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8권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8권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내가 기억컨대 과거세에 출현하신 부처님 
그의 명호 용맹정진 세존이신데 
보기 좋게 미묘한 그 겁의 명칭은 화적(花積)이고 
가장 훌륭한 그 세계의 명칭은 선견(善見)이라.



거기에 또 8만4천의 연꽃이 피어나 
부처님 언제나 그 겁에 출현하시므로 
세계는 마치 도솔천과 같아서 
필요한 음식을 다 뜻대로 얻으며 

여인이 없어 모태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중생이 다 장엄한 모습으로 화생하고 
다시는 다른 승(乘)을 닦지 않아 
보살이 다 대승의 법에 머물렀네.



그러므로 시방에서 모여온 보살들 
저 훌륭하고도 보기 좋은 세계에서 
저마다 희상삼매[喜相妙定門]를 얻어 
전에 없던 쾌락을 받으며 

26억의 출가 보살들이 
부처님을 장엄하고 
그 밖의 무수한 하늘·사람들이 
다 최상의 부처님 법에 편히 머무는데 

그 부처님 지혜와 공덕의 바다로 
자주자주 정진의 법문을 선설하시자 
거기에 견고개(堅固鎧)라는 보살이 있어 
부처님께 이러한 이치를 질문하였다.


'보살이 정진의 힘에 편히 머물려면 
어떻게 정진을 닦아야 하리까? 
원컨대 이 이치를 선설하옵소서.


저희들 이 정진의 힘에 머물러 수행하고자 합니다.'



큰 법왕 그 질문하는 뜻을 아시고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네 가지 덕을 말씀하시되 '그 발기(發起)와 근작(勤作)이 서로 걸맞고 
항상 사찰(伺察)과 수행에 머물러야 하리니 

발기란 이른 바 보리심을 발기함이고 
근작이란 뭇 선한 법을 성취함이고 
사찰이란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이고 
수행이란 어떠한 법에서도 다 인욕에 머묾이며 
또 발기란 경전의 법을 공경히 들음이요 
근작이란 들은 법을 선설하여 밝힘이요 
사찰이란 그 뜻을 견고하게 함이요 
수행이란 올바른 소견을 일으킴이며 

또 발기란 간탐(慳貪)하는 더러움을 씻음이요 
근작이란 모든 가진 것을 다 버림이요 
사찰이란 보리심을 갖추어 회향함이요 
수행이란 하는 일에 과보를 구하지 않음이며 

또 발기란 크게 희사하는 명성을 떨침이요 
근작이란 구걸하는 자에게 인자하게 함이요 
사찰이란 모든 수용에 있어 무상을 관함이요 
수행이란 보시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음이며 

또 발기란 모든 수용을 법에 의지함이요 
근작이란 깨끗한 생명을 스스로 유지함이요 
사찰이란 진실한 보시를 행함이요 
수행이란 보시할 때 아무런 생각이 없음이며 

또 발기란 파계한 더러움을 씻음이요 
근작이란 금지한 계에 결함이 없음이요 
사찰이란 파계한 사람을 거두어 옹호함이요 
수행이란 계율을 구족하여 다른 생각이 없음이요 

또 발기란 몸의 업이 청정함이요 
근작이란 입의 업이 청정함이요 
사찰이란 마음의 업이 청정함이요 
수행이란 모든 법이 청정함이며 
또 발기란 성내는 마음을 용납하지 않음이요 
근작이란 인욕의 힘을 발휘함이요 
사찰이란 자신과 다른 이를 다 옹호함이요 
수행이란 인욕을 갖추어도 다른 생각이 없으며 

또 발기란 성내는 자를 항상 청정케 함이요 
근작이란 그 성내는 자를 버리지 않음이요 
사찰이란 마음속이 언제나 청정함이고 
수행이란 자타가 다 소득을 벗어남이며 

또 발기란 그 게으름을 제거함이고 
근작이란 정진하는 힘을 선택함이고 
사찰이란 게으른 중생을 포섭함이고 
수행이란 어떠한 법에서도 다 인욕에 머묾이며 

또 발기란 선한 법을 쌓아 모음이고 
근작이란 선한 법을 다 성취함이고 
사찰이란 다른 승(乘)을 좋아하지 않음이고 
수행이란 모든 업보를 파괴하지 않음이며 

또 발기란 정념(正念)을 분명하게 앎이고 
근작이란 법을 깨달아 행함이며 
사찰이란 바른 지혜를 잘 옹호함이고 
수행이란 견고하게 머묾이며 

또 발기란 이치이고 근작이란 가르침이며 
사찰이란 법문이고 
수행이란 벗어나는 길이니 
이것이 정진을 일으키는 선방편이다.


또 발기란 문자를 다 거두어 가짐이고 
근작이란 그 이치를 잘 선설함이고 
사찰이란 음성과 문자에 집착하지 않음이고 
수행이란 말할 수 없는 법을 깨달음이며 

또 발기란 착한 벗에 친근함이고 
근작이란 나쁜 벗을 멀리 여읨이고 
사찰이란 착하거나 나쁜 벗을 평등히 관찰함이고 
수행이란 모든 법을 기억해 지님이며 

또 발기란 출가할 생각을 일으킴이고 
근작이란 온갖 애착을 다 버림이고 
사찰이란 선한 법을 회구함이고 
수행이란 어떤 법에도 장애가 없음이며 

또 발기란 벌판에 거처하기를 좋아함이고 
근작이란 시끄러움을 멀리 여읨이고 
사찰이란 고요한 곳에 있기를 좋아함이고 
수행이란 적정행(寂靜行)을 닦음이며 

또 발기란 욕심을 적게 함이고 
근작이란 자기 분수를 알아 기뻐함이고 
사찰이란 미묘한 즐거움을 얻음이고 
수행이란 응함에 따라 재량할 것을 앎이며 

또 발기란 계율을 증상하는 배움을 닦음이고 
근작이란 그 배움을 닦음이 잡되지 않음이고 
사찰이란 마음을 증상하는 배움을 닦음이고 
수행이란 지혜를 증상하는 배움을 닦음이며 
또 발기란 보시·지계를 행함이고 
근작이란 인욕·정진을 닦음이고 
사찰이란 선정·지혜에 들어감이고 
수행이란 지혜의 방편을 모두 일으킴이며 

또 발기란 법시와 재시로써 거둠이고 
근작이란 사랑스러운 말로써 거둠이고 
사찰이란 이익되는 행동으로써 거둠이고 
수행이란 진실한 동사(同事)로써 거둠이며 

또 발기란 대자심을 원만케 함이고 
근작이란 대비심을 구족케 함이고 
사찰이란 대희심으로 법을 구함이고 
수행이란 대사(大捨)의 지혜를 설함이며 

또 발기란 모든 불찰을 청정케 함이고 
근작이란 상호(相好)를 원만케 함이고 
사찰이란 바른 법을 옹호해 지님이고 
수행이란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킴이며 

또 발기란 온(蘊)의 마장에 집착하지 않음이고 
근작이란 번뇌의 마장을 벗어남이고 
사찰이란 죽음의 마장을 거둬 굴복시킴이고 
수행이란 자재천의 마장을 꺾어 굴복시킴이며 

또 발기란 괴로움의 과보를 앎이고 
근작이란 괴로움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음이고 
사찰이란 그 도를 닦음이고 
수행이란 멸제(滅諦)의 지혜에 머묾이며 
또 발기란 신념처(身念處)를 관함이고 
근작이란 수념처(受念處)를 관함이고 
사찰이란 심념처(心念處)를 관함이고 
수행이란 법념처(法念處)를 관함이고 

또 발기란 신근(信根)의 힘이고 
근작이란 정진근(精進根)의 힘이고 
사찰이란 염정근(念定根)의 힘이고 
수행이란 혜근(慧根)의 힘이며 

또 발기란 불선한 법을 끊음이고 
근작이란 선한 법을 헐지 않음이고 
사찰이란 몸과 마음이 경쾌함이고 
수행이란 4신족(神足)의 지혜를 일으킴이며 

또 발기란 7각분(覺分)을 닦음이고 
근작이란 8정도(正道)를 행함이고 
사찰이란 지관(止觀) 법을 익혀 행함이고 
수행이란 진실한 해탈을 증득함이며 

또 발기란 모든 행을 발기함이고 
근작이란 그 결백한 행을 나타냄이고 
사찰이란 마음이 경쾌하고도 편안함이고 
수행이란 모든 상(相)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음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편안하므로 
그 견(見)과 인(因)을 다 벗어나 
그 중에 명색(名色)을 분명히 알 수 있으므로 
모든 부처님이 이 정진을 칭찬하심이며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견해를 없애면 
일체 취할 바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며 
현전의 5개(蓋)를 제거하고 
나쁜 조작과 온갖 의혹을 다 끊어버리고 

또 이 정진의 힘을 말미암아 
모든 번뇌의 병을 다 파괴하고 
그 장애를 제거해 번뇌를 없애고 
교만과 지나친 아만을 다 끊어버리고 

나아가선 일체의 상(相)을 제거하고 
일체의 희론(戱論)을 다 그치게 하고 
일체의 번뇌 원인을 끊어 없앨 수 있으므로 
지혜로운 자 이 정진을 칭찬함이라.



그러므로 이 정진의 공덕을 듣고 나서 
용감히 정진을 발기하여 함께 칭찬한 
그 때 그 모임의 십천(十千) 보살들이 
모두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음이네.



석가여래가 이 모임에서 
여러 보살들 위해 널리 선설하노니 
이 정진 듣고 솔선 수행할 때엔 
5천의 보살들이 청정한 인(忍)을 얻고 

그밖에 하늘·사람·아수라와 
긴나라(緊那羅) 등 모든 대중들 
이 때 모임에 백천이 있었으니 
다 보리심 내어 편히 머물리라.



나 옛날 견고개라는 이름으로 
보살의 지위 최상의 인(忍)을 얻어 
몸과 목숨 버려가면서 정진을 닦되 
그 오랜 때에 항상 게으름 없고 

8만4천 부처님께 친근하여 
내 몸을 받들어 섬기며 
한 겁 동안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도 
그 뒤 무수한 보살의 지위를 겪었노라.

그 때에 대비사유(大悲思惟)라는 대범천왕이 해의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이른바 불법이란 그 어떤 것을 포섭한 말입니까?”

해의보살은 대답하였다.

“대범이여, 불법이라 함은 일체의 법을 포섭한 말이니, 왜냐 하면 여래는 분별 없는 상(相)으로써 보리 그대로를 취증(取證)하기 때문이요, 분별 없는 상이란 바로 일체 법의 평등한 상이므로 여래는 이러한 상 가운데 보리 그대로를 취증하십니다.

대범이여, 만약 일체 법의 평등함을 안다면 그것이 곧 보리이므로 일체 법을 불법이라고 말함이니, 일체 법이 곧 불법이라면 일체 법의 자성(自性)이 또한 불법의 자성이라, 일체 법을 여의므로 불법도 여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일체 법이 공하므로 불법도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대범이여, 일체 법은 인연에 따라 생기므로 모든 법이 인연따라 생기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곧 보리이니, 여래께서 일체 법을 이와 같이 보는 것처럼 저 불법도 이와 같이 보아야 합니다.”

범천은 다시 물었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이 불법이 삼계를 벗어난 것이 아닙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삼계의 자성이 또한 이 불법이니, 왜냐 하면, 범천이여, 저 불법의 평등한 상(相)은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기 때문이오. 마치 허공이 높고 낮음이없는 것처럼 불법 또한 높고 낮음이 없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대범이여, 일체법 또한 그러하여 자성이 공한 가운데 평등하여 높고 낮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범이여,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불법을 알려면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방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다시 대범이여, 이른바 불법이 방분(方分)도 없고 처소도 없는가 하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푸르거나 누르지도 않고 붉거나 희지도 않으므로 빛깔을 드러냄이 없고, 어떤 형상도 없으므로 빛깔과 형상이 없으며, 형상이 빛깔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그것을 곧 상(相)없음이라 합니다.

대범이여, 다시 말하자면 상없는 이치란 곧 불법의 이치이고, 불법의 이치란 곧 문구(文句)에 떨어지지 않는 이치이고, 문구에 떨어지지 않는 이치란 곧 적정(寂靜)의 이치이고 적정의 이치란 곧 여의는 이치이고, 여의는 이치는 곧 공(空)의 이치이고, 공의 이치란 곧 집착이 없는 이치이고, 집착이 없는 이치란 곧 진실한 성품의 이치이고, 진실한 성품의 이치란 곧 진여(眞如)의 이치이고, 진여의 이치란 필경 나지 않는 이치이고, 나지 않는 이치란 곧 사라지지 않는 이치이고, 사라지지 않는 이치란 곧 머무는 처소가 없는 이치입니다.”

그 때 해의보살이 거듭 게송을 읊어 말하였다.

이른바 상없는 이치란 
곧 수승한 불법의 이치이고 
그 수승한 불법의 이치란 
곧 문구에 떨어지지 않는 이치이고 

문구에 떨어지지 않는 이치란 
곧 적정의 이치이고 
그 적정의 이치란 여의는 이치이고 
여의는 이치란 곧 공의 이치이고 
공의 이치란 집착 없는 이치이고 
집착 없는 이치란 진실한 성품의 이치이고 
진실한 성품의 이치란 진여의 이치이고 
진여의 이치란 곧 필경의 이치이고 
필경의 이치란 생멸 없는 이치이고 
생멸 없는 이치란 처소 없는 이치이다.



법의 이치에 이와 같이 머묾은 
바로 법계에 머무는 것이므로 
모든 법의 머묾이 다 그러하고 
모든 법의 머묾과 같이 
불법의 머묾이 또한 그러하고 
불법의 머묾과 같이 
생멸 없는 법도 그러하고 
집착 없는 법의 평등한 이치가 
본래 다 진리 그대로의 머묾이므로 
저 성문·연각의 법까지도 
다 평등에 따라 머물러야 하네.



이러한 머무는 법 가운데 
불법이 가장 수승하여 
방분(方分) 없고 처소도 없으므로 
언제나 불법에 편히 머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저 생멸에 의혹하지 말고 
불법에 수순하여 관할지니 
저 형상은 어떤 빛깔을 드러내지 않고 
조그마한 법도 얻을 것이 없고 
아무런 형체도 모습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불법의 광명이네.



모든 법의 자성(自性)과 같이 
불법이 또한 그러하므로 
이른바 이 평등이란 
차별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이니 

이 불법을 구하는 것처럼 
모든 법을 그렇게 구하여 
어떠한 법에도 얻을 것이 없다면 
그것이 곧 분별 없는 법이다.



부처님과 모든 불법(佛法) 
일체의 법이 다 그러하므로 
큰 선인[仙]께서 저 도량에 처하여 
평등하고 올바른 법을 얻으며 

부처님의 그 모든 법을 
도량에서 관찰하므로 
그의 설하는 부처님 법은 
언제나 평등하여 견줄 데 없네.



평등한 법이란 높고 낮음 없어 
마치 허공처럼 청정함이니 
부처님의 지혜 또한 그러하므로 
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모든 법은 인연으로 자라날 뿐 
그 자성(自性)이 없는가 하면 
본래 자성이 없음에 따라 
곧 조그마한 법도 날 것이 없다.



이러한 실제법[實際]을 안다면 
세간의 평등함 끝이 없이 
그 실제 중에 지혜를 일으켜 
일체의 법 바퀴를 굴리리니 

이른바 과거·미래·현재의 법이 
다 부처님 법에 포섭되므로 
이러한 3세에 걸쳐 
부처님 지혜는 집착이 없고 
그 집착 없는 지혜를 말미암아 
곧 모니께서 설법하심이라.



이른바 부처님의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공동하지 않은 
그 모든 공덕의 법과 
그 밖의 널리 포섭되는 
일체의 법이 다 부처님의 법이네.

다시 대비사유 대범천왕이 거듭 해의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러한 법 가운데 어떠한 소견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보살이 대답하였다.

“대범이여, 이 불법을 빛깔이나 수량으로 생각합니까?”

범천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이 말하였다.

“대범이여, 불법이 만약 빛깔이 아니라면 볼 수도 없고, 또 대치나 장애가 없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거늘 무슨 소견이 있다는 말입니까?.

대범이여, 불법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일체의 법도 다 그러하나니, 왜냐 하면 법이 본래 두 가지가 없고 두 가지가 없는 그것이 곧 일체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대범이여, 만약에 어떤 법이 소견이 있다면 그는 어떠한 상(相)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분별없는 것으로써만 분별없는 불법을 볼 수 있고, 분별없는 견으로써 불법을 보는 것처럼 일체의 법을 보는 것도 다 불법을 보는 그러한 견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범천은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여래도 일체의 법에 아무런 소견이 없다 하겠습니다.”

보살은 대답하였다.

“대범이여, 만약 여래가 불법에 대해 무슨 소견이 있다면 그 여래와 불법은 어떤 진실하고 또 결정된 성품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범천은 다시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불법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까?” “대범이여, 법이 진실한 성품과 결정된 성품이 없다면 그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를 다 말할 수 없으며, 또 법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면 그는 곧 아무런 소견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제 모임의 대중들에게 불법을 말씀하십니까?” “대범이여, 마치 저 허공을 말할 때에 허공이 어떤 진실하고 결정된 성품이 없는 것처럼, 불법도 그와 같아서 이 불법을 말할지라도 저 불법의 자체가 진실하고 결정된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라오.” “선남자여, 전에 없던 일이옵니다. 처음 발심하는 보살이라도 만약 이 법을 듣고 나서 놀라거나 겁내지 않는다면, 그 보살이야말로 이 불법의 견고한 갑옷[鎧]을 입었다 하겠습니다.”

대범이여, 어떤 중생일지라도 부처님의 가호하는 힘을 얻어 이미 보리심을 발기한 자라면, 이 깊고 깊은 불법을 듣고 놀라거나 겁내지 않을 것이며,또 취함이 있거나 집착이 있는 자는 놀라고 겁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놀라거나 겁내지 않으며, 의지하거나 집착하는 자는 놀라고 겁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놀라거나 겁내지 않으며, 나와 내것이라는 소견이 있는 자는 놀라고 겁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놀라거나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선남자여, 보살은 몇 가지의 힘을 지녀야 하며, 또 어떠한 힘을 갖추어야만 깊고 깊은 이러한 법에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범이여, 보살이 갖추어야 할 여덟 가지 힘이 있으니, 이 힘을 갖춘다면 이러한 깊고 깊은 불법 가운데에서도 놀라거나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여덟 가지란, 첫째 장애 없는 믿음의 힘이니 이는 모든 불법에 수승한 신해(信解)를 내기 때문이요, 둘째 존중하는 마음으로 선지식의 힘을 냄이니 이는 스승과 어른에게 정성껏 수순하기 때문이요. 셋째 많이 들어 지혜의 힘을 냄이니 이는 출세간의 법을 다 원만케 하기 때문이요, 넷째 복된 행으로 받들어 섬기는 힘을 냄이니 이는 한량없는 복된 행을 다 원만케 하기 때문이요. 다섯째 견고한 뜻으로 지혜로운 힘을 냄이니 이는 모든 마군을 파괴하기 때문이요, 여섯째 대자(大慈)로써 대비(大悲)의 힘을 냄이니 이는 무아(無我)의 법에 대한 의혹을 벗어나기 때문이요. 일곱째 안정된 마음으로 잘 사유하는 힘을 냄이니 이는 큰 보리심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여덟째 전일한 신심으로 인욕의 힘을 냄이니 이는 생사 없는 묘법의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대범이여, 이것이 이른바 보살의 여덟 가지 수승한 힘이니,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 힘을 갖춘다면 그는 곧 깊고 깊은 이 모든 불법에 놀라거나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세존께서 해의보살마하살을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해의여, 너는 보살의 여덟 가지 힘을 잘 설명하였다. 보살이 만약 이 힘을 갖춘다면 그는 이 깊고 깊은 모든 불법에 놀라거나 겁내지 않을 것이며, 또 불법 가운데 들은바 그대로를 수순하여 조금도 공포를 느끼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해의는 알아 두라. 모든 설법의 음성을 다 분별할 수 있지만, 보리의 그 수승한 이치는 말할 수 없나니, 왜냐 하면, 그 수승한 이치는 언어 로써 표현할 수 없고 문자(文字)를 쌓거나 모아서 지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하는 법으로도 굴릴 수 없거늘 하물며 문자로써 그 이치를 쌓아 지을 수 있겠느냐?
해의여, 네가 이제 본 바 그대로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다만 그 헤아릴 수 없는 일체 중생을 위해 대비를 굴리기 때문에, 곧 이러한 깊고 깊은 법에 정각(正覺)을 성취하였을 뿐, 문자가 없고 언어도 없고 문자의 기록도 없고 어떤 표현하는 법도 없나니, 말하자면 저 중생과 일체의 유정들을 위해 문자를 빌려서 법을 선설함이니라.

해의여, 마치 어떤 사람이 이 허공은 빛깔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대치나 장애가 아니므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허공에 갖가지 빛깔로써 코끼리·말·수레·천룡·야차·건달바 따위의 모든 형상을 그림으로 나타내려면 네 생각에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이 어렵겠느냐, 어렵지 않겠느냐?” “세존이시여, 그 사람의 하는 일이 매우 어렵겠나이다.” “해의여, 그 보다는 이 불·세존 되기가 더욱 어렵나니, 왜냐 하면 그 말할 수 없는 법 가운데 정각을 성취하고 나서 언어를 빌려 저 중생과 일체 유정들에게 법을 선설하고, 또 말할 수 없는 이치를 여실하게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세존 되기가 어렵고도 어려우니라.

다시 해의는 알아 두라. 어떤 사람이 이 깊고 깊은 불법에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거 부처님께서 이미 선근을 깊이 심어 수승한 행을 쌓았기 때문에 이 깊고 깊은 불법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이 깊고 깊은 경전과 일체 세간의 신해(信解)하기 어려운 법을 여실하게 알고 나서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널리 다른 사람에게까지 선설하다면, 그 사람 또한 여래의 일체 법장(法藏)을 충분히 받들고 일체 중생의 착한 법을 잘 지닌다 하리라.

다시 해의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부처님 눈[眼]의 광명을 얻어 그 한량없는 모든 불찰에 가득 쌓인 값진 보배로써 저 많은 여래께 받들어 공양하기 위해 널리 보시를 행한다면, 네 생각에는 그 보살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복의 쌓임이야말로 한량없고 셀 수 없어 내지 어떻게 비유할 수 없겠나이다.” “해의여, 내가 이제 너에게 말하겠으니 너는 알아 두라. 만약에 어떤 보살이 여래의 법을 잘 옹호하여 3보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모든 중생에게 대비를 버리지 않으며, 또 이러한 매우 깊은 경전과 여래의 큰 지혜 법을 분명히 알고서 받아 지니고 읽어 외움은 물론, 나아가서 그 이치대로 수행한다면 이 보살이 얻는 그 복의 쌓임이 저 보시의 인연으로 얻는 복보다 배로 많으리니, 왜냐 하면 모든 재물의 보시는 다만 세간 사람의 애락(愛樂)하는 것일 뿐 이 법의 보시야말로 일체의 세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해의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이 바른 법을 호지(護持) 한다면 그는 곧 네 가지 섭수(攝受)를 얻으리니, 이른바 네 가지란 부처님의 섭수를 얻는 것이 그 첫째이고, 하늘의 섭수를 얻는 것이 그 둘째이고, 복의 섭수를 얻는 것이 그 셋째이고, 지혜의 섭수를 얻는 것이 그 넷째이다.

그리고 보살이 부처님의 섭수를 얻는다면 그는 또 네 가지 가장 수승한 법을 얻나니, 첫째는 여래를 항상 우러러 뵙게 되고, 둘째는 일체 마군의 무리들이 침해할 기회를 노릴 수 없고, 셋째는 다함이 없는 다라니 문을 얻고, 넷째는 빨리 신통의 힘을 얻어 퇴전하지 않는 지위에 머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보살이 하늘의 섭수를 얻는다면 그는 또 네 가지 청정을 얻나니, 첫째는 하늘 무리들이 그의 신력(神力)으로 보살 대중을 청정케 하고, 둘째는 바른 법을 듣고서 전일한 마음을 갖게 하고, 셋째는 일체의 마군과 외도의 무리들을 제거하게 하고, 넷째는 하늘의 위신(威神)을 말미암아 일체를 청정하게 함으로 인하여 청정한 마음을 얻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보살이 복의 섭수를 얻는다면 그는 또 네 가지 장엄한 모습을 얻나니, 첫째는 원만한 상호를 얻어 몸이 장엄하고, 둘째는 일체 중생들의 언어와 음성보다 뛰어나 말이 장엄하며, 셋째는 모든 시작(施作)을 나타내어 국토가 장엄하고, 넷째는 범왕·제석·호세천왕 등의 위치에 태어나 그 출생하는 곳이 장엄함이다. 그리고 보살이 지혜의 섭수를 얻는다면 그는 또 네 가지 조명(照明)하는 법을 얻나니, 첫째는 일체 중생의 근성(根性)을 조명하여 알맞게 설법하고, 둘째는 일체 번뇌의 병을 조명하여 그 병에 따라 법의 약[法藥]을 주어 치료하고,셋째는 그 신통의 힘으로 모든 불찰을 두루 조명하고, 넷째는 법계를 조명하여 일체의 법을 사실 그대로 분명히 요달함이 그것이다.

해의여, 이와 같이 보살이 부처님의 섭수를 받는 자는 네 가지 가장 수승한 법을 얻고, 하늘의 섭수를 받는 자는 네 가지 청정을 얻고, 복의 섭수를 받는 자는 네 가지 장엄을 얻고, 지혜의 섭수를 받는 자는 네 가지 조명을 얻나니,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만약 이러한 섭수를 받아 공덕 찬탄하는 법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수행하여 바른 법을 호지해야 하며, 부지런히 수행하여 바른 법을 호지하는 자라야만 곧 한량없는 그 가장 수승한 공덕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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