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 02. 하권
“문수사리여, 여래란 법신(法身)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여래란 생김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다. 문수사리여, 여래란 이름[名]도 없고 색(色)도 없으며, 언설(言說)이 없고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이 없다. 문수사리여, 여래란 분별이 없고 분별을 떠났다.
문수사리여, 여래라 말함은 공(空)이 된다 하며, 다할 수 없는 모양이며, 진제(盡際)와 실제(實際)며, 공하고 평등하여 일체 법의 경계[際]가 둘이 아닌 경계이며, 항상 알 수 없는 곳이다.
문수사리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는 모든 곳에 분별이 없고 다른 분별을 떠나며, 하(下)도 아니고 중(中)도 아니고 상(上)도 아니다.
이와 같이 문수사리여, 일체 법은 분별이 없고 분별을 떠나서 하도 중도 상도 아니니, 왜냐하면 일체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일체 법이 평등함이요, 일체 법이 평등하다 말함은 곧 평등하게 머무름이요, 평등하게 머무른다 말함은 곧 움직이지 않음이요, 움직이지 않는다 말함은 곧 일체 법이 의지한 데가 없음이요, 일체 법이 의지한 데가 없다 말함은 저 마음이 안정되어 머무름이 없음이요, 마음이 안정되어 머무름이 없다 말함은 곧 생김이 없음이요, 생김이 없다 말함은 곧 생기지 않음이다.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저 마음과 심수법(心數法)이 필경 전도(顚倒)되지 않을 것이요, 만일 필경 마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저 수행하는 자는 여실(如實)하게 얻을 것이요, 만일 여실하게 얻는 자면 그는 희론(戲論)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요, 만일 희론을 일으키지 않는 자면 그는 일체 법을 행하지 않을 것이요, 만일 희론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자면 그는 나고 죽는 데에 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나고 죽는 데에 있지 않으면 그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만일 움직이지 않는 자면 그는 법을 어기지 않을 것이요, 만일 법을 어기지 않는 자면 그는 일체 법을 수순(隨順)할 것이요, 만일 일체 법을 수순하는 자면 그는 법성(法性) 중에 능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만일 법성 중에 움직이지 않는 자면 그는 자성(自性)법을 얻을 것이요, 만일 자성 법을 얻는 자면 그는 얻은 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에 의하여 일체 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에 의하여 일체 법이 생긴 자면 그는 항상 생김이 아닐 것이요, 만일 항상 생김이 아닌 자면 그는 항상 얻을 수 없을 것이요, 만일 항상 얻을 수 없는 자면 그는 실제법(實際法)을 얻을 것이요, 만일 실제 법을 얻는 자면 그는 불공(不共) 일체 법에 머무를 것이요, 만일 불공(不共) 일체법에 머무른 자면 그는 불공에 머무름이요, 만일 불공에 머무르는 자면 그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요, 만일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자면 그는 법 가운데에 머무름을 얻을 것이요, 만일 법 가운데에 머무름을 얻는 자면 그는 바른 생각의 법[正念法] 수행함을 얻을 것이요, 만일 바른 생각의 법 수행함을 얻는 자면 그는 한 법도 불법(佛法)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달은 것을 ‘보리(菩提)’라 이름하며, 보리는 ‘일체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달음’이라 이름하니, 공(空)은 곧 보리(菩提)이다. 이와 같은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과 무작(無作)과 무행(無行)과 무의(無依)와 무생(無生)과 무취(無取)와 무처(無處)니, 이와 같은 법을 깨달은 자를 ‘보리’라 이름하며, 보리는 ‘바른 생각[正念] 을 수행함’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바른 생각을 수행함이라 말한 것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을 곧 바른 생각이라 이름하며, 관찰하지도 않고 달리하지도 않는 것을 행함이라 이름하며, 집착하지도 않고 속박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 것을 행함이라 이름하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을 행함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바른 생각의 행함이란 그곳은 행함도 없고, 이익도 없고, 과위(果位)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마음 자성[心自性]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저 마음을 객진(客塵) 번뇌가 더럽힌다 하여도 그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저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곧 그 자체에 더러움이 없고 더럽지 않는 것이며, 저 곳엔 대치(對治)할 법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법으로 대치하여 이 번뇌를 없애겠는가. 왜냐하면 저 청정함이란 청정함이 아니요, 곧 본래 청정함이다. 만일 본래 청정한 것이면 곧 이 생김이 아니요, 만일 생김이 아닌 것이면 곧 더러움이 아니요, 만일 더러움이 아닌 것이면 염법(染法)을 떠나지 않음이다. 만일 염법을 떠난 것이면 일체 더러움을 없앨 것이다.
어떤 법으로 일체 더러움을 없애겠는가. 생김이 아닌 것이다. 만일 생김이 아닌 것이면 곧 보리다. 보리란 평등이라 이름하고, 평등이란 진여(眞如)라 이름하며, 진여란 다르지 않음[不異]이라 이름하고, 다르지 않음이란 여실히 일체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에 머무름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진여라는 저 곳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둘 없는 법이니,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둘 없는 법이 곧 진여이다.
문수사리여, 진여라 말한 것은 실제(實際)이며, 실제라 말한 것은 다르지 않음[不異]이며, 다르지 않음이란 미래의 진여이며, 미래의 진여라 말한 것은 곧 다르지 않음이며, 다르지 않음이라 말한 것은 곧 진여이며, 진여라 말한 것은 항상함도 아니고 진여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고 진여도 아니라 말한 것은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며,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라 말한 것은 생김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며, 생김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라 말한 것은 열반 평등이며, 열반 평등이라 말한 것은 세간(世間)에도 있지 않고 열반에도 있지 않으며, 세간에도 있지 않고 열반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것이라 말한 것은 하(下)도 아니고 중(中)도 아니고 상(上)도 아니며, 하도 아니고 중도 아니고 상도 아닌 것이라 말한 것은 바로 여래이다.
여래라 말한 것은 진실한 말[實語]을 이름하며, 진실한 말이라 말한 것은 진여를 이름하며, 진여라 말한 것은 여실(如實)을 이름하며, 여실이라 말한 것은 아(我)를 이름하며, 아라 말한 것은 바로 둘 아닌 것이며, 둘 아닌 의(義)란 바로 보리이며, 보리란 깨달음을 이름하며, 깨달음이란 3해탈문(解脫門) 지혜에 드는 것이며, 지혜란 3세(世)가 평등한 일체 법 지혜에 드는 것이다.
의(義)라 말한 것은 일체 법에 차별이 없는 이치이니, 의(義)란 이름[名]도 없고 말[言]도 없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지혜[智]라 말한 것은 일체 법 깨달음을 지혜라 이름하며, 일체 법 아는 것을 지혜라 이름한다.
의(義)라 말한 것은 중생과 식지(識智)와 요의(了義)를 아는 것이니, 바로 법이다. 법이란 바로 의(義)이니, 의지(義智)와 식지(識智)와 요의지(了義智)와 법지(法智)와 법주지(法住智)와 법체지(法體智)인 것이다. 그것은 법의 전(轉)과 소전(所轉)에 의하여 자전(自轉)하며 평등하여 둘 아닌 이치이다.
평등하여 둘 아닌 의(義)는 곧 평등이요, 평등이란 곧 의인 것이다. 말한 의(義)와 식지(識智)가 평등함이란 곧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지혜이며, 요의(了義)라 이름하니, 불요의(不了義)가 아니다. 평등이라 말한 것은 곧 평등이며, 곧 공(空)이다. 공이라 말한 것은 곧 환(幻)인 아(我)가 평등함이며, 아(我)가 평등하다 말한 것은 곧 법이 평등함이요, 법이 평등하다 말함은 곧 떠나 평등함이요, 떠나 평등함이란 바로 깨달음이 평등 함이요, 깨달음이 평등함이란 곧 보리이다.
문수사리여, 색(色)에 집착함이란 곧 눈에 집착함이요, 눈에 집착함이란 곧 자성(自性)에 집착함이요, 견(見)에 집착함이란 곧 자아(自我)에 집착함이요, 자신(自身)에 집착함이란 곧 자성의 공한 지혜에 집착함이요, 바르지 않은 염관[不正念觀]에 집착함이란 곧 법 광명의 관법(灌法)에 집착함이다. 게으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견고한 정진으로 지혜를 증득하는 데에 집착함이다. 여실하게 법을 아는 것을 집착함[著]이라 이름하며, 5개(蓋)와 보리분(菩提分)에 집착하는 것도 집착함이라 이름한다. 집착이 아니고 장애가 없는 해탈의 지혜와 일체 법의 자성이 청정함은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또 보살마하살이 더러움과 깨끗한 인연을 여실하게 알아서 더러움과 깨끗한 인연 속에서 머무르지 아니한다. 아(我)를 일으키며 소견을 일으킴을 더러운 인연[染因]이라 이름하고, 안으로 고요하고 밖으로 행하지 않음을 깨끗한 인연[淨因]이라 이름한다. 음욕과 분노와 원한과 해침과 각관(覺觀)을 더러움의 인연이라 이름하고, 부정(不淨)과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로 12인연의 인(忍)에 드는 것은 깨끗한 인연이라 이름한다. 4전도(顚倒)는 더러운 인연이고, 4념처(念處)는 깨끗한 인연이다. 5개(蓋)는 더러운 인연이고, 5근(根)은 깨끗한 인연이다. 6입(入)은 더러운 인연이고, 6념(念)은 깨끗한 인연이다. 7비정법(非淨法)은 더러운 인연이고, 7각분(覺分)은 깨끗한 인연이다. 8사법(邪法)은 더러운 인연이고, 8정법(正法)은 깨끗한 인연이다. 9뇌사(惱事)는 더러운 인연이고, 9차제정(次第定)은 깨끗한 인연이다. 10불선업도(不善業道)는 더러운 인연이고, 10선업도(善業道)는 깨끗한 인연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일체 좋지 못한 생각은 더러운 인연이고, 일체 좋은 생각은 깨끗한 인연이다.
말한 더러운 인연과 깨끗한 인연의 저 일체 법은 자성(自性)이 공하여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명(命)도 없고 수(壽)도 없으며, 내 것도 없고 시키는 것도 없어서, 마치 환(幻)과 같아 형상이 없고 안으로 고요하다.
안으로 고요함이란 곧 적멸(寂滅)이며, 적멸이란 곧 자성이 청정한 것이다. 자성이 청정함이란 곧 얻을 수 없는 것이요, 얻을 수 없는 것은 곧 처소가 없는 것이며, 처소가 없는 것이란 곧 진실[實]이며, 진실은 곧 허공이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한 법도 생기거나 멸함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이 이와 같다면 여래께서는 어떻게 보리(菩提)를 얻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감관[根]도 없고 머무름도 없나니 여래는 이와 같이 보리를 얻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감관이며, 어떤 것이 머무름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신견(身見)을 감관이라 이름하며, 실답지 못한 분별을 머무름이라 이름한다. 저 보리는 평등하나니 여래는 일체 법의 평등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여래를 감관이 없고 머무름이 없이 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보리를 청정하다[淨]고 이름하고, 또한 고요하다[寂靜]고 이름하나니, 어떤 것이 청정한 것이며, 어떤 것이 고요한 것입니까?” “문수사리여, 나[我]와 내 것[我所]의 눈[眼]은 공(空)하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의 나와 내 것이 공하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이 공함을 알아 색(色)에 집착하지 않나니, 청정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귀가 공함을 알아 소리에 집착하지 않나니 곧 고요함이며, 코가 공함을 알아 냄새에 집착하지 않나니 곧 고요함이며, 혀가 공함을 알아 맛에 집착하지 않나니 곧 고요함이며, 몸이 공함을 알아 촉감에 집착하지 않나니 곧 고요함이며, 뜻이 공함을 알아 법에 집착하지 않나니 곧 고요함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의 자성은 청정하나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자성이 청정하다는 것은 말한 바 자성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아닌 것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평등함이 허공과 같다. 자성이 허공과 같다. 비유하건대 허공의 본래 자성은 청정하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함은 취함도 아니고 버림도 아니다. 어찌하여 취함도 아니고 어찌하여 버림도 아니냐. 취함이 아니라 함은 일체 법을 취하지 않음이니 그러므로 취함이 아니라 말한다. 버림이 아니라 함은 일체 법을 버리지 않음이니 그러므로 버림이 아니라 말한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큰 표류(漂流)를 건넜으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저 진여(眞如)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보지 않나니 여래는 일체 법이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떠난 것을 알므로 여래가 말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형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무엇이 형상이 없고 볼 수 없는 것이냐. 문수사리여, 안식(眼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색(色)을 볼 수 없기에 볼 수 없다고 이름한다. 이식(耳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볼 수 없다고 이름한다. 비식(鼻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냄새를 맡을 수 없기에 볼 수도 없다고 이름한다. 설식(舌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맛을 알 수 없기에 볼 수도 없다고 이름한다. 신식(身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촉감을 알 수 없기에 볼 수도 없다고 이름한다. 의식(意識)으로 볼 수 없기에 형상이 없다고 이름하며, 법을 알 수 없기에 볼 수도 없다고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이는 여러 성인(聖人)의 경계니 이른바 3계(界)의 경계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어서 3세(世)가 평등하고 3세가 청정하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3세(世)의 지혜이냐. 이른바 과거법에도 마음이 행하지 않고 미래법에도 알음알이[識]가 가지 않고 현재법에도 생각이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마음과 뜻과 의식에 머무르지 않나 니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분별하지 않고 분별이 없으며, 분별하지 않고 분별이 없기 때문에 미래법과 현재법을 보지도 않고 희론하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보리는 몸[身]이 없고 함[爲]이 없다. 어떤 것이 몸이 없는[無身] 것이며, 어떤 것이 함이 없는[無爲] 것이냐. 문수사리여, 몸이 없음이란 이른바 안식(眼識)으로 알지 못하며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으로도 알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만일 마음과 뜻과 의식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함이 없는 것이다. 함이 없다고 말함이란 생김도 아니고 머무름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니, 그러므로 3세가 청정하고 함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함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이 함이 있음[有爲]도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말한 일체 법의 자체란 곧 체성(體性)이 없음이니 체성 없음인 그곳은 두 말이 없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한 것은 차별이 없음[無差別]과 발자취[足迹]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무엇이 차별 없음이며, 무엇이 발자취이냐. 문수사리여, 형상 없음[無相]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진여(眞如)를 발자취라 이름하며, 머무름 없음[無住]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법을 발자취라 이름하며, 다름 없음[無異]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실제(實際)를 발자취라 이름하며, 얻을 수 없음[不可得]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움직임 아님[不動]을 발자취라 이름하며, 공(空)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형상 없음[無相]을 발자취라 이름하며, 감각 없음[無覺]을 차별 없음이라 이름하고 소원 없음[無願]을 발자취라 하며, 이름 구하지 않음[不求名]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중생 없음[無衆生]을 발자취라 하며, 중생의 체[衆生體]를 차별 없음이라 하고 허공을 발자취라 하며, 보지 않음[不見]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생김 아님[不生]을 발자취라 하며, 멸함 아님[不滅]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함이 없음[無爲]을 발자취라 하며, 행이 없음[無行]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보리를 발자취라 하며, 고요함[寂靜]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열반을 발자취라 하며, 일어나지 않음[不起]을 차별 없음이라 하고 깨달음[覺]을 발자취라 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몸은 우둔하여 지각함이 없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초목과 장벽, 흙덩이ㆍ그림자[影像] 같다. 마음은 허깨비[幻]와 같아 공하여 있는 바 없고, 진실[實]도 아니고 지음[作]도 아니다.
문수사리여, 몸과 마음을 여실하게 깨닫는 것을 보리(菩提)라고 이름하나 세간(世間)의 이름[名字]에 의함이요, 제1의(第一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보리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법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고 진실 아님도 아니며, 진리[諦]도 아니고 진리 아님도 아니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말하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으로 보리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보리는 머무른 곳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비유컨대 허공은 머무른 곳을 말할 수 없고, 함이 없으며[無爲]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는 것처럼, 보리도 또한 이와 같이 머무름도 없고 함도 없으며 생김도 멸함도 말할 수 없다.
문수사리여, 비유컨대 일체 세간의 법에서 만일 그 진실을 구하려 해도 말할 수 없듯이 문수사리여, 보리도 또한 이와 같이 일체 법으로써 말한다 하여도 보리를 실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진실 법에는 명자(名字)와 글귀[章句]를 얻을 수 없나니, 무슨 까닭이냐.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말한 바 보리는 취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취할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는 것이냐. 문수사리여, 눈[眼]을 여실하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색(色)을 보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귀를 여실하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소리를 듣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코를 여실하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냄새를 맡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혀를 여실하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맛을 알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몸을 여실하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촉감을 느끼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뜻을 여실하 게 알기에 취할 수 없고, 모든 법을 보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고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여래는 취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기에 보리를 증득하였다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보리를 증득하여 눈을 취하지도 않고 색깔을 보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안식(眼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귀를 취하지도 않고 소리를 듣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이식(耳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코를 취하지도 않고 냄새를 맡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비식(鼻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혀를 취하지도 않고 맛을 알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설식(舌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몸을 취하지도 않고 촉감을 느끼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신식(身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의식을 취하지도 않고 법을 알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의식(意識)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마음과 뜻과 의식에 머무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여래를 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중생에게는 네 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법이 있어 저 네 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법에 의지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중생이 색(色)에 의하여 마음이 머무르며,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 등이니, 중생이 이 네 가지에 의하여 마음이 머무른다.
문수사리여, 이 네 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법을 여래는 여실하게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아나니, 그러므로 부처[佛]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한 것은 공(空)을 이름한 것이다. 문수사리여, 저 일체 법의 공함이 보리의 공함과 다르지 않아 보리의 공(空)이 곧 일체 법의 공이니, 저 일체 법의 공을 여래는 여실하게 알았기에 깨달은 자[覺者]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공(空)이 아닌 공(空)임을 알지니, 문수사리여, 공이란 곧 보리요, 보리란 곧 공이다. 문수사리여, 공 속에는 공(空)이 없고 또 보리도 없고 또 둘이 없다. 어떤 법을 공이라 하며, 어떤 법을 보리라 하여 두 이름을 말하랴.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일체 모두가 둘이 없고 형상이 없고 차별이 없고 이름이 없고 생각이 없고, 마음과 뜻과 의식을 떠나서 생김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며, 행(行)도 아니고 행도 없으며, 모음[集]도 아니요, 이름도 없고 소리도 없다.
문수사리여, 공이라 말한 것은 실없는 말[戲論]을 취하여 이름한 것이다. 문수사리여, 제일법에는 공이라 이름할 수 있는 법이 없나니, 문수사리여, 마치 허공을 허공이라고 말하나, 허공이라 이름할 것이 없건만 허공이라 이름함과 같다. 문수사리여, 공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공을 공이라 말하나 공이라 이름할 법이 없다. 이와 같이 일체 법에 들어감을 일체 법문에 들어감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은 이름이 없으나 이름에 의하여 말함이다. 문수사리여, 이름은 이곳도 아니고 이곳을 떠남도 아니기에 이와 같이 이름에 의하여 어떤 법을 말하나니 그 법은 이곳도 아니고 이곳 떠남도 아니다. 이와 같이 문수사리여, 여래는 여실하게 일체 법이 본래 생김이 아니고 일어남이 아니며 멸함이 아니어서 형상이 없고 마음과 뜻과 의식을 떠나고 이름도 없고 소리도 없는 것임을 안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한 것은 마치 허공과 같이 평등하나니, 허공은 평탄하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듯이 보리도 또한 평탄하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법이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법이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평등하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고 말하겠는가.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와 같이 일체 법이 평등하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깨닫고 나서 조그마한 어느 법도 평등하지 않거나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이 없다. 저 법대로 머물러 이처럼 여여(如如)한 진실 지혜로 안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여실(如實)한 지혜이냐. 문수사리여, 일체 법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일체 법은 없는 것이어서 본래부터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법이 본래 생기지 않으며 생겼다가 도로 없어진다. 저모든 법은 짓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이 생기고, 짓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이 멸한다.
문수사리여, 모든 법이 인연에 의하여 생기고 인연이 없어지면 멸하여 진실한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도 끊는 자를 위하여 설법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함은 여실한 발자취[如實足迹]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여실한 발자취이냐. 문수사리여, 여실한 발자취라 말함은 곧 보리이니, 보리와 같아서 색(色)도 또한 이와 같이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았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이와 같이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 보리와 같아서 지계(地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고, 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도 또한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 보리와 같아서 안계(眼界)와 색계(色界)와 안식계(眼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
문수사리여, 보리와 같아서 이계(耳界)와 성계(聲界)와 이식계(耳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고 문수사리여, 비계(鼻界)와 향계(香界)와 비식계(鼻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으며, 설계(舌界)와 미계(味界)와 설식계(舌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고, 신계(身界)와 촉계(觸界)와 신식계(身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으며,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도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은 거짓 이름인 법이니,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를 이른다. 여래는 저 법을 여실하게 깨닫고 뒤바뀌지[顚倒] 않게 깨달아서 저 법같이 과거[本際]ㆍ현재[中際]ㆍ미래[後際]에 머무른다. 여래는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여실하게 아나니, 저 법같이 과거에도 생기지 않고 미래에도 가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저 법같이 발자취를 여실하게 알아서 한 법과 같이 일체 법에도 또한 그러하며, 일체 법과 같이 한 법에도 또한 그러하다.
문수사리여, 하나와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 아(阿)의 문과 아(阿)가 없는 문(門)에 들어간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아(阿)의 문이며, 어떤 것이 아가 없는 문이냐. 문수사리여, 아(阿)라 말함은 일체 선근법(善根法)을 처음 발함이요, 아가 없음이란 일체 법도 보지 않음이다. 또 아(阿)라 말함은 마음이 머무르게 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음이요, 아가 없음이란 무상삼매 해탈문(無相三昧解脫門)이다. 아라 말함은 모든 법상(法相)을 헤아리고 관찰함이요, 아가 없음이란 한계에 벗어남을 이름한다. 어떤 것이 한계에 벗어남이냐. 식(識)과 업(業)이 없는 것이다.
아(阿)라 말함은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함이요, 아가 없음이란 무위법(無爲法)을 관찰함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함은 번뇌[漏]가 없고 취(取)함이 없는 법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는 것이냐. 문수사리여, 번뇌가 없다 말함은 네 가지 번뇌[漏]를 떠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욕심의 번뇌[欲漏]ㆍ유의 번뇌[有漏]ㆍ무명의 번뇌[無明漏]ㆍ소견의 번뇌[見漏]이니, 저 네 가지 번뇌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멀리 떠났다고 말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취함이 없는 것이냐. 네 가지 취함을 떠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욕심의 집착[欲取]ㆍ소견의 집착[見取]ㆍ나라는 집착[我取]ㆍ계의 집착[戒取]이니, 이 모든 번뇌로 중생이 무명의 어둠에 빠지고 애욕의 물에 젖게 되어 번갈아 서로 인연하여 허망하게 집착을 낸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아(我)의 근본을 여실하게 알아 아(我)의 청정함으로써 일체 중생의 청정함도 여실하게 아나니, 말한 바 아의 청정함과 일체 중생의 청정함 이 둘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는 이치[義]로서 곧 생김도 멸함도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생김도 멸함도 없는 것은 어떤 자리이냐. 마음과 뜻과 의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어떠한 법도 마음과 뜻과 의식이 없다. 그 법에는 분별이 없거늘 어떤 법이라고 분별하여 바르지 못한 생각을 내겠는가. 그러므로 보살은 바른 생각을 낸다. 바른 생각을 냄이란 무명을 일으키지 않음이요, 무명을 일으키지 않음은 12유지(有支)을 일으키지 않음이요, 12유지를 일으키지 않음은 곧 생김이 아니요, 생김이 아님은 곧 자리[位]요, 자리는 곧 요의(了義)요, 요의는 곧 제1의(第一義)요, 제1의는 곧 무아(無我)의 이치[義]요, 무아의 이치는 곧 말할 수 없는 이치요, 말할 수 없는 이치는 곧 인연의 이치요, 인연의 이치는 곧 법의 이치요, 법의 이치는 곧 진여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인연을 보았다고 말함은 곧 법을 본 것이요, 법을 본 것은 곧 여래를 본 것이니, 보았다는 말한 것은 모든 법을 보나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보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은 마음을 보며 관(觀)함을 본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마음을 보지 않나니, 마음을 보지도 않고 관함을 보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진실을 보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저 모든 법은 이와 같이 평등하나니 여래는 저 법의 평등한 대로 안다.
문수사리여, 보리라 말함은 깨끗함이며, 더러움[垢] 없고 티[點]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깨끗함이며, 어떤 것이 더러움 없음이며, 어떤 것이 티 없음이냐. 문수사리여, 공(空)을 깨끗함[淨]이라 이름하고, 무상(無相)을 더러움 없음[無垢]이라 이름하며, 무원(無願)을 티 없음[無點]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생김이 없음[無生]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행이 없음[無行]을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일어남이 없음[無起]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자성(自性)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선근(善根)이 깨끗함을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광명이 원만함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실없는 말 없음[無戲論]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실없는 말 떠남을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일체 실없는 말이 고요하고 없어짐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진여(眞如)를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법계(法界)를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실제(實際)를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허공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걸림 없음을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보지 않음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속이 청정함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밖으로 행하지 않음을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안팎으로 보지 않음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5음(陰)이 모인 것을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법계 자체를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12입(入)에 들어가지 않음을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과거의 다한 지혜를 깨끗함이라 이름하고, 미래의 생김 없는 지혜를 더러움 없음이라 이름하며, 현재의 법계(法界)에 머무르는 지혜를 티 없음이라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깨끗함과 더러움 없음과 티 없음을 대략 말했거니와 한 평등한 법의 발자취 속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고요한 발자취[寂靜足迹]이다. 고요한 발자취는 곧 적멸(寂滅)이요, 적멸은 곧 깨끗함[淨]이요, 깨끗함은 곧 성스러움[聖]이다. 문수사리여, 허공과 같아서 보리도 또한 이와 같고, 보리와 같아서 법도 또한 이와 같으며, 법과 같아서 법체(法體)도 이와 같고, 법체와 같아서 중생도 이와 같으며, 중생과 같아서 국토도 이와 같고, 국토와 같아서 열반도 또한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일체 법이 평등하여 열반과 같다’고 말하나니 필경 구경(究竟)이요, 소치법(所治法)이 없고 모든 소치법을 떠나고, 본래 청정하며 본래 더러움 없고 본래 티 없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와 같이 일체 법을 여실하게 깨달아서 일체 중생의 본성이 곧 청정하고 더러움 없고 티 없음을 관찰하고 대자비심(大慈悲心)을 크게 편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보살행을 행함이냐. 문수사리여, 만일 보살이 마음을 내지 않으면 모든 법에 다함이 되지 않고, 모든 법에 생김이 되지 않고 모든 법에 생기지 않음도 되지 않으며, 모든 법이 본래 다함을 보거나 모든 법이 다하지 않음을 보더라도 교만한 마음을 내어 ‘내가 이와 같이 알았노라’ 말하지 않고, 모든 법이 본래 나지 않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문수사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보살행을 행한다.
또한 문수사리여, 보살은 과거 마음이 다했다고 보지 않고 보살행을 행하며, 미래의 마음이 이르지 않는다고 보지 않고 보살행을 행하며, 현재의 마음이 있다 보지 않고 보살행을 행한다.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와 같이 보살행을 행한다.
문수사리여, 보시(布施)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지계(持戒)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인욕(忍辱)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정진(精進)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선정(禪定)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반야(般若)에 보살과 여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보살은 색(色)이 공함을 보지 않고 색이 공하지 않음을 보지 않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색과 공이 색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수사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행(行)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행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살행을 행한다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마음ㆍ뜻ㆍ의식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어느 한 법도 알거나 떠나거나 닦거나 증득함이 있지 않다.
문수사리여, 다함[盡]이라 말한 것은 저 법이 항상 다함이요, 다함 아님[不盡]과 본래 다함이 아니다. 만일 법이 본래 다함이라면 저 법은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함이라 말하나니, 왜냐하면 여실하게 다함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실하게 다함이라면 저 법은 어느 한 법도 다함이 아니다. 만일 한 법도 다함이 아니라면 저 법은 무위(無爲)이다. 만일 법이 무위이면 그것은 무위법(無爲法)이니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이를 여래(如來)라 이름한다. 만일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더라도 법성(法性)ㆍ법체(法體)의 법은 법의 제자리[法位]에 머무르니 법계(法界)가 진실 그대로이다. 법계가 진실 그대로 법의 지혜[法智]에 머물러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나니 저 지혜에 의하여 무위법을 안다. 문수사리 여, 만일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제자리에 들어간다면 모든 번뇌법[漏法]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알 것이다.
문수사리여, 모든 번뇌가 다하였다고 말한 것은 세간의 명자(名字)와 빌린 말[假言]에 의하여 말한 것이요, 저 진여 법신(眞如法身)은 법의 생김도 없고 또한 법의 멸함도 없다.”
그 때에 문수사리법왕자(文殊師利法王子) 보살마하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며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미묘한 게송으로 여래를 찬탄하였다.
색(色)도 형상도 없고
감관도 머무름도 없어
생김도 멸함도 아니신
부처님께[無所觀] 경례(敬禮)합니다.
머무르지도 가지도 않으시고
취함과 버림 없으시며
6입(入)을 멀리 떠나신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3계(界)를 뛰어넘으시고
평등한 허공 같아
모든 애욕에 물들지 않으신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가고 오며 잠들고 깨어나는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항상 고요함[寂靜]에 계시는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가고 옴에 모두 평등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시고
평등을 무너뜨리지 않으신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형상 없는 정(定)에 들어
모든 법의 고요함 보시고
항상 평등에 드시는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 모양이기에
모양 없는 허공처럼
모든 인과(因果) 떠나셨나니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허공은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나니
모든 부처님 몸 또한 그러하며
마음도 허공과 같나니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
세간법에 물들지 않으시고
세간을 분별하지 않으시니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모든 법은 허깨비[幻]와 같으며
허깨비는 얻을 수 없으니,
모든 환법(幻法) 떠나신
부처님께 경례합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문수사리여, 이 법을 시원스럽게 말하였도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고 이와 같나니 모든 부처님 여래를 마땅히 색(色)으로 보지 못하고 법(法)으로 보지 못하며 형상[相]으로 보지 못하고 상호[好]로 보지 못하며 법성(法性)으로 보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단독으로 볼 수 없으며 대중으로 볼 수 없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이 없으며, 현재 공양 올리는 사람이 없고 미래에 공양 올리는 사람이 없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법이 하나라고 말하지 않으며 법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보리를 증득하지 않았고, 모든 부처님 여래는 한 법으로 이름을 얻지 않았으며 많은 법으로 이름을 얻지 않았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모든 법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며 모든 법을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법을 알지도 않으며 모든 법을 깨닫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한 법을 말하지도 않고 모든 법을 보이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현재에 모든 법을 말하지도 않고 모든 법을 보이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법을 증득함이 없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더러운 법[染法]을 끊지도 않고 깨끗한 법[淨法]을 증득하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모든 법을 보지도 않고 모든 법을 듣지도 않고 모든 법을 맡지도 않고 모든 법을 지각하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 법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중생을 벽지불(辟支佛)의 지위에 있게 하더라도 이 법문에 믿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만일 다시 어느 보살이 이 법문을 믿으면 이 보살의 공덕은 오히려 전자보다 많거늘, 하물며 이 법문을 스스로 쓰거나 남에게 쓰게 함이랴. 그 복은 저보다 많아서 한량없고 끝없다.
문수사리여, 만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알로 생기거나[卵生] 태로 생기거나[胎生] 습기로 생기거나[濕生] 변화로 생기거나[化生], 빛깔이 있거나 빛깔이 없거나, 생각이 있거나 생각이 없거나, 발이 하나거나 발이 둘이거나 발이 셋이거나 발이 넷이거나, 발이 많거나 발이 없는 중생들을 일시에 모두 사람 몸을 얻게 하며,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모두 보살이 되게 하고, 그 낱낱 보살이 제각기 음식ㆍ의복ㆍ평상ㆍ침구ㆍ의약ㆍ탕약과 갖가지 생활필수품과 모든 오락 기구로 항하(恒河)의 모래 수처럼 많은 아승기(阿僧祇) 불국토(佛國土)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승(聲聞僧)에게 이와 같이 내지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아승기겁 동안 받들어 올리고 공양하며, 저 모든 여래와 보살과 성문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높이가 1유순(由旬)인 7보탑(寶塔)을 세우되 뭇 보배로 난간을 만들어 둘러싸며 마니보(摩尼寶) 화만으로 사이사이 장식하고 보배 당기ㆍ번기ㆍ일산을 세우며 자재로운 마니보왕(摩尼寶王) 그물[羅網]로 그 위에 덮는다면, 그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 만일 어떤 보살이 아주 청정한 마음으로 이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을 믿고 이 법문에 들어가며, 이 법문에 의혹하지 않고 이 법문에 청정한 마음을 내며 내지 남을 위하여 한 게송이라도 연설해 준다면, 이 보살의 얻는 공덕은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歌羅千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분의 일에도 비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수분(數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산수(算數) 비유(譬喩)로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공덕은 부처 지혜를 성취하여 증득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집에 있는 보살이 음식ㆍ의복ㆍ평상ㆍ침구ㆍ의약ㆍ탕약과 갖가지 생활필수품과 일체 오락 기구를 항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 여래ㆍ모든 보살ㆍ모든 성문승에게 받들어 올리고 공양하기를 이와 같이 내지 항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겁 동안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 만일 출가한 보살이 계를 지니고 마음이 청정하며 내지 한 축생과 중생에게 한 번 먹을 음식을 베풀어 준다면 그의 얻는 공덕은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니, 앞에서 말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가라소분(歌羅少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지 산수(算數)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설령 삼천대천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출가한 보살이 계를 지니고 마음이 청정한데, 그 낱낱 보살이 제각기 음식ㆍ의복ㆍ평상ㆍ침구ㆍ의약ㆍ탕약과 갖가지 생활필수품과 일체 오락 기구를 시방세계의 항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승에게 받들어 올리고 공양하되, 이와 같이 내지 항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겁 동안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만일 또 어떤 보살이 계를 지니고 마음이 청정하되 집에 있거나 출가하였거나 간에 이 법문 듣고서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며, 만일 자기가 스스로 쓰거나 남에게 쓰게 한다면, 얻는 공덕이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앞에서 보살이 보시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수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산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7보로 모든 부처님 여래께 받들어 올리고 공양하되 삼천대천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겁 동안 이와 같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만일 또 어떤 보살이 다른 보살을 위하여 이 법문 가운데 내지 하나의 4구게(句偈)만이라도 말해준다면, 얻는 공덕은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수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수분(算數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지 산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7보로 삼천대천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겁 동안 보시하여 얻는 공덕은 차치하고라도 문수사리여, 만일 또 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여러 보살들이 있는데, 그 낱낱 보살들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 불국토(佛國土)에서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세계를 만들고 모든 나무를 하늘 옷으로 감싸며 일체 광명이 있는 마니(摩尼)보배 그물로 그 위에 덮고, 또 자재왕마니보(自在王摩尼寶)로 누각(樓閣)을 만들되 전광명(電光明) 마니 보배로 그 난간을 만들며,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그 세계에 가득하게 하고, 온갖 보배 당기[幢]와 번기[幡]와 일산[蓋]을 세우고서 날마다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 부처님 여래께 받들어 올리며 공양하기를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아승기겁 동안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이 법문을 믿고 다른 보살을 위하여 이 법문 가운데 내지 하나의 4구게만이라도 말해준다면, 얻는 공덕은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수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승기야(僧企耶)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수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우파니사타(憂波尼沙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지 산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문수사리여, 설령 삼계에 있는 중생 가운데 지옥(地獄)ㆍ축생(畜生)ㆍ아귀(餓鬼)에 있는 중생들을 만약 집에 있는 어떤 보살이 그 지옥ㆍ축생ㆍ아귀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출하고 제도하여 벽지불 지위에 있게 했다면,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만일 또 출가한 보살이 한 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축생에게 베풀어 주면, 얻는 공덕이 앞에서 말한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10천 국토에 셀 수 없는 억 나유타(那由他), 백천만억 나유타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출가한 보살이 있는데, 그 낱낱 보살이 시방세계의 낱낱 곳에서 10억 이루 말할 수 없는[不可說] 백천만억 나유타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여래를 뵙고 낱낱 여래와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승에게 음식ㆍ의복ㆍ침구ㆍ평상ㆍ의약ㆍ탕약과 갖가지 생활필수품과 일체 오락 기구로 보시하며, 천억 나유타, 백천만억 나유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세계에 가득 찬 자재왕마니주(自在王摩尼珠)로써 날마다 낱낱 여래와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승에게 보시하기를 이와 같이 천억 나유타, 백천만억 나유타의 불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한다면,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이 법문을 믿고 내지 한 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한 축생인 중생에게 베풀어 준다면, 얻는 공덕은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덕을 이 공덕에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승기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가라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수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산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법문을 믿으면 보살인(菩薩印)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신행(信行)에 있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의행(義行)에 있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의행(義行)에 있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법행(法行)에 있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법행에 있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팔인(八人)에 있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는 아승기(阿僧祇)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팔인에 있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수다원(須陀洹) 과위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수다원 과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사다함(斯陀含) 과위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사다함 과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아나함(阿那含) 과위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아나함 과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阿羅漢) 과위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고 내지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 과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벽지불(辟支佛) 도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고 내지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벽지불 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보리심(菩提心)을 내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고 내지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보리심을 내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교화하여 물러서지 않는 지위[不退地]를 얻게 한다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고 내지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물러서지 않는 지위를 얻게 하더라도, 만일 또 어떤 보살이 이 법문을 믿고 스스로 쓰거나 남에게 쓰게 하거나 남들을 위하여 널리 말해주면, 그 얻는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수승하고 내지 한량없는 아승기일 것이다.
이와 같이 내지 백천만억 나유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을 말씀하셨다.
보살이 10억 부처님의
미묘한 법 지닌다 하여도
어떤 사람이 이 경 들으면
이 공덕 그보다 뛰어나리라.
부처님 발에 예배하며
신통으로 시방에 노닐고
꽃과 향과 바르는 향[塗香]으로
10억 부처님께 공양한다 하여도
어떤 사람이 이 경 듣고서
남을 위해 잠깐 말해주면
이 공덕 그보다 뛰어나고
한량없이 많으리라.
부처님 법신(法身)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면
둔한 그도 날카로운 지혜 생겨
위없는 도를 빨리 증득하리라.
부처님 위해 천상 인간에다
미묘한 탑 많이 세우되
한량없는 억의 수효로서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천까지 이르고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탑에 당기[幢]와 번기[幡] 달고
금방울과 7보 일산으로
부처님께 이처럼 공양한다 하여도
보살이 이 경 듣고서
능히 스스로 쓰거나
남에게도 쓰게 한다면
이 복은 그보다 뛰어나리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지니면
간탐과 질투 벗어나리니
그 공덕 한량없어서
큰 보리 빨리 성취하리라.
이 경은 법신 밝힌 것으로서
허공에 모든 형상 나타남 같아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의 말씀이니
그러므로 잘 지니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