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족화상의 포교
또 북위(北魏)의 스님 담시(曇始)의 전기에 보면 담시는 관중(關中=長安) 사람인데 출가한 후로는 이상한 일이 많이 있었다.
동진 효무제 태원 9년(384) 말에 담시는 경장(經藏), 율장 수십부를 파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고 삼승을 가르쳐 즉시 불교에 귀의하게 했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와 접한 시초일 것이다.
의희(義熙) 초년(405)에 당시는 다시 관중으로 돌아가서 삼보(三輔) 지방을 개도(開道)시켰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였으며, 또 비록 진흙물을 건너더라도 일찍이 발이 젖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 불렀다 한다.
동진(東晋) 말기에 북방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함락시키고 죽인 사람이 헤일 수도 없었다.
그 때 담시도 또한 화를 당했으나 칼날이 그를 해치지 못했다.
발발(勃勃)은 탄식하면서 널리 승려들을 놓아주고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몰래 산림으로 천택(川澤)으로 도망하여 두타승(頭陀僧)의 행실을 닦았다.
척발도(拓跋盜)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이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최호는 지위가 재상에 올라 척발도의 신임하는 바가 되자,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도(盜)를 달래었다.
「불교는 세상에 이익이 없고 생업에 해만 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를 폐지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양경제(梁敬燾)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그제서야 척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정월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문에 이르렀다.
척발도는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베어 죽이게 했다.
그러나 여러 번 베어도 상하지 않으므로 도(盜)는 제 손으로 그를 베었으나 또한 상하지 않았다.
북쪽 동산에 기르고 있던 범에게 주었으나 범도 또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척발도는 매우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역질(疫疾)에 걸렸으며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이 죄과가 그들 때문이라 하여 이에 두 집의 종족을 죽여 없애고, 나라 안에 선언하여 불교를 크게 퍼뜨렸다.
담시는 그 뒤에 그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한다.
<三國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