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 제2권-1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 제2권-1

  1. 신행품 ②
    “아난이여, 이것을 여래ㆍ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呵)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께서 모든 보살을 위하여 방편으로 이와 같이 신행(信行)을 말씀하신다 하느니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것이 여래께서 다시 모든 보살을 위하여 법행(法行)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알지니라. 보살마하살은 불법에 머무르지 않고도 능히 현시하며, 법계를 여의지 않고도 끝내 부사의(不思議)를 이루느니라. 모든 법을 받아 지니어 마음에 하열한 것이 없고, 비록 모든 법을 말하나 법상(法相)에 대해 취착(取着)하지 않느니라. 생각 없고 머무름 없어서 모든 법의 여실한 모양과 성품을 잘 지니니, 법을 취하지도 않으면서도 법 아닌 것을 버리지도 않으며, 법을 즐기지도 않으면서도 법을 즐기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비록 능히 이렇게 해서 모든 법의 특징을 여의긴 해도 잘 조복하여서 마음이 항상 안락하느니라. 모든 법을 잘 설명하되 요란함이 없으며, 모든 법의 특징 가운데에서 몸을 여의지도 않으며, 또한 몸에 머물지도 않느니라. 이 몸의 전제(前際)는 법계와 평등하여 허공과 같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진제(眞際)의 여여(如如)한 모습과 같나니,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이니라. 곧 보살이 청정무구를 증지하여 일체 법이 공하고 볼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음을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여의었기 때문이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은 보이지 않으며,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다툼이 없느니라. 버젓이 나타난 법계는 말이 없고 설명이 없으니, 체성이 본래 공하여 마음이 흘러갈 곳이 소멸하느니라. 이 마음은 얻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따질 수도 없건만 다만 적멸하고 반연 없는 경계를 보일 뿐이니라. 모든 법을 보호하며 지니되 의지하는 바가 없나니, 왜냐하면 일체 법은 체(體)와 상(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법은 한 모습이고 없는 모습이니, 무과(無果)의 설법을 칭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가령 남을 위하여 법상(法相)과 명자(名字)와 모든 글귀를 말하면, 모두가 이미 스스로 증득한 것이니, 이 법을 성취하면 종성(種性) 보살마하살이라 하느니라. 이 종성을 얻으면 모든 법에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어지느니라. 일체 법을 지니되 움직임도 무너짐도 없으리니,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니라. 이것을 법행(法行)이라 부르느니라. 법을 성취하는 까닭에 곧 일체 법의 특징 없음을 보며, 법다운 이익을 얻는 까닭에 또한 법행이라 부르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법은 물러남이 없고 
부처님들도 그러하시니 
만일에 능히 지니는 이는 
이를 법행이라 하리라.



불법을 드러내되 
형상 없고 모습 없고 
심히 깊어 물듦 없으면 
이를 법행이라 이르니 

모든 세계를 여의지 않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로 하여 
법계에 두루 이르면 
이를 법행이라 하리.



모든 법을 보호하여 지니고 
부처님과 같이 드러내어 보이되 
마음에 티가 없으면 
이를 법행이라 이르리.



물러나지 않는 바퀴를 굴리면 
무상(無相)이라 이르거니와 
게다가 집착하지 않으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부르리.



취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어 
법다운 지혜를 받들어 지니라.


이렇게 받들어 지닌다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부르리.



마음으로 언제나 좋아하여서 
법 구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게으른 생각 멀리하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부르리.



법문을 들어서 받아 지니되 
번뇌[漏] 없고 의지함도 없게 하여서 
안락한 경지에 잘 머문다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부르리.


만일 법문을 말하는 이가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아 
무상(無相)으로 받아 지닌다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부르리.



좋은 몸을 좋게 머무르되 
머무름에 처소가 없으면 
이 몸은 몸이 아니니 
몸의 모습을 안다 하리라.



앞뒤의 한계[際]가 없나니 
법성과도 같아서 
오고 감이 없으면 
몸의 모습을 안다 하리라.



또는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보이심과 같게 하라.


이 법을 얻으면 
이를 법행이라 하리라.



허공과 세계의 성상(性相)에 
어느 것에나 집착하지 않으면 
이러한 법을 지닌다면 
법행이라 부름이 마땅하리라.



또는 모든 법에 대하여 
공하여 보는 바가 없나니 
만일에 보는 바가 없으면 
곧 장애함이 없으리라.


무상(無相)을 드러내면 
다툼이 없어지리니 
말 없고 설명 없으니 
또한 있다 함도 없어지네.



마음의 모습들을 여의고 
게다가 얻을 바가 없나니 
마음에 얻을 바가 없으면 
부사의라 이름하리라.



오는 것 없고 가는 것 없건만 
버젓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반연이 없어지고 말할 수 없음을 
부사의라 이름하리라.



만일에 이 법을 지닌다 해도 
가히 의지하진 못할 것이니 
있는 바가 없다고 이름하여 
이를 일러 법문을 지닌다 하리.



이와 같은 법은 
보살들이 말할 바이니 
합하고 흩어질 것 없음은 
지음[作] 없음을 나타냈나니 
이름하여 행처(行處)라 하네.



이 종성의 처소는 
이러한 이익을 얻나니 
이름을 행처라 하리라.


이 종성을 쫓으면 
나무랄 것 없나니 
이러한 경계 얻으면 
법문을 지닌다 하리라.



법은 줄지 않으며 
가도 가는 것이 아니며 
오되 오는 것이 아님을 보며 
어떠한 하나의 법이라도 
오거나 가는 것을 보지 않나니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여서 
이렇게 법을 지니면 
또한 동요함이 없으리.



늘지 않고 줄지 않는 것 
이는 지음이 없는 법이니 
만일 늘고 줆 없으면 
이를 법문을 지닌다 하리.



법상은 여여(如如)하여서 
인연 없으며 말이 없나니 
이 법을 얻는다면 
이를 법문을 지닌다 하리.



그러므로 아난이여, 
보살은 드러내어서 
깊은 법의 이익을 얻나니 
이를 법문을 지닌다 하리.


그러므로 아난이여, 
법문 지님을 드러내어 
믿지 않는 이를 위하여 
이 법을 말하여 주라.



이러한 분별은 
보살들에게 말한 것이니 
모두가 방편으로써 
불법을 드러내어라.

“이와 같아서 아난이여, 여래ㆍ정각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이러한 방편을 말씀해 주시어 불법 지니는 것을 보여 주노라.”

다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여래께서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8정도(正道)를 말씀하시며,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8사(邪)를 여의고 8해탈을 향하는가? 범부의 경계를 초월해 8정도를 닦되 이르는 곳이 없이 모든 극단[邊]을 떠나서 중도(中道)에 안주하며, 범부의 경계를 넘어서 보리에 안주(安住)하되 또한 보리의 상(相)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모든 사견(邪見)을 여의고 정견(正見)을 닦아 몸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보리의 상에도 머물지 않아 불신(佛身)은 무위로서 모든 범주를 떠나며, 부처의 모습을 닦는 이는 곧 중생의 한 모습[一相]과 무상(無相)을 얻으며, 중생의 나고 죽는 음(陰)ㆍ계(界)를 벗어나서 무위필경의 공적한 집에 머물러서 일체 법의 나고 머무름 없음을 보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과 특징이 모두 머무름이 없는 때문이니라.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을 멀리하고 적멸한 곳에 머물러 세간에 물들지 말고 출세간에 집착하지 말지니라. 만일 법과 법 아닌 것과 유위와 무위를 모두 멀리하고, 단상(斷常)을 버리어 평등한 모습에 머무르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마음의 범주[心數]가 다른 모습이 없음을 알며, 또한 보리심의 모습을 얻으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 마음은 모두가 평등한 때문이니라. 몸의 특징[身相]도 또한 그러하나니, 그러므로 독(毒)과 불과 칼과 화살에 다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미 온갖 번뇌의 독기를 여읜 때문이니라. 항상 청정한 국토에 태어나서 모든 나쁜 갈래를 여의며, 비록 모든 갈래에 머무르나 보리를 증득하여 편안한 경계에 상주하되, 또한 의지할 것이 없느니라. 이러한 뜻으로써 일체의 칼[刀]ㆍ군사[兵] 들이 능히 해치지 못한다 하나니, 적멸한 보리는 공하여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일체의 독화살이라도 능히 해치지 못하나니, 이를 속박 없음[無縛]이라 하느니라. 신속히 수레에 탔으나 또한 승(乘)에 머물지 않으니, 이를 속박 없음이라 하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칼과 화살이 그 몸을 해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모든 법이 공한 것을 알아서 얻지 못함[不可得]을 구한다면 일체의 독해(毒害)가 침노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두루 자비를 행해 일체를 덮는 까닭이며, 보리의 자비를 행해 중생을 얻지 않는 까닭이며, 공의 자비를 행해 모든 법이 적멸하는 까닭이며, 무열(無熱)의 자비를 행해 모든 번뇌를 여읜 까닭이니, 이러한 자비를 행해 칼이나 병사가 몸을 해치지 못하게 하느니라.

욕계ㆍ색계ㆍ무색계는 모두가 평등하니, 일체 세계와 법성은 보리와 똑 같아서 다른 모습이 없는 줄 알지니라. 만일 능히 이와 같이 마음에 사려(思慮)가 없고 조희(調戱)가 없으면 적멸하고 청정하리라. 보살마하살은 일체 법이 외치는 소리의 울림과 같음을 아나니, 모든 상을 떠나서 법계에 동일하니라. 돌아갈 곳이 없고 나아갈 곳이 없이 온갖 음성과 말을 잘 해석하며, 보일 것 없고 말할 것 없이 음성의 상을 여의느니라. 스스로가 자기를 높이지 아니하고 나라는 생각을 여의며, 일체의 언설(言說)과 음성을 초월해 과상(過相)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빠짐없이 일체 법의 적멸을 아느니라. 일체 법의 상을 얻지 않고 모든 법을 뛰어넘어 초월하되 마음이 돌아갈 곳이 없으며, 모든 말과 소리에도 물들지 않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8사(邪)를 여의고 
8정도(正道)와 9차제(次第)와 

8해탈(解脫)을 닦으면 
이를 8배(輩)라 이름하리라.



범부를 뛰어넘어 초월했으나 
보리(菩提)에도 머물지 아니하여서 
법 가운데 영웅이 된다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범부를 뛰어넘어 초월했으나 
보리에도 머물지 아니하여서 
보리의 모습을 여읜다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모든 삿된 소견을 여의고 
바른 소견을 수행하여서 
정도(正道)을 증득한 것도 여의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중생이라는 생각[想]을 여의고 
항상 부처라는 생각을 닦아 
선정의 생각을 건넌다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중생의 굴을 여의고 
열반의 성에 들어가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세간을 뛰어넘어 
성도(聖道)를 보여 주어 
적멸의 세계에 모이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모든 세간을 떠나서 
부처의 법상을 말하되 
마음에 증득할 바가 없으면 
이를 8배라 하리라.



있는 한계[際]도 없으며 
없는 한계도 없으니 
있고 없음을 멀리하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적멸하고 무위이어서 
단상(斷常)을 모두 버리고 
깊숙이 평등에 들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과거를 취하지 않고 
미래의 마음도 그렇게 하며 
현재도 그렇게 한다면 
이를 8배라 이름하리라.



처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보리심을 낸다고 설명하나 
마음의 모습은 공한 것이니 
무엇을 일러 보리라 하리.


이를 곳과 뛰어넘을 것 없으며 
보리라 할 것도 또한 없나니 
독이나 불이나 칼이나 화살 따위가 
해치려 들지도 못하리.



모든 갈래를 끊고 
영원히 의지처를 여의어 
가고 옴이 없으면 
해칠 것도 없으리.



보리로 향하는 일 없이 
버젓하게 음성을 드러내어 
스스로가 실다움을 증명해 
다른 가르침에 의하지 않네.



옳은 갈래와 그리고 
그른 갈래를 얻지 못하면 
소리가 생각 생각에 멸하니 
대승(大乘)을 속히 드러내어라.



항상 안온(安穩)함과 
가장 공한 법을 말하여서 
만일에 속히 증득하면 
이를 속박 없음이라 하고 

신속히 이 법을 
보살이 설하는 바를 따라 
마음에 버림이 없으면 
이를 속박 없음이라 하고 
난리와 그리고 나쁜 갈래에 
핍박 당하지 않는 곳에서 
몸에 두려움 없음을 얻어 
독해가 해치지 못하네.



보살은 자비를 행해 
널리 일체에 두루하여서 
다투는 말을 여의었나니 
이를 속박 없음이라 하네.



몸의 모습 취하지 않되 
몸을 익숙히 분별하고 
보리의 길에 이르러서 
나쁜 갈래 여의었다네.



그 우치를 제거하여서 
신통이 자재하고 
밝은 보리를 얻으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욕계와 색계와 
그리고 무색계를 알되 
삼계가 같은 모습이라 하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모든 세계가 평등하여서 
번뇌와 보리를 여의었나니 
망상과 어리석음은 
물들이지 못할 바라네.


일체의 상을 뛰어넘어 
나무랄 바가 없나니 
만일 말할 바가 있을지라도 
모두가 법계로 나아가리.



나아갈 바가 없어서 
법계와 같음을 말하며 
마음이 법인(法忍)에 머무르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만일에 닦고자 한다면 
적멸한 법에 머물러서 
스스로를 칭찬 말고 
남을 위해 설하라.



소리의 모습을 초월하고 
소리 없는 모습도 지나서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를 8배라 부르리라.



소리로 인하여 해탈한 이는 
법의 모습 없음과 
머무는 곳 없음과 
갈래와 벗어남 없는 줄 알리라.



아난이여,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은 8배는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 되느니라.

3. 성문벽지불품(聲聞辟支佛品)

그 때에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알라. 여래ㆍ등정각께서는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이와 같은 8배를 방편으로 설하셨느니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째서 여래ㆍ세존께서는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수다원(須陀洹)을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다원이란 이른바 성스러운 도의 흐름에 든 것이니, 부사의한 불법이라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능히 이렇게 닦아서 도(道)와 그리고 닦을 바 도[所修道]를 봄이 없이 일체의 상을 건너서 부처의 특성인 색도 아니고 생도 아닌[非色非生] 상태가 흘러들며,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일체 법은 처소가 없고, 반연[緣]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있는 바가 없고, 성취함이 없게 되리라. 보살마하살이 만약 이 도에 이르러 굳은 정진과 힘과 지혜와 슬기를 얻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적멸에 올라 여실한 도에 안주하며, 중생을 구호하되 가장 뛰어나서 위가 없으리라. 이 도를 취하지 않고 또한 머무르지도 않나니, 이러한 도를 닦아 일체 법을 구하되, 얻는 바도 없고 잠기거나 동요됨도 없으며, 머문다는 생각 없고, 도라는 생각 없고, 세간이라는 생각 없고, 부처라는 생각도 없어서 모두가 평등하여 모든 가림[蓋障]이 없으며, 지견(智行)의 경계에 걸리는 바가 없으며, 일체 법과 모든 사견에 대하여 평등한 모습으로 머무르며,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 깊은 법문을 보이며, 신견(身見)을 분별하여 나라는 생각을 초월한다면, 이를 수다원이라 하느니라.

불도의 집착 없이 끝내 걸림 없는 불도를 구하기 좋아하되, 유계(有戒)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불계(佛戒)를 취하지 않으며, 계취계(戒取戒)도 아니고 취상계(取相戒)도 아니며, 3결(結:번뇌)을 이미 여의고 삼계에 머물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배우신 바와 같게 하여 성도를 수행하며, 일체의 생각을 여의어 반연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장애가 없어서 불도에 들어가 마음에 적멸을 얻으며, 수명ㆍ아ㆍ인 등의 소견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근이 청정하여 번뇌를 멀리하며, 보리를 닦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일체를 모두 버리어 괴로운 중생을 구제하여 4류(流)를 건너 열반에 서게 하며, 모든 존재상[有想]을 다하여 무상[無相]을 드러내되 4중(衆)을 보아도 두려워 않고 정성껏 적멸한 청정 보리도를 구하며, 현전에 적멸을 증득하여 모든 티끌을 여의었기에 이미 두려움을 여의고는 죽는 두려움도 없으며, 불도에 잘 머물러 가고 오는 갈래 역시 가고 옴이 없음을 알며, 중생들의 망상을 잘 분별하되 마음에 희론이 없이 불도를 다 이룬다면, 이를 보살마하살의 수다원의 모습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네 가지 길[四道]을 말하니 
부처는 부사의하시어라.


만일 머무는 사람은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리.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의지할 바가 없나니 
머무름 없고 반연 없어서 
집착을 여의었다네.



이것을 일러 도라 하나니 
견고한 뜻을 얻어서 
이러한 수레를 타고 
위없는 구세주께서는 

그 어디에도 머무는 일 없이 
중류(中流)에 처하거나 
불도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이를 수다원이라 하리.



일체 세간과 그리고 
불법과 다른 법으로 
마침내 저 언덕에 이르면 
이를 수다원이라 부르리.



모든 가림[蓋障]을 소멸하고 
불도를 보여 주어서 
일체 행상을 다하면 
이를 수다원이라 하리.



자기 몸은 높이지 않고 
불법을 일으켜서 
지견(知見)을 열어 보이고 
부처님 지혜[佛慧]에 들게 하거나 

먼저 일으켰던 아상(我想)과 
뒤바뀐 뭇 악행들을 
이렇게 안 후에는 
불법에 집착하지 않거나 

본래부터 부처를 의심해 
득(得)이다, 부득(不得)이다 했으나 
마침내 집착이 없어지고 
도상(道想)을 취하지 않거나 
계취(戒取)를 일으키지 않고 
불계(佛戒)에 잘 머물러 
항상 부지런함[正勤]을 닦되 
계상(戒想)을 취하지 않거나 

3결(結)을 끊어 
삼계에 집착하지 않고 
불도를 행하면서도 
중생상(衆生想)을 알거나 

비록 보리를 닦으나 
망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으로 적멸을 행하여 
불도를 청정케 하거나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빈축을 받지 않거나 
바른 삶[正命]에 머물러 
마음에 희론이 없이 하거나 

일체를 모두 버리어 
괴로운 중생을 구제하고 
위없는 보시를 얻으면 
이를 수다원이라 하리.



자꾸 태어남[數數生]을 끊어서 
모습 없고 집착 없으며 
공포를 멀리 여의고 
출세간의 두려움을 여의며 
옳은 법과 그리고 그른 법 
일체를 모두 버리고 
모든 음(陰)에 집착하지 않으면 
세간의 밝힘[世間明]이라 이르리.



4중(衆)에 편안히 머물러 
두려워할 것 없고 
적멸을 드러내어 
불법을 맑게 닦으며 

중생이란 생각 없고 
또한 실답게 생각 않으면 
이를 물듦이 없다 하리라.



두려움을 분별하여 
온갖 두려움을 여의고 
또한 죽음이 두려움 없으면 
적멸에 머물러 
때[垢]를 여의고 편안하리라.



이미 나쁜 갈래 지났으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모든 길을 잘 말하되 
무루(無漏)와 무상(無相)이라 하고 

보살의 법을 
수다원에게 보이나니 
모든 못난이를 위하여 
이렇게 말하였노라.


공교한 방편으로써 
불법을 보여 주니 
방일(放逸)한 이를 위해 
이 법을 드러냈노라.



구세주이신 세존은 
방편의 설법이 많으니 
그 본행(本行)을 따라 
불도를 보여 주노라.



아난아, 마땅히 알지니 
이 수다원의 법문은 
지혜가 적은 이를 위해 
이렇게 말하였노라.



방편을 알지 못하는 이 
우치하고 비좁고 열등해 
심히 깊은 뜻 알지 못하고 
다투는 말만을 일으킨다네.



백천 가지 법으로써 
수다원을 보이었나니 
수다원이라 하는 것은 
보리의 법을 나타냄일세.

“이와 같이 아난이여, 여래ㆍ등정각께서는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좋은 방편으로써 수다원을 말하였노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것이 여래ㆍ등정각께서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사다함(斯陀含)을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불지(佛智)를 수순하나, 불지란 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니라. 한량없는 인(因)을 닦으면서도 또한 원인의 모습[因相]과 보리의 지혜를 취하지 않고 일체 미혹을 능히 끊어 부처의 지혜를 구하며, 금강삼매(金剛三昧)가 모든 선정을 초월하였음을 찬탄하고 일체의 결박인 번뇌의 어두운 장애를 끊으며, 모두가 부처를 보아서 일체 불법의 평등한 정관(正觀)을 얻어 한량없는 인으로써 얻을 바 없음을 구하며,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과 같아서 중생을 동요치 않으며, 또한 중생계에서 동요함이 없으면서도 법계를 취하며, 한량없는 중생이 여러 겁(劫) 동안에 부족한 바가 많았으므로 보리의 길을 성취할 수 없으니, 중생을 인도하여 물러나지 않는 데에 이르러서 정성껏 부처를 구하게 하며, 근[五根]ㆍ힘[十力]ㆍ각도[七覺道]ㆍ선정ㆍ해탈을 무색정(無色定)이라 부르니, 이제 이러한 법들로써 중생에게 보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解悟]을 얻고 다시 불도를 구하게 하며, 도량에 앉아 여실한 지혜를 구하고자 하며, 불안(佛眼)의 부사의한 눈[不思議眼]을 통달하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여 최상의 지혜인 불안을 구하며, 모든 법의 심히 깊은 모습을 모두 알고 스스로가 지혜에 대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으며, 중생을 분별하여 모든 법 가운데 머무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체 법이 머무르지 않음을 알게 하나니, 이러한 법을 얻기 위해 와서 모인 자를 사다함이라 부르느니라.

온 뒤에 중생계와 부사의계를 보되, 통달하여 걸림 없고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얻거나 이를[到] 것도 없으니, 그 어디에 성취할 중생이 있겠느냐. 성취할 중생을 보지 않는 까닭에 일체 법과 중생계에 대하여 봄이 없으니, 아니 보는 것이 아니면서도 중생을 아느니라. 법계에 흘러들고 법계를 밝게 깨치어 보리와 같이 하며 법계와 중생계와 한량없는 불도를 이해하되, 얻음도 없고 분별도 없어서 도지(道智)와 같아지며, 무등지(無等智)에 가까워지느니라. 때를 여의고 청정하여 얻을 바 없음을 얻으며, 증득할 바 없음을 증득하나니, 이것을 참다운 지혜[眞智]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지혜를 구하면 사다함이라 부르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지혜를 수순한다면 
이를 부사의라 이름하나니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때문에 
사다함이라 부르네.



한량없는 인연의 설법으로 
보리도를 성취하나니 
이 법을 수행하려는 까닭에 
나는 항상 왕래하였노라.



동요 없는 삼매를 구해 
결박을 소멸했나니 
그러므로 오로지 닦고 익히며 
성취해 물러나지 말아라.



또한 법과 법 아님을 알며 
장애 없는 모습 통달하여 
모든 법의 실제(實際)에 머물러 
사다함을 수행하네.



부처님 말씀을 수순해 
들은 대로 수행하라.


이 법을 얻기 위하여 
나 항상 왕래하며 구했노라.



법계에 미증유(未曾有)한 것이나 
중생계를 움직이지 않았나니 
이를 사다함이라 부르니 
적멸한 거래의 모습일세.


중생은 지혜 없어 
우치하고 심히 괴로우니 
편안히 세우기 위하여 
부처의 지혜 구할지니라.



근(根)과 힘[十力]과 각도(覺道)와 
선정과 그리고 해탈은 
부지런히 닦을 삼매의 모습이니 
부처님의 지혜 구함이니라.



보리법을 구경(究竟)케 함은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이니 
이것이 사다함의 
행을 일으켜 구함이네.



만일에 이런 법을 얻으면 
불안(佛眼)은 부사의하니 
이것이 사다함의 
항상 불안을 구함이네.



부처님께서 구하신 바와 같아서 
구호(救護)함이 의지가 되나니 
내가 이제 구하는 바는 
일체 지혜에서 최상이라.



이것은 지혜로써 알 바며 
모든 법상의 진실이어서 
지혜에도 물들지 않음은 
이 지혜가 최상인 까닭이네.


이것은 지혜로써 알 바이며 
모든 법상의 진실이어서 
항상 마음이 물들지 않으니 
이런 법을 언제나 구하네.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 
모든 지혜 중에 으뜸이어라.


이것이 사다함의 
가고 오며 구하는 바라네.



법계를 자세히 보건대 
중생은 부사의하나니 
이것이 사다함의 
중생계를 구함이라네.



중생계를 알고 나서는 
중생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이 사다함의 
무소득을 구함이라네.



만일에 중생을 얻지 못하면 
일체 법은 모습이 없나니 
능히 이렇게 알면 
중생들을 인도하리라.



비록 일체 법을 관하되 
관찰하는 상이 없나니 
마음에 어지러운 뜻 없이 
불도를 구함이네.


이렇게 청정한 지혜는 
일체 더러움을 여의었나니 
이러한 지혜 얻는다면 
이를 일러 불도를 구한다 하리.



모든 중생에게 보여 주는 일 
보살은 나무라지 않는 바이니 
이것을 구경의 지혜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짐짓 온다네.



아난아, 그대는 알지니, 
사다함을 말했거니와 
지혜가 적은 중생들은 
망상으로 시비에 집착하노라.



아난아, 그대는 알지니, 
사다함을 말하였나니 
부지런한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견해를 짓게 하여라.



언제나 다문(多聞)을 잘 닦고 
심히 깊은 뜻 결정하면 
진실한 이치를 얻을 것이며 
신속히 보리를 성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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