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의 구층탑

황룡사의 구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때다.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율사는 태화지를 지나다 갑자기 나타난 신인을 만나 수법을 받았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으므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소.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요?」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개의 야만족이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

또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왜적이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를 위하여 경기 남쪽에 한 정사를 짓고 나에게 복을 빌면 나도 또한 그 덕을 갚을 것입니다. 」

선인은 말을 마친 후 홀연히 사라졌다.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 황제로부터 불경, 불상, 가사 등을 받아가지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즉시 왕에게 아뢰었다.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시면 외국의 침략을 막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이 안녕을 누릴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이 의견을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조각계의 명장으로 소문난 백제의 아비지를 데려다 탑을 조성하자고 말했다.

신라 조정에서는 보물과 비단을 백제에 보내고 아비지를 청했다.

신라의 대탑 조성을 위해 특별히 초청을 받은 아비지는 내심 즐거웠다.

「신라에는 나만한 공장이 없는 모양이지. 이 기회에 내 예술성을 과시해야지. 아냐 하필이면 원수국에다 백제인의 솜씨를 심을 필요가 있을까?」

즐거움도 잠시, 망설임에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는 아비지에게 백제의 벼슬아치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며 서라벌 중심부에 백제인의 탑을 심고 돌아올 것을 권했다.

사비성을 떠나 서라벌에 도착한 아비지는 이간(신라 17관등의 제 2위) 용춘이 거느린 소장 2백여 명과 함께 탑 불사에 들어갔다.

두 달 남짓한 세월이 지나 황룡사 법당 앞에는 높다란 탑 주가 세워졌다.

탑 주가 세워지던 날밤. 경내엔 휘영청 딴은 달빛만 가득할 뿐 사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아비지는 절 마당에 내려와 탑주를 바라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겁에 빛날 탑을 세워야지.」

순간 아비지의 뇌리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신라는 왜 갑자기 9층탑을 세우는 것일까? 절을 지을 때 함께 세울 일이지 이제 와서 ‥‥」

그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적국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아비지는 백제로 도망칠 결심을 했다.

「예술이고 백제의 넋이고 뭐고 간에 얼른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짐을 챙긴 후 밤이 되길 기다린 아비지는 용춘의 집을 빠져나와 황룡사로 갔다. 그는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꿈이 다만 꿈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법당에서 나와 다시 한 번 탑주를 바라보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기 전에‥‥마음을 다져먹고 막 돌아서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어디선가 일대 광풍이 몰아치면서 달빛에 먹구름이 가리 우더니 천둥 번개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이었다.

놀라 법당으로 뛰어 들어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아비지는 또다시 놀랐다.

광풍이 멈춘 법당 앞에는 어디선가 노스님 한분과 키가 구척이나 되는 장수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자기가 세운 탑주와 똑같은 탑주를 순식간에 세웠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는 필시 부처님께서 날 보고 탑 불사를 계속하라는 계시일게다.」

아비지는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지의 가슴에 또 하나의 파문이 일었다.

「이 탑이 완성되면 9개 나라에서 우리 신라에 조공을 바친다며‥‥」

「그렇다는구먼.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단원, 8층 여적, 9층은 백제와 고구려를 상징한다는구먼.」

일터에서 인부들이 주고받은 말을 무심히 듣게 된 아비지는 그동안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더 이상 탑을 조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져누워 생병을 않았다.

아비지에게 사모의 정을 품은 채 늘 가슴만 조이던 용춘의 딸 아미는 아비지의 방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정성껏 간병했다.

「낭자, 낭자는 9층탑을 세우는 이유를 자세히 알고 있지요?」

「소녀,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

「그대 역시 신라의 여인이구려.」

아미 낭자는 가슴이 아팠으나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며칠간 병석에서 번민한 아비지는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으로 돌리고 탑 불사에 전력, 총 높이 2백 25척의 거대한 탑을 완성했다.

찬란한 햇살 속에 새로 탄생된 신라의 보물을 바라보는 아비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 그는 은빛 햇살이 반짝이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소리에 뒤이어 또 하나의『풍덩』소리가 들렀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비지를 따르던 아미 낭자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운 뒤 삼국을 통일했고 황룡사 9층 석탑은 신라의 3대보물중의 하나가 됐다.

이 탑이 있던 경주 황룡사의 일대를 구황동이라 부른다.

황룡사를 비롯 분황사 황복사 등 [黃]자가 든 아홉 절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또 일설에는 진흥왕 때 황룡사터에 신궁을 지으려고 하는데 아홉 마리의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므로 궁전대신 절을 세우고 구황동이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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