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왕과 늙은 바라문

염라왕과 늙은 바라문

석존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실 때의 일이다.

어느 곳에 한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출가하여 산림 속에 한거하면서 도를 배우고 있었으나 나이 육십 노년에 달하도록 아직 득도하지 못한 채 있었다. 대체로 바라문의 법규에는 육십세가 되도록 득도하지 못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맞아 일가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도리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아내를 얻고 살림을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한 아들이 태어났다. 용모가 준수하고 단정하여 두 부부는 그지없이 이 사내아기를 사랑했다. 이 아이는 성장함에 따라 더욱 영특하고 총명했다. 일곱 살 때는, 이미 제서(諸書)를 읽고 외웠으며, 또한 말 재주가 뛰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사소한 일로 시름시름 병을 얻어 앓기 시작하더니 며칠 뒤엔 그 병으로 그만 죽어버렸다.

아버지인 늙은 바라문의 비탄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는 죽은 자식의 싸늘한 시체 위에 엎드려 울부짖다가 그만 기절해 버렸다. 친척들은 슬퍼한 나머지 기절한 늙은 바라문을 가까스로 소생시키고, 아들의 시체를 부친으로부터 강제로 뺏다시피 하여 성밖에 매장했다.

사랑하던 외아들을 잃어버린 바라문은 울어도 울어도 소용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염마왕에게로 가서 그 죽은 아들을 되찾아 오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목욕제계하고 향화등을 지참하고는 그 집을 나섰다.

가는 곳곳마다 염마왕의 소재를 물어 보면서 장장 수천리를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깊은 산속에서 득도한 여러 바라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염마왕의 소재를 또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염마왕을 찾아서 무얼 하자는 거요?』

『실은 저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애는 얼마나 영특하고 총명한지 장래 반드시 대성하리라고 기뻐하면서 그 성장을 즐거움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병이 들어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저 는 도무지 살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슬프고 안타깝고 괴로워서 어떻게 해야할지 저도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염마왕을 만나 뵙고 제 자식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 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집을 나와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바라문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생각해서 이렇게 위로했다.

『이봐요, 염마왕이 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거기에 갈려 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일랑 아예 버리시오. 그러나 다행히 여기서 서쪽으로 사백여리쯤 가면 그곳에 큰 강이 있는데 그 강 속 큰 성이 하나 있소. 그 성은 제천(諸天)의 신들이 이 세상을 관찰할 때에 유숙하는 성이오. 염마왕도 매월 초팔일에는 시찰하기 위해서 이 성에 올 것이오. 그때 당신은 목욕제계하고 거기가서 만나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하고 가르쳐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가엾은 늙은 바라문은 대단히 기뻤다. 곧 그 강 속에 있다는 큰 성을 향해 부랴부랴 떠났다. 바라문들이 친절히 가르쳐준 대로 과연 큰 강 속에 큰 성이 있었다. 그 웅장한 궁전의 규모는 도리천도 이와 같지는 못하리라고 생각될 만큼 훌륭하고 장엄했다.

바라문은 그 궁전의 문 앞에 서서 향을 피우며 한쪽 발을 들고 열심히 주문을 외우며 축원을 들였다. 염마왕을 만나게 해달라는 바라문의 열성어린 축원에 감동한 염마왕이 문지기에게 명령을 내려 바라문의 축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바라문은 염마왕을 만나

『대왕님, 저는 간절한 원이 있어서 대왕님을 알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실은 제가 만년에 한 아들을 얻었기에 노후의 의지로 사랑하여 길들었는데, 나이가 일곱 살이 되자 그만 병으로 얼마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쪼록 대왕님의 자비심으로 그 자식을 저에게 다시 돌려 주시옵소서. 소원입니다, 대 왕님.』

그는 눈물을 흘리며 슬피 흐느끼면서 염마왕에게 탄원했다.

『으음, 그렇던가,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다. 네 자식은 지금 동원(東園)에서 딴 아이들과 놀고 있을 터인 즉, 가서 찾아가지고 데리고 가라.』

염마대왕의 허락을 받은 바라문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나는 듯이 동원에 달려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매불망하던 자기 아들이 지금 딴 이이들과 한참 기쁘게 뛰놀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자기 아들을 덥썩 껴안고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했다.

『오오, 내 아들, 참으로 있었구나. 나는 네가 죽고 나서 낮이나 밤이나 너를 잊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하루 세끼 밥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느니라. 너도 부모 곁을 떠나 얼마나 외롭고 슬펐겠니. 이젠 됐다. 이젠 됐어. 내가 왔으니 이젠 너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으리라. 나와 함께 집으로 가지 얘야.』

아이는 깜짝 놀랐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바라문을 욕했다.

『뭐라구? 이 바보 늙은이 같으니, 무식한 말 작작하라구. 잠시 머무르는 곳을 빌린 것만으로 어떻게 부모와 자식이란 말이야? 지금 나에겐 이 세상의 부모가 있어. 허튼 소리 작작하구 어서 빨리 돌아 가. 바보 늙은이야.』

바라문은 제 자식의 핀잔과 욕설을 듣자 할 말을 잊고 고개를 숙인 채 쓸쓸히 거기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대로 단념하질 못했다.

『나는 승려인 석존께 물어보리라. 석존은 인간의 혼이 변화하는 길을 잘 안다고 하지 않는가.』

바라문은 그렇게 생각하자 돌아온 즉시 석존에게로 갔다. 그 당시 석존께서는 사위성의 기원정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설법 중이시었다.

그는 석존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제 자식은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도리어 저를 바보 늙은이라고 욕설을 퍼 부었습니다. 그리고 또 제 자식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석존께서는 바라문의 말을 들으시고 그를 위해 이 세상의 생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바라문아, 너는 과연 어리석은 자로구나. 사람이 죽어 혼이 떠나면 곧 또 다른 형태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되고 처자가 되는 인연은 말하자면 손님이 왔다가 가는 것처럼 그 만남과 헤어짐이 무상한 것과 같이 상주성(常住性)이 있는게 아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잘못된 생각에 방황하는 자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 득실에 대해 슬퍼하고 근심하고 번뇌한다. 이것은 그 근본을 오달치 못하고 외형에만 너무나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자(智者)는 은애(恩愛)를 탐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또한 한 게송(偈頌)을 읊어 주셨다.

『세상사람 모두 처자를 거느리되, 그 유전(流轉)의 근본을 모름이여. 한 번 죽음에 직면하면 곧, 격류 하는 폭포처럼 거세게 울부짖누나.

부자라도 오히려 그를 구하지 못하거든,

타인이야 하물며 어이 죽음을 구하리.

목숨 다하여 떠나고 나면,

남겨진 자 등불을 지키는 소경 같아라.

지혜를 다해 이 뜻을 알 것이며,

몸은 오직 경계(經戒)를 힘써 닦아서,

부지런히 행하고 세상을 제도해서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할지라.

번뇌의 심연을 멀리 함이어.

바람이 구름을 쫓듯 하라.

이미 제상(諸想)을 멸하고 나면,

이는 진실한 지견(知見)이로다.

지혜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무위(無爲)를 기쁘게 구하여,

정교(正敎)를 받아 지니게 되면

생사의 고통과 번뇌는 끝나리로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이러한 게송(偈頌)을 듣자 유연히 그 마음의 눈이 열렸다. 목숨은 무상한 것이며 처자란 오직 왔다가 떠나는 손님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바라문은 마음에 안정을 얻게 되고 자식을 위해 집착하던 마음이 스르르 평화롭게 가라앉으며 맑은 물처럼 체념이 샘솟았다.

늙은 바라문은 이에 석존께 승려가 될 것을 바라며 간청했다.

석존께서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좋은 일이로다!』

하고 한 말씀 칭찬하시자 홀연히 그 바라문의 빈발은 자연히 떨어지고, 법의는 그 몸에 입혀졌으며 곧 훌륭한 승려의 모습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세상의 무상을 깨닫고 자식이 죽은 비탄과 번뇌를 깨끗이 씻고 오직 부처님의 길을 닦고 부지런히 행한 까닭에 아라한의 오달(悟達)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法句譬喩經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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