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로가론

일수로가론

구담류지(瞿曇留支)한역:김월운 번역
☞용수보살(龍樹菩薩)지음

사물의 본체는 무상하나니
이러한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

본체라는 그것의 성품에도 본체가 없으니
그러므로 공과 무상을 설하네.

무슨 까닭으로 이 논서를 짓는가? 어떠한 이치를 설하고 어떤 사람을 파(破)하는가? 대답하노니 경을 읽는 이가 광대한 부피에 싫증을 내기 때문이며 또한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이 한량없는 논서를 많이 익혔으나 여래의 법의 바다 가운데에서 뜻을 생각하다가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또 무상하고 자기 본체가 공하며 다르지 않다는 뜻에 대하여 의심을 내기 때문에 이 의심을 끊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어떠한 이치를 말했는지를 이제 설명하겠다. 일체의 법은 무상하고 스스로의 본체가 빈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본체가 공하다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체의 법은 스스로의 성품과 스스로의 본체가 비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함이 없다. 온갖 부처와 연각과 성문은 공한 법 가운데에서 벗어남을 얻었다. 항상한 법 가운데에서 제행을 끊고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다.

게송에서 말한다.

공을 멸하고 있음의 본체에 머무르면 
상견을 이루게 되고 
다음 찰나에 모두 사라진다고 한다면 
단견을 이루게 되리라.

이런 까닭에 온갖 법은 스스로의 본체가 비었다 한다. 모든 부처님과 연각과 성문과 아라한은 이 이치 가운데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파하는가에 대해서 이제 말하겠다. 만약에 얻은 바가 있는 사람이 제행(諸行)을 떠나서 무상(無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다. 만약에 무상이 유위(有爲)를 떠났다면 무상은 항상한 것이 되고 허공과 같게 되리라. 만약 그렇다면 무위와 유위의 본체는 차별이 없게 된다. 만약에 유위와 무위가 합한다면 무위와 합했기 때문에 병(▩)은 깨뜨릴 수 없게 된다. 만약에 무위와 유위가 합했다면 유위와 합했기 때문에 열반(涅槃)도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만약에 일체법이 다르지 않는 것이라면 일체법은 파괴할 수 없다. 열반과 같이 항상하고 인연으로 생(生)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제행이 인연에서 생한 것이 아니라면 허공이나 열반과 다르지 않으므로 유위법을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에 제행이 인연에서 생한 것이 아닌데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과 열반도 항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더 나은 법이 없다. 만약에 무상이 유위를 떠났는데도 여전히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유위는 항상함을 떠난 것이 되고 이름이 무상하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경전 중에 그런 말이 있는가? 어떤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가? 그대가 지금 하는 말은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가? 그대가 지금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대의 삿된 소견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말하는 바는 바른 견해가 아니다.

재의 법 역시 인연으로 생한 것이 아니고 자성(自性)을 본체로 하여 성립할 것이다. 미래와 현재의 자성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성이 평등하다면 현재에 있는 법이 모두 인연을 따라 생겼는데 미래의 법인들 어찌 인연을 따라서 생기지 않으리요. 그대의 지금 주장은 경전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인가?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면 이치가 없고 만약 이치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만약에 미래의 법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고 자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미래의 법은 허공과 같아서 인(因)과 연(緣)이 없다. 인과 연이 없기 때문에 인연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로 미래의 본체는 없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도 또한 없다. 현재와 과거가 없기 때문에 삼세(三世)는 본체가 없다. 만약에 본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상견(常見)이다.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불제자로서 얻을 바가 있다는 소견을 가지면 외도인 가비라(迦毘羅) 등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논서는 가비라나 우루가(憂褸迦) 등의 외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소견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지은 것이 이 논서이다. 앞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을 파하는가 하였는데 그대들처럼 얻을 바가 있다는 사람들의 사견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짓는다.

일수로가론의 게송의 뜻을 지금부터 풀이하겠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자체의 성품이 무상하다’라고 하였는데, 자체라는 것은 생겨남이 있는 것을 말하고 법이 있기 때문에 본체라고 이름한다. 얻은 바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이 법 중에서 마음으로 집착해서 본체라 하나니, 이 법은 5음(陰)과 18계(界)와 12입처(入處) 중에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법을 굴린다.

하나, 둘 또는 여럿이라고 말할 때와 같이 또는 한 사람, 두 사람, 여러 사람이라고 말할 때 제각기 스스로의 본체가 있기 때문에 자체라고 말한다. 지 수 화 풍이 제각기 딱딱하고 축축하고 뜨겁고 움직이는 자기 성품을 가지듯이 이와 같이 제각기 스스로의 모습과 스스로의 본체가 있으므로 자체라고 말한다.

얻은 바가 있다는 사람이 생(生) 주(住) 멸(滅)이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다. 자체의 성품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본체와 이름은 얻을 바가 있다는 사람들이 분별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법을 떠나서 무상의 본체는 따로 없다. 자기의 모습이 바로 무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가 무상하다. 이 말씀에 따르면, 법을 떠나서 무상함이 스스로의 모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에 그대가 어찌하여 무상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금 설명하겠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이러한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고 하였는데, ‘사물에 본체가 없다’는 것은 그대가 분별하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 무상한 것은 본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자성으로서 본체가 없기 때문에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본체라는 그것의 성품에도 본체가 없다’고 하였는데, 본체가 없음을 떠나서 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에 ‘본체라는 그것도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만약에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본체가 없음을 떠나서 다른 본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대의 이 말은 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본체가 없는 것이 곧 스스로의 본체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경전에서 설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어떤 경전에서 이런 법을 말하셨는가? 부처님의 경전에는 이런 말이 없다. 경전에서 설한 것이 아니므로 옳지 않다. 큰 성인의 경전에서 설한 바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써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품은 그대로 본체가 없으므로 본체가 없다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다.

만약 이와 같이 경전의 뜻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뜻은 합당하다. 만약에 경전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말은 무너진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경전을 이해하면 그 이치는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성품이 그대로 본체가 없다는 그 말이 일수로가론 1권에서 성취되었다. 무릇 모든 법은 본체와 성품과 사물들의 있음이 이름은 다르나 그 뜻은 같다. 그러므로 혹은 ‘본체[體]’라고 하고 혹은 ‘성품[性]’이라고 하고 혹은 ‘법(法)’이라 하고 혹은 ‘있음[有]’이라 하고 혹은 ‘사물[物]’이라 하는데, 모두가 있음[有]의 차별일 뿐이다. 정음(正音 : 범어)으로는 사바바(私婆婆, sa- bhava)인데, 번역하여 ‘자체의 성품[自體體]’이라 하고, 다른 번역으로는 ‘없는 법과 있는 법[無法有法}’이라 하고, 다른 번역으로는 ‘자성이 없는 것[無自性性]’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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