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의 길

깨달음으로의 길

석존께서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제자들과 비를 피하고 계셨을 때의 일이다.

석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었다.

『하늘에 구름이 일어서 비가 오게 되면 시들은 나무와 돌산이나 고원(高原)에는 빗물이 머물지 않고 논밭으로 흐르고 연못이나 개울은 물이 철철 넘친다.

부처님이 하시는 깨달음의 가르침도 같아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비와 같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마음의 논밭을 적셔준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신앙이 없는 일천리(一闡提)의 무리들이다.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법우(法雨)에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시들은 나무와 돌산이 비의 덕택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볶은 씨앗은 몇백년 동안 단비를 맞아도 싹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일천리의 무리들도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의 비를 뿌려주어도 불심의 눈이 트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들은 모든 일체의 선근(善根)의 뿌리를 뽑아 버린 불에 태운 씨앗과 같은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주옥(珠玉)을 뿌연 물에다 넣으면 구슬의 위덕으로 인하여 물은 맑아진다. 그러나, 진흙 속에 넣었다면 진흙이 맑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열반경도 파계를 한 사람의 흐린 물에 넣어 두면 불심(佛心)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지만 일천리의 진흙 속에서는 영구히 보리심(菩提心)을 갖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심(善心)이 없는 곳에 불심의 눈이 틀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 약왕수(藥王樹)라는 약나무가 있었다고 하자. 이 나무는 약종의 약으로 가장 훌륭한 효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약왕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유에 섞거나, 꿀 혹은 물과 섞어서 사용하거나 또는 가루나 환약(丸藥)으로 해서 사용하거나 상처에 바르거나 눈에 넣거나 혹은 냄새만 맡아도 능히 만병을 고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약왕수는 다음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것들 중에서 만일 자기의 뿌리를 갖는 자는 잎을 가져서는 안된다. 잎을 갖는 자가 뿌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줄기를 갖는자가 껍질을 가져서는 안된다. 또 껍질을 갖는 자는 줄기를 가져서는 안된다.>

약왕수는 이런 생각은 조금도 안하고 있지만 능히 만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열반경도 사람들의 악행, 번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지만 일천리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만병에 듣는 약왕수도 수명이 다한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살려 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손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 독(毒)에 닿으면 독은 순식간에 온 몸에 퍼질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없는 사람은 그런 염려가 없다.

여기서 상처라함은 깨달음의 인연을 가르치는 것이고, 독이라는 것은 묘약(妙藥)을 비유함이다. 전연 상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일천리를 말함인데 상처가 없는 일천리에게는 독약도 그 작용을 미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금강석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가 없는 반면 무엇이든지 깨뜨릴 수가 있다. 그러나, 거북( )의 등 껍데기와 백양(白羊)의 뿔은 예외이다. 대열반경도 이와 같다.

생명을 가진 많은 것들을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 시킬 수 있지만 일천리의 무이들에게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만은 불가능하다.

매시풀이나 사라쌍수나 판양쥬의 가지나 줄기는 자르면 다시 가지와 줄기가 먼저 같이 나오지만 산유화만은 일단 자르면 먼저 같이 되지가 않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계율을 깨거나 번뇌로 괴로와하는 일이 있어도 다시 보리의 인연을 되찾을 수가 있지만 일천리의 족속들은 대열반경을 들을 수가 있어도 그것이 보리의 인연을 되찾을 동기(動機)가 되지 못한다.

내리기 시작한 비는 공중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이 대열반경도 같다. 모든 것을 윤택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일천리에게 만은 그 법우가 머물지를 않는 것이다.

일천리는 전신이 딱딱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금강석이 어느 것을 막론하고 자기 몸안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일천리의 무리가 때로는 아라한(阿羅漢)의 형상을 하고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비난할 때가 있다. 그것을 보고 범부는 진짜 아라한이다, 대보살이다 하고 존경하지만 이렇게 아라한의 모양을 한 일천리의 나쁜 수도자는 불법의 도장(道場)에 있으면서 불법을 깨는 족속이다.

그래서 불법의 덕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심을 가지고,

〈대승경전 따위는 천마 하즙의 설이다.〉

〈부처를 위시하여 모든 것은 생멸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헐뜯으며 참된 불제자인 스님을 욕하나다. 이러한 일천리들이 그 죄의 응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들은 실로 재(灰)로 가리운 불을 밟는 무리들이다.

연꽃은 햇볕을 쪼이면 모두 한결같이 피어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대열반경의 일광(日光)을 보고 들을 수가 있으면 불심이 없었던 사람도 불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대열반의 빛이 털구멍으로 들어갈진대 반드시 묘인(妙因)이 된다.」

저들 一천리에게도 선천적인 불성(佛性)은 있지만 그것은 한없이 많은 죄에 덮여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마치 누에가 고치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나쁜 인연으로 인하여 보리의 길은 영원히 막혀서 생사의 바다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파랑, 노랑, 빨강, 흰 연꽃이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도 그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이 대열반경을 공부하고, 사람은 번뇌가 있어도 그 번뇌 때문에 마음을 더럽히지는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은 대열반경을 수행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일에 대하여 깊이 아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청량(淸凉)한 바람이 부는 나라의 사람은 그 바람이 털구멍에 닿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듯 대승 대열반경도 그러하다.

생명을 갖는 모든 것의 털구멍으로 들어가서 깨달음을 위한 미묘한 인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一천리는 여기서 제외된다. 그것은 법기(法器)가 아닌 까닭이다.

또 명의(名醫)는 묘약을 가지고 앞 못보는 사람을 치료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선천적인 장님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승 대열반경도 사람이 지혜의 눈을 뜨게해서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 할 수 있지만 선천적으로 장님인 一千리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명의는 모든 병을 고치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약방문(藥房文)으로 병에 따라서 적당한 약을 준다. 대승 대열반경도 그와 같이 사람들의 무한한 번뇌의 병을 없애서 모두 불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一千리만은 예외이다.

지옥에 떨어져서 여러 가지 고문(拷問)과 고통을 받는 꿈을 꾼 사람이 불현듯 뉘우치며,

〈아! 나는 참으로 나쁜 사람이었다. 이 괴로움도 필경 내가 자초(自招)한 것이다. 만약 이 죄와 벌을 면할 수가 있다면 그 때에는 반드시 불심을 먹어야겠다.〉

꿈이 깨면 이 사람은 올바른 가르침의 응보를 받을 수가 있다.

또 갓난아기는 성장함에 따라서 효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철이 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기와 어머니가 신세를 진 의사의 일을 생각해서,

〈그 의사는 명의였었고 친절해서 환자를 잘 돌봐 주었다.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에는 어머니에게 약을 주었고 어머니는 그 약 때문에 건강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 덕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열달동안 몸안에 품고 계셨고 낳은 후에는 대소변의 시중은 물론 젖을 먹이며 여러 가지로 나를 돌보시며 키워주셨다.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 높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도 임종시에 대승 대열반경을 염하면 설사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를 위하여 보리의 인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천리만은 예외이다.

그리고 명의의 지식은 매우 넓고 깊으므로 독은 제거하는 묘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래서 독사나, 살모사, 용 같은 것에 묘법을 써서 좋은 약이 될 수 있게 한다.

이 약을 신에 바르고 독충을 건드리면 그 벌레의 독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대용(大龍)이라는 독만은 재거 할 수가 없다. 대승 대열반경도 이와 같다.

사람들의 여러 가지 죄의 병독(病毒)을 없애서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시키는 신약(神藥)이기는 하지만 일천리라는 대용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새로 만든 독약을 북에다 바르고 북을 치니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별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즉사(卽死)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만 불사신(不死身)인 자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승 대열반경도 마찬가지이다.

열반경을 듣는 자는 때와 곳을 막론하고 번뇌가 사라진다. 그러나 불사신인 일천리만은 예외인 것이다.

귀먹어리는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데 일천리도 이와 같다. 대열반경을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또 바다를 항해(航海)하는 배는 바다를 왕복하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사람을 운반한다. 부처님도 이와 같다. 대승 대열반이라는 보선(寶船)에 타고 계시면서 항상 사람들을 깨달음의 경지로 건네 주려고 한다.

그래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 부처님의 모습을 불 수 있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을 무상선사(無上船師)라고도 하는 것이다.

배가 있으면 뱃사공이 있다. 뱃사공이 있으면 배를 자유롭게 대해를 건너갈 수가 있다.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뱃사공은 생사의 거칠은 바다를 대열반이라는 보선으로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항해를 함에 있어서 순풍(順風)을 만나면 배는 대단히 바른 속력을 내서 목적지로 갈 수가 있지만 그와 반대로 바람을 거슬려 올라가는 경우에는 몇년이 걸려도 배는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고 때문 따라서는 파선(破船)이 되어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일도 있다.

사람도 생사의 바다에서 수도하는 배가 대열반이라는 순풍을 만날 수 있으면 빠른 시일안에 깨달음의 항구(港口)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낳아서는 죽고, 죽고는 다시 태어나면서 생사의 바다를 방황(彷徨)하고 있는 중에 때로는 배가 난파(難破)하여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만약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서 배가 표류(漂流)하게 되면,

〈우리들은 이제 죽는구나.〉

하고 비관을 하는데 갑자기 순풍을 만나서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하여지면,

〈아! 이제는 살았다. 참 시원한 바람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나!〉

하고 기뻐 할 것이다.

세상에 「삶」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오랜동안 어둡고 괴로운 생사의 바다를 헤매고 있으므로 지칠대로 지쳐서 그 고통은 극도에 달하고 있고 아직도 대열반의 순풍을 못만나서 이제는 별수 없이 지옥, 아귀, 축생계에 빠질 것이라고 비탄의 눈물에 젖어있을 때 돌연 대승 열반경의 가르침을 듣게되면 비로소 깨달음의 경지를 얻게 되어 절망적(絶望的)이라고 생각했던 비관은 백팔십도로 전환해서,

〈아! 유쾌하다. 나는 이제껏 이렇게 여래가 될 가능성을 가진 마음을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다.〉

이리하여 대열반경에 대한 깨끗하고 두터운 신앙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뱀이 묵은 껍질을 벗는 것이 뱀의 죽음이 아닌 것같이 부처님도 마찬가지로서 일시적인 방편으로 사바세계에서 그 몸을 버리는 일은 있어도 그것은 뱀이 묵은 껍질을 버리는 것과 같으므로 부처님의 죽음이 아니라 부처님은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또 금은공(金銀工)은 순금을 마음대로 가공(加工)하여 여러가지 장식품을 만든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생사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상과 모습은 여러 가지로 변하여도 부처님의 본체(本體)는 불변이다.

가공물(加工物)의 형태가 아무리 달라도 본질은 어디까지나 순금인 것과 같다.

망고와 앰브 나무는 일년에 세번 변화한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가 다음에는 푸른 잎이 무성하고 나중에는 낙엽이져서 나무가 시들은 것 같은 상태가 된다.

부처님도 이 세상에서 세가지 현상을 보여준다. 탄생과 성인(成人)과 열반이 그것이다. 그러나 열반은 부처님이 죽으심이 아니다. 떨어진 나무의 잎이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 심장(意味深長)하므로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그것은 대왕이 신하를 보고,

〈센다바(소금, 그릇, 물, 말의 네 가지 뜻을 가진 말)를 가지고 오너라.〉

하고 명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센다바라는 하나의 명칭(名稱)에는 네가지 물건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소금 ,둘째 그릇, 세째 물, 네째는 말을 뜻 한다. 이렇게 네가지 물건의 뜻을 가지고 잇는 말이므로 지혜가 있는 신하는 경우에 따라서 대왕의 명령을 분별(分別)한다.

즉 대왕이 목욕을 할 때 센다바 라고 하면 물을 가지고 가고 식사 때에는 소금을 올리고 식사 후 마실 것을 찾을 때에는 그릇을 가지고 외출하는 경우라면 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치 있는 신하는 대와의 말을 능히 이해한다. 대승 열반경도 또한 이와 같다. 사무상(四無常)이 라는 것이 있다.

지혜 있는 자만이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여래는 입적한다 하고 말씀하시면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은 부처님이 상주(常主)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위하여 무상의 여러 면을 풀이하시는 것이다.〉라고 직감(直感)한다.

또 부처님이 석가의 가르침을 멸하고 정법(正法) 또한 망한다. 하고 말씀하시면 지혜있는 사람은 〈이것은 석존께서 환락에 집착하는 자를 위하여 고뇌에 대한 것을 풀이 하시는 것이다.〉라고 직감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나 지금 병을 앓고 있다.」하고 말씀하시면 지혜있는 사람은 〈이것은 부처님이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위하여 무아(無我)의 형상을 풀이하시는 것이다.〉라고 직감한다.

혹은 또 소위 「공(空)이란 곧 깨달음이다」하고 설법하시면 지혜있는 사람은 <이것은 부처님이 실체(實體)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위하여 공의 사상을 풀이 하시는 것이다 라고 직감한다.

이같이 부처님의 말을 옳게 해득하는 자는 지혜있는 사람이며 범부가 아니다.

또 우유를 팔아서 생활을 하고 있는 소를 치는 여자는 이익을 더 올리기 위하여 이할(二割)의 물을 타서 도매하는 여자에게 판다.

이 여자는 다시 이할의 물 섞어서 중간 도매를 하는 여자에게 판다. 이 여자는 또 이할의 물을 타서 소매하는 여자에게 판다. 이 소매하는 여자는 손님에게 팔 때 다시 이할의 물을 섞어서 소매한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품질이 좋은 우유를 사려고 소매하는 여자에게 갔다.

그런데 그녀는 부당(不當)한 값을 요구하였으므로,

『이 우유는 묽어서 좋지 않다. 그러나 손님이 갑자기 왔으니 할 수 없군, 살 수 밖에 없다.』

우유보다는 물이 더 많이 섞여있는 이 우유도 다른 것에 비하면 천배나 더 훌륭한 음식이다. 우유의 맛은 모든 음식 중에서 가장 좋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에 대승 경전이 사바세계에서 보급 될 때가 있다. 그때 옳지못한 중들은 그럴듯한 말을 붙여서 경전을 해설한다.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이므로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옳지 못한 중들에 의하여 선전되는 경전은 윈래가 훌륭한 대승경이므로 다른 경전보다는 천배나 나은 것이다.

또 여자란 모두 남자에게 강열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본래 여자는 모든 죄악의 근본인 것이다. 여자의 옥망을 만족시키기란 모기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다.

이 땅덩어리를 움직일 수 있는 남자라도 한 여자의 욕망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남자가 모두 모여도 한 여자의 욕망을 채울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뱃물과 하천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대해가 넘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만족을 못 얻는 것은 백화(百花)가 만발(滿發)한 꽃밭에서 끌벌들이 꿀을 빨고 또 빨아도 아직 부족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자는 만사를 제쳐 놓고 기회를 만들어서 이 대승 대열반경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자의 욕망을 버리고 남자같이 되어야 한다.

이 대승경전은 불성이라는 대장부(大丈夫)를 풀이하는 가르침이므로 이 불성에 눈뜬 사람은 여자라 하더라도 남자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불성에 맹목(盲目)인 자는 남자라도 그는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부처, 보살, 연각, 성문은 그 모습만은 따로이지만 그 본성은 틀리는 것이 없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성(性)도 형상도 모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잘못이다.

가령 여기 한 사람의 장자(長者)가 있다고 하자. 이 장자는 여러 마리의 젖소를 사육하고 있는데 젖소의 털에 색깔은 모두가 제각기 다르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게 되서 하인은 모든 젖소에서 젖을 짜 가지고 그릇에 담아서 주인에게 가지고 왔다. 그 젖의 빛깔은 제각기 털의 색깔이 다른 젖소에서 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백색이었다.

하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소의 색깔은 다른데 어째서 젖의 빛깔은 같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문이라던가 연각이라던가 보살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들이 동일불성(同一佛性)이라는 점에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습이 다른 것은 번뇌가 두터운가 얇은가에 의한 것이다.

또 어린 아기는 십육개월(十六個月)이 되면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부모는 말을 가르치려고 자신들도 아기의 흉내를 내서 더듬거리며 말을 맞춰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부모가 올바른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법을 하시고 모습도 바꾸신다.

그러나 그석은 아기에게 가르치는 부모의 말더듬과 같은 뜻을 가진 것이며 이는 모두 사람들을 교화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涅槃經第九>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