있지 않은가 돌부처의 잘린 목에서 선혈이 솟구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면서 천둥 번개가 치니 사람은 울부짖고 말은 날뛰었다.
왜졸들은 손으로 감싸고 땅바닥을 기었다.
당황한 왜장은 황급히 명을 내렸다
「저 스님을 풀어줘라. 어서.」
그러나 왜장은 끝내 벼락을 맞고 쓰러졌으며 왜병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이때 기회를 엿보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날 그 스님이 누구였으며, 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도 경북 하동 제비원에는 선혈의 자욱이 있는 목 잘린 돌부처가 풍운의 역사를 지닌 채 서 있다.
<韓國寺刹史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