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14권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14권

“다시 해의(海意)야, 내가 이제 비유로써 거듭 이 이치를 밝히겠노라.

해의야, 세간에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금강(金剛)의 견고한 갑주(甲胄)를 입고서 아주 치성한 불덩어리 속에 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마른 풀을 갑주 삼아 입고서 그 치성한 불덩어리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해의야, 너는 그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불에 타고, 어떤 사람이 불에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겠느냐?”

해의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금강의 갑주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치성한 불덩어리 속에 들어가더라도 그 견고한 갑주가 사람을 잘 보호하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겠지만, 저 마른 풀을 갑주 삼아 입고서 불덩어리 속으로 들어 간 사람은 반드시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저 마른 풀로써는 치성한 불 속에서 사람을 보호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의야, 저 몸에 금강의 갑주를 입고서 큰 불덩어리 속으로 들어가도 타지 않는 이가 바로 보살이니라. 보살은 항상 대자대비로써 갑주를 삼아 마음을 굳게 하고, 금강의 힘으로 중생을 보호하여 해탈케 함으로써 그 서원을 언제나 버리지 않음은 물론, 비록 일체 법의 공하고 상(相)없고 원(願)없고 조작 없고 생멸 없음을 관찰하여 고요한 삼매속에 들어가더라도 성문·연각의 지위를 초월하여 그 과위를 구하지 않으며, 저 선정의 수승한 맛을 느끼기는 하되 그 맛에 집착하지 않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난 뒤엔 다시 그 불토를 장엄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고 부처님의 지혜를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리고 해의야, 저 마른풀을 갑주 삼아 입고서 큰 불덩어리 속에 들어가 타버리는 자는 바로 성문·연각이다. 성문·연각은 모든 행 가운데 공포심을 내고 다시 3유(有)의 끊임없이 치성함을 보고는 중생을 버리고 대비심을 멀리 여의며, 고요한 삼매에 들기는 하되 그 삼매의 맛에 집착하여 중생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삼매에서 일어나더라도 그 8과(果)의 과위를 증득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성문·연각은 그 복된 행과 죄가 되는 행과 동요되지 않는 행을 다 수습(修習)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그 한량없는 복되고 슬기로운 행을 수습하고, 수습하여도 중간에 그 실제(實際)를 취증(取證)함이 없이 필경 일체의 부처님 지혜를 원만하게 하느니라.

해의야, 그러므로 보살은 그 공하고 상이 없고 원이 없고 조작이 없는 법 가운데서 항상 치성한 생각을 낸다. 비록 그러한 법을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고 나서도 다시 그 법 가운데 슬기롭고 착한 행을 일으켜 끝까지 실제를 취증하지 않나니, 이는 보살이 선근을 성숙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법을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의야, 이른바 보살이 선근을 성숙시킨다는 것은 깊고 깊은 불법을 이치 그대로 수행하되 중간에 실제를 취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냐 하면, 저 보살들은 모두 대승의 법을 성숙시켜 점차로 향상하고 깊이 들어가 그 수승함을 더할 뿐, 다른 승(乘)의 법을 성숙시키지 않기 때문이니라.

해의야, 마치 오지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아직 태양에 쪼이지 않아 성숙되지 못했을 때엔 다만 그릇의 모형일 뿐 어떤 명칭을 정할 수 없고, 완전히 성숙된 뒤라야 그 그릇의 명칭을 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살의 하는 일도 그와 같아서 비록 모든 선근을 많이 닦는다고 하더라도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지 않는다면 곧 바라밀다의 명칭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만이 바라밀다의 명칭을 얻는 길이니라.

해의야, 또 비유컨대 아무리 묘하고 좋은 진금(眞金)일지라도 아직 공작(工作)을 거치지 않고는 다만 진금(眞金)일 뿐이어서 그 장엄한 명칭을 갖출 수 없고, 공작을 거쳐 만들어지게 된 뒤라야 모든 장엄을 갖추어 명칭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살의 하는 일도 그와 같아서 선근을 닦되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지 않는다면 바라밀다의 명칭을 얻지 못하고,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여야만 비로소 바라밀다의 명칭을 얻을 수 있다.

해의야, 이 때문에 보살이 항상 광대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선근을 성숙하되 그 선근을 성숙하고 나서는 곧 일체의 지혜에 회향해야 하며,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는 까닭에 보살이 그 깊고 깊은 법을 이치 그대로 수행하면서 중간에 실제를 취증하지 않게 되느니라.”

그 때 해의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라면 하기 어려운 일을 잘하고 모든 과실을 잘 막아서 보호해야 하리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 하는 일이 어떤 것에서도 과실을 범하거나 더럽히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매우 공교한 방편을 갖춘 보살이라면 그는 곧 회향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방편을 지니기 때문에 비록 선정·해탈과 삼매 속에 들어가더라도 그 선정·해탈과 삼매에 집착하여 과실을 범하지 않고, 선교한 방편을 갖추어 모든 하는 일을 잘 나타내어서 그 조작 없는 견 가운데 떨어지지 않는 동시에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에 잘 머물기 때문입니다. 만약 삿된 선정에 나아가는 중생이 있을 때엔 보살은 그들에게 바른 선정의 법을 말해 주고, 또 그 중생들의 원(願)을 원만케 하기 위해서는 보살 자신도 바른 선정에 머물렀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해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말처럼 그렇다, 그렇다. 보살은 어떠한 곳에서라도 항상 선교한 방편을 수습해야 한다. 왜냐 하면, 해의야, 선교한 방편이 곧 보살의 보리이므로, 만약 선교한 방편이 없다면 보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세간에 염색하는 어떤 그릇[染器] 하나를 두고서 거기에 푸른 빛깔과 붉은 빛깔과 황금 빛깔의 이 세 가지 물감으로, 모피로 만든 옷[毳衣]에는 푸른 빛깔을, 짐승의 털로 만든 옷[氈衣]에는 붉은 빛깔을, 가장 값지고 미묘한 하늘 옷[天衣]에는 황금 빛깔을 염색하되, 그 세 가지 옷이 똑같은 그릇을 사용하는 저 염사(染師)가 조절하기에 따라 뜻대로 묘한 빛깔을 낼 수 있으므로 푸른 것이 필요하면 푸르게, 붉은 것이 필요하면 붉게, 누른 것이 필요하면 누르게 하지만, 그러나 그 염색하는 그릇은 조금도 분별함이 없는 것과 같다. 해의야, 그 염색하는 그릇은 바로 공하고 상(相)이 없고 원(願)이 없는 해탈문이며, 똑같은 그릇에 염색되는 옷은 성문승과 연각승과 대승의 이 세 사람이다. 세 사람이 각각 그 작용에 따라 마음대로 즐겨하고 필요에 따라 지혜의 빛깔을 가져오되, 그러나 저 공하고 상이 없고 원이 없는 해탈의 그릇은 조금도 분별함이 없나니, 알아 두라. 그 모피로 만든 옷은 성문승의 사람이고, 짐승의 털로 만든 옷은 연각승의 사람이고, 값진 하늘 옷은 대승에 편히 머무는 사람이니라.

해의야, 너는 모든 법을 관찰하되 그 실제의 자성(自性)이 없고, 조작하는 자성이 없고, 나라는 자성이 없고, 사람이라는 자성이 없고, 수자(壽者)라는 자성이 없고, 주재하는 자성도 없이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기고, 생기고 나서는 또 모이고 쌓이되 아무런 깨달음이 없고 분별하는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을 안다면 그 보살은 곧 모든 법 가운데서 어떠한 법에도 게으르거나 지치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러한 지견(知見)이 청정해진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요익(饒益)함도 없고 요익하지 않음도 없는 동시에, 여실하게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분명히 알 것이며, 이같이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분명히 알고 나면 언제나 대비의 갑옷[鎧]을 버리지 않으리라.

해의야, 마치 세간의 유리(琉璃) 구슬을 저 더러운 진흙 속에 묻어 두고 천 년이 지난 뒤에 꺼내어 닦더라도 그 구슬 보배 자체가 본래 맑고 깨끗하여 티로 가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더러운 진흙만 제거하면 여전히 맑고 깨끗하여 아무런 티가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중생들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고 명철하고 결백하나 다만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덮이고 가려졌음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보살이 이것을 관찰하고는 곧, ‘중생들의 심성이 본래 청정하나 다만 번뇌에 덮이고 가려졌을 뿐, 실상 번뇌에 머무는 것이 없거늘, 중생들이 도리에 벗어나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저 중생들을 위해 번뇌 끊는 법을 선설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생들을 널리 해탈하게끔 부지런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더욱 노력하기를 아끼지 않아야 하며, 또 생각하기를, ‘이 모든 번뇌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파괴하여 열약(劣弱)하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그 실제로는 없는 번뇌 속에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게 하니, 이러한 사실 그대로의 이치를 사찰(伺察)하여 견고한 뜻을 세운다면 번뇌에 흔들리지 않고 번뇌에 화합하지도 않음은 물론, 번뇌에 화합하지 않는다면 곧 착함에 나아가는 것이니, 내가 만약 번뇌에 화합한다면 어떻게 저 번뇌에 얽매인 중생들에게 번뇌 끊는 법을 선설하랴. 그러므로 나는 이제 어떠한 번뇌에도 화합하지 않고 마땅히 번뇌에 얽매인 중생들을 위해 번뇌 끊는 법을 선설하리라. 그러나 내가 만약 그 윤회(輪廻)속에 있는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모든 선근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면 또한 번뇌에 화합해야 한다. 윤회 속에 있는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해 번뇌에 화합되면서 선근을 이어간다는 것은 이른바 복된 행을 부지런히 구하되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리라.’

보살이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저 3유(有) 가운데 일부러 태어나되 부처님을 만나 중생 제도하기를 맹세하여 게으름 없이 바른 법을 호지하고 모든 시작(施作)에 용감하게 나아가 물러남이 없으며, 항상 법욕(法欲)을 내어 모든 바라밀다의 그 수승한 행을 오래 버리지 않아야 하나니, 해의야, 이것이 바로 윤회 속에서 번뇌와 화합하면서도 선근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비록 번뇌에 화합하기는 하되 그 번뇌에 더럽혀 과실을 범하지 않느니라.”

해의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선근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무엇 때문에 그 번뇌를 들어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해의야, 보살은 이러한 모든 번뇌의 법이 3계(界)와 더불어 화합됨을 분명히 알고서 그 번뇌로부터 3계에 출생하되, 출생하는 보살이 매우 공교한 방편을 갖추기 때문에 그 선근을 쌓고 모음에 있어서 인연의 힘으로 3계에 화합하나니, 그러므로 이것을 이르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선근은 번뇌와 화합한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 3계에 화합하기 때문에 다시는 어떠한 번뇌도 마음속에 자라날 수 없느니라.

해의야, 마치 세간에 어떤 장자(長者)가 외아들을 두고서 매우 자애한 마음으로 어여삐 여기며 길러왔는데, 때마침 그 동자가 어리석고 아직 철이나지 않아 더러운 우물가에서 뛰어 놀다가 갑자기 그 우물에 빠졌다. 그 때 동자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함께 그 동자가 더러운 우물 속에 빠진 것을 보고 달려와서 우물을 보았으나, 우물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어 근심하고 슬퍼할 뿐, 그 우물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들을 사랑하는 아픈 마음으로서도 구제할 수 없었는데, 그 때 그 아버지가 이것을 알고 달려와서 동자가 더러운 우물 속에 빠진 것을 보자마자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너무나 사랑하던 외아들을 그대로 버릴 수 없어서 갖은 방법을 다해 그 우물 속에 들어가 마침내 그 아들을 구출하는 것처럼, 해의야, 알아 두라. 저 더러운 우물은 바로 3계이고, 그 아들은 일체 중생인 바, 보살이 일체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하는 것이며, 동자의 어머니와 친척은 바로 성문·연각승의 사람으로서 중생들이 그 윤회 속에 빠진 것을 보고서도 마음으로 근심하고 괴롭게 여길 뿐 구출할 방편을 모르는 것이고, 그 장자는 바로 보살이니라.

이와 같이 보살 자신은 비록 결백하고 청정한 때[垢] 없는 마음으로 무위법(無爲法)에 머물 수 있지만, 그러나 다시 3계에 화합함은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해 그러한 행을 닦는 것이니, 해의야, 이것이 곧 보살의 대비한 행이다. 보살이 필경 자신의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나서도 다시 그 3유(有) 가운데 몸을 받아 태어남은 선교한 방편을 갖추고 수승한 지혜로 포섭하기 때문에 자기의 번뇌에 아무런 걸림 없이 일체 중생을 위해 그 번뇌 끊는 법을 선설하느니라.”

해의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라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을 잘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그 결백하고도 청정한 때[垢]없는 마음으로 윤회 속에 있는 중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깊고 깊은 법을 설하고 진리 그대로를 자세히 살피되 무위법에 머물지 않고 그 과증(果證)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이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의야, 그러한 보살은 바로 바른 도를 닦아 선정과 함께 화합한 보살이라 하리니, 이른바 반야바라밀다와 선교한 방편이 그것이다.

해의는 알아 두라. 보살의 결백하고도 청정한 번뇌 없는 마음이 곧 반야바라밀다이고, 윤회 속을 싫어하지 않고서 몸을 받아 태어나 중생을 교화 제도함은 곧 매우 공교한 방편이니라.

다시 해의야, 보살이 만약 공하고 상이 없고 원이 없고 조작이 없고 생멸이 없는 그 모든 법을 이치 그대로 살핀다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다이고, 거기에 다시 현전의 대비심을 일으켜 무위법에 머물지 않고 과증을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곧 매우 공교한 방편이다. 또 보살이 3세의 평등한 법에 잘 머무는 까닭에 어떠한 법에도 갖가지 상(相)을 보지 않는다면 그 법계의 평등함이 곧 중생계의 평등이고, 중생계의 평등함이 곧 열반계의 평등이며, 열반계의 평등함이 곧 법계의 평등이다. 그러므로 이 법계의 평등한 성품에 들어간다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다이고, 다시 한 법계에 들어가 중생계를 분명히 알고 열반계를 취증(取證)하지 않는 까닭에 중생계를 버리지 않고 법계에 머물지도 않고 과증(果證)을 취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곧 매우 공교한 방편이니라.

다시 해의야, 만약 보시를 청정하게 한다면 그것이 지혜이고, 회향을 청정하게 한다면 그것이 방편이며, 지계·인욕·정진·선정을 청정하게 한다면 그것이 지혜이고, 회향을 청정하게 한다면 그것이 방편이니, 요약하여 말하자면, 일체의 선근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지혜이며 거기에 회향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방편이니라.”

해의보살이 또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그 선근을 청정하게 함이란 어떤 것이며, 회향을 청정하게 함이란 어떤 것이며, 또 지혜의 청정이란 어떤 것이고, 방편의 청정이란 어떤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의야, 보살이 그 선근을 청정하게 함이란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중생이라든가, 수자(壽者)라는 그러한 견해를 여읜 뒤에 모든 선근을 쌓는 것이며, 회향을 청정하게 함이란 이른바 공하고 상이 없고 원이 없는 법에서 선근을 성숙시켜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며, 지혜의 청정이란 이른바 일체 중생의 그 전후 근성(根性)을 지혜로써 다 요달하는 것이고, 방편의 청정이란 일체 중생에게 그 응하는 대로 다 설법해 주는 것이다.

또 선근을 청정하게 함이란 모든 갈래에 비록 몸을 받아 태어나더라도 의지함이 없는 동시에 모든 선근을 쌓는 것이고, 회향을 청정하게 함이란 일체 성문·연각의 승을 초월하여 모든 승이 가진 선근을 잘 포섭하되 모두 대승의 법에 회향하는 것이며, 지혜의 청정이란 일체 번뇌의 그 종자와 습기를 다 끊어버리는 것이고, 방편의 청정이란 이른바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해 먼저 그 일을 함께 하고 다음에 대승의 법을 가르치는 것이니라.

다시 해의야, 선근을 청정하게 함이란 이른바 보살이 그 보배로운 손[寶手]를 펴서 다함 없는 공덕을 베풀어 일체 중생을 수용(受用)하는 것이고, 회향을 청정하게 함이란 이른바 일체 중생과 일체의 유학(有學)·무학(無學)과 일체의 연각·보살·부처님의 그 모든 선근을 널리 수섭(收攝)하여 운용하여서 회향에 들어가는 것이며, 지혜의 청정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다 받아 간직하되 다라니의 인(印)으로 인하면서 그 받아 간직함을 헐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고, 방편의 청정이란 이른바 끊임없는 변재(辯才)와 걸림없는 변재로써 모든 중생에게 속임없는 법을 잘 선설하여 그 중생들로 하여금 다 환희심을 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해의야, 선근을 청정하게 함이란 그 태어날 때마다 항상 큰 보리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회향을 청정하게 함이란 큰 보리심을 잊지 않고서 선근을 다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이며, 지혜의 청정이란 큰 보리심에 편히 머물러 그것을 근본으로 삼을 줄 아는 것이고, 방편의 청정이란 자신이 평등한 보리심에 머물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도 그 보리의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니라.”

그 때 해의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치를 제가 풀이한다면, 모든 선교한 방편이 바로 보살의 보리이고 청정한 반야바라밀다이며, 모든 것에 통달하는 것이 또한 다 보리이므로 어떠한 법도 보리 아닌 것이 없겠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일체 법의 평등한 성품을 요달하는 것이 곧 보리이기 때문에 보살이 그 보리에 대해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지말고, 설사 그 모든 법에 6진(塵)의 대상이 와서 장애를 일으키더라도 보살로서는 그 때 여실하게 깨달아야만 그것이 곧 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곧 매우 공교한 방편을 얻어 그 방편을 청정하게 하고 또 반야바라밀다를 얻어 그 반야바라밀다를 청정하게 할 수 있겠나이다.”

그 때 세존께서 해의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구나. 이제 너의 말과 같다. 보살이 그 매우 공교한 방편과 청정한 반야바라밀다를 갖춘다면 모든 법에 설사 6진의 대상이 와서 장애를 일으킬지라도 그 때 여실하게 깨달아 아는 것이 곧 보살의 보리이다. 그러므로 해의야, 보살로서는 마땅히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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