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과 이차돈의 순교
신라 본기에 법흥 대왕 즉위 14년(527)에 소신(小臣) 이차돈(李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죽였다.
곧 소량(簫梁=梁武帝) 보통 8년 정미(527)에 서천축의 달마대사가 금릉에 왔던 해다.
이 해에 또한 낭지법사(郎智法師)가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먼 곳(중국)과 가까운 곳(신라)에서 같은 시기에 서로 감응했던 것을 여기서 믿을 수 있다.
원화 연간(元和年間)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을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이렇다.
예컨대 법홍대왕이 자극전에서 등극(登極)했을 때에 동족의 지역을 살펴보시고
「예전에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방에 유행하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부터 인민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조신(朝臣)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략(神畧)을 따르지 않았다.
대왕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 !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대업(=왕업)을 이으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지요.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고 있소 누가 나와 같이 일하겠소?」
이 때, 내양자(內養者=小臣) 성은 박(朴), 자(字)는 염촉(厭髑)이라고도 하고 또는 염도(厭覩) 등으로도 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서 곧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官爵)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제 4위는 파진찬(波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요 습보(習寶)도 또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대체로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사신(史臣)도 또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은 그 때 나이가 26세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자는 공한(功漢), 증조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염촉(厭髑)은 죽백(竹柏)과 같은 자질(姿質)을 수경(水鏡)과 같은 심지(心志)로, 적선한 집의 증손으로서 궁내(宮內)의 무신(武臣)을 희망했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성세(盛世)의 시신(侍臣) 되기를 바왔다.
그 때 그는 사인(舍人)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심정을 눈치 채어 왕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비천(卑賤) 한 사람에게도 계책(計策)을 물었다 하옵기 신은 중죄(重罪)를 무릅쓰고 아뢰겠습니다.」왕은 말했다.
「너의 할 일이 아니다.」
사신은 말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임은 신하의 큰 절개이오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백성의 바른 의리(義理)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을 형벌하여 머리를 베시면, 만민이 모두 굴복하고 감히 왕명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아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했고, 옛날 부처님께서 본생수행하실 때 매에게 쫓겨 오는 비둘기를 숨겨주시더니 매가 비둘기만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느냐 하면서 생살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의 몸을 베어 비둘기를 구원한 일이 있다.
피를 부려 생명을 끊어 짐승 일곱 마리를 스스로 불쌍히 여겼었다.
또 전생에 왕자로 있을때 굶어 죽게 된 호랑이 새끼들을 보고 몸을 주어 살게 하였다.
내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데, 어찌 중죄한 사람을 죽이겠는가?
너는 비록 공덕을 끼치려 하지마는 죄(=죽음)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
사인은 말했다.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신명(身命)입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지면 불법(佛法)은 다시 일어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왕은 말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릴 때부터 하늘을 뚫을 마음이 있고, 홍곡(鴻皓)의 새끼는 날 때부터 물결을 헤칠 기세가 있는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보살(菩薩)의 행위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임시로 위의(威儀)를 갖추고 무시무시한 형구(刑具)를 사방에 벌여놓고, 뭇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 그대들은 내가 사원(寺院)을 지으려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켰다.」
―전(鄕傳)에서는 염촉(厭觸)이 왕명이라 하면서 그 역사(役事)를 일으켜 절을 세운다는 뜻을 전했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했으므로 왕은 이에 염촉에게 책임지어 노하면서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달했다고 처형한 것이다고 했다. ―
이에 뭇 신하들은 벌벌 떨면서 황급히 맹세하고 손으로 동서를 가리키었다. 왕은 사인을 불러 이 일을 문책했다. 사인은 얼굴빛을 변하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대왕은 분노하여 베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유사(有司)가 그를 묶어 관아(官衛)로 끌고 가니 사인이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허연 젖이 한길이나 솟아났다.
이에 하늘은 침침해져 사양(斜陽)이 빛을 감추고, 땅은 진동하는데 천화가 내려왔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시였고 채상(宰相)은 상심하여 진땀이 관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문득 마르니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
동궁에서 말 고삐를 나란히 하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듯이 이별을 애태웠다.
관을 바라보고 우는 소리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았다고 모두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릿살 베인 일도 그 염촉의 고절(苦節)엔 비할 수 없을 것이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인들 어찌 그 염촉의 장렬(狀烈)에 견줄 수 있으라.
이는 곧 임금(法興王)의 신력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본심을 이룬 것이니 성자(聖者)다.」
드디어 북산의 서쪽 고개―곧 금강산이다.
향전(鄕傳)에서는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므로 그 곳에 장사했다 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무슨 까닭일까?―에 장사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짓고 그 이름은 자추사(刺秋寺)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반드시 대대의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를 행하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지었다.
양 무제(梁武帝) 태청(太淸) 초년(547)에 양(梁)의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왔고, 진문제(陳文帝) 천가(天嘉) 6년[565]에 진(陳)의 사신 유은(劉恩)은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을 받들어 왔다.
절(寺)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섰다. 법당(法堂)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
용상(龍象)의 중은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불법은 경국(京國=수도)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타방(他方)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분황(芬皇)의 진나(陳烈), 부석(浮石)의 보개(寶蓋), 낙산(洛山)의 오대(五含)등이 이것이다.―
서역(西域)의 명승(名憎)들이 이 땅에 오시니 이로 말미암아 삼한은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은 어울려 한 집이 되었다.
그러므로 덕명(德名)은 천구(天拘)의 나무에 쓰이고 신적(神速)은 은하 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이것이 어찌 세 성인의 위덕(咸德)으로 이룬 것이 아니랴!―
세 성인은 아도 법흥왕 염촉을 이른다.―
훗날 국통(鬪統) 혜융(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圖)·김상랑(金相郞)과 대통(大統) 녹풍(鹿風)과 대서성(大書省) 진서(眞恕)와 파진찬(波珍飡) 김의(金儀) 등이 사인의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를 세웠다.
원화(元和)는 12년 정유[817] 8월 5일로, 곧 제 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永秀禪師) ― 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스님을 모두 선사라 일컬었다―는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결성하고 매달 5일에 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어 법회(法會)를 열었다.
또 향전(鄕傳)에는 고을의 늙은이들이 매양 그의 죽은 날을 당하면 사(社)를 만들어 흥륜사에서 모였다고 하였으나 금월(今月=8凋) 초 5일은 곧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에 순응하던 날이다.
아 ! 이 임금[법흥왕]이 없었으면 이 신하(염촉)가 없을 것이고 이 신하(염촉)가없었으면 이 공덕이 없었을 것이니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고기와 물 같은 관계며,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한 아름다운일이라 할 수 있겠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일으켜 세워 절이 이룩되자 면류(冕旒=임금의 관)를 벗고 가사를 입으며 궁에 있는 왕의 친척을 내놓아 절 종으로 삼고―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 일컫는다.
후에 태종왕 때에 이르러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화보(花寶), 연보(蓮寶)라 했다. 몸을 던져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잡아와서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그 절에 살면서 몸소 불교를 널리 폈다.
진홍왕은 선덕(先德=법흥왕)을 이은 성군이었으므로 임금의 직책을 잇고 임금의 자리에 처(處)하여 위엄으로 배관을 통솔하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다.
왕은 이내 이절에 대왕 흥륜사(大王興輪寺)란 이름을 내리었다.
전왕(=법흥왕)의 성은 김씨요, 출가한 이름은 법운(法雲)이요, 자는 법공(法空)이다.―승전(憎傳)과 제설(諸說)에서는 왕비도 출가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다.
또 진흥왕도 법운(法雲)이라 했고, 진흥왕비도 법운(法雲)이라 했다 하니 자못 혼동됨이 많다.―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법흥왕의 성은 모(募)요,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처음 역사(役專)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사씨(史氏=毛祿의 누이동생)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법흥왕)과 같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법명(法名)을 묘법(妙法)이라 하고는 또한 영흥사에 살더니 몇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
국사에서는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塑像)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가서 진흥왕비 비구니(比丘尼)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살펴 보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는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또한 출가하여 여승(女僧)이 되었다.
그러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아마도 진(眞=眞興왕비의 眞)자는 마땅히 법(法)자로 고쳐야 될 것 같다.
이는 법흥의 비 파초부인(巴焦夫人)이 여승이 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것을 이름이며 이가 곧 그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에는 양제(梁帝=武帝)를 위하여 옹천주(甕天州)에 절을 세우고 그 절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 했다.
성인의 지혜는 만세를 위하니, 구구한 여론은 보잘 것 없다.
법륜(法輪)을 쫓아 구르니, 태평성제가 불교로 인해 이루어진다.
위는 원종(原宗 :법흥왕)에 대한 찬사다.
의(義)에 죽고 생(生)을 버림도 놀라운 일인데, 천화(天花)와 흰 젖은 더욱 다정하다.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죽고 생(生)을 버림도 놀라운 일인데, 천화(天花)와 흰 젖은 더욱 다정하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죽었으나, 각 절의 종소리는 서울을 뒤흔든다.
위는 염촉(厥髑=이차돈)에 대한 찬사다.
<三國遣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