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십지경(佛說十地經) 제4권

불설십지경(佛說十地經) 제4권

05. 보살난승지(菩薩難勝地)

보살이 이 훌륭한 지(地)의 행상(行相)을 듣고서 
법을 깨치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공중에서 꽃비 흩뿌리며 찬탄하여 말하였네.

"훌륭하도다, 금강장 대사(大士)여."



자재천왕이 하늘 대중들과 함께 
이 법을 듣고는 기뻐 뛰면서 허공에 머물어 
가지가지의 묘한 빛 구름을 널리 놓아 
여래께 공양하고 기쁨이 두루 충만하였네.



또 천상의 아름다운 모든 천녀들은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말과 노래로 부처님을 찬탄했나니 
이 모두 보살의 위신력으로 말미암아 
그 음악 속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네.


"부처님께서 서원을 세우신 지 오래인데 오늘에야 이루어지고 
부처님께서 깨치신 도는 멀고 오래인데 이제야 얻었노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천궁(天宮)에 이르러 
하늘과 사람들을 이롭게 하심이 오래인데 오늘에야 보았네.


큰 바다가 생긴 지 오래인데 이제야 움직이고 
부처님의 광명이 있은 지 오래인데 이제야 놓으시며 
유정들도 생긴 지 오래인데 이제야 안락하고 
큰 자비의 음성은 오랜만에 듣겠구나.



그리하여 공덕의 피안(彼岸)에 모두 이미 이르렀고 
교만의 어둠은 모두 이미 멸하였네.



세존께서는 지극히 청정하시어 허공과 같고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음은 저 연꽃과 같으며 
큰 모니 세존께서 세상에 나타나심은 
비유하면 수미산이 큰 바다에서 나온 것 같네.



공양은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다할 수 있고 
공양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이 공양처(供養處)는 무등(無等)을 공양하나니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저 천녀들은 
이런 말로 부처님을 찬탄하고는 
모두들 공경함에 기쁨이 충만하여 
여래를 우러러 묵묵히 있었다.



이 때 대사(大士) 해탈월보살은 
다시 두려움이 없는 금강장보살에게 청하였다.

"제5지의 행상에 대해 
불자께서 지금 설명하시길 바랍니다."

그 때 금강장보살은 보살 대중에게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만약 보살이 제4지의 도를 원만히 하면서 보살 제5지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10가지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의 의요(意樂)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그 10가지인가? 이른바 과거 불법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미래 불법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현재 불법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계율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선정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견해의 의혹을 제거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도(道)와 도 아님[非道]의 지혜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끊음의 지혜에 대한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 일체 보리분법의 후후관(後後觀)의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이니, 보살은 이 10가지 평등하고 청정한 의요로 제5지에 들어갑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제5지에 이르러서는 각분(覺分)과 도지(道支)를 잘 빛내고 증상된 의요를 청정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후세의 수승한 도를 구하나니, 이런 것들이 바른 행을 따르기 때문이요, 원력이 부축해 주기 때문이며, 큰 자비로 모든 유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資量)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며, 훌륭한 방편을 내기 때문이요, 후후지(後後地)의 광명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항상 부지런히 부처님의 가지(加持)를 구하기 때문이요, 염혜취각(念慧趣覺)의 힘의 부축을 받기 때문입니다.

물러나지 않는 바른 작의(作意)를 얻고는 이것이 고성제(苦聖諦)임을, 저것이 집성제(集聖諦)임을, 그리고 이것이 멸성제(滅聖諦)임을 아나니 이렇듯 바른 행과 성제(聖諦)를 여실히 다 알게 합니다.

또 이 보살은 세속제(世俗諦)에서 선교(善巧)를 얻고 승의제(勝義諦)에서 선교를 얻으며 상제(相諦)에서의 선교와 차별제에서의 선교와 안립제(安立諦)에서의 선교 그리고 도지제(道智諦)에서 선교를 얻어 모든 보살지(菩薩地)를 차례로 상속해서 성취한 까닭에 여래의 지집제(智集諦)에서 선교(善巧)를 얻습니다.

또 이 보살이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그 마음이 즐기는 대로 하게 하여 모두 기뻐하기 때문에 세속제를 아는 것이요, 모든 이치에 깨쳐 들어가기 때문에 승의제를 아는 것이요,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기 때문에 상제(相諦)를 잘 압니다. 또 법의 차별과 안립(安立)의 이치를 깨닫기 때문에 차별제(差別諦)를 아는 것이요, 온(蘊)·계(界)·처(處)의 안립을 이해하기 때문에 안립제를 아는 것이요, 심신(心身)을 고뇌스럽게 하는 것을 요달(了達)했기 때문에 사제(事諦)를 아는 것이요. 모든 취생(趣生)의 상속을 통달했기 때문에 생제(生諦)를 아는 것이요, 일체의 뜨거운 번뇌가 구경에는 멸하기 때문에 진무생지제(盡無生智諦)를 안다는 것이요, 둘이 없음을 끌어내기 때문에 입도지제(入道智諦)를 아는 것이요, 일체의 행상을 두루 깨닫기 때문에 일체의 보살지를 차례로 상속해 성취하고는, 나아가 여래지제(如來智諦)를 안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만 승해지(勝解智)의 힘에 의해 아는 것이지 구경지(究竟智)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제(諦)의 선교가 일으킨 바른 지혜로 모든 유위법은 다 허망하고 거짓이어서 우부(愚夫)들을 의혹시키는 것임을 여실히 압니다. 그리하여 이 보살은 다시 일체 유정들이 거처하는 곳에 대비(大悲)가 나타나게 하고 대자(大慈)의 광명을 발생케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지닌 지혜의 힘으로 유정 세계를 보살피고 부처님의 지혜를 희구(希求)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위(有爲)의 행(行)을 관찰합니다. 저 과거에서부터 같이한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에서 생겨난 유정들은 생사의 흐름을 따라 표류하면서 온(蘊)에 대한 집착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통의 덩어리만 증장시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이 없고 수명(壽命)이 없으며 기르는 것조차 없는 자는 삭취취(數取趣)가 없어지고 나와 내 것이 떠남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또 그 미래에 모든 어리석음과 애욕이 없어서 구경에는 유(有)를 끊고 극단에서 벗어나 있음이 아님[非有]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미혹하고 전도된 범부들은 참 가엾구나. 무수한 몸들은 이미 멸했고 앞으로도 멸할 것이며 지금도 멸하고 있는데 이렇게 멸하고 마는 몸에 대해 염오(厭惡)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더욱더 갖가지 고통의 기관들을 증장시켜 생사의 흐름을 쫓아 돌아오지 못하는 구나. 또 모든 감각기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대종(大種)이라는 독사를 떠나지 못하고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의 화살을 뽑지 못하며 탐냄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의 불길을 끄지 못하고 무명의 어둠을 날려 버리지 못하며 갈대의 큰 바다를 말리지 못하는 구나.

10력(力)을 큰 성인 도사를 구하지 않고 마군의 의요(意樂)인 빽빽한 숲속을 다니며 항상 끝이 없는 생사의 큰 바다와 갖가지 심사(尋伺)의 물결과 바다 짐승의 시끄러움 속에서 쉼이 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 나는 지금 이러한 무량한 갖가지 고통으로 핍박을 받고 고독하며 구해줄 이가 없고 의지할 데가 없으며 집이 없고 섬이 없으며 길이 없고, 장님이며 무명이라는 알 껍질의 두터운 막(膜)에 싸이고 어둠에 덮여 있는 저 유정들을 위하여 홀로 무등(無等)하고 무량한 복과 지혜의 자량을 닦아 모아 이 자량으로 저 일체의 유정들로 하여금 구경의 청정을 증득하고, 나아가 여래의 10력과 걸림이 없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하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잘 관찰하는 지혜로 끌어낸 슬기와 잘 닦은 선근은, 다 일체 유정을 구호하고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고 일체 유정을 안락케 하고 일체 유정을 가엾이 여기며 유정들로 하여금 모든 재해가 없게 하고 일체 유정을 해탈시키며 일체 유정을 부축해 일으키고 유정들로 하여금 깨끗한 믿음을 내게 하며 일체 유정을 조복하고 일체 유정을 멸도시키기 위하여 닦아 모으는 것입니다.

보살이 이 제5 난승지에 머무를 때 그를 억념(億念)을 갖춘 자라 이름 하는 것은 바른 법을 잊지 않기 때문이요, 지혜를 갖춘 자라 하는 것은 지혜로 잘 가려서 알기 때문이요, 취지(趣旨)를 갖춘 자라 하는 것은 경(經)의 취지와 비밀한 가르침을 깨달았기 때문이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라 하는 것은 자타(自他)를 다 보호하기 때문이요, 굳게 지니는 자라 하는 것은 율의(律儀)와 계행(戒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깨달은 자라 하는 것은 처(處)와 처(處) 아님을 관찰하여 선교를 얻었기 때문이요,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라 하는 것은 다른 것에 끌리지 않기 때문이요, 지혜의 행을 따르는 자라 하는 것은 뜻이 있고 뜻이 없는 2구(句) 중에서 선교를 얻기 때문이요, 신통을 일으키는 자라 하는 것은 일으킴을 닦아 선교를 얻기 때문이요, 방편이 선교한 자라 하는 것은 세간을 따라 변하기 때문이요, 싫증을 모르는 자라 하는 것은 복덕의 자량을 잘 모으기 때문입니다.

쉼이 없이 정진하는 자라 하는 것은 지혜의 자량을 구하기 때문이요, 권태 없는 의요를 가진 자라 하는 것은 큰 자비의 자량을 모으기 때문이요, 일체 유정을 위해 가행(加行)하는 자라 하는 것은 모든 유정을 잘 멸도(滅度)케 하기 때문이요, 교만하지 않고 가행(加行)을 구하는 자라 하는 것은 여래의 힘과 무외(無畏)와 불공법(不共法)을 구하기 때문이요, 작의의 행을 잘 일으키는 자라 하는 것은 불토(佛土)의 장엄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갖가지 선업의 행을 짓는 자라 하는 것은 상호(相好)를 모으기 때문이요, 항상 가행(加行)을 잘하는 자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몸과 말과 뜻의 장엄을 구하기 때문이요, 크게 존중하여 잘 받들어 섬기는 자라 하는 것은 일체 보살과 모든 법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기 때문이요, 마음이 걸림이 없는 자라 하는 것은 큰 방편의 선교로 상속해서 세간에 들어가기 때문이요, 밤낮으로 다른 마음을 여의는 자라 하는 것은 오직 일체 유정을 성숙시키기 위해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부지런히 수행할 때는 보시(布施)로 유정을 성숙시키고 또 애어(愛語)로, 또 이행(利行)으로, 또 동사(同事)로, 또 단엄한 색신(色身)을 나타내 보임으로, 또 설법으로, 또 모든 보살의 행을 설명함으로, 또 여래의 대아(大我)를 드러내 보임으로, 또 생사의 허물을 나타내 보임으로, 또 부처님 지혜의 훌륭한 이익을 칭찬하고 광대한 신통 유희와 갖가지 방편과 작용과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정을 성숙시킵니다. 그리고 이 보살이 이렇게 정근(精勤)하여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은 그 마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항상 부처님의 지혜로 나아가고 선근의 가행이 퇴전(退轉)되지 않고 훌륭한 법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부지런히 수학하여 유정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세간의 갖가지 글짓기·도장파기·산수·금성(金性) 등의 논(論)과 모든 의방론(醫方論), 즉 조갈병·지랄병·귀신들림·벌레독·송장 일으키는 귀신 등의 치료와 주문의 화합, 문필로서 찬영(讚詠)·가무·기악·우스갯소리 등, 즐기는 곳 즉 왕성·촌락·궁궐·가옥·정원·샘·동산·못·꽃·과수·약초 숲 등을 나열하고 금·은·마니·진주·유리·산호·패옥·산호 등을 보이고 해와 달·별·지진과 새와 짐승의 울음과 몽상(夢相)의 길흉과 전체의 몸과 각 부분, 상과 율의·계행·선정·신통과 무량심(無量心)과 무색정처(無色定處) 및 다른 모든 해로움이 없는 일들은 일체 유정의 이락(利樂)과 무죄 (無罪)를 자아내는 일이며 이런 모든 것은 다 일체 유정에 대한 가여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차츰 무상(無上)의 불법에 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이 난승지에 머물면서 광대한 소견과 원력으로 말미암아 현재에서 많은 부처·많은 백 부처·많은 천 부처·많은 백천 부처·많은 백천나유타 부처님과 많은 구지 부처·많은 백구지 부처·많은 천구지 부처·많은 백천구지 나유타 부처님을 봅니다. 보살은 이런 여래·응공·정등각을 뵈옵고는 모두 광대하고 증상된 의요로 공경하고 존중하며 봉사하고 공양하되 의복·음식·침구·의약 등 모든 생활 거리를 보살피고 보살의 온갖 오락거리를 승가에 바치어 공경을 표하며 이 선근을 무상정등보리에 회향합니다.

모든 부처 여래를 정성껏 섬기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희유하다는 생각으로 바른 법을 듣습니다. 그 법을 듣고는 받아 지니고 분수를 따라 수행합니다마는 대부분은 그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 안에서 깨끗한 믿음으로 출가하며, 출가해서는 곧 문지(聞持 : 들어 지니는) 법사가 되는데, 이는 대체로 행상(行相)을 들음으로써 총지(總持)를 얻어 법사가 됩니다.

보살이 이 난승지에 머무르면 무량한 겁 동안 이 모든 선근이 더욱 왕성해져서 청정하게 되는데, 무량 백 겁·무량 천 겁·무량 백천 겁·무량 백천 나유타 겁·무량 구지 나아가 무량 백천구지 나유타 겁 동안 이 모든 선근은 더욱 왕성하게 바뀌므로 청정해집니다.

불자들이여, 비유하면 연금술사가 담금질한 금으로 장엄구를 만들고 차거(車)로 갈아 빛내면 그것이 더욱 빛나서 한층 더 밝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난승지에 머무르면 이 모든 선근 또한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와 사유(思惟)와 관찰로 그것은 더욱 왕성해지고 한층 더 밝고 깨끗해지는데, 그것은 지혜와 가행의 공덕으로 일으키는 사유와 관찰로서 아무것도 그 빛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불자들이여, 비유하면 해와 달과 별과 궁전이 가진 광명은 일체의 바람으로 그 빛을 뺏을 수 없고 또한 바람과 함께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난승지에 머무를 때에 선근도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와 사유와 관찰이 행하는 바를 따르기 때문에 일체의 성문과 모든 독각 등으로 서는 그 빛을 가릴 수 없거니와 또한 세간의 다른 선근과 함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보살은 10바라밀 중에서 선정바라밀이 가장 증상되고 다른 바라밀은 힘을 따르고 분수를 따라 하지마는 수행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불자들이여, 이것이 보살의 제5지인 난승지를 대략 설명한 것입니다.

보살이 이 지(地)에 안주하다가 생을 받으면 대개는 산도사다(珊覩史多) 천왕이 되어 능히 자재하게 유정들을 잘 교화시켜 일체 외도의 그릇된 법을 버리게 하고 유정들을 진실제(眞實諦)에 안주케 하며, 그가 지은 모든 업 보시거나 애어(愛語)거나 이행(利行)이거나 동사(同事)거나 이러한 일체의 것은 모두 부처님의 작의(作意)와 법의 작의와 승가(僧伽)의 작의와 보살의 작의와 보살행의 작의와 바라밀의 작의와 모든 지(地)의 작의와 무외(無畏)의 작의와 불공법(不共法)의 작의를 떠나지 않고, 나아가 일체 행상(行相)의 승묘(勝妙)와 승응하는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작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발원합니다.

‘나는 일체 유정들 중에서 그 으뜸이 되고 훌륭함이 되고 뛰어남이 되며 묘함이 되고 미묘함이 되며 위가 되고 위없음이 되며 길잡이가 되고 장군이 되며 장수가 되고 나아가 일체지지(一切智智)가 의지하는 곳이 되리라.’

만일 즐겨 이런 정진을 일으키면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한 찰나·순식·수유 사이에 백구지의 온갖 삼마지(三摩地)를 증득하고 백구지 부처님을 보며 그 부처님의 가지(加持)를 다 알고 백구지의 세계를 진동시키며 백구지의 모든 불찰에 가고 백구지의 세계를 비추며 백구지의 교화될 유정을 성숙시키고 백구지의 겁을 살며 과거와 미래의 백구지의 겁에 각각 들어가고 백구지의 법문을 바르게 사유해 결택하며 백구지의 몸을 보이되 그 몸몸마다 백구지의 보살 권속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상은 원력이 있는 보살의 그 훌륭한 원으로 말미암는 모든 유희로서 혹은 몸이거나 혹은 광명·신통·눈·경계·음성·행·장엄·혹은 승해(勝解)나 지음 등인데 이런 것들은 나아가 백천구지 나유타 겁에도 다 셀 수 없습니다.”

그 때 금강장보살은 이 뜻을 거듭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살은 제4 염혜지에서 
닦은 바른 행이 맑고 깨끗해지면 
곧 삼세불(三世佛)의 평등함을 깨치나니 
이른바 계율과 선정으로 견의(見疑)를 없앤다 하느니라.



도(道)와 도 아닌[非道] 것과 또 바른 행에서 
후후(後後)를 관찰하는 각분(覺分)의 지혜는 
유정들을 성숙시키고 평등하기 때문에 
이것을 통달하고 제5지에 든다.



염처(念處)는 활이 되고 5근(根)은 예리한 화살 
정근(正勤)은 말이 되고 신족은 수레 되고 
5력(力)은 견고한 갑옷 되어 적을 부수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제5지에 들게 된다.



부끄러움은 옷이요 각분(覺分)은 화환 
깨끗한 계율은 향기롭고 선정은 바르는 향이로다 
선교한 방편의 묘한 장엄으로 
총지의 숲과 등지(等持)의 동산에 논다.



신족(神足)은 발이 되고 바른 억념은 목이 되고 
자비는 눈이 되고 지혜는 이가 되니 
사람 중의 사자는 무아(無我)를 부르짖어 
혹(惑)의 짐승을 없애고 5지에 들어간다.



보살은 이 제5지에 머무르면서 
최고로 뛰어난 깨끗한 도를 점차 닦아서 
부처님의 법을 한 뜻으로 구하며 물러서지 않으니 
자비를 생각함엔 싫증 내는 일이 없네.


복과 지혜의 공덕을 쌓고 
방편에 부지런히 힘써 위의 자리를 관찰하며 
부처님 힘이 가지(加持)하심을 입고 염혜(念慧) 갖추어서 
4제(諦)를 다 여실히 아노라.



세제(世諦)와 승의제(勝義諦)와 
상제(相諦)와 차별제(差別諦)와 성립제(成立諦)와 
사제(事諦)와 생제(生諦)와 진제(盡諦)와 도제(道諦) 
그리고 걸림없는 불지제(佛智諦)를 잘 아노라.



이와 같이 진리를 관찰함이 비록 미묘하지만 
아직은 걸림이 없는 훌륭한 해탈은 얻지 못했노라.


이로써 큰 공덕을 능히 낼 수 있나니 
그러므로 세간의 지혜를 뛰어넘노라.



진리를 모두 관찰하고 유위를 아나니 
체성(體性)이 거짓이어서 견실함이 없기에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광명의 몫을 얻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부처의 지혜 구하노라.



모든 유위(有爲)의 과거와 미래를 관찰하니 
무명의 어둠과 애착에 계박(繫縛)되어 
괴로움의 갈래(趣)에서 이리저리 헤매어 도는데 
그러나 나[我]도 유정도 그리고 수자(壽者)도 없는 것이매 

애(愛)와 취(取)가 인(因)이 되어 다가오는 미래에 그 고통을 받는데 
욕구(欲求)는 끝이 없어서 
미혹과 망령에 떠돌아 돌아올 기약 없으니 
이들이 가엾구나, 나는 제도하리.



온(蘊)의 집과 계(界)의 뱀과 모든 견(見)의 화살 
탐욕은 맹렬한 불이요 무명은 어둠 
애욕의 강물에 허우적거리느라 잠시라도 이를 보지 못하니 
고해(苦海)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길잡이 없노라.



이렇게 알아서 부지런히 정진하니 
짓는 바는 모두 유정을 제도키 위함일세.


이들은 억념을 갖추고 지혜를 갖춘 자 
나아가 방편을 깨달아 아는 자라 이름하노라.



복록과 지혜를 닦아 익힘에 싫증 내지 않고 
다문(多聞)을 공경함에 피곤한 적 없어서 
찰토(刹土)를 장엄하고 상호(相好)를 끌어내나니 
이러한 모든 것은 유정을 위함일세.



모든 세간(世間)을 교화하고자 
서(書)·논(論)·수(數)·인(印) 등을 잘 알고 
또한 모든 약방(藥方)을 잘 알 수 있어서 
온갖 병을 치료하여 다 낫게 하노라.



문사(文詞)와 가무(歌儛) 또한 훌륭하고 
궁궐·저택·정원·연못을 잘 꾸미며 
갖가지 보배로운 성품을 다 드러내 보임은 
한량없는 유정을 이익코자 함일세.



해와 달과 별, 대지가 진동하고 
나아가 신상(身相) 역시 관찰하며 
정려(靜慮)와 등지(等至), 그리고 신통(神通) 
세간을 이익코자 모두 드러내노라.


지혜로운 이가 이 난승지(難勝地)에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법을 들으매 
마치 차거(車)로 진금(眞金)을 빛냄과 같으니 
선근이 점차 깨끗이 변함도 이와 같도다.



비유하자면 별자리 궁궐의 빛과 같아서 
바람에 의해 빛이 가리워지지 않음이고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피어도 물들지 않음이니 
보살이 세상에서 행(行)하는 것도 이와 같도다.



대부분 도사다 천왕이 되어 
외도와 뭇 삿된 견해를 꺾을 수 있고 
닦은 모든 선은 부처의 지혜를 위함이니 
10력(力)을 얻어 모든 생명을 구제하리라.



만약 이러한 큰 정진을 일으킨다면 
순간에 백구지 부처님을 뵈옵고 
선정을 얻고 몸을 나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하나니 
원력(願力)으로 짓는 것은 이보다 더 넘치도다.



이러한 제5 난승지(難勝地)는 
인간과 하늘에서 가장 존귀한 이의 진실된 도(道)라서 
내 갖가지 방편의 힘으로 
그대 불자들을 위해 설명을 하였노라.



#### 06. 보살현전지(菩薩現前地) ① 

보살은 모든 뛰어난 행을 듣고서 
그 마음이 기뻐 묘한 꽃비를 내리고 
깨끗한 빛을 놓고 보배와 진주를 흩뿌리며 
여래를 공양하고 훌륭한 설법이라 칭송하였네.



백천(百千)의 하늘 대중이 모두 기뻐하여 
함께 하늘에서 뭇 보배와 
화만(花鬘)과 영락(纓珞) 그리고 깃발과 
보개(寶蓋)와 향을 뿌려 여래를 공양하였네.



자재천왕과 그의 권속들도 
마음에 환희심(歡喜心)을 내어 공중에서 
보배를 날려 구름을 만들어 공양하고 
불자의 통쾌한 해설을 칭송하였네.



한량없는 천녀(天女)들이 공중에 머물면서 
함께 음악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니 
노랫가락 속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은 번뇌의 병을 없앨 수 있다네.



법성(法性)은 원래 적적하여 뭇 상(相)이 없으니 
마치 허공과 같아서 분별을 여의고 
모든 취착(取着)을 떠나며 언설(言說)을 끊나니 
진실 등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여라.



만약 모든 법성(法性)을 통달할 수 있다면 
유(有)·무(無)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나니 
이 부처의 입에서 참된 불자(佛子)가 나옴일세.



뭇 상(相)을 취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본디 모든 악을 끊고 굳건히 계율을 지켜서 
법은 생(生)이 없음을 깨달아 잘 감인(堪忍)하고 
법성이 여읨인 줄 알아 정진을 갖추노라.



번뇌가 이미 다하여 선정에 들고 
법성의 공함과 분별되는 법을 통달하며 
지혜와 힘을 두루 갖추어 널리 구제하고 
온갖 악을 모두 없애어 대사(大士)라 일컬어지네.



이와 같이 천만 가지 아름다운 음성으로 
찬탄하고서는 묵묵히 부처님을 우러렀다.


해탈월보살은 금강장보살에게 말하였다.

'어떤 행상으로 뒤의 자리[地]에 들 수 있습니까?'

그 때, 금강장보살은 보살 대중에게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만일 보살이 제5지에서 닦은 도가 다 원만하여서 보살 제6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10가지 법의 평등한 성품으로 들 수 있는데 어떤 것이 그 10가지인가? 이른바 일체의 법에 상(相) 없음이 평등하고, 일체 법의 자상이 없음이 평등하며, 일체 법의 일어남이 없음이 평등하고, 일체 법의 남[生]이 없음이 평등하며, 일체 법의 적정함이 평등하고, 일체 법의 희론(戱論) 없음이 평등하며, 일체 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음이 평등하고, 일체 법의 요술과 같고 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으며, 아지랑이와 물의 환화(幻化)와 같음이 평등하며, 일체 법의 유무(有無)가 둘이 아님이 평등한 것이니, 이 10가지 법의 평등한 성품으로 제6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여 빛을 따르고 수순함을 따라서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거역하지 않기 때문에 제6의 현전지지(現前智地)를 통달합니다. 다만 날카롭고 예리한 마음이라야 증득할 수 있을 뿐, 그래도 아직은 무생인문(無生忍門)은 얻지 못합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자성(自性)의 모든 법을 따라 행할 때에는 대비(大悲)를 길잡이로 삼고, 대비가 증상되고, 대비를 원만히 하려 하기 때문에 세간의 모이고 흩어짐과 나고 멸함을 관찰합니다. 보살은 이 세간의 생멸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간의 모든 생(生)을 받는 시설(施設)은 다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므로 만일 아집을 여의면 곧 세간의 생을 받는 시설은 없어질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모든 범부들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아(我)에 집착하므로 무명의 침침한 백태에 덮이어 유(有)와 비유(非有)를 구하여 이치답지 않음을 따르고 마음이 흩어져 편벽한 길을 치달리고 삿됨을 따라서 행하며 복과 복 아님을 모아 그 행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 유정들은 모든 행이 심은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는 마음의 종자를 심어 내세생(來世生)과 노사(老死)를 계속한다. 중유(中有)와 후유(後有)로 이를 윤택케 하고 아견(我見)의 업 밭에 무명의 어둠을 감추고 애착의 물로 적시며 아만(我慢)의 그물에 물꼬를 대어 명색의 종자 싹을 틔워 왕성하게 자라게 한다. 명색(名色)이 자라면 5근(根)도 자라서 유전(流轉)하고 5근이 유전한 뒤엔 식(識)을 상대해 촉(觸)을 생(生)하나니 촉과 상대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수(受)가 생기고 수(受)를 좋아함을 애(愛)라 하는데 애는 취(取)를 증장시키고 취(取)는 유(有)를 내나니 유(有)가 생기면 5온(蘊)이 생기고 5온이 생겨나서는 5취(趣) 가운데서 점점 쇠변(衰變)한다. 쇠변해서는 파괴되고 쇠변하여 파괴되는 까닭에 뜨거운 번뇌가 있게 되며 뜨거운 번뇌로 인하여 모든 근심과 탄식 그리고 고통의 번뇌 등 온갖 고(苦)가 다 모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모으는 주체도 없고 저절로 돌고 돌므로 멸하는 주체도 없다.’

보살은 이렇게 그 행상을 따라 연기(緣起)를 관찰합니다.

또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승의(勝義)의 상이 진리에 무지(無知)한 것을 무명이라 하고 무명이 지은 업의 과(果)를 행(行)이라 하며 행이 의지하는 초심(初心)을 식(識)이라 하고 식(識)과 함께 생기는 다른 4가지 취온(取蘊)을 명색(名色)이라 하고 명색이 자란 것은 6처(處)라 하며 근(根)과 경(境)과 식(識)의 3가지가 화합한 것을 유루(有漏)라 하고 촉이 함께 생긴 것을 수(受)라 하며 수(受)에 맛들이는 것을 갈애(渴愛)라 하고 갈애가 증장(增長)한 것을 취(取)라 하며 취가 일으킨 유루의 업을 유(有)라 하고 업 등류(等流)의 모든 온(蘊)이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며 온이 성숙한 것을 노(老)라 하고 온이 무너지는 것을 사(死)라 하며 죽음에 다달아 무너지려 할 때에 우매한 자는 탐련(貪戀)하기 때문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수(愁)라 하고 수로 말미암아 소리내어 부르짖고 한숨 쉬는 것을 탄(歎)이라 하며 5근이 상대하여 유쾌치 못한 것을 고(苦)라 하고 의식이 상대하여 유쾌치 않는 것을 우(憂)라 하며 우(憂)와 고(苦)에서 생기는 탄식을 번뇌[惱]라 한다. 순전한 큰 고(苦)의 덩어리는 이렇게 증가되고 이루어지지마는 거기에는 전연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짓는 것이라야만 비로소 작용이 있지마는 지음이 없으면 승의제로써 작용도 또한 없다.’

이 보살은 다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른바 삼계(三界)는 오직 이 마음이다. 여래께서는 이것을 12유지(有支)로 분별하여 설명하셨지마는 다 일심[心]에 의하여 이렇게 세우신 것이다. 어째서일까? 만일 모든 일에 탐욕과 상응하면 마음이 일어남이 이 식(識)이요, 일이 곧 행이다. 행에 미혹하면 곧 무명하니 행과 무명과 마음이 함께 생기면 이것을 명색이라 한다. 명색이 증장하면 6처(處)라 하고 6처를 나눈 것을 촉(觸)이라 하고 촉과 함께 생긴 것을 수(受)라 하며 수용할 때 싫어함이 없으면 이것을 애(愛)라 하고 애가 강제로 수(受)를 거두어 버리지 않으면 취(取)라 한다. 저 유지(有支)가 생겨나면 유(有)라 하고 유가 일으키는 것을 생(生)이라 하며 생이 익은 것을 노(老)라 하고 노가 허물어지는 것을 사(死)라 한다.

이 중에서 무명은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반연되기 때문에 유정을 미혹시키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행이 생김에 인(因)이 되는 것이다. 행(行)에도 또한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미래의 이숙(異熟)을 일으키는 것 이요, 둘째는 식(識)을 생기시키는 인(因)이 되는 것이다. 식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능히 유(有)를 지속케 하는 것이요, 둘째는 명색이 생기는 인을 되는 것이다. 명색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서로 돕는 것이요, 둘째는 6처가 생김에 인(因)이 되는 것이요. 6처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자체 경계의 차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촉(觸)을 생기시키는 인이 되는 것이다. 촉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반연되는 것에 닿는 것이요, 둘째는 수(受)를 생기하는 인이 되는 것이다. 수(受)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두 가지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요, 둘째는 애(愛)가 생기는 인이 되는 것이다. 애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물드는 일에 물들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취(取)가 생기는 인이 되는 것이다. 취(取)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잡염(雜染)을 상속시키는 것이요, 둘째는 유(有)가 생기는 인이 되는 것이다. 유(有)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후유(後有)의 다른 세계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생(生)이 생기는 인(因)이 되는 것이다. 생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온(蘊)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노(老)가 생기는 인이 되는 것이다. 노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근(根)에 쇠변(衰變)이 있게 함이요, 둘쨰는 사(死)와 함께 화합하여 생겨나는 것의 인이 되는 것이다. 사(死)에도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행을 파괴함이요, 둘째는 두루 알아[徧知] 끊은 것이 아니다.

또 그 중에서 무명(無明)이 행을 반연한다는 것은 무명이 반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행이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행(行)이 식(識)을 반연한다는 것은 행에 있어서 연(緣)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식(識)이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식이 명색(名色)을 반연한다는 것은 식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명색이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명색이 6처(處)를 반연한다는 것은 명색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6처가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6처가 촉(觸)을 반연한다는 것은 6처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촉이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촉이 수를 반연한다는 것은 촉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수가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수가 애(愛)를 반연한다는 것은 수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애가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애가 취(取)를 반연한다는 것은 취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취가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취가 유를 반연한다는 것은 취에 있어서 반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유(有)가 끊이지 않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유가 생(生)을 반연한다는 것은 유(有)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생이 끊이지 않고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함이요, 생(生)이 노사(老死)를 반연한다는 것은 생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니 이른바 노사(老死)가 끊이지 않고 또 도와 줌을 말함이다. 무명(無明)이 멸한 까닭에 행이 멸한 것은 무명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 없는 까닭에 모든 행이 단멸되고 더 이상 도움이 없는 것이다. 행이 멸한 까닭에 식이 멸한다는 것은 모든 행에 있어서 반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식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고,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처가 멸한다는 것은 명색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6처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으며, 6처(處)가 멸하기 때문에 촉이 멸한다는 것은 6처(處)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촉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고,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가 멸한다는 것은 촉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수(受)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는 것이다. 수(受)가 멸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한다는 것은 수에 있어서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애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고,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가 멸한다는 것은 취에 있어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취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으며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가 멸한다는 것은 취에 있어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유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고,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이 멸한다는 것은 유에 있어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생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는 것이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가 멸한다는 것은 생에 있어 연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노사도 단멸해 더 이상 도움이 없는 것이다.

또 무명과 애와 취는 번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음이라 하고, 행과 유는 업의 흐름이 쉬지 않음이며, 이 이외의 다른 가지[支]는 고(苦)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음이다. 차별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멸한 것은 흐름이 끊어진 것이니 이 세 가지 흐름은 다 아(我)가 없고, 아(我)와 아소(我所)를 여읜 것으로 서 자성(自性)의 생멸 또한 마치 갈대 묶음[束蘆]과 같은 것이다.

또 이른바 무명이 행을 반연한다는 것은 전생(前生)의 관대(觀待)요, 식에서 수까지는 현생의 관대요, 애에서 유까지는 후세의 관대이니 이로 말미암아 후세까지 상속하여 떠도는 것이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한다는 것은 이 관대가 단절된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12유지(有支)로 인하여 세 가지 고성(苦性)이 있으니, 이 중 모든 행에서 6처(處)까지는 이 행의 고성(苦性)이요 촉(觸)과 수(受) 이 둘은 고고성(苦苦性)이며, 나머지 유지(有支)는 괴고성(壞苦性)이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고성(苦性)의 인(因)을 따르고 연(緣)을 따라 현행(顯行)하여 생겨 나는 것의 성품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고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한다는 것은 현시(顯示)하는 행에 자성(自性)이 없음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무명이 행을 반연한다는 것은 생의 연이은 계박(繫縛)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고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한다는 것은 멸의 연이는 계박(繫縛)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무명이 행을 반연한다는 것은 유(有)를 관(觀)하여 수순하는 것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고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한다는 것은 이 멸진관(滅盡觀)을 수순하는 것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보살은 이와 같이 10가지 행상으로 연기법(緣起法)을 순으로 역으로 관찰하나니, 이른바 유지(有支)가 상속하기 때문이요, 일심(一心)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제 업이 차별되기 때문이요,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3류(流)가 끊기지 않기 때문이요, 과거·현재·미래 세상을 관대(觀待)하는 이치 때문이며, 세 가지 고(苦)가 모이기 때문이요,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생멸의 연이은 계박[連縛] 때문이요, 유(有)의 다함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이 10가지 행상(行相)으로 모든 연기를 관찰하여 아상(我相)이 없고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삭취취(數取趣)가 없고 자성(自性)이 공적(空寂)하여 짓는 자와 받는 자를 여의고서 연기를 관찰하기 때문에 공해탈문(空解脫門)이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보살이 저 모든 유지(有支) 행상을 멸하였기 때문에 구경의 해탈을 현재에 증득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어떠한 법상도 뒤에 생기는 것이 없나니 이로 인해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이 보살은 이와 같이 공(空)과 무상(無相)에 들어간 뒤에는 대비(大悲)를 길잡이 삼는 것 외에 다른 바람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정을 성숙시키나니, 이로 말미암아 무원(無願)해탈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이 세 가지 해탈문을 수습할 때에 자타(自他)라는 생각을 떠나고, 짓는 자·받는 자라는 생각을 떠나며, 있다 없다라는 생각을 떠나고, 대비를 으뜸으로 하여 아직 닦아서 증득하지 못한 모든 각분법(覺分法)을 닦아 깨닫기 위하여 더욱 수행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응하기 때문에 유위법에 유전(流轉)하고,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에 유전하지 않으며, 화합하기 때문에 유위법에 유전하지마는 만일 화합하지 않으면 유위법에 유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모든 유위법이 이와 같이 많은 허물과 오염됨으로 하여 유전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내 지금 이 상응함과 화합됨을 끊어야 하지만 그러나 저 유정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일체 유위법을 아주 끊을 수는 없다.’

불자들이여, 보살은 이와 같이 저 유위법은 허물이 많고 오염되었으며 자성이라곤 전혀 없고 본성은 끝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관찰합니다. 이것을 관찰할 때는 대비(大悲)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체 유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착지(無着智)가 현현(現顯)하여 바라밀에 머무른다 하고 또 기대어 나타나기 때문에 앞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보살은 이런 지혜를 성취하고는 지혜바라밀의 머묾에 비추어지고 능인각분(能引覺分)의 뭇 연(緣)들을 유발시키나 머무름이 있어서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유위업의 자성이 적멸됨을 관찰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면 저 보리분법(菩提分法)은 결코 원만한 것이 아닙니다.

보살이 이 현전지(現前地)에 머무르면 공성에 들어가는 삼마지(三摩地)가 눈앞에 드러낸다 하는데, 즉 자성공성삼마지(自性空性三摩地)·승의공성(勝義空性)삼마지·최상공성(最上空性)삼마지·대공성(大空性)삼마지·상응공성(相應空性)삼마지·인발공성(引發空性)삼마지·여리무분별공성 (如理無分別空性)삼마지·유고련공성(有顧戀空性)삼마지·이불리공성(離不離空性)삼마지가 모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살이 이와 같은 공성문(空性門)을 최고 으뜸으로 한다면 백만의 삼마지가 앞에 나타나고 이와 같이 무상문(無相門)의 백만 삼마지, 그리고 무원문(無願門)의 백만 삼마지도 다 앞에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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