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여래흥현경(佛說如來興顯經) 제4권

불설여래흥현경(佛說如來興顯經) 제4권

“불자여, 무엇을 모든 보살이 여래(如來)ㆍ지진(至眞)께서 대멸도(大滅度)를 나타내시는 데 들어간다고 하는가?
이 보살이 멸도에 들어가고자 하여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하여 자연인 줄을 명료히 알면 부처님이 된다. 비유하면 본래 없었던 것이 다시 멸도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여래의 멸도도 이와 같다. 또 본제(本際)와 같아 법계도 이와 같으니, 비유하면 끝없는 허공계와 같다. 또 본래 청정한 것과 같고 진본제(眞本際)와 같아 욕제(欲際)를 여의니, 무상제(無相際)와 같아 자연의 경계도 없다. 비유하면 모든 법이 청정하여 진본제와 같이 멸도를 취하는 것과 같으니, 여래의 멸도 이와 같다. 왜냐하면 응(應)하거나 응하지 않거나, 이 모든 존재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생김도 없으며 일어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법이 생김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면, 그 법을 헤아리되 가는 일도 없고 가지 않는 일도 없으며 여의는 일도 없고 여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여래란, 모든 보살들을 부추겨서 타이르고 찬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고요한 멸도를 취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께서는 목전(目前)에서 계시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과거 또한 그러하며 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일시(一時)에 모두 다달으시어 속히 지혜를 이루게 하시니, 이것이 모름지기 도를 얻는 것이다.

모든 여래를 뵈면 모두 색상(色像)과 음향(音響)을 펴되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지만 또한 두 가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상(思想)을 버리고 보살행에 응하므로 온갖 의지할 것을 버리니, 여래께서는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여래의 멸도이다. 중생이 온갖 생각들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출현하셨지만 또한 멸도하시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도 머무시는 곳은 법계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몸을 나타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멸도가 있지만 작용이 말미암는 법계는 끝이 없다. 마치 해의 궁전이 물 속에서 나오면 곧 모든 천하를 두루 비추되 해의 궁전은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옮겨가지 않고도 모든 것을 비추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모든 물그릇에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으나, 그릇에 물이 없다면 다시 해의 궁전의 빛을 볼 수 없다.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 그림자가 그릇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해의 허물이라고 하겠느냐?” “아닙니다. 물이 없는 그릇의 허물이지 해의 허물이 아닙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렇다. 여래의 지혜의 해는 본래 다니던 곳으로 가셔서 모든 법계에 이르시어 중생들을 위하여 항상 청정함을 펴신다. 그리하여 자연사(自然事)를 일으켜서 도념(道念)에 이르게 하시니, 그 마음이 밝게 드러나서 항상 여래의 몸을 뵐 수 있다. 그러나 물그릇이 파괴된 사람은 마음에 더러운 생각이 있으므로 위광(威光)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불자는 응당 교화하고 제도하여야 한다. 중생이 목마르게 갈구하는 까닭은 여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이니, 그들을 위하여 멸도를 나타내셨을 뿐이지만 실은 생기신 적도 없고 생기지 않으신 적도 없으며 또한 멸도하시지도 않는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가령 해가 
그 경계와 변두리까지 두루 비추면 
나타난 그림자 두려워하기 어려우나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듯이 
인중존께서도 이와 같으시니 
세상에 두루 나타나시나 
중생이 독실한 믿음 여의었기에 
무위(無爲)로써 가르쳐 보이셨네.



모든 불국토 두루 보면 
평등하게 말미암으니 허깨비[幻]와 같으나 
뭇 인연에 익숙하여 
나[吾我]를 헤아리네.



가령 짓는 행이 있다 하여도 
구경(究竟)에는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것이나 
혹 대성(大聖)을 볼 수 없기에 
보는 것이 같지 않네.



최승께 선정의 뜻[定意] 있으시니 
이름하여 해무상(解無常)이라 하며, 
부처님께서 이로써 업(業) 지으시고 
그러신 후에 평등하신 태어남[等生]을 나타내시네.



몸의 모습 분별하려면 
양(量)이 없고 한(限)이 없어 
잠깐 사이에 시방에 두루하시니 
부처님께서는 마치 연꽃 같으시네.

“비유하면 불이 두루 세상을 위하여 익히는 기능을 하다가 혹 다른 때에 한 마을에서 불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과 같다.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장차 모든 세계에서 불이 모두 없어지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 여래께서 모든 법계에 들어가시니, 남김없이 두루하시어 불사(佛事)를 일으키신다. 다른 때에 다시 다른 불토에서 도의(道意)를 현발(顯發)시키시려고 문득 멸도를 나타내시나 실은 멸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와 같은 것으로써 여래의 반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또 불자여, 가령 비유하면 요술쟁이[幻師]가 환술을 잘 배워 방편을 잘 알고, 신통스런 주문에 통달하고 정진하여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물로 변화시킨다고 하자. 스스로 그 몸을 어떤 나라의 도시나 시골에 나타내어 환술로써 모든 것을 정지시켜서 위엄을 세우고 나서 다른 나라의 도시나 시골에 가고자 하여 문득 변화하여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다.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장차 환술이 다 없어져 버리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 여래께서 무량한 지혜의 환술을 잘 깨달으시고 선권(善權)인 성스러운 주술을 나타내 보이시기에 두루 모든 곳에 들어가셔서 모든 법계를 나타내시나 또한 들어가신 일이 없으시다. 비유하면 환술로 여래의 몸을 나타내신 것과 같으니, 법계에 계시면서 허공계가 다하도록 중생이 믿고 즐거워하는 데 따라 각기 그들을 위하여 모든 불토를 변화하여 보이시고 멸도를 나타내신다. 단지 한 국토에서만 반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니, 여래께서는 모든 법계에 개달(開達)하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이 모든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대멸도를 나타내시는 곳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불자여,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는 또 무소착정의정수(無所着定意正受)라고 하는 삼매가 있어 대멸도를 나타내신다. 바로 이 선정으로써 정수(正受)하실 때 여래 몸의 낱낱의 털구멍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억백천해의 광명이 찬란하게 퍼져 나온다. 그 하나하나의 광명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연꽃이 변화하여 나오고, 낱낱의 연꽃에는 무수히 많은 영묘한 사자상좌(師子牀座)가 자연히 변화하여 만들어지는데, 각각의 자리에는 화신 여래께서 앉아 계신다. 이는 여래께서 중생들의 수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신 것이니, 모습을 구족하시고 진제(眞諦)의 덕을 엄정히 두루 구비하셨다. 이는 모두 옛날에 서원하셨던 것이다. 모든 근(根)이 순숙해진 중생이 있으면 곧 여래의 안온하신 모습을 보고 율교(律敎)를 따라 엄정하게 되며, 미래의 본제(本際)에도 중생 가운데 뜻이 순숙한 자를 따라 계율로써 제도한다. 그러나 이 여래의 모습 역시 처하시는 곳이 없고 또한 처하시지 않는 곳도 없으며, 또한 말씀하신 것도 없고 말씀하시지 않는 일도 없으며, 또 항상하시는 일도 없고 항상하지 않으시는 일도 없다. 또 이 모든 것은 모든 여래께서 과거의 본원(本願)으로 서원하신 것을 행하시는 것으로서,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고 연설하시어 모든 근을 통달하게 하시고 위신력의 교화로써 성소(聖所)에 이르게 하신다. 불자여, 이것이 모든 보살이 여래의 대반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간 곳이 한이 없고 장애가 없는 구경의 법계이며, 끝도 중간도 없는 허공계이다.

또 여래란 자연이어서 일어나는 일도 없고 멸하시는 일도 없어 진실한 본제에 처하신다. 만일 나타나고자 하실 때에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휴식을 얻게 하신 다음, 두루 위신을 나타내어 건립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에게 법계를 보여주심으로써 그 성품을 순화(順化)시키시고 법요(法要)를 연설하신다. 비록 연각이 있다 하나 오직 보살만이 명료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집착 없으신 불정왕(佛定王)이시며 
모든 중생 가운데 거룩한 분이시여, 
끝없는 대애력(大哀力)으로 
신음(身陰)에 두루하시네.



바르고 참된 도에 처하시어 
법비를 분별하여 내리시고 
무상념(無想念)의 빛을 비추시되 
모든 세상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시네.



이러한 지혜와 
모든 10력의 마음 사모하여 

가장 훌륭한 성인 관찰하니 
어떤 것들이 도(道)가 되는가.



시방에 두루 퍼진 
온갖 모습의 백성들 
모든 것이 다 공(空)인 줄 생각하면 
자연도 없고 몸도 없으리.



보살이 훌륭한 방편의 지혜로 
사자좌와 연꽃을 변화하여 나타내고 
모든 곳에 안온하게 처하니 
중생의 법계일세.



모든 성스러움에 안주하여 
자연히 지모(智謀) 이루니 
이 무극(無極)의 지혜로 
모든 육신 초월하네.



이미 해탈과 같아 
법계에 사람도 사물도 없으나 
만일 시방에 있다면 
연각에 머물기 때문이라네.



오직 불자만이 이러하여 
남김없는 법계에 도달하리니 
모든 법계 관찰하면 
더함도 덜함도 없네.



가장 훌륭한 성인 가까이하면 
배우거나 배우지 않거나 
유위(有爲)이거나 무위(無爲)이거나 
모든 지혜 자재하리라.



모두 자재에 안주하여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으며 
다함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니 
부처님 지혜 한이 없네.



비유하면 마치 물이 흘러 
점점 넓게 퍼져 
부드럽게 토지를 적시되 
그 몸은 아첨하는 일 없고 

땅 역시 물이 두루 퍼지지 못하게 하려는 
상념이 없는 것과 같으니 
정진력 따라 익히면 
모든 것 널리 분별하리라.



10력께서 끝이 없이 
모든 중생계를 아시니 
이러한 중생류도 
안주하는 지혜 생각하고 

곧 따라 수행하여 
정진하는 일 일으키니 
이를 알면 오래지 않아 
공덕과 지혜 건립하리라.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께서 나타내신 것을 듣고 모든 덕의 근본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보살은 다함이 없는 진실한 행으로써 여래를 보고 허망한 것으로써 여래를 보지 않는다. 또 말씀하신 것을 듣고 온갖 덕의 근본을 심어 한량없는 탐욕의 행으로 들어가 위신을 다 갖추고 평등하게 그들을 다스린다. 유위(有爲) 중에 태어나 두루 뭇 원(願)을 갖추되 다함이 없고, 무위(無爲)에 들어가고자 발심하여 미래에 끝도 한도 없이 색계와 욕계를 다 마치고 자재지(自在地)에 이른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조금씩 바람을 불어 금강을 부수려 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이 비록 그렇게 한다 하여도 비난할 수 없다. 마땅히 그 몸체가 깨끗하지 못한 그릇이며, 오장(五藏)을 흩어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줄을 생각하여야 한다. 또 그 바람이란 자연의 법으로서 허물어뜨리는 기능이 있다. 이와 같이 불자여, 불법을 따르고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면 덕을 심는 것이 비록 엷다 하여도 그것으로써 모든 유위에 머무는 번뇌를 파괴할 수 있다. 여래의 지혜란 무위에 응하는 것이어서 일체 있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장애를 없애며 여래께서 심으신 덕의 근본은 없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풀더미를 수미산같이 쌓는다 하더라도 겨자만한 불씨를 풀 위에 던지면 즉시 모두 남김없이 태우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불의 성질은 태우는 것이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자(行者)가 비록 여래에게서 심은 복덕이 적더라도 이것이 모든 번뇌를 태워 남음이 없게 하기에 속히 멸도(滅度)로 돌아가는데 가까이 간다. 왜냐하면 모든 가리워진 장애를 영원히 없애기 때문이니, 이미 여래에게서 덕의 근본을 심었으므로 온갖 더러움을 없앤다.

마치 선견(善見)이라는 대약(大藥)이 있어 그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향내를 맡거나 먹거나 몸에 지니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자연히 청정하게 되고, 만일 죽어서 땅에 들어가면 변해서 의약이 되어 다시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자여, 여래ㆍ지진께서는 성스러운 지혜를 갖춘 대약왕(大藥王)이 되시어 중생에게 이익을 주시고 많은 중생들을 치료해 주신다. 만일 여래의 색신(色身)을 뵈면 눈이 청정해지고, 귀로 삼매를 들으면 모든 것을 꿰뚫어 들을 수 있게 된다. 만일 계향(戒香)을 맡으면 코가 자연히 청정해지며 법미(法味)를 맛보면 뭇 행(行)을 충만하게 갖추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강설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혀가 자연히 청정해져서 변재가 한량없게 되며,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의 광명을 만나면 곧 법신(法身)을 얻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를 생각하면 그 마음이 평등하고 청정해지며,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ㆍ지진께 공양하면 덕의 근본을 이루고 번뇌의 병을 없애게 된다.

이제 불자에게 부촉하여 권유하고 현시(顯示)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를 보거나 들으면 능히 음개(陰蓋)와 죄의 환난을 청정하게 없앨 수 있다. 만일 말씀을 듣고도 환희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이들로 하여금 덕의 근본을 심게 하여 허망하지 않게 하시고 멸도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다. 만일 소리를 듣고 온갖 덕의 근본에 들어가면 인하여 모든 불선(不善)한 법을 끊어 없애게 된다. 그리하여 뭇 도(道)의 근원을 두루 증명하되, 모자람이 없이 모두 알게 된다. 온갖 비유를 들어 여래께서 모든 것을 갖추시고 출현하셨다고 하나, 비유를 인용하여 깨우칠 수 없다. 부처님의 공덕은 불가사의하여 모든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로써 중생의 지성(志性)을 개화시켜 그들을 기쁘게 하려 하신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보살들을 위하여 온갖 비유를 들어 깨닫도록 하셨으나, 이것은 정요(正要)가 아니다. 이와 같은 홍범(洪範)이 곧 여래의 비밀스러운 곳간[藏]이니, 이것을 ‘모든 세간이 미칠 수 없는 지혜’라고 하며, 마침내 여래의 묘인(妙印)에 들어간다. 여래의 큰 지혜는 끝없는 성명(聖明)의 종성(種性)이다. ‘모든 보살을 품으며 중생이 미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평등한 국토인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뭇 중생계를 청정히 하여 남음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장애의 근원을 두루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지진(至眞)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 홍전(弘典)을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직 대승행(大乘行)을 구하려고 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사의승(無思議乘)인 보살도를 강설하신다.

또 이 경전은 끝내 다음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보살들에게만 행해진다.

비유하면 불자여, 전륜성왕의 금륜(金輪)과 백상(白象)과 감마(紺馬)와 명주(明珠)와 옥녀(玉女)와 장신(藏臣)과 병신(兵臣)의 자연의 7보(寶)가 변화하여 오되,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않고 오직 왕의 적태자(適太子)에게 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거룩한 왕비가 잉태하여 태어났기에 전륜성왕의 모습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만일 정후(正后)가 이 태자를 낳아 성왕(聖王)의 모습을 다 갖추었다 하여도 만일 목숨이 다하게 되면 전륜성왕의 소유인 7보는 7일 후에 모두 없어져 나타나지 않아 남음이 없다.

이와 같이 경전의 근본은 끝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직 정각(正覺)의 맏아들이요 여래의 종족이며, 도로써 태어난 사람으로서 여래의 덕의 근본을 심은 사람에게만 이른다.

설사 법신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도를 준수하여 은혜를 입는다 하여도 그 세력이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색상(色像)과 여래의 비장(秘藏)인 경전의 요지를 체득하고 3보를 끊지 않을 것이나, 만일 법이 다 없어지면 곧 보는 사람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모든 성문승과 연각승은 이 경전에 이를 수 없고, 또한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하물며 받아 지니고 독송하는 것이겠느냐? 오직 대인(大人)인 모든 보살에게만 돌아가니, 경권(經卷)에 써 두거나 집에 잘 놓아 둘 뿐이다.

불자여,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강설을 듣고 지성(志性)이 도타와져서 법사를 공경히 모시고 편안하게 공양하여 받들면 이 경전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보살이 독실하게 믿고 우러르면 마땅히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 대사가 무수히 많은 억백천해 겁 동안 끝없이 6도(度)를 행하여 쌓고 다시 도품(道品)의 법을 품어 비애(悲哀)를 따라 수행한다 하여도 또한 이 여래의 끝없이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한다면 이는 ‘보살’이라고 하지 않는다.

보살법에서 이익을 증장시키지 못하면 여래의 뒤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보살이 여래의 장애 없는 지혜를 강설하고 독실히 믿어 도(道)에 들어가되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를 ‘진실한 보살’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든 신통과 지혜의 경계를 어기어 잃지 않으며, 능히 모든 세간의 법과 대성(大聖)의 행을 두루 궁구하고 여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불세계에 대하여 집착함이 없이 보살법을 건립한다.

그리하여 곧 모든 부처님의 정전(正典)에 통달하여 망설임이 없게 되며, 변동이 많은 도품의 경계로써 자재함을 얻어 모든 법을 세워 이룬다.

뭇 보살 가운데 위신이 우뚝하며 곧 여래의 장애 없는 경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이 법을 듣는다면 두루 안주하는데 이르러 도의(道意)가 한이 없을 것이며, 또 그 지성의 힘이 지극히 진실하여 모든 응하고 응하지 않는 온갖 생각을 버리고 성명(聖明)에 들어갈 것이니, 모든 여래께서 눈앞에 환히 나타나실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허공계를 명료히 알고 삼매를 받들어 마음을 열고 발오(發悟)하는 것이므로, 그 행(行)이 무량법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뜻한 대로 뭇 덕을 성취하여 자재를 얻게 할 것이다. 신통과 지혜에 창달하여 세간의 온갖 더러움을 없애고 발심하여 남음이 없게 할 것이다. 그 나라는 일체의 시방에 두루하여 보살도에 들어갈 것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들께서 합하여 한 길이 되시어 평등히 덕의 근본으로 나아가 성도를 권조(勸助)하실 것이다. 중생을 인도하여 이익을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하시며, 아직 듣지 못한 자들을 개화시켜 이 법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들어가되 들어가는 곳이 없으므로 틈을 엿볼 수 없고 모든 법으로 하여금 인연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며,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여 일체지와 일체법을 따르게 하시되 모두 한량이 없을 것이다. 보살이 이미 이와 같은 곳에 들어갔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하찮은 것이 된다. 들어가는 곳은 미치기 어려우니, 그 지혜가 자재하고 위신이 우뚝하다.”

보현(普賢)보살이 부처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 법을 말할 때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억백천해의 티끌 수와 같은 모든 불국토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18가지로 변화하여 감응을 나타내었고, 여래의 위신으로 법시(法施)를 현양[顯暢]하였다. 하늘꽃이 비처럼 내려오고 공후가 연주되지 않아도 저절로 울렸으며, 의복과 장식이 흩어져 내리고 모든 당번과 일산[蓋]이 펼쳐졌다. 내려오는 뭇 향은 천상(天上)의 모든 훌륭한 향을 뛰어넘은 것이니, 향기로운 잡향(雜香)과 도향(擣香)이었다. 또한 천상의 영락이 비처럼 내려오고 또 대여의주(大如意珠)가 내려왔으니, 그 광명은 하늘의 보배보다 더 뛰어났다. 이 때 찬탄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보살의 도(道)여. 모든 하늘들을 뛰어넘는구나. 길이길이 형상이 없어 획득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또 모든 보살이 자신이 과거에 지었던 덕을 이어받아 두루 불가사의하고 진기한 보배를 내려 모든 불국토를 청정히 장엄하였으며 최정각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두 구름같이 모여들어 무량법(無量法)을 비처럼 내리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강설하였으며, 또한 여래께서 강설하신 가르침을 찬탄하였다. 마치 보살이 4대역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어 건립하고 발기(發起)하여 보살을 이룬 뒤 기쁘게 하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모든 불세계도 남음이 없이 시방에 접하였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80억해백천(億姟百千)의 국토 안에 가득 찬 티끌 수와 같았다. 이와 같은 모든 불국토의 수보다 많으신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보현보살이 강설하는 것을 들으시고 멀리서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그대 족성자(族姓子)여, 이는 여래께서 분별하여 말씀하신 불가사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제(眞諦)를 건립하여 법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이 시방의 팔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억백천해의 불세계 안에 가득 찬 티끌 수 같은 모든 부처님께서 자연히 소리를 내시어 경법을 연설하셨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 제자들을 개화시키는 것과 같다.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강설하신 법과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백천 개의 국토 안에 가득 찬 티끌 수 같은 모든 보살이 신통을 얻어 온갖 삼매에 들어갈 것이며, 이로 인하여 시방의 부처님께서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를 획득하고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道)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수결(授決)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천 개의 불국토에 가득 찬 티끌 수 같은 중생들이 무상정진도의 뜻을 내면 모두 성존(聖尊)에게서 수결을 받되, 장래에 무수히 많은 불국토에 가득 찬 티끌 수 같은 겁이 다하면 부처가 되리니, 명호를 ‘불계지호(佛界之乎)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라고 할 것이다. 항상 이 법을 세우고 강설하여 미래의 보살로 하여금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이 네 지역에서 선양하고 봉행하여 모든 세계의 중생들이 알게 할 것이다. 이 세계의 중생들이 도교(道敎)로 개화(開化)되어 율(律)을 따르는 것같이 시방의 불국토도 이와 같아 억백천해의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생각할 수 없고 끝이 없이 도(道)로 교화되어 제도될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도록 모든 불국토의 백성들이 다 개화될 것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위신으로 밝게 비추실 것이다. 여래께서 예전에 본래 건립하시어 이르신 바로써 모든 법을 체득하시고 덕의 근본을 닦으셨으니,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비유할 데가 없다. 부처님께서 때맞추어 이끌어 이익되게 하시고, 보살들의 마땅함을 따라 모든 근(根)을 조정하므로 숙세에 행한 것을 망실(亡失)하는 일이 없다.”

그러자 보현보살이 큰 위신으로 모든 신통과 지혜를 갖추고 위성(威聖)이 장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모두 보았다.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억백천해의 불토에 가득 찬 티끌 수와 같은 보살들이 모두 모여 시방의 모든 법계에 충만하였으며, 끝없이 엄정(嚴淨)한 보살들이 큰 빛을 떨쳐 모든 불세계를 감동시키고 천궁(天宮)을 놀라게 하며, 악마의 무리를 항복시키고 모든 악한 취(趣)들을 없애버리고, 여래의 무량한 위존(威尊)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법락(法樂)을 선양하였다. 그리고 한량없이 솟아나는 여래의 덕을 찬탄하여, 끝없이 많은 진기한 보배와 온갖 공양구들을 비처럼 내렸다. 한이 없는 각각의 다른 몸들이 모두가 다 여래의 법문(法門)이 되어 자기 몸의 그릇에 맞게 받아들이는 것이 한량없었으며, 부처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함께 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소리를 내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그대, 부처님의 아들이여, 마침내 능히 여래의 비할 데 없는 법을 널리 펴시는군요. 우리가 익힌 것은 모두 보현의 법을 따른 것이었으며, 무량칭(無量稱)에 달하여 음성호(音聲號)에 들어가 친히 여래를 따라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불세계는 보광(普光)이라 이름하며, 그 법 또한 지금 이곳과 다름이 없이 모두 이 법을 연설하여 부처님의 성지를 받들어 여래의 경전을 체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자여, 현재 부처님께서 건립하신 것을 증명하려고 이 모임에 온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처럼 시방 법계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 역시 한량없었으니, 허공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모든 불국토의 낱낱의 국토마다 사방의 지역에 여래께서 건립하신 부처님의 국토를 나타내 보이되 한량이 없었으며, 백천의 불국토에 가득 찬 티끌 수 같은 보살들이 모여왔다. 모두 여래의 위신의 덕으로 수행하되 비할 무리가 없었으며, 이 장구(章句)로써 이곳을 장엄하게 꾸미고 진리는 파손되는 일이 없음[無損]을 살피니, 능히 이들보다 더 뛰어난 자가 없었다.

이 때 보현보살이 모든 보살들의 덕을 모두 보고 법제(法際)를 관찰하고 나서 대성(大聖)의 성족(姓族)을 선양하려고 모든 부처님의 무극(無極)의 도(道)인 여래의 법을 이치대로 해석하였으니 비할 자가 없었다. 곧 토론을 하였는데, 널리 미치어 끝이 없었으며 숙세의 덕본을 알아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빛이 번쩍이는 것 같되 모두 형체가 없었다. 그리고 불전(佛典)을 연설하였으니, 중생의 지성이 나아가는 곳을 모두 알아 두루 보지 못하는 곳이 없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때맞춰 체득하여 법구(法句)를 버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염(念)하여 도법의 광명의 낱낱 빛줄기를 모으게 하였다. 세존께서 무극을 건립하여 자만심이 없으셨으니 노래로 찬탄하여 말하기를, “모든 여래께서 모두 한 몸이 되시니 합하여 하나의 법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전생의 대행(大行)과 정진의 힘을 선양하여 숨기는 일이 없었다. 속제[等際]의 모든 길상(吉祥)의 힘은 부처님의 위신을 받들어 도에 감응하는 것으로서,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이 없이 도달하였다.

이 때 보현이 거듭 말하였다.

“보살 대사가 법인(法忍)을 체득하는 데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그로써 능히 법인을 구족하는 자는 음개(陰蓋)가 없이 곧 모든 법인의 지위에 올라 모든 불법에서 장애가 없게 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음향에 통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순(柔順)하게 행(行)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기법인(不起法忍)이고, 넷째는 유환(喩幻)법인이며, 다섯째는 야마(野馬)법인이고, 여섯째는 약몽(若夢)법인이며, 일곱째는 호향(呼響)법인이고, 여덟째는 약영(若影)법인이며, 아홉째는 여화(如化)법인이고, 열째는 여공(如空)법인이다. 이것이 보살이 체득하는 열 가지 법인이다.

그러면 무엇을 음향인(音響忍)이라고 하는가? 설법하시는 모든 소리를 듣고 공포심을 품지 않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기쁘게 순종하려 생각하여 그대로 따라 행하므로 모든 행에 있어서 어기는 일이 없다. 이것이 음향인이다.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응해서 나아가야 할 법에 수순하여 태어나 법을 관찰하고, 행을 평등하게 세워 거슬려 어지럽게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모든 법에 유순하게 응한다면 마땅히 건너야 할 것을 건너고, 지성(志性)이 청정하여 평등을 좇아 닦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순순히 들어가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유순법인이다.

무엇을 보살의 불기법인(不起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설령 생겨난 모든 법을 보아도 모두 처소가 없음을 보아 멸진한다고 헤아리지 않고 또한 보는 것도 없다고 관찰한다. 만일 생기지 않는다면 곧 멸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멸하는 것이 없다면 다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다함이 없다면 파괴되는 것도 없을 것이며, 파괴되는 것이 없다면 끝과 바닥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밑과 바닥이 없다면 적연지(寂然地)이며, 적연지라면 담박할 것이다. 담박하다면 행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행하는 것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인 불기법인이다.

무엇을 보살의 유환법인(喩幻法忍)이라고 하는가? 모든 것이 환(幻)과 같아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명료히 깨닫고, 하나의 법을 깊이 믿어서 온갖 셀 수 없이 많은 법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법으로써 하나의 법에 평등히 들어가고, 나[吾我]에 들어가나, 들어가되 들어가는 곳이 없으므로 건립하는 모든 것과 이익되게 인도하는 온갖 행에 집착하는 일이 없다.

비유하면 온갖 탈 것 중의 으뜸인 큰 코끼리가 허깨비[幻]와 같기에 온갖 코끼리나 수레나 보행자들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고, 남자나 여자나 소년이나 소녀 등의 대소(大小)와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고, 나무나 줄기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와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무는 것과 같다.

보살도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아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임을 명료히 깨달으면 흙이나 물이나 불이나 바람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하루나 보름이나 한 달이나 일 년에 관계없이 함께 유유히 머물며, 백 년이나 천 년을 헤아리지 않고, 달과 해의 겁수(劫數)를 상관하지 않고 함께 유유히 머문다.

그림자나 메아리나 온갖 보는 것들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물고, 많은 것이나 많지 않은 것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많은 것으로써 하나의 일에 들어가지 않고 함께 유유히 머물며, 미묘하거나 열등하거나 부드럽거나 거친 것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매우 적거나 매우 많은 것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며, 유한한 것이나 무한한 것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문다.

색(色)에 처해 있는 각기 다른 많은 대중들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그 모인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변한 것과 더불지 않으므로 함께 유유히 머물며, 그 변화된 것 역시 모인 사람들과 더불지 않으므로 유유히 머문다.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것이 없지만 머물지 않는 곳이 없이 보이는 모든 것을 평등히 제도한다.

온갖 것이 허깨비여서 각각 보는 것이 다르나 이 모든 견해에 대해 영원히 보는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모든 취(趣)의 근원을 본다.

불자여, 이것을 ‘보살이 허깨비와 같은 데에 들어가 세상을 제도한다’고 한다.

보살이 제도하는 세상은 번뇌가 횡행하는 세상과 세속 국토의 법에서 노는 세상과 나를 주장하는 세상과 고통스러운 세상과 유위의 세상과 유(有)를 여의는 세상과 합하고 모이는 세상[合會世]과 모임이 없는 세상과 분별하는 세상과 행을 짓는 세상이니, 이것이 보살이 제도하는 세상의 이름이다.

보살이 허깨비 같은 교화를 위하여 두루 모든 세상에 들어가되, 중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생을 파괴하지도 않으며, 국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국토를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법을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되, 과거의 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도 없고 또한 생각을 여의지도 않는다.

또한 미래도 없고 짓는 행도 없으며, 미연(未然)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현재에 머물지 않되 존재하는 바를 허물지도 않는다.

불도(佛道)에 치달리지 않으니, 도를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부처님과 함께 하지도 않으며 부처님을 권하지도 않고 멸도를 취한다.

모든 원(願)에 머물지 않되 맹세한 것을 버리지도 않고 평등을 좇아 수행하며, 또한 거룩하고 청정하게 장엄하지도 않으면서 장애하는 것이 없이 국토를 개도(開導)한다.

권하여 파괴되는 일이 없는 곳에 들어가게 하고, 법의 근본[法本]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게 한다.

평등히 나[吾我]에 들어가되 또한 나라는 생각을 어기어 허물지 않게 한다.

음(陰)이 종자가 되는 모든 입(入)으로 뭇 행(行)을 깨우치고 집착을 버리게 하여 중생을 도탈시킴으로써 이 모든 행에 있어서 의지하는 것이 없게 한다.

모든 법이 평등하여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명료히 알게 하고, 모든 법이 단지 임시로 된 글자일 뿐임을 분별하게 한다.

성인께서 통달하신 밝은 지혜는 미칠 수 있는 자가 없다.

중생을 도탈시키시되 항상 적절한 때[時宜]를 따르시며, 또한 중생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시고 대애(大哀)에 머무신다.

숙세(宿世)의 행의 헤아려 알 수 없는 보응(報應)의 일을 말씀하시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신다.

이것이 네 번째인 유환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야마법인(野馬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모두 황홀(恍惚)하여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줄을 깨닫는 것이다. 사람이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면 마치 강이 흘러 파도가 일어나는 것 같으나, 통달한 사람[達士]은 그것이 물이 없는 뜨거운 기운인 줄을 명료히 아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이 모든 법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일들을 분별하여,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단멸되는 것도, 항상하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한다. 가르침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는 잘못에 들어가지 않으며, 있는 것 같으나 악취(惡趣)가 없음을 본다. 마음이 밖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또한 안에 처하지도 않으며, 한 모습이거나 온갖 모습 가운데 모습이 없는 줄을 알고, 모든 법은 미묘함을 구족하나 다 근본이 없는 줄을 안다. 이것이 다섯 번째인 야마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유몽법인(喩夢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마치 몽상(夢想)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꿈은 세상에 처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일어나지도 않으며 세상을 좇아 생기지도 않는다. 또 꿈이란 꿈일 뿐이어서 욕계(欲界)도 없고 색계(色界)도 없고 무색계(無色界)도 없다. 꿈이라고 하는 이유는, 생기는 바가 없어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꿈에는 번뇌가 없기에 원한을 맺는 일도 없다. 또 꿈을 헤아려 보면 이미 생긴 적이 없으므로 또한 청정함도 없으며, 꿈에는 꿈을 볼 수 없다. 보살 대사가 모든 세상을 관찰하여 꿈과 같은 줄을 명료히 깨닫되 또한 밝게 통달함도 없고 어둡고 어리석음도 없다. 꿈이란 자연이어서 꿈에는 집착할 것이 없다. 꿈이란 황홀한 것이며 꿈이란 본래 청정한 것이니, 건립하는 바가 있기에 이 꿈이 있다. 꿈은 파괴되는 일이 없으니, 생각함을 인하여 이 꿈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법이 꿈과 같은 줄을 명료히 깨닫는다면 세상을 개도할 수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인 유몽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여향법인(如響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법을 배워 들어가는 모든 소리이다.

만일 배운 것이 있으면 아직 제도받지못한 사람들을 제도하여 법을 배우도록 개화하지만, 모든 것은 마치 메아리와 같아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되 본래 모두 고요하니, 또한 제도할 대상도 없음을 깨닫는다.

보살 대사가 이와 같은 색상(色像)으로 여래의 안과 밖의 모든 음향을 관찰하되, 안과 밖의 모든 일을 분별하여 보지 않으므로, 밖의 일도 모르고 또한 안의 일로써 밖의 일을 알지도 않는다.

의탁하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 언사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이치를 환히 아니, 이것이 온갖 장구(章句)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메아리와 같은 인연으로 계도(啓導)하는 것이 있으니, 모든 법시(法施)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장애가 없다.

배운 것이 있으면 모든 소리가 존재가 없는 줄을 분별하여 환히 깨닫는다.

마치 천제석(天帝釋)에 속해 있는 천상의 묘하고 아름다운 옥녀(玉女)가 하나의 입과 몸으로 동시에 백천 가지의 기악 소리를 내지만, 그 기악은 생각하는 일도 없고 입도 역시 ‘내가 지금 백천 가지의 묘한 음향을 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 대사도 온갖 경계를 건너지만 또한 생각도 없고 언사도 없다.

마땅한 방편[權宜]을 환히 깨달아 무량음(無量音)을 이루고, 한량없는 방편으로 세법(世法)를 건넌다.

또한 퇴환(退還)하는 일이 없이 항상 법계를 다니면서 뭇 백성 속에 들어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여 말해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개도하여 건립하게 한다.

입으로 장애 없는 소리를 연설하므로 모든 불토에 두루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고 기뻐하게 한다.

경전을 널리 펴서 백성을 훈도하고, 광명을 떨쳐 아직 깨닫지 못한 자에게 비추어 모든 소리를 깨달아 알게 한다.

비록 설한 것이 있다 하나 아무 생긴 것이 없으며, 온갖 소리를 내지만 도무지 상념이 없다.

더욱 개도하여 생기는 바가 없는 줄을 깨닫게 하고 모든 깨달음의 장[覺場]을 펴서 성도(聖塗)에 이르게 한다.

보살 대사가 이미 이러한 얻을 것이 없는 평등한 경지에 머물렀으므로 두루 듣는 자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께서 일어나신 곳으로 들어가게 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한없이 제도하는 법륜을 굴리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따르게 하되 상념이 없다.

이것이 일곱 번째인 여향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약영법인(若影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에서 없어지지도 않고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고 세상에서 노닐지도 않고 세표(世表)를 벗어나지도 않고 세상에서 다니지도 않는다.

법계를 믿지 않고 세속의 습관을 허물지도 않으며 또한 세계를 파괴하는 일도 없다.

세상에 이르지도 않고 세상을 탐락(貪樂)하지도 않고 세상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세상을 기르지도 않는다.

또 저 보살은 세상에 처하지 않고 세상을 해탈하지도 않으며 또 보살행을 받들어 행하지도 않고 독실히 믿는 것도 없다.

대서원(大誓願)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지만, 허망한 행이 없어 모든 부처님의 법으로 나아간다.

세간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나 또한 세속법에 머무는 일이 없고 세속의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으니, 비유하면 마치 그림자와 같다.

가령 해의 궁전과 달이 남자와 여자와 나무와 산과 언덕과 집들과 모든 신의 궁전과 모든 강하(江河)의 흐름과 같은 온갖 형상을 비추면, 다함이 없고 한량없는 인연으로 모든 방면에서 해의 광명으로 인하여 뭇 형상들을 모두 보고, 그들이 나아가는 곳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맑은 물에서 뱃사공이 야광주(夜光珠)를 가지면 보이는 것으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훌륭한 것을 베풀면 청정치 못하여 광채가 없다 하여도 모두 그 밝음을 받아 빛을 쪼이게 되나, 야광주는 조작한다는 생각이 없다.

또 그 광명 역시 존재가 없고 음향이 없으며, 또한 생긴 적이 없다.

그 광명으로 인하여 분별하는 일이 있지만 광명은 다니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

비록 청정하게 드러나나 또한 밝게 드러남과 함께하지 않아도 광명지(光明地)에서는 광명이라 한다.

온갖 흐름을 비추되 비추이는 것이 없으니 두루하는 것도 없으며, 그림자 역시 강이나 샘이나 큰 바다나 연못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그림자를 생각하면 처하는 곳도 없고 집착하는 일도 없다.

나타난 그림자는 깨끗하지 않고 하자(瑕疵)도 없으니, 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근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널리 나타나되 먼 것도 없고 가까운 것도 없다.

보살도 이와 같아 개화(開化)되는 대상이 이미 그의 성품에 이르러 지행(志行)이 나아가는 바에 자재하고, 관하는 중생의 도혜(道慧)의 장(場)에 권화(勸化)하는 바가 있으니 그들의 뜻하는 것이 균등해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다니는 도량을 분별하여, 자기 세계와 남의 세계가 두 가지 품(品)이 없는 줄을 두루 관찰한다.

마치 나무를 심으면 처음 싹이 터서부터 점차 자라 무성해지고, 점점 성장하여 줄기와 마디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이 자기의 세계와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모든 모습을 분별하여 법에는 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장애가 없는 본체로 들어간다.

저 보살신(菩薩身)이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지나가 모든 불토를 보되 역시 집착하는 일이 없다.

세계에서 옮겨다니지 않고도 모든 불세계에 이르나, 또한 이르는 일이 없다.

법신(法身)이 이르는 곳은 태양 궁전의 그림자와 같으니, 모든 곳에 함께하여 그 몸이 일체의 세계에 두루 들어가 나타난다.

현생(現生)하는 것이 있어도 행함에 장애가 없으니, 또한 몸을 나누지도 않고 행하는 것도 없다.

이 세간의 세속적인 생각이 없고 세상의 허무한 말을 없애며, 또 몸을 흩트리지 않고도 종시(終始)가 없는 데 이르러 덮지 않는 곳이 없으니, 여래의 종자로서 본제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히 하지 않고 문득 한량없는 찬탄에 들어가 일체신(一切身)을 청정히 하니 두루 통달하지 않는 일이 없다.

이것이 여덟 번째인 여향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여화법인(如化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두루 세속에 들어가 만일 이르는 곳이 있다면 중생이 모두 화(化)와 같은 줄을 관해서 알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하겠으면 화사(化事)를 생각해야 한다.

화(化)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세계가 지은 행과 사상으로 인하여 변화된 것임을 말한다.

일체의 전도(顚倒)된 고통과 즐거움은 변화된 것들이다.

일체 세간은 모두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있다.

혹은 사상(思想)으로써 문득 번뇌의 뭇 생각[想]의 염(念)을 이루고, 인연으로 변화하여 생긴다.

그러므로 음향과 법률을 건립하고 펴고 찬탄하니, 무상(無想)의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개화시켜 굳게 물러나지 않게 하고 평등하게 인도하며, 모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고 뜻과 서원을 세우게 한다.

행(行)이 화(化)와 같다는 것은, 여래의 대애(大哀)의 행과 백성이 변화하여 생긴 것인 줄을 관찰하고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를 법륜의 선권방편을 닦는다고 말하며, 지혜와 무외(無畏)와 네 가지의 분별하는 변재로써 자재하게 성달(聖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시켜 제도하고, 세상의 공덕을 뛰어넘으니, 변재가 자유롭고 끝없이 넓어서 한량없이 많은 억천(億千)의 중생 속에 들어가 그 속에 처하여 자재를 얻는다.

능히 사람이 행하고하늘이 움직이는 것을 명료히 알아 성로(聖路)가 없는 것을 보고 대도(大道)로써 보여주어 그 행하는 대로 어기거나 잃는 일이 없게 한다.

비유하면 요술로 만든 사람[化人]처럼 생각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으며,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지도 않고 법에 머무는 일도 없다.

업(業)에서 생기지 않고 보(報)를 바라지도 않으며, 이르는 곳도 없고 세상에 나오지도 않는다.

또한 세상에서 정각을 이루지도 않고 법을 염(念)하지도 않으며, 모든 법을 익히지도 않는다.

또한 오래 머물지도 않고 잠깐 머물지도 않으며, 또 처하는 곳도 없다.

습속(習俗)을 행하지도 않고 세간사(世間事)를 키우지도 않으며 치우친 말도 없다.

모든 한정된 곳에 가까이 가지 않고 또한 한정하지 않는 일도 없으며,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며, 독실한 믿음도 없고 또한 믿지 않는 일도 없다.

현성도 없고 범부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원한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다.

또한 지혜도 없고 지혜롭지 않은 일도 없으며, 소유도 없고 미묘함도 없다.

세상에 의지하지 않고 인도하여 가르치지도 않으며, 모든 법계에 대해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다.

받아들이는 일이 없되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일도 없으며, 5음(陰)이 없되 또한 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생사(生死)도 없고 멸도(滅度)하지도 않아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와 같이 보살이 세상에 다니면서 보살행을 닦아 변재를 환히 깨달으나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

세간을 모두 보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일이 없이 수행해야 할 것을 따르나, 자기 몸을 위해서도 아니고 세속을 위해서도 아니다.

방일하지 않으므로 내가 없고 집착과 교만함을 여의나 또한 이것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 오만하고 방자함을 버리나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처하지도 않고 세상과 단절하지도 않는다.

또 법에 대하여 자재함이 넘치지도 않고, 인간계에 대하여 집착하고 의지하는 일도 없다.

개도(開導)하는 일도 없고 또한 중생계에 처하지도 않으며, 원하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장엄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불법에 대하여 가진 것이 없으므로 구족하게 성취하여 마침내 대도에 이른다.

또 이 모든 법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니, 비유하면 저 변화한 것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과 같다.

변화에 통달한 보살은 법인(法忍)에 머물러 평등히 모든 불도를 환히 깨닫고, 이미 성취하고나서 성제(誠諦)를 세운다.

이렇듯 보살이 불법은 화(化)와 같아 처하는 곳이 없는 줄을 두루 살피기에 불도에 두루하되 획득하는 것이 없고, 중생의 행을 하되 모든 음개(陰蓋)가 없으며,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일체신(一切身)에 들어가 개도하여 건립하는 것이 있으나 집착하는 일이 없다.

만일 색(色)을 보더라도 색이 화(化)와 같은 줄을 알아 집착하는 일이 없이 평등히 진제(眞諦)인 본제(本際)를 구족한다.

자연의 밝음으로써 비추는 것이 있으나 해탈법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며, 일체법에 대하여 생긴 것이 있음을 나타내나 생긴 것이 없다.

마치 저 요술로 만든 사람이 생각하는 일이 없으므로 본성이 청정하여 말을 들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과 같다.

모든 계율을 따르되 또한 상념이 없으니, 마치 요술로 만든 사람이 감동을 준다 하여도 변이로써 만들어진 것일 뿐인 것과 같다.

이제 일체 여래의 성스러운 도량에 이르러 물러나는 인연이 없고 또한 생긴 일도 없어 장애가 없이 일체력(一切力)을 이루나 모두 생각하는 것이 없다.

마치 저 요술로 만든 사람이 그 마음이 모두 통달하였다 하나 위신산(圍神山)을 가리어 장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아홉 번째인 여화법인이다.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여공법인(如空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중생계를 관찰하여 들어가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 연(緣)으로 삼는 상(相)이 없는 것이다.

모든 법도 이와 같아 모든 불토에 들어가되 실제로 들어가는 것이 없다.

또 모든 법은 허공과 같아 두 가지 일이 없으며, 보살도 이와 같이 서원하는 바가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불토를 감싸안는 것 역시 이와 같이 속박하는 일이 없으니, 여래께서 들어가신 힘을 일으켜 함께 노닌다.

마치 허공이 들어가는 곳이 둘이 아닌 것처럼 도(道) 또한 이와 같아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고, 지혜 역시 이와 같아 모든 법이 들어가는 곳이 이 같은 줄을 분별한다.

보살 대사가 법인을 체득하는 것이 허공과 같으며, 성혜(聖慧)에 이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모든 승(乘)에 대하여 획득하는 것이 있으나 모두 허공과 같으며, 몸과 입과 뜻이 획득하는 것이 자재하여 허공과 같다.

체득한 모든 법이 뜻으로 생각한 것에 인하여 성취된 것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법은 심은 일이 없으므로 없어지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다.

보살도 이와 같아 일체법에 대하여 자재를 얻으니,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비유하면 허공에 처소가 없어 능히 파괴할 자가 없는 것처럼, 모든 신통과 지혜도 처소가 없어 파괴되는 일도 없다.

허공처럼 모든 불력(佛力)에 자연히 머물며 모든 세상에 머무는 일이 없어 곧 자연의 경계가 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건립하되 또한 건립된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화(化)와 같다.

비유하면 허공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또한 낳는 것도 없으나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이와 같이 머무는 일이 없고 성취하는 것도 없되 청정히 장엄하는 것이 있어서 그로 인해 모든 세계를 두루 드러낸다.

마치 허공에 처소가 없고 방면(方面)이 없고 끝이 없고 또 바닥이 없으나, 깊고 넓게 창달하여 두루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 처소가 없고 방면이 없으나 이르는 곳이 있어, 일체법에 대하여 넓게 통달하고 모든 행을 평등히 다스려 두루하지 않는 일이 없다.

마치 허공을 의지하여 머물고 서므로 낳는 것이 없지만, 온갖 것을 나타내어 백성들의 뭇 형상들을 감싸안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 행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되 뭇 행을 따라 다니며 나타내는 것이 있으나, 또한 낳는 것이 없다.

마치 허공이 형상이 없으나 또한 형상을 나타내지 않는 일이 없고, 청정한 행도 없고 더러운 행도 없되 그로 인하여 가르쳐 인도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 같아 세속의 형상이 없으나 세속의 형상을 벗어나는 일도 없고, 한량없는 형상이 없으나 그로 인하여 나타내는 것이 있다.

마치 허공이 영원토록 견고하지도 않고 잠깐 서는 일도 없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 같아 영원히 존립하지도 않고 잠깐 동안 머물지도 않으니, 비유하면 그림자가 나타나나 그림자가 없는 것과 같다.

보살행을 하면서 만일 이것을 환히 깨닫는다면 마침내 구경(究竟)을 얻을 것이다.

허공처럼 행하면 모든 번뇌[塵勞]가 나타나되 더러움이나 허물이 없고, 모든 원한이 나타나되 원망과 증오가 없다.

보살도 이와 같아 도력으로써 뭇 악마를 항복시켜 모두 청정하게 하고, 그 마음이 깨끗하고 고요하여 평등히 일체 세간의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또 허공이 세간을 평등히 감싸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 같아 모든 법에 대하여 평등하며, 보살 대사는 또 모든 법에 대하여 장애 받는 일도 없고 망실(亡失)하는 일도 없다.

마치 허공이 모든 것을 평등히 감싸안아 허공을 한정지으려 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보살도 이와 같아 모든 법에 대하여 지성(志性)이 함께 노닐며 또 그 도심(道心)이 끝이 없다.

왜냐하면 그 허공이 평등히 두루 미치는 것처럼, 보살도 자신에 대해 수행하여 청정을 성취하고 평등하게 나아가 하나의 두루한 업이 되기 때문이니 한 가지 일로써 한량없는 것으로 바뀌어 모든 국토를 두루 다닌다.

마치 허공과 같아 모든 불토에서 구경에 이르지 않고도 구족하며 모든 방면에서 머무는 일이 없이 모든 방면에 들어가 신통을 이루니, 온갖 덕이 한량없고 훌륭하고 기이한 일을 자연히 구족한다.

모든 법을 획득하여 도무극(度無極)에 이르고 견고한 술법을 얻되 뜻이 허공과 같다.

마치 금강과 같아 모든 소리에 대하여 상념이 없이 온갖 음성으로 개도(開導)하니, 어기거나 버리지 않고 법륜을 굴린다.

만일 보살행을 다 갖추어 이 인(忍)을 이룬다면 자재를 얻을 것이니, 이르는 곳도 없고 오거나 가는 일도 없어, 모두 향하는 곳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자재를 얻어 없어지는 일이 없이 문득 무위법에 대하여 자기를 말미암게 될 것이며 망실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실제 있는 몸을 없애고 진체(眞體)를 성취할 것이며, 율과 교를 따르고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어 하나의 모양[一相]이 될 것이다.

그 몸이 자재하여 모양 없음[無相]에 들어가니 무상이기에 한량이 없다.

부처님의 힘은 한이 없으시니 몸이 두루 자재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

자기의 행을 보호하여 몸이 무너지는 일이 없되 자신을 말미암으며, 견고하고 평등하여 항복시켜 모든 곳에 들어가신다.

만일 부처님을 뵙는다면 그로 인하여 눈이 청정해질 것이며, 이미 음개(陰蓋)가 없어 욕행(欲行)을 여의되 또한 행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한없이 고요한 것처럼, 들어가는 곳은 인(忍)이 없는 것으로써 하되 인(忍) 아닌 곳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공덕이 이미 두루 미치어 담박한 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에는 위험한 액난이 없는 것처럼, 모든 보살이 행하는 일을 환히 깨달아 청정에 들어가면 마음이 평등하여 허공과 같으므로 모든 불법을 무너뜨리거나 잃는 일이 없다.

큰 바다가 한량없이 수특(殊特)하여 유입(遊入)된 일이 있으나 단절되는 일은 없는 것처럼 모든 불토에 들어가 무한한 국토의 경계와 중생들을 건립하고 유도한다.

허공이 바닥이 없고 모든 색상을 여의며 뭇 음향이 없는 것처럼, 두루 시현(示現)하는 데 따르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곧 개화 시켜 구족히 성취하게 한다.

뜻이 견고하기가 허공과 같아 능히 막고 무너뜨릴 자가 없으며, 그 마음이 강하여 모두 구경을 얻어 세계와 평등하되 또한 허공과 같아 일체 있는 것이 없다.

만일 견고하다면 모든 세상에 나아가는 일이 없어서 모든 은애(恩愛)를 없앨 것이며 능히 대도를 구족할 것이다.

만일 겁(劫)이 다하도록 천지를 태워 모두 타 없어진다 하여도 허공은 태울 수 없으니, 허공이 모든 불세계를 총괄하여 받아들이듯이 보살도 이와 같이 모든 힘에 들어가 무상정진(無上正眞)의 지혜를 건립한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 대사가 모든 법은 허공과 같은 줄을 깨닫는 것이니 열 번째 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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