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아유월치차경(佛說阿惟越致遮經) 03. 중권-1

불설아유월치차경(佛說阿惟越致遮經) 03. 중권-1

7. 불환품(不還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보살에게 불환(不還:阿那含)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는가?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곳곳에서 조작되어진 행동을 하지만 이러한 모든 존재를 초월해서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체득하고 모든 행업을 덜어 없애며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항복받았으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법을 깨달았으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니라.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어 세간의 지혜를 버리고 부처님의 밝은 지혜에 들어가 머무름이 없는 경지를 획득하고 모든 법이 평등함을 깨달아 적멸한 세계를 성취하고 범부의 세계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성인의 도에도 머물지 않고 모든 악한 길을 막으며, 정욕(情欲)에서 벗어나기를 힘쓰고 모든 음식에 대하여 집착하여 먹지 않으며, 최상의 밝은 경지를 체득하였느니라. 모든 소견을 뽑아버려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모든 사견(邪見)인 예순두 가지 견해를 없애며, 이미 나고 죽음을 초월하여 니원(泥洹:涅槃)을 관찰하였느니라.

무위(無爲)의 경지를 뛰어넘어 모든 생각을 버리고 경적(經籍)도 따르지 않고 악한 세계에 물들은 것을 깨끗이 하며, 교만함을 버리고 스스로 크다는 생각을 갖지 않느니라.

지혜롭지 못하여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근원에서 벗어나고 애욕(愛慾)을 깨뜨려 무너뜨리고 숱한 어둠을 없애며, 탐락(貪樂)을 뽑아버리고 진애(塵埃)를 버리며, 교만과 스스로 방자함 등 이러한 장애를 모두 쉬어서 세간의 지혜를 영원히 여의나니, 그런 까닭에 불승(佛乘)만을 생각하고 성인의 평등한 지혜를 획득하느니라.

보살은 생각을 버리고 애욕의 세계도 버리며, 본래부터 청정한 과거 성현의 적멸한 가르침을 익히나니, 그 지혜는 가장 뛰어나서 여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나타나게 하려는 생각을 하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이 극진히 존경하되 이보다 더함이 없느니라.

보살은 이렇게 모든 생각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는 평등함을 획득하고 나서 일체의 의심 많은 세계를 제거하여 없애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이치를 체득한 뒤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느니라.”

다시 아난에게 물으셨다.

“저 어떤 사람이 도에 머물지 아니하면 마땅히 이들을 다 어떻게 도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곧 깨달음이니 중생들이 그런 것을 밝게 알면 그것이 바로 도에 머무는 것이니라. 능히 이와 같이 깨달으면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리니, 왜냐 하면 공(空)한 일과 중생 세계는 불가사의하고도 평등한 도의 지혜[道慧]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것을 분별하여 알면 곧 중생의 종류는 공한 것이고 청정한 세계의 중생도 공한 것이어서 중생이라는 생각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라.

일체의 여러 사람도 허공과 특별히 다름이 없어서 이 몸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얻을 것도 없으며 머무르는 것도 아니니, 저것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니라. 마치 허공의 모양이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과 같아 일체의 생각을 없애서 무념(無念)으로써 도를 성취하고 중생이라는 생각을 덜어 없애느니라.

허공의 모양은 버릴 것도 없고 버리지도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다 평등하고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은 버릴 것도 없으며 놓아 버려야 할 것도 없고 평등한 까닭에 얻을 것도 없으니, 이미 얻을 것이 없으므로 오지 않는 것이니라. 이렇게 헤아려 아는 것이 곧 불환(不還)이요, 이렇게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에 대하여 깨달아 알면 모든 걱정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저것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작용 있는 행업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나니 
모든 머무는 바를 덜어 없애면 
이것을 불부환(不復還:阿那含)이라 말하네.



가고 옴에 대하여 밝게 알고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머무는 바도 얻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돌아오지 않음이라 하느니라.



저 범부의 행업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연도 아니요 헤아릴 것도 없으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은 다시 오는 일이 없고 
또한 모든 법은 가는 것도 아니니 
가고1) 옴이 없음을 얻으면 
이것을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그 사람은 일찍이 머물지도 않고 
세 가지 길에 가지도 않으며 
밝은 부처님의 도를 이룩하나니 
이것을 곧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결정코 모든 욕심 끊어버리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아 
보리도를 증득하면 
이것을 곧 불환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소견으로 행하는 바 
예순두 가지 견해를 분별해 알면 
저 경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곧 불환이라고 하느니라.



이 법은 처음과 끝도 없고 
이미 모든 두려움도 여의었으며 
이 지혜는 여여(如如)하여 본래 없는 것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네.



무위적멸(無爲寂滅)에 상응하고 
모든 번뇌[塵勞]에 집착하지 않으며 
저 모든 생각 제거해 버리나니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이미 모든 악한 세계를 끊어버리고 
숱한 번뇌의 집착 씻어버리며 
적연 무위(無爲)의 경지 닦으면 
이것을 곧 불부환(不復還)이라고 하느니라.



저 악한 마왕과 
그 관속(官屬)의 무기를 항복받으며 
갖가지 생각 영원히 없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어리석음과 근심ㆍ걱정 뽑아버리고 
애욕의 뿌리 끊어 없애며 
왕성한 탐욕과 음욕 끊어버리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는다 하네.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아 없애고 
수많은 생각 뽑아버리면 
구경(究竟)의 높은 지혜에 이르리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不復還)이라고 하느니라.



온갖 근심 걱정 떨쳐버리고 
교만의 산 깨뜨려 무너뜨리며 
5음(陰)을 끊어버릴 생각 가지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불승(佛乘)에 뜻을 두어 광명 밝히니 
불승보다 더 높은 것 없네.


애욕의 근심 탐하지 않으면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의 복장처(伏藏處) 이미 깨달았으니 
모든 복장 가운데 제일이어라.


과거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이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저들은 불승[尊乘]에 머무나니 
불승보다 더 높은 것 없다네.


모든 의심 끊어버렸으므로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 받아들여서 
불도(佛道)에 머물게 하고 
성인의 궤도에 오르게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공하여 세계 없음을 밝게 깨닫고 
중생의 세계도 평등하다는 것 알며 
멀리 모든 집착과 생각 여의면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일체 세계를 밝게 깨달으면 
법계 또한 이와 같나니 
중생은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알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중생의 세계를 깨닫고 나면 
허공과 같아 생각할 것 없네.


모든 법 이와 같음을 아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그 사람은 무심(無心)하여 
모든 생각 물리쳐 버렸네.


모든 생각으론 도를 이루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불환(不還:阿那含)에 대하여 찬탄하여 말하였나니 
모든 것은 영원히 오지 않고 
부처님의 도에 머무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에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 보살에게 불환에 대하여 찬탄해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8. 무착품(無着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보살에게 무착(無着:阿羅漢)에 대하여 찬탄하시고 훌륭하게 여기셨는가?
이 보살은 모든 행업[行]을 소멸하고, 살고 있는 국토에서 떠나며, 모든 부처님께 의지하지 않고 중생들을 해탈시키느니라.

조작함도 없고 번뇌[塵勞]의 때[垢]와 괴로움ㆍ즐거움도 없으며, 색욕(色欲)을 멸하여 없애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까닭에 무착(無着: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욕애(欲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탐내지 않음이 이와 같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침범함과 속임을 버리고 처소에 머무는 일도 없으며, 모든 법은 공(空)한 것이어서 적정(寂靜)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모든 생각을 익히지 않아서 여러 가지 생각이 안정되면 모든 생각이 소멸되고 중생이라고 헤아리지도 않아 집착하는 바를 소멸하며, 모든 법은 공한 것임을 지혜로써 깨달아 집착하는 일이 없고 부처님의 도는 생각할 것이 없다고 알며 불호(不怙:菩提)를 원만하게 성취하면 그것을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전적(典籍:菩提法)을 연설하여 갖가지 번뇌[瑕]를 파괴하며, 과거 세계의 등정각(等正覺)의 가르침과 미래ㆍ현재의 부처님 가르침을 찬탄하고 방일하지 않고 청정하여 더러운 때를 여의며, 오직 조용하고 고요[寂然]함을 논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보살대사(菩薩大士)가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부처님 도에 머물게 하고 성인의 길을 구하게 하며, 모든 법에 대하여 흠모하여 집착함이 없게 하고 자비한 마음 원만하게 갖추며 부처님 같은 어짊을 시행하게 하여 영원히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게 하나니 그의 자비가 이와 같은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을 교화하여 성취시키되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며, 끝내는 큰 자비로써 집착하여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밝게 깨달았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은혜를 베풀고 도법(道法)을 보되 법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이와 같이 끊어 없애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깨달음의 힘[覺力]을 찬양(讚揚)하여 원수(願數)가 있음을 헤아려 머무름 없음을 획득하고 모든 감관을 뽑아 제거하며, 중생을 교화하여 청정한 법을 깨닫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도의(道義:菩提)를 성취하게 하여 영원히 의지하지 않게 하는 까닭에 불착(不着: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의지할 것이 없는 처소를 보고 탐하지 않는 몸을 만들며, 온갖 물질에 대하여 의지하지 않고 중생의 모임을 구하되 온갖 물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유위법(有爲法)은 이와 같이 근본이 없음을 강설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노닐지만 가더라도 이를 곳이 없고 본말(本末)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부처님의 거룩하고 존경스런 모습을 보고 도를 깨달았으나 적멸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의지할 곳이 있지도 않나니 이와 같은 국토를 건립하여 한량없는 국토에 이 모든 나라가 평등하며, 세계에 대하여 조롱하거나 희롱하지도 않고 청정하되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며, 복덕의 경지에 머물되 공(空)하여 모든 국토는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물러남이 없는 경지요 여인도 없으며, 모든 번뇌와 수면(睡眠)의 의지를 놓아 버리며, 부처님의 거룩한 국토를 증득하고 음개(陰蓋)의 국토를 없애며, 마군과 그 권속을 항복받고 모든 원수와 적(敵)을 제거하며, 조용하고 고요한 국토에 들어가 감동을 일으켜 변화시키며, 서원이 있는 나라를 세워 나라와 중생을 구원하느니라.

보살은 부처님의 위엄과 광명을 원만히 갖추고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물며, 부처님의 의지를 깨달아 획득하고 청정한 법인(法印)으로 중생을 인가하며, 많은 국가를 안락하게 하고 일체의 영락(瓔珞)같은 보배로 장식하는 일과 수많은 번뇌의 티끌을 제거해 버리나니, 이는 최후의 경지인 작용이 없는 지위[無爲地]에 머무는 이로서 모든 중생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니라.

이와 같은 형상과 미묘한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을 성취하면 모든 법은 공(空)한 것임을 깨달아 도행(道行)을 구족(具足)하는 까닭에 무착(無着: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온갖 즐거움을 다 떨쳐버리고 모든 감관[根]에 대하여 옳게 여기지 않으며, 일체의 법에 대하여 성내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적멸하고 평등한 수레를 타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지혜이니, 몸과 입과 뜻으로 다함께 최상의 적멸한 경지를 닦으며, 성인의 도를 흠모하여 구하면서도 그 궤적(軌跡)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자비로 불쌍히 여기고 마음이란 없는 것이요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수히 많은 백천억의 중생들에게 권유하고 그들을 교화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큰 도를 머물게 하며, 우매한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법을 생각하고 모든 중생은 평등한 것임을 깨닫게 하느니라.

수없이 많은 대중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리의 마음을 내어 등륜(等倫:이와 비교하여 동등한 것)이 없는 데 머물게 하며, 모든 법 은 평등하고 공하여 특별히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본래 공한 것이요, 지혜도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 생각이 없는 데에 머물게 하느니라.

아라한이 이와 같이 의지할 대상이 없음을 이미 알고 난 뒤에 이와 같이 그 중생들의 반응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모든 이익을 흠모하지 않고 경적(經籍)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감관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여의고 이와 같은 법을 강론하되 영원히 말이 없으며, 여러 곳에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되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도 없으며, 중생들을 구원하여 모든 집착을 끊게 하고 몸을 탐하는 생각을 면하게 하고 교만을 초월하게 하며, 모든 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느니라.

중생들이 온갖 물질의 모양에 집착하면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질ㆍ아프고 가려운 느낌[痛痒:受]ㆍ고정관념[思想:想]ㆍ나고 죽는 행업[生死:行]ㆍ인식작용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고 범부를 동요하지 않으면서 해탈케 하여 불법에 머물게 하되 도적(道迹)에 집착하지 않게 하느니라.

의지하지 않도록 교화하여 정진에 힘쓰게 하고 이로움으로 인도하여 의지하게 하되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며, 힘써 구제하고 권유하여 보살의 마음을 내게 하느니라.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넓히고 도에 인연 있는 이를 구원하며 온갖 혼란한 생각과 어리석고 속이는 마음을 여의게 하며 삼매(三昧)를 원만히 갖추고 정의(定意)을 성취하게 하여 갖가지 생각을 품지 않게 하느니라.

삿된 지혜를 없애서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혜를 깨닫게 하며 성문의 마음을 일으켜 삿된 길[反迹]을 사모하는 이를 교화하고 부모ㆍ처자ㆍ사택(舍宅)ㆍ형제ㆍ자매를 의지하여 은애(恩愛)를 일으키지 않게 하며, 국토와 재색(財色)ㆍ온갖 물질[萬物]에 집착하여 탐구(探究)하는 생각과 번뇌[塵勞]에 전도된 이를 제도하느니라.

온갖 물질에 집착하는 모든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집을 떠나서 적정(寂定)을 닦게 하고 게으름과 하열한 따위의 모든 모습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가서 욕망과 번뇌의 법으로부터 해탈케 하며, 도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고 두 가지 마음을 갖지 않게 하니, 일찍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곧 무위법(無爲法)이요 생사법(生死法)이니라.

아무런 인연할 것 없는데 인연하고 세속의 마음을 도의 뜻이라 하며 보호하여 금지하는 계율을 범하는 이러한 무리들을 인도하여 교화하고, 두 가지 모양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이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이 없도록 하며, 모든 근본에서 해탈시키기 때문에 무착(無着: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우(衆祐)와 현성(賢聖)께서는 정진(精進)을 게을리 하고 남자와 여인(女人)으로서 미련하고 총명한 이와 밝고 성스러우며 어둡고 막힌 이러한 이들을 모두 인도하여 이롭게 하고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며, 중생들을 구원하여 전진시키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성취하여 혹 수기[別]를 받더라도 또한 거기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도에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이 뜻을 분별해 알아서 두 가지 생각을 내지 않고 성현의 길을 체득하느니라.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반니원(般泥洹:般涅槃)에 이르며, 모든 망상을 여의고 의지하지 않으며, 이 모든 법을 인연해서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고, 이와 같은 자연의 법칙으로 모든 법을 깨달아 알며, 근본이 없는 법을 연설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행업 없애고
존중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며
모든 말과 가르침 다 버리면
그런 까닭에 무착(無着:阿羅漢)이라 하느니라.

모든 진애(塵埃) 뽑아버리고
괴로움과 걱정에서 벗어나며
중생들을 구제하므로
이를 이름하여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살펴보면 중생도 얻을 수 없는 것이요
욕망과 때[垢:번뇌]도 또한 그러하며
모든 법도 다 얻을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수많은 뒤바뀐 생각 제거하고
마음 다져 의혹 없는 곳에 머물며
모든 법이 공(空)한 것임을 분별해 아니
그러므로 무착이라 하느니라.

공의 이치 깨달아 알아서
모든 생각과 집착 없으며
일체의 뒤바뀐 견해 제거해버리면
이를 이름하여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생각 다 없애고
중생이라는 생각과 악한 생각까지도 소멸하여
마음 속에 삿되고 혼란함이 없으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공한 이치 깨달아 의지하지 않으니
부처님의 도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
더더욱 힘써 크게 정진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경(經)의 인연을 강설하고
담담하고 고요하여 조롱하고 희롱함이 없으며
중생들을 권유하여 도덕 세우면
이것을 이름하여 무착이라 하느니라.

참된 사람 자비를 수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되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본래 없는 것인 경적(經籍) 강설하여
중생들에게 은혜 베풀면서도
일찍이 중생이란 생각 하지 않으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바르고 진실한 근(根)ㆍ역(力)ㆍ각(覺)에 대하여
중생을 위해 밝게 설법해주고
스스로도 이런 지혜 체득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중생들이 적정(寂定) 깨달아
청정한 법으로 보리[道] 이루고
큰 성인의 가르침을 강설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모든 물질 믿지 않고
눈 앞에 나타난 물체를 보되
일체는 허공과 같아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알면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 국토에 의지하지 않고
국토에 있을 적엔 인의(仁義) 행하며
평등한 깨달음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느니라.

진인(眞人)의 바른 가르침 깨달아
볼 게 없음을 관찰하고
성현의 깨달음 자세히 살피면
이것을 무착(無着: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자연 그대로의 국토를 성취하고
지금 나를 증득하여 깨달으면
최후의 경지엔 본래 비롯함도 없나니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알음알이 제거해 버리고
마음 속에 성냄과 해칠 생각 없어서
응진(應眞:阿羅漢)과 같아 한스러움 없으면
적연한 도[寂然道:菩提道)를 닦아 성취하리라.

마음 정해져서 멸하지 않고
고요한 데 머물러 일으킴 없으며
도를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인물(人物)에 대하여 더하거나 동요치 않고
중생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와 같으며
수많은 중생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아
그들을 교화하여 도의 이치에 머물게 하네.

중생과 보리의
영원히 생각 없는 데 머물러서
밝은 지혜로 헤아려 평등한 줄 알면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평등하여 다른 형상 없으며
모든 법 또한 이와 같나니
마음에 진정 이와 같은 도 깨달으면
그런 까닭에 생각이 없다 말하네.

이른 바 응진(應眞:阿羅漢)이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들 위해 밝게 분별하여 깨우쳐 주되
모든 법 고요하여 의지할 게 없다 말하네.

중생 위해 법의 이치 설하되
비록 말은 하나 가르침 없으니
널리 한량없는 중생 제도해도
중생 보고 동요하지 않느니라.

중생이라 해도 얻을 수 없는 것
모든 중생의 집착을 끊어주네.

중생 건져 사견(邪見)을 여의게 하고
모든 중생을 고뇌(苦惱)에서 건져주네.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머무르는 처소도 없고 소멸함도 없네.

중생의 모든 생각 관찰하여
중생들을 곤액(困厄)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모든 물질은 늘어나거나 무너지지도 않고
아프고 가려운 느낌도 이와 같으며
고정관념과 인식작용ㆍ나고 죽는 행업에서
제도하는 것도 다름이 없느니라.

현성(賢聖)의 법에도 동요하지 않고
범부(凡夫)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으니
부처님 이치에 머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느니라.

중생들은 과보(果報)에 대한 생각과
연각(緣覺)의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이 생각 초월하여 각의(覺意)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이 법 설하였다네.

도심(道心)을 일으켜
언제나 보시를 의지하며
지계와 인욕도 이와 같이 하므로
그런 까닭에 의지할 대상 아님을 강설했느니라.

뒤바뀐 견해 깨달아
정진하여 닦고 익혀서
이러한 모든 생각 끊어 없애니,
그런 까닭에 법에 집착하지 말라고 설하느니라.

도의(道意)3)의 생각 내거나
삿된 지혜 만약 밝아지면
여기에 의지하지 않으리니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이 법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약간의 그 무엇도 없음을 깨달아서
이와 같은 법 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無着: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 헤아리므로
성문은 이런 생각 많이 하나니
이러한 생각 제거하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에 대해 생각함 없고
약간의 그 무엇 없음을 깨달아서
이 근본 없음을 연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부모와 형제와 아들은
공적(空寂)한 것이건만 있는 것이라 집착하며
나고 죽은 행업을 인정하니
부처님도 이룰 수 없느니라.

아내와 자매(姉妹)를 사모하여
의지한 채 허망함에 쏠리므로
이를 의지해선 안 된다고 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나고 죽는 일 만들어 내고
친족에 대한 생각 일으키며
인연 따라 정욕(情欲)을 내어
나의 오랜 벗이라 하네.

스스로 제 몸을 나라고 인정하면서
숱한 모든 일에 마음 끄달려
분별심 일으키다가 뒤바뀐 생각에 떨어지나니
기필코 미군의 가르침에 머물게 되리.

나고 죽는 행업과
시종(始終)의 재앙과 환란 다 버리고
니원(泥洹:涅槃)의 덕 찬양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을 칭찬하여 설하느니라.

번뇌의 때에 대한 법과
흥망성쇠와 다툼을 강설하지만
이 모두는 말소리에 불과할 뿐이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중생들은 대부분 이익 다투고
방일하며 온갖 물질 탐하나니
이러한 중생들 구제하려는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집을 연모하면서도
마음으론 도 배울 생각 내나니
미련하고 아둔한 생각 이와 같기에
무착을 드러내어 찬양하였네.

오직 비천(卑賤)한 법만 보면서
참되고 오묘한 진리는 보지 않으며
갖가지 생각 살피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해탈시켜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네.

범부의 이치 제거해버리고
오로지 불법만을 흠모하여 정진하면서
중생들의 탐욕을 뽑아 없애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만약 선악의 행업을 보고도
이와 같이 많은 법에 집착하나니
한량없는 중생들 이렇기 때문에
구원하여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네.

모든 훌륭한 상호 갖추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진하면서
이와 같은 모양에 집착하지만
어진 이는 여기에서 해탈하였네.

모든 부처님의 국토 장엄하고서
존상(尊上)의 법 성취하고는
바른 깨달음의 이익에 의지하나니
해탈하여 무착의 경지에 이르렀네.

무위법(無爲法)의 이치
얻었건 얻지 못했건 간에
이것은 성인의 도를 수행함이니
바른 서원 세울 수 있느니라.

계를 지키지 못하느니 범하지 않느니 하거나
방일하느니 지혜롭느니 하면서
어둡고 캄캄하고 연약한 사람이
문득 이 세 가지 일에 집착하느니라.

중생들 이런 모습에 집착하여
모든 생각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약간의 생각이라도 덜어 없애야 하므로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거룩하고 많은 복전도 생각하고
또한 덕이 없다는 생각도 내어
범인(凡人)의 법을 분별하나니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이와 같은 행업 지어서
남자다 여자다 분별하거나
현성(賢聖)이니 범부(凡夫)니 하고 분별하면
이것은 곧 두 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이 두 가지 일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행위로서
이 두 가지 사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해탈시켜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느니라.

흔들림에 이르러서도 물러남이 없고
조작하면서도 짓는 일 없으니
성인의 도에 가까워지게 하려고
이런 마음 일으켜 이런 생각 하게 하였네.

큰 도를 획득하고서
더 이상 없앨 것 없다는 마음 내지 않네.

마음 속에 항상 이런 생각 품고서
무위(無爲)의 도를 구하느니라.

그들은 중생을 받아들이니
어진 사람이 우매한 중생을 염려하네.

이런 까닭에 무착이라 말하나니
모든 형상을 구하는 중생 제도한다네.

이것은 곧 보살법이니
아라한의 몸으로 나타나되
그런 인해 법인(法忍)4)을 일으키지 않으며
스스로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아라한의 법 강설하나니
이것은 마땅히 보살이 하는 일
집착 없는 법에 머물면서
최상의 도[無上道]를 증득한다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로서 무착행을 하는 일에 대하여 찬탄하셨으니 이것이 곧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하느니라.”

9. 성문품(聲聞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 보살이 성문(聲聞)이 되는 것을 빛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보살대사(菩薩大士)는 수없이 많아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법(佛法)을 듣고 경적(經籍)을 분별하게 하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성현의 도에 대해 듣고 나서 청정하여 방일(放逸)하지 않게 하는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무위(無爲)의 법을 듣고 편안해 하며 감로(甘露)를 즐기며 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의지(意止)ㆍ의단(意斷) 등 이러한 일들을 원만하게 갖추어 빠르게 도혜(道慧)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공혜(空慧)를 증득하여 이 몸은 견고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지만 어둡고 우매한 사람들은 꽉 막혀 깨닫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그들은 자신의 몸을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경계[入]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색(色)이라 한다는, 이런 이치를 뚜렷이 관찰하게 하여 불안(佛眼)을 성취하게 하나니, 그 눈은 널리 불가사의한 경계를 보게 되리라. 눈에 의지하는 대상을 여의면 끝내는 이 눈을 일체법을 성취한 눈이라고 하리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이 모든 법을 헤아리되 소리는 마치 메아리와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음성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말한 이도 없고 또한 들은 이도 없으며, 냄새에 대해 냄새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냄새를 맡지도 않나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갖가지 냄새를 맡았지만 이 일을 다시 헤아려 보면 아무런 냄새도 맡지 않은 것과 같나니, 이는 바로 사물에 미혹5)되어 그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러한 모든 냄새를 중생들이 맡은 것은, 비유하면 마치 꿈 속의 일과 같아서 견고(堅固)한 것이 아니니라. 이러한 음성을 깨달아 알면 이것을 곧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혀에 대한 맛에 있어서도 그 맛 또한 공한 것이니, 마치 고깃덩이가 혀가 된 것과 같아서 혹 지혜로운 이는 이를 깨달아 맛에 미혹되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거품 덩어리와 같아 서 모든 논리에서 벗어나므로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지혜가 밝은 이는 이를 관찰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아느니라. 만약 이러한 맛에 대하여 집착하고 생각하는 이는 악한 죄를 짓게 되나니, 여섯 경계를 생각하여 맛에 대한 분별심을 내지 말라. 마음으로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서 생각이 방일하지 않아야 하리니, 만일 이런 이치를 알아서 마음으로 작용이 없음을 생각하며 각각 분별하여 들은 이치를 말하거니와 그 듣는 것까지도 공한 것임을 알면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저 모든 경계[入]의 일들을 밝게 깨달아서 그 들음이 공한 것임을 알고 몸도 스스로 조용하고 고요한 것임을 깨달아 일찍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는 바를 알지도 못하니, 생겨나는 것도 없고 생겨나지도 않는 것을 성인의 도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또한 듣는 것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이 몸은 자연 그대로일 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보시(布施)에 대하여 듣고 은혜로써 그 법을 행하는 것이 불가사의하니,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따라서 부처님의 도를 성취하셨느니라.

마음에 보시하는 바가 있으되 그 마음을 보지 않으며 의지(意志) 없음으로써 성인의 지혜를 체득하나니, 왜냐 하면 종자를 심어서 반드시 그 열매를 얻는다지만 그 과실은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과보를 설하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며, 의식(衣食)의 보시에 대하여 듣고 물질의 보시에 대하여 헤아려 보면 그 보시는 가장 엷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모든 희사[捨] 가운데 법시(法施)가 가장 존귀하니, 탐하거나 애석하게 여기지도 말고 보시한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록 베푸는 것이 있을지라도 바라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되나니, 비유하면 마치 환술로 만든 사람은 마음과 뜻이 없어서 아무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수행하여 성취하고자 하면 보시를 한다는 생각은 없어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보시를 하고도 희망하는 것이 없으면 도를 수행함이 순조롭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음성과 일체의 진애(塵埃)를 여의고 전혀 듣는 것도 없으며 모든 유위법을 여의나니, 음성으로써 불법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음성을 분별하고도 의지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두 가지 일이 음성을 낼 때 비록 두 가지 일이 있으나 아무것도 존재함이 없으며, 인연이 합해져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법음을 이루는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무앙수(無央數)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무념법(無念法) 듣도록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성문(聲聞)이라 말하거니와 
이는 곧 용맹한 보살이니라.



적정(寂定:菩提)의 도 듣고 
편안해 하고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한량없는 중생들이 법을 듣게 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담박(澹泊)하고 안온(安穩)함을 듣고 
모든 즐거움은 형상이 없다 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거니와 
조용하고 고요하여 작용 없는[無爲] 경지에 이르네.



각(覺)ㆍ근(根)ㆍ역(力)의 법 듣고 
의지(意止)와 의단(意斷)을 원만히 갖추어 
스스로 최후의 경지 이루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이 몸은 공한 것으로 
얻을 수도 없고 견고하지도 않다는 말 듣고도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집착하나니 
그런 까닭에 이 몸에 대하여 밝게 알아야 하리라.



눈으로 보는 것도 없나니 
듣지 못함도 이와 같건만 
중생들은 보는 바의 침범을 받아 
어둡고 막혀 깨달아 알지 못하네.



만약 불안(佛眼)을 성취하면 
평등한 눈6) 불가사의하니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면 
어둡고 우매한 모든 중생 개화할 수 있으리라.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 경(經)전 듣고서 
모든 법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니 
이런 까닭으로 명호(名號)를 얻었기에 
그 이름 성문이라 하느니라.



저 듣고 받아들임 없는 이치가 
메아리와 같음을 깨달으면 
말하는 이도 볼 수 없고 
듣는 이도 없음을 알리라.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이름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듣고 받아들이게 하지만 
근본을 헤아려 보면 듣는 것도 없나니 
음성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갖가지 향 냄새 맡았지만 
황홀하여 얻을 수 없거늘 
공한 냄새에 빠진 것과 같느니라.



냄새에 대하여 이와 같이 깨달아 
일찍이 냄새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거늘 
한량없는 사람들이 그 뜻을 잃어버렸으므로 
보살이 그들을 인도하여 깨우쳐 주느니라.



혀를 살펴보아도 의지할 대상 아니니 
고깃덩이론 맛을 모르기 때문이네.


가령 고깃덩이가 단맛 안다면 
혀도 마땅히 그것을 인식해야만 하리라.



이 모든 생각은 의지할 게 없으니 
좋은 것 생각하면 흉하고 위험하리.


여섯 가지 경계 생각하면 안 되나니 
모든 맛의 종류 깨달아 알아야 하네.



보살은 매우 용맹스러워 
눈으로 보고 분별하여 알며 
들음으로 인하여 이룩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제 몸을 분별해서 
이 몸은 자연 그대로 공한 것임을 아나니 
이것이 정녕 허무한 것임을 깨달아 알면 
나지도 않고 생기게 하는 이도 없음을 알리라.



만약 일으킴이 없으면 
이것은 곧 성현의 도 아는 것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법을 듣게 하므로 
이것을 성문이라고 하느니라.



마음 헤아려보면 본래 청정하여 
형체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 
이것을 중생이라 말하지 말라.


그 이치 깨달으면 성문인 것을.



마치 요술로 만들어낸 것과 같아 
멸하여 없어지면 또한 공한 것 
만약 갖가지 모습 7)을 보고 
깨달아 알면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 보시법에 대하여 듣게 하나니 
법시(法施)는 생각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며 
이 법은 곧 성인의 길이라서 
그대로 따르면 불도(佛道)를 이루리라.



그 본래의 종자 따라서 
열매를 얻음도 이와 같으니 
보시는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무념대로(無念大道)를 성취하리라.



의식(衣食)을 보시함은 그 복이 엷고 
법시만이 가장 뛰어나니 
버리되 마음으로 애석해 하지 않으면 
이것을 성혜도(聖慧塗:菩提道)라 하느니라.



생각 없는 마음 키우고 
보시하되 집착하지 않으며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 이는 
빠른 시간에 부처님 도 성취하리라.



모든 분별심(分別心) 다 버리면 
귀에 들리는 것도 없을 것이요 
합해져서 이룩된 모든 물질에서 벗어나리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부름으로 인하여 메아리 생겨나니 
그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생들 가운데 거룩하고 높은 이 되며 
더없이 훌륭한 불법 되리라.



모든 중생으로 소리 듣지 않게 하고 
일체 것에 의지하지 않게 하며 
두 법도 아니요 약간의 그 무엇도 없음을 
드러내 설법하면 성문이라 하느니라.



수많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그들로 하여금 그 설법 듣게 하여 
듣는 것이 메아리와 같음을 깨닫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부처님 도 성취하리라.



모든 부처님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듣는 것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평등각(平等覺:佛) 계신 곳 따라 
최상이신 세존을 가까이에서 섬기라.



삼천세계에 들리게 하고 
머무는 곳 허공 같으니 
중생을 헤아려보면 적멸의 경지에 머문 것과 같고 
니원(泥洹:涅槃)의 형체 없음과 같네.



세상 사람은 생각에 집착하고 
4대(大:地ㆍ水ㆍ風)에 집착하여 의지하지만 
그것은 허공일 뿐 
니원과 상념(想念)은 다름 없다네.



모든 종자 이와 같음을 알아 
견고한 것이라 생각지 말라.


나고 죽음이 본래 없는 것 
번뇌[塵勞]도 멸하여 없앨 것 없네.



온갖 물질은 최후의 경지 아니요 
중생을 살펴보아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모든 법은 적연(寂然)한 것으로 
중생계는 볼 수 있는 것 아니네.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을 듣게 하여 
밤낮으로 그와 같이 수행하게 하면 
그들은 온갖 생각 일으키지 않을 것이요 
나는 모든 사람 교화하여 듣게 하리라.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을 듣게 하면 
그와 같은 사람은 제자 되리라.


들은 법도 들을 대상이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성문을 찬탄하였느니라.



웅인(雄人:世尊)께서 지난 일 기억함은 
듣고 받아들인 최상의 법이네.


분별없이 경(經) 보아야 하나니 
일체법은 일체법 그대로라네.



보살의 설법은 치우침 없어 
이 모임의 중생 구제하고자 
중생들 위해 설법하나니 
이것을 곧 성문이라 하느니라.



무위(無爲)의 경계 강설하여 
청정하여 방일(放逸)하지 않게 하며 
말없는 법 자세히 살펴보면 
불법 또한 그와 같은 것.



법을 관찰함이 멀리 있는 것 아니니 
부처님의 강설이 바로 법이요 
저 법 또한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의지할 것도 없느니라.


그런 까닭에 제자에게 강론하여 
설법 듣고 이 가르침 따르게 하며 
모든 중생에게 권유하고 교화하여 
이 설법 듣게 하여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성문의 교화를 강설했으니 
임시로 이름 붙여 제자라 하지만 
그는 곧 보살대사(菩薩大士)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을 성문(聲聞)이라 찬탄해 말씀하셨으니, 이 이치도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10. 연각품(緣覺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보살이 연각(緣覺)이라는 것을 선설하셨는가? 이에 보살이 모든 법을 보나니, 무엇을 법을 본다고 말하는가? 모든 법은 공한 것이어서 형상이 없으므로 무너지지 않으며 현재에도 법이 소멸되지 않는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경적(經籍:法)은 불가사의하나 모든 중생들이 다 니원(泥洹:涅槃)과 같아서 안과 밖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음을 밝게 깨달아 아느니라.

모든 법은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것도 아니니, 중생의 본제(本際)는 곧 니원이요 본래 청정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다만 말에 집착하는 것일 뿐,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법을 체득할 수도 없으니 이름지어 부르기는 하지만 말로는 통하게 할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그 말이란 곧 공한 곳이어서 입으로 지껄이기는 하거니와 이미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의 본제(本際)가 곧 부처님의 도이므로 분별할 수 없으니,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스스로 색음(色陰)을 살펴보아도 그것은 다만 소리일 뿐이요, 이 색음에 대하여 그 물질이 생겨나는 것인가 살펴보지만 그것도 오직 이름을 뿐이니, 말과 음성을 여의고 나면 색음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느니라.

저 색음은 몸이 아니요 나도 아니니, 왜냐 하면 입으로 이름을 지어 부르고는 있지만 그 말도 또한 공한 것이요 생겨나거나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며 말이란 자연 그대로일 따름이다. 나에 대해서도 집착해서는 안 되니 또한 영구히 보존 할 수도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입으로 내뱉는 말이겠느냐?
눈으로 색음(色陰)을 봄으로 인하여 아프고 가려운 수음(受陰)이 일어나거니와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 소멸하고 나면 그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니, 입으로 말하는 것을 따라서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라 이름하지만 아프고 가려운 수음은 내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이른바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라고 하는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몸에 집착해서도 안 되니 또한 머무를 곳도 없거늘 더구나 말이겠느냐?
아프고 가려운 수음에 대하여 깨닫고 나서 상음(想陰)을 관찰하면 상음은 적멸한 것이어서 고정관념이 생길 수 없으니, 상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요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입으로 상음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을 말로 분별할 따름이니라. 자연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마음에 새겨두는 것도 없어야 하거늘 더구나 말이겠는가?
상음에 대하여 관찰하고 나면 나고 죽는 행음(行陰)도 소멸하리니, 행음은 나고 죽는 행업이 없어서 이른바 내 몸도 아니요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행음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거나 소멸하는 것도 아닌데 다만 말에 집착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오래도록 보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더구나 입으로 내뱉는 말이겠느냐?
행음을 관찰하고 나면 식음(識陰)이 있으니, 설령 식음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담연(湛然)하고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곧 이 식음은 다만 음(陰)이라는 소리일 뿐이니라.

왜냐 하면 식음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도 곧 공(空)할 뿐이어서 생겨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니라. 그 말은 자연 그대로여서 머물러 그침이 없거늘 더구나 언설(言說)이겠느냐?
이 5온(陰)은 모두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니, 본래 없는 이치를 분별해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입으로 말하는 것들은 모두가 인연을 상대해서 이루어진 것이니 인연이 없으면 연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강설하는 그 말도 말할 것이 없으니, 5음(陰)의 일이 여기에서 집착함이 영원히 다 없어져서 갖가지 인(因)을 짓지 않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눈앞의 모든 법을 보고 
모두가 공한 것임을 분별해 알면 
모든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리니 
최후의 경지엔 아무 모양도 없기 때문이니라.



현전한 이 법을 관찰하여서 
공하여 자연 그대로임을 깨달았네.


이것은 담박(澹泊)한 것이어서 
그 근원(根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별하여 깨달았네.



현전한 법에서 이 이치 획득하여 
5음(陰)도 이와 같음을 깨우쳤으니 
그것은 곧 평등한 깨달음이요 
생각으론 알 수 없는 연각이라네.



중생은 다 작용 없으니 
그 마음 얻을 수 없고.


본제(本際)도 일어남이 없어 
청정하여 없는 모습 무사의(無思議:不思議)하네.



일체 중생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짐도 없음을 관찰했으니 
모든 법이 동요하거나 일어남이 없으면 
이것을 무위(無爲)라 말하느니라.



중생은 모두 니원(泥洹)과 같아 
나아갈 바를 성찰(省察)해 보면 
중생 없음이 마치 그림자 같아 
그런 까닭에 무위라 하느니라.



이 명칭 쓰지 않아야 하니 
중생이 곧 니원이어서 
생겨나지도 않으며 소멸되는 것도 없는데 
다만 입으로 찬탄하여 말할 뿐이네.



감히 말조차도 모두 공(空)한 것이건만 
중생들은 말이 공한 줄 알지 못하네.


이런 까닭에 중생들 위해 
니원(泥洹:涅槃)법을 설하여 나타냈네.



입으로 내는 모든 말은 거짓이어서 
처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네.


입으로써 훈계하는 말 
근본을 구해봐도 얻을 수 없네.



음(陰)이란 본제(本際)가 없으니 
말로는 나타낼 수 없네.


모든 음성으로 일컫는 말 
중생들은 또한 생각할 수 없으리라.



중생과 열반과 
본무(本無)와 시제(始際)에 대해 
편안함을 얻어 방일함이 없으면 
구제받아 돌아갈 곳 있으리라.



본래 청정하건만 메아리에 집착하나니 
중생도 또한 그러하다네.


형체가 없어 공하고 고요하니 
본래 청정한 것 마음으론 생각할 수 없네.



법의 근본이 이와 같은데 
거짓으로 이름붙여 찬양하나니 
그 근원 얻을 수 없어 
그런 까닭에 언설(言說) 생겼네.



아첨하는 일로서 
분별해 알지 못하니 
그 실제는 공하여 없는 것 
중생의 근본 깨달았다네.



그 말은 강설(講說)에 의지하지 않나니 
말로는 나타낼 수 없고 
모든 중생들도 이와 같나니 
중생의 본제(本際)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리.



음(陰)이라고 하는 것도 공한 것 
언성(言聲)으론 분별할 수 없나니 
그 언설도 또한 이와 같으며 
본제[際]도 역시 그러하니라.



저 본제(本際) 없음도 이와 같아서 
깨닫고 나면 생각할 게 없나니 
이것이 곧 평등한 도로서 
연각(緣覺)의 무사의(無思議:不思議)라네.



본래의 색음 깨닫고 보면 
이 음(陰)은 다만 음성일 뿐이니 
이 색음은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언성조차 있을 수 없네.



자연히 놓아버리면 
이것을 형체 없는 것이라 말하리니 
나라는 것도 자연 그대로여서 
살펴보아도 처한 곳 없네.



말로써 음이라 말하거니와 
색음은 본래 몸이 아닐세.


그 음성도 모두 공(空)으로 돌아가나니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아니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 근본 구해봐도 얻을 수 없네.


말이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것 
이를 이름하여 색음이라 하네.



현전한 식음(識陰)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음성일 뿐 존재하는 실체가 없으니 
이 음(陰)도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메아리와 같은 음은 실체가 없네.



여기에서 몸을 멀리 여의어야 하니 
여의어야 할 몸은 이른바 나라고 하는 것 
헤아려보면 모두가 자연 그대로의 공한 것이어서 
일찍이 견고하게 머물지 못하느니라.



입으로 음이라 말하거니와 
식음 또한 허공과 같고 
입으로 본제를 말하지만 그것도 적멸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네.



가령 게송으로 말한 것이라 해도 
살펴보면 모두가 본래 없는 것이건만 
지혜롭지 못한 이가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색음에 대해 연설하였네.



모든 음은 언설을 여의었나니 
한량을 얻을 수 없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없으며 
처소도 없고 결단할 일도 아니라네.


번뇌도 침해할 수 없고 
또한 모든 법 조작하지도 않으니 
고집할 것도 아니요 버릴 것도 없으며 
조롱할 것도 아니요 니원(泥洹:菩提)도 아니라네.



저것은 적멸(寂滅)도 아니요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즐겁게 베푸는 것도 아니고 욕애(欲埃)도 아니며 
게으름도 아니요 정진도 아니니라.



혼란도 아니요 일심(一心)도 아니며 
저것은 또한 지킬 계율도 없네.


성취할 만한 물질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마땅히 가져서 금지하리요.



다섯 가지 세계는 생각할 대상 아니요 
생각 없음도 이와 같나니 
두려워할 일도 아니요 두려워할 대상도 없고 
해탈도 아니요 속박도 아니니라.



비록 강설하더라도 연설한 것이 없는 
이것이 색음이 들어갈 곳이며 
일체의 법음(法音)도 그러하여 
얻을 게 없으니 말에 집착하지 말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체득하고 깨달아 
다함이 없는 법 설하였나니 
이것으로써 삼매(三昧)를 성취하면 
모든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리라.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 이치 분별해 알면 
언설이 평등하고 여여하다 말하리니 
모든 법 또한 이와 같아 
말도 없으며 집착할 것도 아니니라.



인연법을 밝게 깨달은 이는 
음성이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아네.


그런 까닭에 평등도(平等道:正覺)라 부르나니 
이것을 바로 연각(緣覺)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대사(菩薩大士)가 현재 나타나 있는 명(明)과 무명(無明)을 분별하여 알며, 행(行)과 비행(非行), 식(識)과 식이 아닌 것, 색(色)과 색이 아닌 것, 여섯 가지 경계[六入]와 경계가 없는 것, 모든 습(習:觸)과 습이 아닌 것, 아프고 가려운 느낌[痛痒:受]과 아프고 가려운 느낌이 아닌 것, 은애(恩愛)와 은애가 아닌 것, 수(受:取)9)와 사수(捨受), 유(有)와 유가 아닌 것, 생(生)과 생이 아닌 것, 늙고 병들고 죽음의 걱정 등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여서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는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분별하여 알 수 있나니, 이와 같이 관찰하여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현전에 나타나 있는 것이 무혜(無慧:無明)임을 깨달아 
일찍이 의지하지 않았기에 밝아졌네.


형상 있음을 성립(成立)시키지 않음이 
마치 물 속에 그림자 같네.



설법 듣고 모든 이치 깨달아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않네.


가령 경(經:法)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지혜로운 모습이니라.



명(明)과 몸[身]은 다르지 않나니 
모든 법의 모양에 대하여 
이런 인연의 이치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느니라.



몸의 행(行)을 말하지만 
그 몸은 조작된 것이 아니니 
영원히 안과 밖이 없어서 
나고 죽는 몸을 초월하였느니라.



처음과 끝 파초(芭蕉)와 같아 
근본도 없고 모양도 없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아니니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느니라.



현전한 법의 이치 깨달아 알면 
곧 용맹한 보살이니 
그 이름 평등성(平等聖)이라 
연각의 무념(無念)과 같느니라.



모든 법을 깨닫고 보면 
적멸행[寂行]이 마치 환화(幻化)와 같고 
그 식(識)은 자연그대로임을 
현전한 법에서 밝게 깨달았으리.



이 마음 홀연히 깨달아 
식(識)과 행(行) 여여함을 알았고 
말씀하여 나타내 보인 생각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네.



식(識)이 그러한 줄 분별하고서 
모든 법에 집착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법을 안다면 
식 또한 환상(幻相)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리라.



명색(名色)이라 부르고 
몸이라 하는 모든 음성과 
갖가지 모양은 공한 것이어서 이룩할 수 없으니 
이것을 자연상(自然相)이라 말하네.



마음이 6정(情)에 끄달리지만 
환화(幻化)와 같아 말할 수 없네.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음성도 아니며 
헤아려보면 자연 그대로의 공한 것이네.



구원겁(久遠劫)을 익혀온 탓에 
모든 입처(入處)가 생기나니 
그것은 분별 때문에 생긴 습(習:觸)이거니와 
자연 그대로여서 공과 같느니라.



습(習)으로 이룩되는 것 다 공한 것이나 
생각에 끄달려 갖가지 촉감 일어나니 
만일 습이 본래 적연한 것임을 알면 
모든 법은 머무르지 않는 것인 줄 알리라.



현전한 습이 자연(自然)인 줄 알고 
갖가지 감촉[更:觸]이 다 적연한 줄 깨달으면 
흉한 죄악 일으키지 않으리니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네.



모든 아프고 가려운 수음 깨달아 
그것이 공하여 본래 청정한 줄 알면 
비유하면 생겨났다 바로 없어지는 거품과 같나니 
필경(畢竟)10)엔 공하여 형상이 없음을 알리라.



갖가지 은애(恩愛) 끊어버리고 
집착 없는 법을 따라서 
정욕(情欲)이 이미 다 끊어졌나니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네.



느껴도 느끼는 것이 아니요 
공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인 줄 알면 
형상도 없는데 무엇을 성취하리.


비유하면 마치 아지랑이와 같네.



나라는 생각 일으키지 말라.


몸이 생겨나는 것도 이와 같나니 
헤아려보면 본래 저절로 생겨난 것이어서 
근본도 없고 형체도 없네.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을 여의면 
죽음에 이르러도 두렵지 않고 
미래세에 다시는 몸을 받지 않으며 
일체가 자재(自在)함을 증득하리라.



현재에 이 지혜 획득하여 
영원히 집착하지 않으면 
연각이란 소리 듣고 
보살행을 닦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에게 연각을 찬양하셨으니, 마땅히 이것이 곧 훌륭한 방편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러한 까닭에 보살대사의 믿음을 지니고 법을 받드는 것과 8등(等)ㆍ도적(道迹:須陀洹)ㆍ왕래(往來:斯陀含)ㆍ불환(不還:阿那含)ㆍ무착(無着:阿羅漢)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찬양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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