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사랑
석존께서 왕사성(王舍城)의 영취산(靈鷲山)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당시 중(中)인도의 코사라국에 장수왕(長壽王)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 태자(太子)의 이름은 장생(長生)이라고 했다.
장수왕은 몹시 인정이 많아서 항상 기꺼이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덕을 따르고 티끌만큼의 불안도 없었다. 또 하늘도 그 덕에 감동했는지 비바람을 알맞게 내려 주었고, 왕도 그 덕을 기뻐하니 오곡이 풍성하게 여물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나라는 날이 갈수록 융성해갔다.
이에 반해서 그 이웃 나라인 바라나시국의 왕인 초예왕(楚豫王)은 포악하기 그지 없어 나라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가난하였다. 그래서 항상 장수왕의 나라의 번영을 시기하고 있었다.
하루는 초예왕이 그 신하를 불러서,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장수왕의 나라는 부자 나라지만 군의 방비가 조금도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 장수왕의 나라를 침략하려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하고 상의했다.
신하도 이에 찬성하므로 당장 대군을 이끌고 국왕이 손수 코사라국을 향해서 공격해 들어갔다. 국경에 살고 있는 코사라국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당장 국왕에게 보고하여 한시라도 빨리 국경지대로 군대를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신들은 즉시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애심 많은 장수왕은 많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나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 나는 나라도 백성도 재산도 모두를 초예왕에게 넘겨줄 작정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초예왕과 싸움을 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이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고 부상을 입을 뿐만 아니라 국토는 황폐해질 것이고 모든 재산은 헛되이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나 때문에 전쟁의 비극을 이 나라의 백성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나는 초예왕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겠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입을 모아 권했다.
『아무쪼록 그런 마음 약한 말씀을 하시지 마시고 군대를 내보내 주십시오. 우리들은 전쟁에 관한 지식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을 지키고 적을 무찌를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힘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기회에 우리들의 힘을 그들에게 보이도록 해주십시오. 꼭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장수왕은 계속해서 말했다.
『설령 우리 나라가 이긴다 해도 적군 속에서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 백성이나 그들 나라의 군인이나 목숨이 아까운 것은 마찬가지다. 자기만을 사랑하고 남을 해치는 것은 현자(賢者)가 취할 길이 아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대신들은 왕의 말을 듣지 않고 왕을 궁성에 남겨둔 채 자기들만으로 대군을 조직하여 국경으로 출발하고 말았다. 거꾸로 이쪽에서 공격을 시작한 셈이다.
뒤에 남은 장수왕은 전쟁의 참화를 생각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어 어떻게 하면 이 전쟁을 중지시킬 수가 있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였다. 생각한 끝에 왕위(王位)를 버리고 몸을 감추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장생 태자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대신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전쟁터로 나갔다. 전쟁을 하면 반드시 사상자가 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모두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 나라를 떠나기만 한다면 전쟁은 자연히 멈춰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나라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숨자.』
태자도 아버지 말을 따라 아버지와 함께 변장을 하고 어두운 밤을 타서 왕궁을 탈출 어느 산중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왕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이 곧 전쟁터에 알려졌다. 왕을 위해서 싸우고 있던 대신들도 왕이 없어지고 보니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래서 전쟁은 자연히 끝이 나고 초예왕은 마침내 장수왕의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은 초예왕은 장수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장수왕의 목을 가지고 온 자에게는 많은 돈을 주겠다.』
하고 방을 전국에 써 붙였다.
어느 날, 산중에 숨어있던 장수왕이 길가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나이든 초라한 모습의 바라문 중이 지나가다가 같이 그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한 나무 그늘에 무릎을 나란히 한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장수왕은 여행에 지친 늙은 바라문 중을 위로하면서,
『당신은 어느 나라의 분이십니까. 어째서 이 나라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나는 이 나라 사람입니다만 까닭이 있어 이 산중에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으며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친절하게 묻자 바라문 중은,
『나는 먼 나라의 가난한 도사(道士)입니다. 이 나라의 장수왕이 보시를 하신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국왕을 만나서 보시를 받아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히 지내고 싶어 멀리 찾아온 사람입니다만 국왕은 지금도 보시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운이 좋은 증거입니다. 아무쪼록 이 나라 형편을 들려주십시오.』
희망과 한가닥의 불안을 품고서도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수왕은 이 말을 듣자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나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 주었는데 나는 그에게 보답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에 잠기다가 눈물을 흘리며 바라문 중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 찾아 오신 장수왕입니다. 전에는 내가 이 나라의 왕이었습니다만 이웃 나라 왕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지금은 이 산중에 몸을 숨겨 세월을 보내고 있는 망명자에 불과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빈털터리입니다.
듣자하니 당신은 나 때문에 일부러 먼 나라에서 와 주셨는데 지금은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당신을 만족시킬 아무 것도 없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당신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하는 왕이나 듣는 바라문 중이나 같이 눈물을 흘렸고 끝내는 서로 손을 맞잡고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왕은 눈물을 닦고 결심해서 말했다.
『이번의 새로운 국왕은 큰 돈을 걸고 내 목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제 목을 베고 가져가서 왕으로부터 상금을 타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 목을 당신에게 보시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라문 중은 놀래서 두 손을 저으며,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신이 아무리 목을 베라고 해도 어떻게 그것을 벨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덕을 전해 듣고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받으려고 생각해 왔지만 당신의 목까지 베고 내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 운이 나쁜 것입니다. 내가 덕이 없는 탓입니다. 나는 그렇게 단념하고 온 길을 되돌아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바라문 중은 일어섰다. 왕은 그의 소매를 붙잡고 열심히 말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나는 머지않아 누군가의 손에 잡혀 새로운 왕의 앞에서 죽을 몸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손으로 참혹하게 죽기 전에 당신 손으로 내 목숨을 끊어 주십시오. 그리고 내 목을 당신의 소용에 닿게 해주십시오.
머지않아 붙잡혀 죽을 목숨입니다. 절대로 주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목을 가지고 가서 돈과 바꿔 주십시오. 멀리서 찾아오신 당신을 헛되이 되돌려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제발 최후의 보시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까지 간청을 하는 데는 그대로 떠나갈 수도 없어 바라문 중은 다시 앉으며 말했다.
『말씀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또 그 뜻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씀하시더라도 나는 손수 당신의 목을 벨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고 깊이 고개를 수그려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자 왕은,
『그렇군요. 당신이 내 목을 벤다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산 채로 나를 묶어서 왕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거절할 수도 없어서 바라문 중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나무 그늘에서 일어서서 함께 왕성(王城)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성문에 이르자 장수왕은 바라문 중에게 자기를 묶게 하고 두 사람은 성문을 들어섰다. 바라문 중은 왕이 있는 궁전으로 가서 장수왕을 체포해 왔다고 말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당장에 많은 돈을 바라문 중에게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기가 걸어온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 걸어갔다.
한편 붙잡힌 몸이 된 장수왕은 불태워 죽이기로 결정이 되어 이내 성문이 있는 네거리에 끌려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의 옛 부하들은 국왕에게 호소를 했다.
『장수왕은 옛날 우리들의 임금입니다. 운이 없어 지금은 사형을 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절대로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승의 이별을 위해서 최후의 식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는 우리들의 돈으로 장사지내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대왕님의 너그러우신 자비심으로 이 부탁을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국왕은 할 수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장수왕의 예 부하들은 따뜻한 식사를 마련하여 자애로왔던 옛날의 임금에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장수왕은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보고 있었던 성안의 주민들은 장수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에게 죄가 없음을 하늘에 대고 외쳤다. 그 소리는 성 밖의 마을로 전해지고 더욱 방방곡곡으로 전해졌다. 이것을 듣고 장수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아버지의 안부를 걱정하며 산에서 내려온 장생태자는 길가는 사람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랬다. 그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해서 등에 메고 나무를 파는 나무꾼으로 변장해서 성안에 들어갔다. 급히 아버지가 묶여있는 네거리로 가서 군중들을 헤치고 아버지 앞으로 나갔다. 그는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이제부터 집행될 참혹한 형벌을 생각하자 슬픔과 분노로 오장이 뒤집혀질 것만 같았다.
장수왕은 장생태자의 모습을 보자 그는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 원수를 갚게 되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말리기 위해서 유언을 해야겠다라고 하늘을 우러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버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첫 번째 의무이다. 장수왕은 절대로 원한을 품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죽어가는 것이다. 만약 장수왕을 위해서 원수를 갚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이 깨끗하고 기꺼운 죽음을 원한의 피로 더럽히는 자이다. 원수를 갚는다면 원수는 또 원수를 낳아 끝없이 영원히 원한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나를 위해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장수왕의 최후의 말이다.』
그리고 장수왕은 분신의 형벌에 처하여졌다. 장생태자는 두 눈으로 참혹한 아버지의 죽음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장수왕의 시체는 옛날 신하들의 손으로 정중하게 매장되었다.
산으로 돌아온 장생태자는 아버지의 최후의 말에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참기 어려운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인가를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다. 여러 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성자(聖者)였다. 딴 나라왕에게 아낌없이 자기 나라를 맡기고 더욱이 목숨까지 주고도 후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를 타일렀다. 비할 데 없는 성자이다. 그런데, 초예왕은 이 성자를 죽이고서도 조금도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이것을 용서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 포악무도한 초예왕을 하늘을 대신해서 벌 주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나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만약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젊은 태자는 마침내 이렇게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나와서 천한 머슴으로 몸을 바꾸는 오로지 왕의 신변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넣어서 대신의 원정(園丁)이 되어 입주하는 데 성공했다. 원감(園監)은 그에게 야채의 씨를 뿌리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그 야채는 아주 훌륭하게 자랐다.
어느날 대신이 정원에 나와서 태자가 심은 야채를 보고 칭찬을 하면서 원감을 불러 누가 가꾸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원감이 대답해서 말했다.
『최근에 고용한 젊은이가 가꾼 것입니다.』
대신은 당장에 그 젊은이를 불렀다. 그는 첫눈에 이 어린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대신은 그를 정원에 머슴으로 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하고,
『너는 요리를 할 줄 아나?』
하고 물었다. 태자는 서슴없이,
『요리는 내가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밭에 나가서 괭이만을 메고 다니던 태자는 부엌에서 칼을 쥐어본 일은 없지만 손재주가 좋은 그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대신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어느날 이 대신은 자기 집으로 국왕이 납시어 주시기를 아뢰었다. 국왕은 기꺼이 대신의 집으로 갔다. 그래서 대신은 자랑하는 요리를 내놓고 국왕을 환대했다. 요리가 너무나 맛이 있기 때문에 누가 만든 것이냐고 왕이 묻자 대신은 이러 이러한 젊은이가 만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왕은 이 요리사가 크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어거지로 대신으로부터 태자를 물려받아 궁정의 요리사로 임명했다. 태자의 우아한 풍채와 준수한 기질에 완전히 반해버린 국왕은 이 소년을 자기의 시종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어느날 장생태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검술을 배운 일이 있는가?』
태자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네, 배운 일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왕은 태자를 자기의 시종으로 삼아 항상 옥좌(玉座) 곁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적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에 죽인 장수왕의 아들 장생태자는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는 나에게 아주 무서운 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 같이 힘센 젊은이가 항상 곁에 있어 주기 때문에 베개를 높이 하고 잠잘 수 있다.』
현재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이 장생태자인 줄도 모르고 그는 자기의 생명을 그에게 내맡긴 셈이었다.
『잘 알아보셨습니다. 대왕을 위해서 언제든지 목숨을 내걸고 지키겠습니다.』
장생태자는 목숨을 적에게 맡기고 안심하고 있는 초예왕을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하니 왕은 태자에 대한 신임은 점점 커갔다. 태자는 불쌍하게 생각하였지만 절대로 복수를 잊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사냥을 좋아하는가?』
태자는 주저치 않고 대담하게 말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냥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왕은 당장에 사냥 준비를 명령했다. 많은 부하들의 호위를 받고 훌륭한 행차를 갖춘 왕과 장생태자는 왕궁을 나섰다. 일행은 거리를 누벼 성문을 빠져나오고, 촌락을 지나 들을 가로지르니 겨우 산모퉁이에 도착하였다.
이미 사냥이 시작되었다. 왕과 장생태자는 도망치는 짐승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 점점 깊은 산중으로 빠져 들어가 마침내 방향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안고 산중을 헤매었으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배는 고파 온다. 몸에 피로가 닥쳐온다. 기운이 빠져온다. 이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밤 두 사람은 숲속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서 주저 앉고 말았다. 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장생태자에게 맡기며,
『네 무릎을 빌려달라. 나는 여기서 잠시 쉴 터이니.』
하고 왕은 태자의 무릎을 베고 정신없이 잠들어 버렸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태자가 왕을 속이고 이 숲속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태자는 이런 기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였다.
<오랫동안 이 기회를 기다렸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었다.>
태자는 칼을 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왕을 찌르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번갯불처럼 번쩍거렸다. 숭고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 순간에 그의 힘을 무디게 하고 말았다. 그는 급히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았다.
이때 왕은 눈을 뜨고 말하기를,
『나는 지금 아주 불길한 꿈을 꾸었다. 장수왕의 아들이 나를 죽이러 왔기 때문에 놀래어 벌벌 떨다가 잠이 깼다. 무슨 일일까.』
장생태자는 어거지로 태연하게 말했다.
『이것은 이 산에 살고 있는 도깨비가 대왕에게 장난을 한 것일 겁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 아무쪼록 안심하시고 주무십시오.』
황은 몹시 피로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장생태자는 다시 칼을 뽑아 죽이려 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생각나 왕을 죽이지 못하고 다시 칼을 놓았다.
그러자 왕은 다시 눈을 뜨고 공포로 몸을 떨면서,
『장생태자가 나를 찌르려고 하는 꿈을 꾸었다. 두 번이나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웬일일까.』
『산에 살고 있는 도깨비의 장난이 틀림 없습니다. 무서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장생태자는 이렇게 왕을 위로했다. 왕은 또 안심하고 잠들어 버렸다. 장생태자는 이번에는 기어코 한 용기를 내어 왕의 가슴에 칼을 댔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마음에 되살아 올라서 도저히 찌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태자의 복수심은 아버지의 숭고한 마음에 지고 말았다.
그는 왕을 찌르는 것을 단념하고 칼을 땅에 내던지고 말았다. 그때 왕이 꿈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또 장수왕의 아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 그러나 그는 칼을 내던지고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꿈속에서 말했다. 이게 어찌 된 꿈일까.』
그래서 태자는 왕 앞에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임금님, 제가 바로 장수왕의 아들인 장생 태자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왕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절대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원수는 원수를 낳아 영원히 끝없이 계속되는 법이다. 아버지는 지금 보시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가는 것이다. 아무런 원한도 없다. 이 아버지를 위해서 보복을 한다면 아버지의 깨끗한 죽음을 보복의 피로 더럽혀질 것이다.
절대로 보복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이 교훈에 따르지 못하고 지금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하여 복수심으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왕 앞에 몸을 내던졌다.
이 말을 듣자 초예왕은 마침내 깨닫고 옛날의 잘못을 뉘우쳐 태자의 손을 잡고 마음으로부터 사과했다.
『태자여, 지금 나를 충심으로 당신에게 사죄합니다. 나의 과거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흉악 무도한 행동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성자(聖者)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참하게도 태워 죽이고 알았습니다. 이렇게 죽은 왕의 태자는 현재 원수의 생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가르침에 쫓아 나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들 부자의 하느님 같은 행동으로 완전히 딴 세상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왕은 땅에 무릎을 꿇고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리면서 충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서로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고민도 원한도 한꺼번에 없어지고 말았다. 괴로웠던 산중의 밤은 밝아 싱그러운 새벽의 햇빛이 숲속을 헤치고 비쳐왔다. 두 사람은 풀밭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감격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두 사람은 제 정신이 들자 숲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숲 밖에는 많은 부하들이 두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육식을 들어 겨우 기운을 차렸다.
왕은 장생태자를 가르치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 분이 누군지 알고 있는가?』
부하 중에는 옛날 장생태자로부터 은혜를 베풀어 받은 자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태자에게 위험이 닥칠까 두려워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 소년이야말로 장수왕의 태자 장생이다. 오늘부터 나는 옛날대로 바라나시국으로 돌아가고 코사라국을 이 장생태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우리는 형제가 되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초예왕은 일체의 일들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다. 이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죽은 장수왕의 위대한 덕에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초예왕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장생태자는 코사라국의 왕위를 이었다. 이 두 나라는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오랫동안 형제와 같이 지냈다고 한다.
장수왕은 지금의 석가모니이다. 장생태자는 지금의 아난(阿難)이다. 초예왕은 데바닷다이다.
<長壽王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