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12권
세존께서 이 대승을 섭수(攝受)하는 모든 법을 선설하실 때에, 그 모임에 있던 4만 4천의 중생과 1천의 하늘 사람들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심하고 2만 8천의 보살들은 생사 없는 법의 지혜[無生法忍]를 얻었다. 그리고 이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는 한편, 큰 광명이 시방을 널리 비추는데, 1천의 하늘 사람들이 허공 가운데에서 서로 음성을 높이면서 뛸 듯이 기뻐하며 돌고, 또 수승미묘한 모든 하늘의 꽃을 뿌리고 갖가지 음악을 울려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묘한 게송을 읊어 찬탄하였다.
이러한 최상의 큰 법장(法藏)을
오늘 여래께서 친히 보여 주시니
오랫동안 대비심에 편히 머물러
중생들 위해 밝은 광명을 비추시었네.
그들은 이 게송을 읊고 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이 큰 보배의 법장을 그 누가 아주 조금이라도 받아 간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빨리 모든 지옥의 공포를 벗어나 차례로 더 없는 법바퀴를 굴리게 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마치 어떤 사람이 저 성중 부근의 촌락에 가서 땅굴 속에 무진장의 값진 보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이익을 차지할 생각으로, 보는 즉시 성중에 달려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빨리 오라. 그대들이 만약 보물을 구하려한다면, 내가 그 보물 있는 장소를 알고 있으므로 그대들에게 무진장의 땅 굴을 보여 주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성중의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곧 그 사람과 함께 땅굴로 달려가서 힘껏 그 보물을 거침없이 캐내어서 제나름의 지량(智量)대로 갖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 땅굴로서는 아무리 캐내어도 다함이 없으므로 어떤 사람에겐 캐내는 것을 허락하고 어떤 사람에겐 허락하지 않는다던가, 또 어떤 사람에겐 가져가게 하고 어떤 사람에겐 못 가져가게 한다는 그러한 분별을 하지 않으니, 왜냐 하면 이 땅굴로서는 아무런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큰 보배의 법장도 그와 같이 백천 겁(劫)에 걸쳐 더 없는 광대한 보배의 법장을 쌓았으며, 이미 쌓고 모았으므로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 정각(正覺)의 과위를 성취하시고 그 뒤엔 바라나(波羅奈)의 녹야원(鹿野苑)에서 큰 법바퀴를 굴리셨습니다. 오늘날 세존께서 또 이 모임을 위해 바른 법을 굴리시고 더 없는 큰 보배의 법장을 보여 주시되 세존께서 그 취착(取著) 없는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대비의 행과 이익 되는 일을 일으키시어 미묘한 범음(梵音)으로 널리 하늘·사람과 아수라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너희들은 여기에 와서 더 없는 광대한 보배의 법장을 받아 간직하라’ 하시니, 이 법이야말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괴로운 경지를 다 벗어나 일체의 묘락을 얻게 하는 것임을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신심을 갖추지 못해 이 바른 법을 믿지 않거나 바로 수순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신심을 내지 못하는 것이며, 또 신심을 갖춘 사람이 이 바른 법을 잘 분별하여 신심을 내거나 바로 수순한다면 그는 분별할 줄을 알기 때문에 청정한 신심을 깊이 내는 것이겠나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과연 여래의 큰 보배 법장을 힘껏 감임(堪任)하여 그 법보를 캐내되 스스로가 보물을 캐내고서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해탈의 법에 깊은 신심을 내어 혹은 성문의 법성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혹은 연각의 법성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기를 좋아하게 하더라도, 그러나 여래의 그 위없는 최상의 큰 보배 법장이야 말로 언제나 다함이 없고 분별하는 것도 없겠나이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이제 이 더 없는 큰 보배의 법장을 이처럼 광대히 열어 보여 주심에 따라 그 어떤 중생이 이 법보의 전체 중에 조금이라도 보물을 캐내지 못한다면, 그는 보물을 얻지 못함으로써 기나긴 세월에 오래도록 세 가지 나쁜 갈래를 다니게 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이 더 없는 큰 보배의 법장을 조금이나마, 내지 네 글귀의 게송 하나라도 받아 간직한다면, 그는 일곱 가지 성재(聖財)를 구족하여 빈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 광대한 바른 법에서 조금의 한 품(品)을 받들어 간직하거나 다시 둘·셋·넷·다섯으로부터 열·스물 내지 일흔 가지의 품을 필경 받들어 간직한다면 그 사람의 얻는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법문은 보리심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이 절박한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청정한 마음을 내어 스스로가 받아 지니고 읽어 외워서 다른 사람에게 선설한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음으로써 도량에 앉아 모든 마군을 항복 받고 이 대승 가운데에서 큰 신통을 얻을 사람인 줄 알겠나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여러 천자들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구나. 너희들 여러 천자는 이제 잘 말하였도다. 알아 두라. 그 누구라도 이 바른 법을 과연 잘 받아 지니고 읽어 외워서 훌륭한 신심으로 이치 그대로를 수행한다면, 그 사람은 일체 언어의 변재와 수승 미묘한 공덕을 세우고 온갖 지혜의 정수리에 도달gkf 것이며, 또 그 사람은 널리 일체 세간을 위해서 지혜의 광명을 두루 비추고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서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위를 성취하리니, 왜냐 하면 이 대승을 승어(乘御)하기 때문이니라.”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이 가장 수승하고 광대한
모든 불승(佛乘)을 세움은
마치 저 허공의 광명이
모든 세간을 초월함과 같음이라.
그러므로 3유(有)를 벗어나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서
아무런 집착된 마음 없이
모든 번뇌를 다 여의고
그 오랜 억천 겁에 걸쳐
광대하고도 청정한 설법으로
중생들에 보시를 가르쳐
속마음을 깊고 견고하게 하는가 하면
계율로 말미암아 죄를 없애어
몸과 마음을 다 청정하게 하며
또 모든 공포심을 벗어나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서
그 평등한 마음과 뜻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받아들이고
이른바 저열한 승(乘)을
그 어떠한 승보다도 뛰어난
이 대승의 법에 회향하여
중생들에게 모두 환희심 내게 하고
큰 법당(法幢)을 높이 세워
말[馬] 타듯 신통으로 다니는가 하면
정진을 계속해 선정으로 상좌(床座)삼고
인욕의 힘으로 큰 지혜 얻어
관정(灌頂)의 지위에 이르며
또 외도와 마군을 꺾어 굴복시키고는
청정한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
이 대승의 법에 회향하여
인자한 마음을 갑주(甲胄)로 삼으므로
어떠한 원적(怨賊)도 이를 파괴 못하고
견고하게 대비심을 행함에 따라
그 깊고 깊은 법의 이치에 나아가며
또 4선정(禪定)과 4신족(神足)과
4무량(無量)의 행을 닦아서
보리심을 잘 조어(調御)하여
모든 바른 길을 버리지 않고
시방의 끝없고 한량없는
그 일체의 중생계로 하여금
모두 이 대승의 법을
타고 이끌어 정진하게 하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이
최상의 이 불승(佛乘) 중에서
이러한 신통의 힘을 갖추며
또 4념처(念處)로부터
저 4정근(正勤)을 수행하고
4신족과 5근(根)·5력(力)도
다 그와 같이 수행하며
부처님께서 찬설(讚說)하신 그대로
7각지(覺支)의 보배를 구족하며
또 8정도(正道)를 행하여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고
고요히 모든 번뇌를 그치고
법의 광명을 원만히 갖추어
일체의 어두운 경계를 깨뜨리므로
저 3유(有)를 멀리 벗어나네.
다시 신통의 힘으로
제석·범왕을 불러 이르되 '너희들 각각 이 견줄 데 없는
대승을 잘 승어(乘御)할지니
이른바 보시·지계와
인욕·정진·선정·지혜의
방편의 행과 진실한 원(願)인
이 모든 바라밀이 그것이고
또 백천의 마군을 모두 꺾는 한편
계율을 헐거나 죄를 짓는
그 중생들을 잘 길러냄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본래 수승한 보살은
항상 많은 공덕을 모으므로
그의 마음을 일으킴에 따라
보리심을 더욱 광대하게 하고
이 대승을 잘 타는 사람은
세간의 그 모든 법과
갖가지 이치와 행과
내지 출세간의 진실한 선법을
모두 관찰하여 알기 마련이라.
그러므로 유학(有學)·무학이나
연각·성인 그 누구라도
이 불승(佛乘)에 머무는 자라면
다 저 문(門)에 들어가지만
갖가지 번뇌와 갖가지 심행(心行)에
고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언제나 유위(有爲)의 경계에 돌아다니므로
이 불승에 머무는 보살로서는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쉬고
필경의 승에 나아가게 하며
또 저 게으른 사람들은
열약(劣弱)하여 세력이 없어
그 마음을 다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생의 온갖 고뇌를 다 겪고
대승을 듣고도 공포심을 일으켜
자신의 안락만을 구할 뿐
다른 이를 이롭게 할 줄 모르므로
큰 지혜의 힘을 지닌 보살로서는
정진의 힘을 원만히 갖추어
중생을 항상 이익 되게 하는 한편
대비의 방편을 행하여
안으로 그 심성(心性)을 청정하게 해야 하네.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누구나 다 환희심 내어
온 세간의 갖가지 끝없는 행과
상·중·하의 차별된 근성(根性)과
그 밖의 모든 뜻을 두루 통달하며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큰 지혜를 갖춘 보살은
모든 중생의 심행(心行)을
한 찰나에 두루 알게 되고
몸은 미묘한 상호를 얻어
온 몸매를 장엄하게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음성을 연출함에 따라
듣는 이마다 모두 기뻐하게 하고
마음의 뜻이 청정하므로
선정과 신통을 남김 없이 다 구족하며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곧 광대한 공덕을 얻고
또 이 최상의 불승이
3계에 두루 들리므로
내지 일체의 부처님과
그 성스러운 불안(佛眼)을 끊지 않고
다시 최상의 법안(法眼)을 더욱 빛내어
3계를 다 초월하여
아라한(阿羅漢)의 지위에 나아가
이 청정 미묘한 승을 말미암아
더러운 국토에 떨어지지 않으며
이 승을 타는 보살은
한 찰나에 모든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시방세계에 두루 다니더라도
지치지 않고 더하거나 덜함도 없이
이 견줄 데 없는 승을 관찰하여
이러한 신통의 변화를 갖게 되며
이 불승을 타는 대사는
모든 세간에 두루 다니므로
가장 뛰어나 견줄 데 없이
세간의 한 용맹스러운 보살로서
더 없는 큰 위신(威神)을 갖게 되네.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마군의 무리를 겁내게 하는 한편
물질의 힘과 위신의 방편을 얻어
광대한 재부(財富)를 이룩하고
혹은 제석·범왕과
전륜성왕·호세천왕과
내지 천상·인간에 걸쳐
이 3계의 안락을 얻으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온갖 묘락을 다 원만히 갖추되
보살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아
높고 뛰어나거나 저열하거나 하천하지 않고
모든 사랑하는 것을 다 보시하되
보시하고서 갚음을 구하지 않는 한편
다만 그 환희심과 자비심으로
두목(頭目)까지도 아낌없이 보시하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되
보살이 청정한 계율을 지니거나
혹은 범행(梵行)을 갖추어서
그 계율과 범행의 청정한 광명을
해와 달보다 더 밝게 비추더라도
그로 인해 어떤 색상(色相)과 재물을
조금도 희구하지 않으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구호하고 제도하되
보살이 어떠한 나쁜 말을 듣더라도
성내거나 미워하지 않음은 물론
설사 그 몸을 부수는 경우라도
모든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 몸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
법왕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보살은 청정한 인(忍)을 얻어
그 끝없는 백천 겁 동안
갖은 나쁜 갈래에 되돌아들고
생사의 경계에 한없이 헤매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크나큰 정진의 힘을 발기하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보살이 그 정진의 힘을 성취하여
고요하고도 뛰어난 묘락(妙樂)으로
선정 닦는 공덕의 법을 얻어
인자한 눈으로 중생을 살펴보되
조금도 선정의 즐거움에 집착 없이
다만 부처님 뵙기를 희구하고
다시 보살은 인연에 따라 자라나는
모든 법의 그 공함을 알므로
나와 법과 중생 그 어느 것에도
다 아무런 얻는 바 없이
모든 견(見)이 제대로 청정하여
그 수승한 지혜로 마음을 조복하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4성제(聖諦)·4무량(無量)과
4선정(禪定)·5신통(神通)과
4무애(無礙)·4섭법(攝法) 등의
그 미묘 청정한 지혜를 이룩하되
그 중에도 법의 보시가 최상이므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문이
다 불승(佛乘)으로부터 나오고
10력(力) 등의 끝없는 법을 갖춘
사람 중의 사자이신 부처님처럼
설법으로 모든 것을 부르짖어도
그 눈썹 사이나 입 속에서나
정수리 위의 방광(放光)을
그 누구도 볼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보살은 그 얻기 어려운
모든 부처님께서 가진 세 종류와
그 최승의 큰 신통을 얻으며
온 세간을 자유롭게 조복하고
모든 마음과 뜻을 밝게 비추어
부처님의 설법하신 그대로
헛되지 않게 중생을 이롭게 하며
또 이러한 최상의 승을 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맞은 이치를
보살이 다 빨리 얻어 간직하되
더럽힘 없고 아무런 허물도 없이
긴나라(緊那羅)의 그 범음(梵音)으로
찬미하여 다 기뻐하게 하고
다시 온 세간 중생들의
그 모든 음성을 두루 포섭하여
부처님의 미묘한 음성을 듣고는
일체 중생이 모두 환희심 내게 하고
보살은 오래지 않아
곧 이와 같이 부처님의 음성을 얻어
허공 같은 모든 불찰에 걸쳐
일체의 음성을 다 나타내 보이므로
그 법의 이치에 걸맞은 말씀을
두루 모두 들을 수 있어
중생들이 듣고 다 즐겨하여
온갖 번뇌를 깨끗이 다 제거하네.
가령 어떤 신통의 힘으로써
저 허공의 끝까지 이를 수 있고
시방의 온 바닷물 속의
그 한량을 다 알 수 있고
그지없는 중생의 모든 행을
한 찰나에 다 알 수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이러한 최상의 승은
그 공덕을 누구도 다 말할 수 없으리라.
그 때 세존께서 다시 해의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해의야, 그러므로 알아 두라. 보살이 만약 이같이 광대하고도 진정한 법을 은밀히 호지(護持)하여 그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깨끗하게 하고, 다른 중생과 기타 유정들이 가지고 있는 그 일체 상·중·하의 근기를 두루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법문 구절의 이치를 받아 간직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그 법문 구절이란 인(印)의 법문 구절과 금강(金剛)의 법문 구절이 그것이다. 이러한 법문 구절을 받아 간직하고서 이치 그대로를 깨닫되 걸맞은 지혜와 최승의 방편으로 진리에 따라 관찰해야 하리라.
해의야, 다시 말하자면 그 법문 구절이란 이른바 모든 시설(施設)의 법문으로써 일체의 법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 이치를 분별함이니, 아자(阿字)의 법문은 일체 법의 생멸 없는 이치를 표시한 법문이고, 파자(波字)의 법문은 일체 법의 수승한 진리를 표시한 법문이다. 나자(那字)의 법문은 모든 명색(名色)의 이치를 분명히 아는 그 일체의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날자(捺字)의 법문은 모든 것을 조복하는 적정(寂靜)의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다.
사자(娑字)의 법문은 모든 집착을 벗어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다자(多字)의 법문은 진여(眞如)의 이치에 따라 머무는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가자(迦字)의 법문은 모든 업보(業報)를 요달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다. 또 사자(娑字)의 법문은 차별 없이 평등한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마자(摩字)의 법문은 일체 법의 그 대비한 이치를 표시한 법문이다.
아자(■字)의 법문은 매우 깊고 깊어 꿰뚫기 어려운 그 근원 되는 이치의 일체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야자(惹字)의 법문은 늙고 죽음을 초월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태자(駄字)의 법문은 법계를 분별하지 않는 이치의 그 일체법을 표시한 법문이다. 설자(設字)의 법문은 원만히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거자(佉字)의 법문은 허공처럼 밝고 빛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차자(叉字)의 법문은 일체 법이 두루 다 생멸 없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예자(倪字)와 야자(野字)의 법문은 일체 법의 지혜가 다 집착 없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고, 타자(他字)의 법문은 일체 법이 그럴 수 있는 이치와 그럴 수 없는 이치를 잘 풀이하는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새자(塞字)와 가자(迦字)의 법문은 모든 온(蘊)의 이치를 분명히 아는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차자(姹字)의 법문은 일체 법이 필경 끝없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또 몸이 적정(寂靜)한 법문이란 탐욕에 물들지 않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마음이 적정한 법문이란 모든 성냄과 어리석음을 조복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다. 지식(止息)하는 법문이란 집착 없음에 돌아가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심고(深固)한 법문이란 3세를 벗어나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다.
실성(實性)에 머무는 법문이란 법계에 머무는 이치의 그 일체 법을 표시한 법문이고, 취함이 없는[無取] 법문이란 일체 법이 그 해탈한 모습의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집착 없는[無執著] 법문이란 일체법이 논쟁(論諍)을 벗어난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고, 잡염없는[無雜染] 법문이란 일체 법이 청정한 모습의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법 자성(自性)의 법문이란 일체 법이 본래 밝고도 깨끗한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고, 묘광명(妙光明)의 법문이란 일체 법이 빛나고도 밝은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관상(觀想)의 법문이란 일체 법이 이산(離散)하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고, 섭장없는[無攝藏] 법문이란 일체 법이 화합하지 않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보리(菩提)의 법문이란 일체 법이 평등하게 한 가지 맛의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고, 열반의 법문이란 일체 법이 모든 번뇌를 여의는 이치인 것임을 표시한 법문이다. 해의여, 이러한 법문의 구절을 받들어 간직한다면 그는 곧 자신의 마음이 결백하게 됨과 동시에 다른 중생과 모든 유정에 대한 그 상·중·하의 근기를 모두 분명히 알게 되리라.
다시 해의여, 어떤 것이 인(印)의 구절이냐 하면, 이른바 일체 법이 해탈의 인[解脫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본래 둘 없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그지없는 인[無邊印]의 인정을 받음은 단(斷)과 상(常)이 다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탐욕을 다 여의는 인[盡離貪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다함도 없고 치우침도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는 인[無高無下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의 평등한 성품이 실제로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허공 같은 인[如虛空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눈 알음알이의 경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허공에 머무는 인[住虛空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계가 바로 허공계이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분별 없는 인[無分別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바로 법계에 섭입(涉入)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법계의 인[法界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의 자체가 분별하는 상(相)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진여의 인[眞如印]의 인정을 받음은 전후제(前後際)가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실제의 인[實際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의 본래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공한 인[空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함이 동등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상 없는 인[無相印]의 인정을 받음은 모든 인연에 대한 차별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원 없는 인[無願印]의 인정을 받음은 모든 구하는 것을 여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무상이라는 인[無常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 자체의 성품이 아무런 성품도 없고 모습도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괴로움이라는 인[苦印]의 인정을 받음은 일체는 5온(蘊)이 쌓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무아라는 인[無我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 자체의 성품이 나[我]가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적정이라는 인[寂靜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필경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진실한 진리라는 인[誠諦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수승한 이치에 널리 섭입(攝入)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변동이 없다는 인[無動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의 종자가 머묾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헐지 않는 인[不壞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필경 결정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진리 그대로의 인[如如印]의 인정을 받음은 전후제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3세 평등한 인[三世平等印]의 인정을 받음은 일체가 다 동등한 맛이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나는 것 없는 인[無生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 자체의 성품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사라지는 것 없는 인[無滅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 자체의 성품이 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서로 계교하지 않는 인[不相待印]의 인정을 받음은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희론 없는 인[無戱論印]의 인정을 받음은 일체를 모아둘 것이 없는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상없음을 밝게 요달하는 인[明了無相印]의 인정을 받음은 모든 빛깔의 모습을 표시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더럽힘 없는 인[無染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아무 데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성판 없는 인[無成辨印]의 인정을 받음은 그 법이 대치(對治)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업보 아닌 인[非業報印]의 인정을 받음은 일체가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법이 무위인 인[無爲印]의 인정을 받음은 생멸과 모든 분위(分位)를 다 여의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평등한 성품의 인[平等性印]의 인정을 받음은 모든 법이 허공처럼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해의야, 이것이 이른바 인(印)의 구절이니, 이 모든 인의 구절은 바로 과거·미래·현재 부처님들 보리의 인이므로 8만 4천의 법온(法蘊)이 모두 그 중에서 나오게 되며, 또 이러한 인의 구절은 모든 불·보살에 대한 최상의 지혜 인을 널리 섭취하므로 빨리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증득하노라.
해의야, 선근을 심지 않은 중생들로서는 이러한 인의 구절을 들을 수 없으며, 또 이 법문은 모든 마업(魔業)을 잘 항복 받는다. 해의야, 이는 곧 다함이 없는 다라니의 보배 상자[寶篋]여서 저 일체의 법을 다 저장할 수 있나니, 이러한 법이 모두 인의 구절로부터 나오느니라. 그리고 또 8만 4천의 삼매 문과 8만 4천의 중생들 심행(心行)과 1천의 바라밀 문이 모두 이 인의 구절로부터 나오는가 하면, 이 인의 구절이 또한 저 모든 법문에 따라 들어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