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1. 상권-1

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후한(後漢)월지삼장(月氏三藏) 지루가참(支婁迦讖) 한역 현성주 번역

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1. 상권-1

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2. 상권-2

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3. 하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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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1. 상권-1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1만 2천 비구와 함께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祇闍崛山)에 계셨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한 8만 4천 보살은 낱낱이 다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분으로서, 모두 온갖 총지법문(總持法門)2)을 얻어서 걸림이 없는 변재[無所罣欲]3)를 지녔으며, 무생법인(無生法忍: 無所從生法)4)도 깨달았다. 또 삼매(三昧)의 지혜를 얻어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알아내고, 사람들이 원하는 경계를 따라서 설법하고 교화하여 알맞은 자리를 얻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천왕(四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제석천의 모든 천자 (天子) 용 열차(閱叉 : 夜叉) 건타라(揵陀羅 : 乾闥婆) 아수륜(阿須倫 : 阿修羅) 가류라(迦留羅 : 迦樓羅) 진타라(眞陀羅 : 緊那羅) 마휴륵(摩休勒 : 滅伽) 등 사람 모양이면서 사람 아닌 무리[人非人]도 다 이 법회에 참석하였다.

이 때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은 그 산의 다른 한 쪽에서 훌륭한 스물다섯 사람들과 함께 자리하였다. 이 스물다섯 사람은 다 보살로서 각각 이름이 있었다.

야나사리(若那師利) 나라달(那羅達) 사리삼파(師利三波) 사리겁(師利劫) 파두사리겁(波頭師利劫) 사인타루(闍因陀樓) 다라니타루(陀羅尼陀樓) 라타파니(羅陀波尼) 라타모하다(羅陀牟訶多) 사하말(私訶末) 사하유가사구라(私訶惟迦闍俱羅) 가나가사(加那迦闍) 사하질두파침마차가(沙訶質兜波沈摩遮迦) 파괄진차살화파타(波栝鎭遮薩波陀) 파지반구리(波坻盤拘利) 사갈말(沙竭末) 마하예루(摩訶麑樓) 기비타차아난타(耆非陀遮阿難陀) 비차파무(譬叉波貿) 기라야아난타(耆羅耶阿難陀) 아람유하라마저타(阿藍惟訶羅摩抵) 사모가저타(沙牟迦抵陀) 아유달(阿喩達) 살화알(薩和頞) 등이 훌륭한 스물 다섯 사람의 이름이다.5) 네 도술천자(兜術天子 : 兜率天子)가 문수사리보살의 처소로 와서 법을 듣고자 하였다. 그 천자들의 이름은 사마타구칙마라(沙摩陀鳩滅 : 普等華) 무구칙마(無拘摩 : 光明華) 만나라건타사하(漫那羅揵陀沙訶 : 天香華) 구술담유하(漚術曇惟訶 : 信法行得)이다. 그 외 다른 천자(天子)들도 조금씩 모여들어 문수사리의 처소에 와서 설법을 듣고자 하였다.

스물다섯 보살과 천자들은 다 함께 앉아서 각각 말하였다.

“부처님의 지혜는 너무나 훌륭하십니다. 그 끝을 알 수 없고, 말로 나타낼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보통으로는 그 서원[僧那]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이어 모두들 말했다.

“우리들은 마땅히 어떻게 법을 닦고 방편을 알아야만 끝없는 지혜에 이를 수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체지(一切智)6)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혜수(慧首)보살이 말했다.

“싫증 없이 부지런히 공덕을 쌓으면서 온갖 공덕에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혜시(惠施)보살이 말했다.

“진실 그대로 고요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기쁘고 부드럽게 스스로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곧바로 일체를 다 아는 지혜[薩芸若]의 마음을 지니게 되고 큰 서원[僧那僧涅]7)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마땅히 끝없는 지혜8)에 도달하게 됩니다.”

구족평등(具足平等)보살이 말했다.

구족평등(具足平等)보살이 말했다.

“겁수(劫數)를 세지 않고 닦아야 합니다. 미래의 겁이 한량없이 멀지라도 헤아리지 않고 닦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스스로 그 서원을 높이 떠받쳐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구족행(具足行)보살이 말했다.

“자신의 편함만을 생각하지 않아야 끝없는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중생을 다 편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더 이상 자기의 편함을 구하지 않고 일체를 다 편안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마땅히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화구족(蓮華具足)보살이 말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 굴복시킬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마음도 다스려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마땅히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화구행겁(蓮華具行劫)보살이 말했다.

“욕망의 번뇌를 따르는 자는 욕망의 번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욕망의 번뇌를 따르지 않아야만 비로소 그 욕망의 번뇌에서 벗어납니다. 그러한 보살은 이익을 얻거나 이익을 얻지 못하거나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또 괴롭거나 즐겁거나 비방을 당하거나 칭찬을 받거나 나쁜 일이거나 좋은 일이거나, 일체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지제근(制持諸根)보살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공덕으로 자기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끝없는 지혜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땅히 자기 혼자일 뿐 벗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일체중생을 생각하여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갖추지 못하는 공덕을 나는 마땅히 갖추리라는 각오로 잠시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중생을 교화하려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행여지(持行如地)보살이 말했다.

“비유하면 땅과 같습니다. 일체 초목과 약초와 집들과 성곽 등이 땅을 의지하여 머물지 않음이 없으나, 땅은 이들을 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체가 땅을 우러러보면서 살아가지만 땅은 부담스럽거나 번거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당연히 땅처럼 기뻐하거나 성냄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일체중생에게 각각 알맞은 자리를 얻게 하면서도 되돌려 받겠다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보원(寶願)보살이 말했다.

“마땅히 거룩한 마음을 지닐지언정 스스로 비굴하지 않아야 하며, 꿈속이라도 두 갈래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 하면 나한(羅漢)이나 벽지불(辟支佛)의 뜻을 두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보배처럼 귀중한 보살정신을 떠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깨우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또 진귀한 보배를 탐하거나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누가 그 보배를 찾을지라도, 다 베풀어 깨우치면서 대승[摩訶衍]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가 이 마음과 평등하고, 무심(無心)의 지혜가 이 마음의 지혜와 평등한 사람은 불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어서 그 마음에 탐하거나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보인수(寶印手)보살이 말했다.

“다섯 세상에서 나고 죽는 사람들을 보면 바다에 빠져 괴로워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들을 가엾게 여기면서 일체를 다 아는 지혜[一切智]의 손길로 건져줘야 합니다. 왜냐 하면 지식이 없는 이를 지식의 으뜸이 되도록 하고, 탐욕이 많은 이를 아낌이 없는 자 가운데 으뜸이 되도록 하며, 계를 지키지 않는 이를 지계(持戒)의 으뜸이 되도록 하고, 많이 성내는 이를 인욕(忍辱)의 으뜸이 되도록 하며, 게으른 이를 정진의 으뜸이 되도록 하고, 마음이 어지러운 이를 선정[一心]의 으뜸이 되도록 하며, 지혜가 없는 이를 지혜의 으뜸이 되도록 하고, 공덕이 없는 이를 공덕의 으뜸이 되도록 하면서, 공덕의 으뜸으로 세 가지 법보[三法寶]를 깨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법보(法寶)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둘째는 스스로 그 몸이 보배처럼 진귀한 공덕임을 알도록 하는 일이며, 셋째는 일체 온갖 법이 허공처럼 텅 비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보(法寶)의 으뜸으로서 이를 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자의(師子意)보살이 말했다.

“그 몸에 서원[僧那]을 세운 이는 겁내거나 두려운 일이 없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고 흐트러지지도 않으므로 털이 곤두서도록 놀라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나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泥洹]을 닦지도 않으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에 평등하게 머물러 두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자보과무구(師子步過無懼)보살이 말했다.

“그 근기가 약하고 열등한 자는 이 끝없는 지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보살은 이 끝없는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뛰어난보살은 온갖 악을 버리고 사특하지 않으며, 질박한 경지를 그대로 따르면서 자신을 높이 받들어 교만하지 않으니, 성내는 마음도 없고, 잘못된 법을 따라 행하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뛰어난 보살은 진실하고 바른 법을 닦아 탐욕[]과 질투가 없고 나쁜 마음이 없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캄캄하여 뛰어난 보살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몸과 입과 뜻을 평등하게 닦아서, 말한 대로 실천하고 뜻을 잃지 않는 가운데 매우 훌륭한 경지를 성취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왜냐 하면 지극히 진실한 경지를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과 함께 스스로 즐기고 법대로 행하면서, 수명(壽命)을 탐하거나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몸과 목숨을 탐하지도 않고 일체중생을 버리지도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탐내거나 아끼는 일 없이 베풀면서, 사람들에게 그 알맞은 자리를 얻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른 경지에 들어가면 잘못된 길이 없어집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진귀한 보배의 창고가 되고,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며, 두려운 이에게는 보호자가 되고, 나약한 이에게는 도의 자리[道地]를 마련해 주며, 잘못된 길로 들어간 이에게는 바른 인도자가 되고, 지혜가 없는 이에게는 지혜의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일체가 다 순조롭게 따르리니, 그 어떤 원한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뛰어난 보살은 이러한 해탈법인(解脫法忍)에서 법을 받아 지니고, 본래대로 머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라야 비로소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마금색(紫磨金色)보살이 말했다.

“생각을 허공처럼 넓게 써야 합니다. 왜냐 하면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비[大哀]를 베풀어서 모자람 없이 덮는다면, 그 마음은 항상 즐겁고 그 얼굴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갖 욕망으로 즐기는 일은, 그 마음이 허망하여 그 가운데 있지 않으나, 보시[所施與]9)는 하늘이 덮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정진(精進)과 일심(一心 : 禪定)과 지혜(智慧)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발의즉전법륜(發意卽轉法輪)보살이 말했다.

“새로 발심한[新發意]이가 있으면 마군(魔軍)이 그 틈을 엿볼 수 없도록 도와서, 모든 부처님과 하늘과 신들의 보호하는 뜻을 잃지 않고, 마음을 내어 머물 때마다 마땅히 법륜(法輪)을 굴려야 합니다. 왜냐 하면 훌륭한 마음을 일으키면서도, 또한 일체의 온갖 법에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어자연보무불입(諸語自然普無不入)보살이 말했다.

“마땅히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본래 자연 그대로 다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언어도 다 공하여 허공처럼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보살도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어야 하고, 하는 일을 말한 대로 행하면서, 그 지혜로 밝히지 못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낙부동(樂不動)보살이 말했다.

“온갖 존재의 음성(音聲)이 존재하지 않으니, 온갖 존재의 성향(聲響)은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이는 기뻐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태산은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살의 마음은 좋은 소리나 나쁜 소리에, 기뻐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집착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부처님의 말씀이나 외도의 말도 모두 공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욕망의 세계[欲有]에서 하는 일은 다 사라지는 존재로 보고 사라짐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떠받들어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 법을 닦는 이는 빠르게 성불(成佛)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해의(海意)보살이 말했다.

“바다가 온갖 것을 받아들이듯 그 마음의 지혜가 끝이 없어야 합니다. 마치 바다가 온갖 강물을 받아들여 한 맛[一味]을 이루는 것처럼, 보살은 온갖 존재를 합하여 한 법을 이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미묘한 법의 작용으로, 12인연(因緣)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거나 줄지 않는법신(法身)을 생각하는 가운데 일체중생을 위하여 공덕을 닦고, 그 닦은 공덕을 일체중생이 다 얻을 수 있도록 바란다면, 이것을 다함이 없는 공덕이라고 합니다. 이 공덕을 마땅히 보호하여 집착하지도 않고 끊지도 않으면서, 의지의 능력을 다하여 몸을 다스리면, 모든 존재의 작용은 다 평등하여 차별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닦으면서 의지(意志)의 지혜를 일으켜야만,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고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대광명(大光明)보살이 말했다.

“마음에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을 갖추는 일은, 세속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살은 광명을 닦아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면, 보시(布施)의 광명을 닦아서 비추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하고, 지계(持戒)의 광명을 닦아서 비추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하며, 인욕(忍辱) 정진(精進) 일심(一心 : 禪定) 지혜(智慧)의 광명을 닦아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염명(焰明)보살이 말했다.

“공덕의 지혜로 마음이 밝아져서 색(色)을 본다면, 색은 청정하게 보이므로 싫어하지 않습니다.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細滑] 법(法)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또 여섯 가지 일도 청정해집니다. 여섯 가지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눈 귀 코 입 몸 뜻입니다. 여섯 가지가 다 청정하니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므로 보는 사람마다 다 불법(佛法)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 바르지 못한 이들을 법으로 이끌어 교화합니다. 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의왕(可意王)보살이 말했다.

“비록 어떤 사람이 헐뜯고 욕하면서 손과 발로 때리고 몽둥이로 칠지라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단지 그 법만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할 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욕하는가. 무엇이 성내는가. 무엇이 치고 때리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욕설과 성냄과 때림 등은 안으로 텅 비어 얻을 대상이없고, 밖으로도 텅 비어 의심할 대상이 없으며, 자기의 몸에서도 볼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의 몸에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손과 발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기쁘게 베풀어주고, 머리를 취하려고 할지라도, 더욱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며, 비록 성(城)과 진귀한 보배를 원할지라도 그 원하는 사람에게 탐내거나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처와 자식을 원할지라도 다 베풀어주면서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경전을 독송하면서 한 장구(章句)를 얻고 기뻐할지언정 금륜왕(金輪王)10)의 환락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쉬지 않고 설법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발심(發心)하여 보살이 되기를 좋아할지언정 범천(梵天)11)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부처님 뵙기를 기쁜 마음으로 원할지언정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12) 의 진귀한 보배를 탐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기뻐하면서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소시무저(所視無底)보살이 말했다.

“일체의 온갖 존재를 볼지라도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다 청정한 세계로 보면서 존재[有]하고 존재하지 않음[無]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부처님을 볼지라도 색상(色相)으로 구할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법신(法身)을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마음만을 볼 뿐, 모든 사람의 소유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공덕의 눈으로 청정한 경지에 이르면 도의 눈[道眼]과 신통을 갖추고, 이어 지혜의 눈[慧眼]을 얻어서 바로 온갖 존재에 탐할 대상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깨달음의 눈[佛眼]을 얻어 열여덟 가지 법[十八法]13)을 다 갖춘 뒤에, 법의 눈을 얻고 열 가지 힘[十力]14) 을 갖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서원을 세운 이는 곧바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작무저행(作無底行)보살이 말했다.

“짓는 일은 모두 일체를 다 아는 지혜[一切智]와 다름없이 지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머무는 대상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머무는 대상이 없는 경지에서, 모든 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살이 이렇게 닦는다면 모든 순경계(順境界)15)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니, 어찌 다른 곳에 떨어지겠습니까. 죄의경계에 떨어지는 일도 없으며 마군(魔軍)의 경계에 떨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법을 버리지도 않고 비법(非法)을 범하지도 않으면서 이 경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죄업(罪業)으로 생긴 마군(魔軍)의 일을 벗어나서 이를 따른다면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식애의(說息愛意)보살이 말했다.

” ‘일체의 소유(所有)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짓는 일마다 곧바로 온갖 마군(魔軍)에 홀린 것임을 스스로 아는 사람은 소유하지도 않고, 더 이상 마에게 유혹 당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마에 홀리는 일을 알고 더 이상 하지 않으면, 곧 다섯 쌓임[五陰]16)을 다스리게 됩니다. 다섯 쌓임을 알면 마의 일이 없습니다. 마의 경계를 벗어난 사람은 닦는 중간에 방해를 받지 않으니, 이미 해탈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뛰어난 보살은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소기즉회(所起卽悔)보살이 말했다.

“온갖 닦는 일이 잘못된 법이면, 마음으로 곧 뉘우쳐야 합니다. 닦는 일을 법대로 행하여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항상 온 마음을 기울여 반드시 선행(善行)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몸으로 닦은 훌륭한 법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옳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입과 뜻으로 닦은 훌륭한 법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옳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 만일 근심하는 이가 있다면, 관대한 법을 베풀어서 근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뛰어난 보살은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득일체원(得一切願)보살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청정한 계(戒)를 지녀서 소원을 성취하고 청정한 계를 따라 행한다면, 더 이상 세속을 범하지 않습니다. 세속을 범하지 않으면, 37품(品)17)의 근본과 호응하여 일체를 다 아는 지혜와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청정한 계법(戒法) 그대로 37품을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뛰어난 보살의 행이라고 하며, 이 행으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보등화(普等華)천자가 말했다.

“나무에 꽃이 피면 이를 보고 좋아하는 것처럼, 일체중생은 닦은 공덕의 은혜를 입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비유하면 도리천상(忉利天上)의 구기(拘耆) 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모든 하늘이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듯이, 법으로 일체중생의 안목이 되는 보살도 꽃과 같습니다. 또 천상(天上)의 마니보(摩尼寶)에 흠집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청정한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광명화(光明華)천자가 말했다.

“비유하면 해가 떠올라서 어둠이 사라졌을 때 모든 색(色)이 다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두루 비추지 않음이 없는 지혜로, 캄캄한 어리석음을 모두 활짝 열어 깨우쳐 줍니다. 왜냐 하면 그 캄캄한 어리석음은 끝내 밝음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둠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밝음을 보고 곧바로 바른 길을 찾습니다. 보살은 바른 길에 머물면서 바른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리켜 보여줍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천향화(天香華)천자가 말했다.

“비유하면 만다라(曼陀羅)의 향기가 네 방향의 높이와 너비와 위와 아래를 각각 40리까지 풍기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이 지닌 청정계(淸淨戒)의 삼매(三昧)는 지혜의 향으로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두루 풍기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향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함은, 그 청정계(淸淨戒)의 삼매(三昧)가 지혜의 향기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이 삼매(三昧)에 머문 보살은 곧바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법행득(信法行得)천자가 말했다.

“법에 머물러서 마땅히 닦아야 할 일을 보살법(菩薩法) 그대로 행하려면, 항상 또 다시 게으름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하고, 더 이상 아는 일도 없어야 하며,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아야만, 곧바로 열 가지 일을 얻게 됩니다.

열 가지 일이란, 첫째 여섯 가지 바라밀(波羅蜜)19) 을 닦는 일이요, 둘째 네 가지 평등한 마음[四等心]19)을 행하는 일이며, 셋째 다섯 가지 신통[五旬]20)을 행하는 일이고, 넷째 네 가지 일[四事]21)을 행하는 일이며, 다섯째 세 가지 해탈과 인욕의 이로움[三脫忍辱利]22)을 다 거둬들이는 일입니다.

여섯째 사람들을 발심(發心)시키는 일이고, 일곱째 교화를 행할 때 고달픈 몸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 일이며, 여덟째 교묘한 방편[漚拘舍羅]23)을 행하
는 일이고, 아홉째 일체 법의 요지를 다 지니는 일이며, 열째 믿는 법에 변함이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닦는 이는 반드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이 뛰어난 보살들[上人]과 천자(天子)들에게 말했다.

“보살은 머물면서 머무는 대상이 없어야 합니다. 머물면서 머무는 대상이 없는 경지24)란 무엇이겠습니까.

삼계(三界)에 있을지라도 삼계의 일을 익히지 않아야 합니다. 안[內]도 익히지 않아야 하고, 밖도 구하여 익히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밖을 익힐지라도, 제자들이 닦아 익혀서는 안될 경계[聲聞地]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또 벽지불(辟支佛)의 경계에도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25)생사(生死)를 익혀왔다고 한다면 생사에 대한 무지(無知)를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이름[名]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이름의 근거인 색(色)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인연을 따라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인연에 대한 관찰[所見]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애착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애착을 일으키는 근본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생사(生死)를 익혀왔다고 한다면 생사에 대한 무지(無知)를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이름[名]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이름의 근거인 색(色)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인연을 따라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인연에 대한 관찰[所見]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애착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애착을 일으키는 근본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나’를 익혀 왔다고 한다면 나가 아닌 법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탐욕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베풀고 나서 달라지지 않는 마음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계법(戒法)에 대한 범행(犯行)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계법(戒法)을 지키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성내는 행위[瞋怒]를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인욕(忍辱)을 닦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정진하지 않는 일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일심(一心 : 禪定)의 경지에 안주(安住)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를 익혀 왔다고 한다면 지혜를 닦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하며, 공덕이 없는 일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공덕을 쌓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법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출세간의 법[道法]을 행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해탈이 없는 경계를 익혀 왔다고 한다면 해탈의 경지를 충분히 갖추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죄악을 익혀 왔다고 한다면 죄악이 없는 법을 행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하며, 번뇌의 남음이 있는 경계를 익혀 왔다고 한다면 번뇌의 남음이 없는 법을 다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행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26)이러한 모든 법을 닦을 때, 보살은 배우고 익히면서도 배우고 익히는 일이 없이 일체 법을 보호하면서 집착하지도 않고 끊지도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보살은 곧바로 끝없는 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27)일체의 온갖 법은 얻을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들어가는 곳도 없고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곧바로 일체를 다 아는 지혜에 이릅니다. 얻을 대상이 없는 것이 일체를 다 아는 지혜이니, 일체를 다 아는 지혜를 얻은 경지는, 색(色)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수(受 : 痛痒)와 상(想 : 思想)과 행(行 : 生死)과 식(識)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법수(法數)로도 헤아릴 수 없고, 비법수(非法數)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보시[施與]로도 셀 수 없으며,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로도 셀 수가 없습니다.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지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온갖 법은 얻을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들어가는 곳도 없고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곧바로 일체를 다 아는 지혜에 이릅니다. 얻을 대상이 없는 것이 일체를 다 아는 지혜이니, 일체를 다 아는 지혜를 얻은 경지는, 색(色)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수(受 : 痛痒)와 상(想 : 思想)과 행(行 : 生死)과 식(識)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법수(法數)로도 헤아릴 수 없고, 비법수(非法數)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보시[施與]로도 셀 수 없으며,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로도 셀 수가 없습니다.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지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과거와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삼세(三世)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다 아는 지혜는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귀 코 입[舌] 몸 뜻이 작용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6근(根)의 온갖 경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남자나 여인이 일체를 다 아는 지혜를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체를 다 아는 지혜와 다름없이 머물러야 합니다. 어떻게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일체의 온갖 법에 머무는 일이 없어야만, 일체를 다 아는 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 스스로 법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닦는 것을 일체를 다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일체중생의 법과 깨달음의 법이 법 그대로 평등한 것을 일체를 다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만일 일체를 다 아는 지혜를 구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4대(大)에서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몸을 몸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연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덕법(功德法)이 있다고 할지라도 공덕법이 없으며, 그 소유를 나의 것으로 여길지라도 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란 생기는 대상이 없고, 생기는 대상이 없으면 헤아릴 수 없으니, 그 헤아림도 생기지 않는 법이라고 합니다. 비록 보이거나 볼지라도 다 생겨남이 없는 법이니, 생기지도 않고 생기는 대상도 없음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경지를 일체를 다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이 이 법사(法事)를 설했을 때, 이천 천자(天子)는 다 무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으며, 만 2천 사람이 모두 더없이 높고 평등한 어도[無上平等道]의 마음을 일으켰다.

낙부동(樂不動)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했다.

“다 함께 부처님의 처소로 가서, 보살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를 물어 보도록 합시다.”

그러자 문수사리보살은 즉시 신통으로 여래를 변화시켜 법회 대중 가운데 앉게 하였다. 그 입은 옷과 형상은 석가모니부처님과 다르지 않았다.

문수사리보살이 파지반구리(波槃拘利 : 樂不動)보살에게 말했다.

“여쭈어 보십시오. 마침 부처님께서 여기에 계시니, 보살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 여쭈어 볼 수 있습니다.”

낙부동(樂不動)보살은 화신부처님인줄 모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길게 끓어 앉아서 여쭈었다.

“부처님[怛薩阿竭]28)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화신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행하는 것처럼 보살도 이렇게 머물러야 하느니라.”

낙부동(樂不動)보살이 또 여쭈었다.

“어떻게 해야 부처님처럼 행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시를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하고,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一心] 지혜(智慧)를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하며, 또 욕망[欲]을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하고, 색(色)을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하며, 무색(無色)을 따라 행하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몸을 따라 행하지도 않아야 하고, 입을 따라 행하지도 않아야 하며, 뜻을 따라 행하지도 않아야 한다. 온갖 행하는 대상은 집착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 부처님께서 낙부동보살에게 물으셨다.

“환영(幻影)의 변화에 행의 근거가 있겠느냐?”

낙부동보살이 말했다.

“행의 근거가 없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환영의 변화에 행의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살도 마땅히 이렇게 행해야 하느니라.”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이 부처님은 변화한 부처님이 아닙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당신은 스스로 모든 법이 환영과 같다는 것을 아십니까?”

낙부동보살이 답했다.

“모든 법은 실로 환영과 같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모든 법이 환영인 줄 알면서 어째서 또 변화한 여래가 아니냐고 물어 보십니까?”

문수보살이 이어 말했다.

“그대여, 모든 부처님도 다 변화한다고 합니다.”

낙부동보살이 또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변화합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하는 행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낙부동보살이 말했다.

“그 청정한 행을 근거로 변화하는 것입니까?”

문수사리보살이 이어 말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우리도 없고 나도 없으며, 다른 사람도 없고 수명의 길고 짧음도 없으며, 목숨 자체도 없습니다. 또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고, 보통 사람을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습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화신부처님께 여쭈었다.

“본래 무엇을 배워야만 스스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배울 대상이 없는 것이 보살의 배움이니라. 왜냐 하면 스스로 ‘나 자신이 이것을 구하고 싶다거나, 이것을 구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니라. 또 근심하지도 않아야 하고 기뻐하지도 않아야 하며, 인연하지도 않아야 하고, 따라 변하지도 않아야 하며, 보는 일도 없어야 하고 처소도 없어야 하느니라. 또 생각도 없어야 하고, 이름[字]도 없어야 하며, 색(色)도 없어야 한다. 일체에 대가를 바라지 않음이 바로 보살의 배움이니라. 이렇게 배우는 것을 평등한 배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우는 이는 집착하지도 않고 묶이지도 않느니라. 이렇게 배우는 이는 탐욕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느니라. 이렇게 배우는 이는 사랑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느니라. 이렇게 배우는 이는 스스로 ‘나는이렇게 배운다거나, 이것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배우는 이는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그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만일 더없이 높고 바르고 진실한 깨달음의 마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내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마땅히 내가 배워 온 것처럼 배워야 하리라.”

낙부동보살이 또 여쭈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배움입니까?”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죄를 짓지도 않고 죄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줄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으며, 가지지 않을 것도 없느니라. 계를 지키지 않을지라도 계를 지킬 일이 없고, 인욕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일[惡意]이 없으며, 정진하지 않을지라도 게으르지 않고, 선정에 들지 않을지라도 어지러운 뜻이 없으며, 지혜를 닦지 않을지라도 알아야 할 일이 없고, 배우지 않을지라도 배워야 할 일이 없으며, 성취하지 않을지라도 성취해야 할 일이 없느니라. 또 보살도 아니고 불법(佛法)도 아니니, 자신의 몸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몸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느니라.

그 보는 일에도 생각이 없으니 법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법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느니라.”

그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이것을 환하게 아는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배우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온갖 법은 환영(幻影)과 같기 때문이니라. 환영[是]으로 모양이 이뤄졌으니, 일체의 온갖 법은 다 합하여 이뤄진 것이니라. 왜냐 하면 비록 헤아릴 수 없는 현상[事]일지라도 이를 사유해[念] 보면 다 공(空)하여 존재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합하여 이뤄진 모양은 텅 빈 것이니라.

모든 법은 볼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 모든 법은 말이 없는 경지이니라. 왜냐 하면 말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처소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믿는 이는 행할 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해탈을 생각하지도 않으며, 보살의 경지를 높여 교만하지도 않느니라.”

그 부처님께서 또 이어 말씀하셨다.

“이를 듣고 배우는 이는 놀라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비유하면 허공이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구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레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 하면 바로 공(空)한 법이기 때문이니라. 보살이란 마땅히 이와 같이 겁내거나 두려운 대상이 없어야 하느니라. 보살이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야만, 결국 온갖 마군(魔軍)을 항복시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며, 일체중생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니라.”

그 화신부처님께서 이 법을 설하고 나서 곧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지금 여래[怛薩阿竭]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오신 곳이 가신 곳이며, 가신 곳이 오신 곳입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했다.

“환화(幻化)란 본래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는데, 어째서 어디에서 온다고 합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비유하면 환화(幻化)가 오는 길도 없고 가는 길도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습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물었다.

“모든 법의 처소는 어디입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자연 그대로 진실하게 머무는 곳이 바로 그 처소입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물었다.

“어느 곳이 일체중생의 처소입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작용하는 바로 그 곳입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물었다.

“모든 법은 작용할 대상도 없고 죄도 없지 않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법은 작용할 대상도 없고 죄도 없으니, 그 법은 작용하지도 않고 죄도 짓지 않습니다. 온갖 존재는 다 법신(法身)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작용하지도 않고 죄도 없다면, 어째서 사람은 그 곳을 따라 작용한다고 말하십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참으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 또한 작용할 대상도 없고 죄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사람들의 법이 법신(法身)이므로, 작용도 없고 죄도 없는 가운데, 작용하는 대로 얻으니, 이 셋29)은 평등합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물었다.

“이 세 일은 평등합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진리 그대로 옴[如來]이 평등하기 때문에 이 세 일도 평등한 것입니다.”

파지반구리보살이 또 물었다.

“진리 그대로 옴은 작용도 없고 죄도 없고 얻음도 없는데, 이 세 일을 무엇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말했다.

“진리 그대로 옴은 작용도 없고 죄도 없고 얻음도 없으니, 그 작용과 죄와 얻음은 그 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평등합니다. 그 죄는 벗어나고 나면 보이지 않습니다. 죄를 이미 벗어났다면, 미래에도 진리 그대로 옴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처소에서는, 사리불(舍利弗) 존자와 아난(阿難) 존자와 그 외 훌륭한 비구들은 모두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문수사리보살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사리불이 말했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저 뛰어난 보살은 하는 일이 법신(法身)을 떠나지 않았으니, 법으로 감동시키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지혜 있는 이라면 그 누구도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저 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보살의 배움에는 배울 대상이 없어야만, 말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느니라. 심은 대로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이 저 보살은 지혜를 배워 지혜를 얻어서 이렇게 지혜대로 설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너도 만일 이렇게 배운다면 스스로 이 지혜에 이르리라.”

정중광명(頂中光明)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성문(聲聞)의 배움은 무엇이며, 보살의 배움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정된 견해에 집착한 배움을 성문의 배움[弟子學]이라고 하며, 한계도 없고 걸림도 없는 배움을 보살의 배움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문은 배움이 작고 약하니 그 지혜도 작고 약하지만, 보살은 배움이 크고 넓으니 그 아는 바도 끝이 없고 말도 걸림이 없는 것이니라.”

광지(光智)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감응(感應)을 내리시어 문수사리보살을 이 법회에 오도록 하옵소서. 그 이유는 이 법회의 대중들이 문수사리보살로부터 잃지 않고 간직할 법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 하면 문수사리보살의 설법은 매우 깊고 미묘하므로,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원을 따라 각각 알맞은 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감응(感應)을 내리시니, 문수사리보살은 즉시 훌륭한 스물다섯 보살과 천자(天子)들과 함께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머물렀다.

광지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보살은 어째서 다른 곳에서 법을 설하였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이곳에 오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시니, 혹시라도 저의 설법이 여래의 뜻에 알맞을지 알맞지 않을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한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광지보살이 또 물었다.

“어떤 법을 설해야 여래의 뜻에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아시고 계십니다.”

광지보살이 또 말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보살은 여래의 뜻에 알맞은 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제가 아는 대로 말하라고 한다면 조금은 할 수 있습니다.”

광지보살이 또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설할 바를 그대로 달라짐이 없이 설법해야만, 여래와 같고 불가사의한 본 바탕과 같게 됩니다. 그러니 법대로 머물러서 법대로 설해야만, 여래의 뜻에 알맞게 됩니다.

또 중지하는 일도 없어야 하고 단절하는 일도 없어야 하며, 인연하지도 않아야 하고 인연의 대상도 없어야 하며, 불어나는 일도 없어야 하고 줄어드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설해야만 여래의 뜻을 잃지 않습니다.

또 자신도 잃은 일이 없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잃지 않게 해야 하며, 법도 잃지 않아야 하고 생사(生死)도 잃지 않아야 하며, 열반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해야만 여래의 뜻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잘했다. 문수사리가 말한 그대로 해야만, 여래의 뜻에 알맞게 되리라. 왜냐 하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니, 알맞게 중도(中道)에 있으면서 달리 생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문수사리가 삼매를떠나지 않고 법사(法事 : 바른 법에 관한 일)를 설했으나, 예전대로 모든 법이 불어난다거나 줄어든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수사리가 설한 그대로 하면, 여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설했을 때, 8백 천자(天子)가 다 무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다.

이 때 이 법회에 2백 천자가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보살심(菩薩心)을 일으켰으나, 그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타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각각 생각하였다.

‘불법(佛法)은 끝이 없으니, 성불(成佛)하기란 너무 어렵다. 우리들은 보살의 배움을 그만두고, 차라리 나한(羅漢)이나 벽지불(辟支佛)의 법을 취하여 열반에 드는 것만 못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이들에게 보살도(菩薩道)를 성취할 능력이 있음을 아시고 계셨다. 부처님께서 이들이 타락하기 전에 그 마음을 되돌리시기 위하여 한 거사[迦羅越]30)를 변화시켰다. 그 거사는 온갖 맛난 음식으로 가득 찬 발우를 가지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를 올렸다. 그리고 부처님께 발우를 올리면서 말했다.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이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곧 발우를 받으셨다.

문수사리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아뢰었다.

“공양을 받으셨으니 옛 은혜를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리불(舍利弗)이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부처님께서는 지난 세상에 문수보살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기에 (옛 은혜를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리불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문수사리보살은 과거에 부처님께 어떤 공덕을 베풀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이제 너의 의심을 풀어주리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발우를 땅에 내려 놓으셨다. 그 발우는 곧 아래로 빠져 온갖 부처님의 세계로 내려가더니, 바로 아래쪽에 있는 72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를 지나갔다. 이렇게 내려간 발우는 한 세계에 이르렀다. 그 세계의 이름은 명개벽(明開闢 : 漚呵沙)이며, 그 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의 이름은 광명왕(光明王 : 茶毘耶羅)으로서, 현재 설법하고 계셨다. 그 발우는 붙들지 않아도 그 부처님 세계의 허공 가운데 떠 있었다. 발우가 지나온 모든 세계의 부처님의 시자(侍者)들은 허공에 떠 있는 발우를 보면서 그들의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발우는 어디서 왔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다.

“위쪽에 인(忍 : 沙呵)31)이라고 이름하는 세계에 석가모니[釋迦文]라는 부처님이 계신다. 이 발우는 바로 그 부처님이 보내셨느니라. 왜냐 하면 타락한 보살들의 마음을 깨우치시기 위해, 신통변화로 감동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발우를 찾아오너라.”

사리불은 곧 자기 지혜의 힘에 부처님께서 내리신 위신력(威神力)을 받들고 1만 삼매에 들어가서 1만의 부처님 세계를 지나 끝까지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사리불은 삼매로부터 깨어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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