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의 유적고-2

초의선사는 서문을 마치고, 이어서 역시 해양후학초의의순찬(海陽後學草衣意恂撰)으로 ‘진묵조사의 유적고’를 적었다. 산새가 노래하는 소리와 함께 두륜산의 먼동이 터올 때, 초의선사는 진묵조사의 유적에 대한 글을 모두 마치었다. 수백년간 구전으로만 전해온 진묵조사의 일화가 초의선사의 원력어린 붓끝으로 최초로 문자화 된 것이다. 당대 승속에서 대문장가로 인정받는 초의선사의 원력어린 붓은 능살능활(能殺能活)하고 작불작조(作佛作祖)하는 능력이 있었다.

아침공양이 끝나고, 다실에서 차를 마실 때, 김기종은 초의선사로 부터 글을 건네받아 소리를 내어 봉독하였다. 글읽기를 마친 김기종은 감격해서 온몸이 떨리고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묵조사님을 석가모니불의 응신(應身)으로 해주시었군요.”

초의선사는 찻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껄껄 웃고는 정색하여 김기종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깨달은 본분 상에서 볼 때에는 일체의 성현이 부처님의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의 하나요, 응신의 하나인 것이요. 다시말해 깨달음과 자비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응신인게요, 아시겠소?”

초의선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들어 김기종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김공이 존경하는 진묵조사에 대한 나의 글은 속세로부터 같은 승려가 침소봉대(針小棒大 )하고 날조(捏造하였다고 비난받을 수가 있소. 김공이 진정 진묵조사를 세상에 알리려면, 나같은 승려와 김공 같은 유생이, 즉 유불(儒佛)이 합심하여 진묵조사를 증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마음을 문자화해야 할 것이오. 나는 내가 아는 제산(霽山)스님을 동참하게 할 것이요. 김공은 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뜻이 같은 유생을 더 많이 만나 진묵조사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글을 받아야 할 것이오. 오늘은 우선 유생의 입장인 김공부터 글이 필요하오. 아시겠소?”

김기종은 일순 두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더니 곧이어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초의선사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솔직히 밝혔듯이 저 자신은 문장력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 지 난감할 뿐입니다.”

초의선사는 어젯밤 자신이 별도로 적은 종이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진묵조사를 세상에 알리려는 김공의 고마운 정신을 생각해서 내가 김공의 이름으로 서문을 써보았는데, 읽어보시고 고치어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김기종이 글을 받아드니 진묵선사유적고서(震默禪師遺蹟攷序)라는 제목의 서문이었다. 끝에는 은고거사김기종서(隱皐居士金箕鍾序)라고 씌여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명문의 서문을 봉독한 김기종은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초의선사에게 또 삼배의 큰절을 올리어 감사를 표시하였다. 초의선사는 앞서의 자신이 적은 찬(撰)에 전주에 사는 승려를 동참시키어 교남후학제산운고교(嶠南後學雲皐校)라고 적어 넣었다. 보름달 하나가 일천강에 비추이듯(月印千江水), 초의선사는 자유자재한 능력을 보인 것이다.

김기종은 초의선사의 원고를 받아 하산할 때, 거듭거듭 합장하여 인사를 하면서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곧바로 ‘진묵조사유적고’를 목판본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유포하겠습니다. 출판기념일에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꼭 참석하시어 증명하기고 법어를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일지암을 떠나가는 손님을 보내는 초의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껄껄 웃는 것이었다.

“김공은 전생에 진묵조사의 진실한 상좌였을 것이오. 상적광토에서 진묵조사는 분명, 기뻐하실 것이오.”

그 후, 김기종은 약속대로 목판본으로 ‘진묵조사유적고’를 인쇄하였다. 출판기념일에 초의선사는 그곳에 가서 증명과 설법을 해주었다. 초의선사의 진묵조사에 대한 서문과 찬문을 읽은 유생과 승려들은 모두 감격하였다. 그들은 초의선사의 뜻에 동참하여 다투어 진묵조사를 증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글을 지어 바치었다.

진묵조사의 이야기는 상하로 나뉘어졌다.

상편은 초의선사의 ‘진묵조사유적고’이고, 하편은 부록으로써 진묵조사유적고하(震默祖師遺蹟攷下)라는 이름으로 진묵조사에 대한 각계 명사들의 숭모적인 대표 글들을 집합한 것이다. 대략, 유생인 지원(芝園 조수삼(趙秀三)이 쓴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 초의선사가 쓴 발(跋), 제산스님이 쓴 글, 유생인 군인(郡人) 김영곤이 쓴 진묵선사유사발(震默禪師遺事跋), 등이었다.

그 후, 초의선사의 글이 모본(母本)이 되어 대흥사의 승려문인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1820∼1896)이 동사열전(東師列傳)에서 진묵조사를 다시 언급하였다. 그리고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장이요, 당대 제일 강백이었던 석전영호스님의 찬(撰)으로 진묵조사무봉탑병서(震默祖師無縫塔 序)가 있다. 역시 모두 초의선사의 서문과 찬(撰)에서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초의선사의 서문과 찬문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첫째, 조선조에 들어와서 유생들은 척불숭유(斥佛崇儒)사상을 주장하면서 불교를 무군무부지교(無君無父之敎)로 몰아부쳤다. 한 가문의 자식으로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할 수 없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승려의 임금에 대한 충성은 저 임난의 승병들이 주창하고 목숨을 던져 실천한 호국사상에서 충성심을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히 보여 주었다. 다음은 불가의 효사상이다. 불교에서 효사상을 권장하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있다. 부처님은 부모은중경 속에서 효사상을 강조하고 실천하고 계시지만, 초의선사는 명망 있는 우리의 고승의 예(例)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사상을 대표적으로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초의선사는 진묵조사를 통해 불가의 효사상이 분명 존재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효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눈을 가진 유생들을 깨우치었다.

둘째, 승려의 일생에 걸친 수행과 교화에는 무소유사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진묵조사를 통해 다시 깨우치었고,

셋째, 승려는 부처님이 내리신 계율을 엄수해야 하지만, 때로는 계율을 초탈하여 정신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진묵조사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저 하였다. 초의선사의 찬문에 등장하는 진묵조사는 불가의 고승이면서, 곡차( 茶=술)를 즐기는 승려였다. 초의선사는 진묵조사를 통해서 승려의 곡차문화를 미화하였다.

어쨌거나 초의선사의 곡차론, 즉 진묵조사가 즐기었든 곡차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숨어서 음주하든 일부 승려들을 해방시켰다. 불가의 새로운 곡차론은 전국에 유포되었고, 술을 마시든 승려들은 떳떳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녘 예불을 마친 어두운 밤, 일부 승려들은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화두가 통 들리지가 않구먼. 우리 다도나 하면서 대화나 할까?”

“무슨 다도?”

“곡차.”

“좋지. 곡차의 다도는 우리같이 외로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견성성불 하기 위해서 삭발위승하여 부모형제를 칼로 베듯 작별하여 승려가 되어 청춘을 바쳐 수행정진 하였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비구승이니 처자가 없고, 무소유사상으로 중생구제에 전념하였으니 개인적인 재물이 있을 리 없지. 남루한 누데기 옷으로 감싼 몸마저 늙고 병이 들어 저승길을 생각하는데, 곡차 한 잔 아니할 수 없지…. 안 그런가?”

자, 이제 독자여러분을 위해 초의선사의 찬문인 진묵조사유적고를 통해서 진묵조사의 격외의 초탈한 모습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면, 서투른 이야기군인 필자의 잘못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야기를 초의선사의 찬문에서 직역한다면, 재미가 부족할 것 같아서 지면관계상 발췌하여 나름대로 구성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만월이 중천에 떠서 삼라만상을 비추이는 고요한 밤이었다, 초의선사의 해묵은 진묵조사유적고의 목판 책의 문자에서 안개가 피워 오르고, 그 안개 속에서 진묵조사가 나타나 걸어나왔다. 그는 낡고 헤어진 가사장삼을 입고, 석장을 짚고 있었다. 그는 곡차에 대취한 모습이었다. 그는 대취한 상태에서 밤하늘을 향해 앙천대소를 터뜨리고는 춤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만월을 향해 큰소리로 자작시를 외치듯 읊었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를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

도리어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상기 진묵조사의 시는 고금의 승려로써 취흥이 도도할 때 읊은 시로는 가장 뱃포가 큰 유일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빛아래 홀로 대취하여 시를 읊으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든 진묵조사는 만월을 우러렀다. 만월의 달 속에 노모와 여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노모와 여동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묵묵히 진묵조사를 내려보고 있었다.

며칠전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노모는 노안에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속에 진묵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아들이 출가위승하여 비구승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이제 조상의 제사는 물론이오, 내 제삿밥도 못얻어 먹게 생겼으니 이런 박복한 팔자가 어디 있을까?”

진묵조사는 뼈만 남아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노모의 손을 잡고서 소리 없이 울면서 장담하듯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

“어머님, 제사일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죽더라도 저와 같은 후학 승려와 속가의 불자들이 어머니의 제사는 물론, 때마다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천하의 명당인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에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노모는 아들의 말이 지극한 효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자손이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받고 때마다 공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도시 믿기지가 않았다. 역사에 어떤 제왕도 그런 복을 누렸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실현성이 없는 말이었다. 노모는 아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정말, 그 천년향화지지가 있다는 것이냐?”

“제가 언제 어머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 않아요? 제 말을 믿어 주세요.”

만월속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이 사라졌다. 달빛만이 교교할 뿐이었다. 진묵조사는 노모가 왜막실(倭幕村)에서 모기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노모가 계시는 곳으로 가서 그곳을 관장하는 산신을 불러서 모기떼를 쫓아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진묵조사는 석장소리를 내면서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진묵조사는 조선 명종조(明宗朝), 임술년에 오늘의 전북 김제 만경의 불거촌(佛居村= 현재 火浦)에서 어머니 조의씨(調意氏)에 의해 태어났다. 진묵조사의 이야기에는 시종 부친의 이야기가 전해오지 않는다. 왜 일까? 진묵조사는 나이 일곱살에 출가위승하여 전주의 봉서사(鳳棲寺)에서 불전(佛典)을 배웠다. 어린 사미는 지혜총명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불경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아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어느 날, 봉서사의 주지스님이 진묵사미에게 부처님을 옹호하는 신중단(神衆壇) 을 청소하고 향피우게 하는 소임을 맡기었다. 진묵사미가 신중단을 청소하고 향 피운지 며칠이 안되는 날 밤, 주지의 꿈속에 창검을 든 신장들이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신장들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부처님에게 예를 받게 하는가? 진묵사미는 부처님의 응신이니 당장 우리의 향 받드는 소임을 바꾸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조석을 편히 지내게 해주기 바란다.”

주지는 벌벌 떨면서 약속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주지는 대중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진묵사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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