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와 대방광불화엄경
모든 경은 그 제목 가운데 대의가 다 들어 있다 하여, 옛 스님들이 경의 제목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8만 4천 법문 가운데 경제목만도 수백 수천에 달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우리 신앙에 친숙해 있는 금강경과 화엄경 법화경을 들 수 있다.
법화경은 이미 설하였으므로 몇 가지만 더 골라 해설해 보고자 한다.
금강은 범어 바일라(vajra)로서 쇠중에서는 가장 굳세고 강한 물건이니, 요즘의 다이아몬드가 그것이고 반야(praina)는 한역으로 지혜인데 일반적으로 사리를 구분하는 분별지가 아니라 제불 보살이 친히 제법실상을 증득한 원명본각지(圖明本覺智)이고 모든 망상과 미련을 여인 청정무분별지(淸無分別智)며, 일체 법이 본래 공하여 얻은 바가 없는 진실무상지(眞實無上智)다.
그런데 이 반야는 능히 모든 업장을 제하고 무루공덕(無漏功德)을 성취하여 무생지화(無生智火)를 말하는 것이, 금강이 능히 모든 재액(災厄)을 소멸하고 수구(須求)하는 바를 이르고 태양과 같은 빛을 발하므로 그에 비유된 것이고 또 반야는 능히 응탁(凝濁)을 밝게 하고 법집을 대치하여 진실리에 안주하게 하여 3독을 대치하는 것같이, 금강은 능히 흐린 물을 깨끗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궁중에 행좌(行坐)케 하고 능히 모든 독을 제하는 까닭에 비유된 것이다.
또 그것은 반야의 세 가지 의미(실상(實相), 관조(觀照), 문자(文字))를 도피(道破)하기 위하여 비유된 것이다.
말하자면 실상반야(實相般苦)가 다겁(多劫)을 지내면서 6도의 생사대해에 유랑하면서도 일찍이 한번도 생멸 윤회하지 않는 것이 마치 금강석이 견고하여 무엇이고 이것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 같고 관조반야(觀照般苦)가 종횡무진으로 세간의 미망을 끊고 삼라만상의 정체를 비추고 잡연한 제법의 본체성을 사무치는 것은 마치 금강석이 날카로워 어떤 굳센 물건이라도 깨뜨리고 끊는 것 같다.
또 문자반야(文字般苦)는 이 두 반야의 이치를 종횡으로 표현하여 밝게 드러내는 것은 마치 금강이 야반에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금강석은 비유이고 반야는 법이다.
보살이 금강 같은 반야로 6도 만행을 닦아 무명고해를 설파하여 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경전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한 것이다.
다음 대방광불화엄경은 우주의 진리를 체회(體會)하고 붓다의 정각을 표현한 경이다.
청량함은 그의 현담1권에서
「대(大)는 법(法)의 상례(常澧)로서 포함의 뜻을 삼고, 방(方)은 용(用)을 말한 것으로서 궤범(軌範)으로서 뜻을 삼고, 광(廣)은 체용(體用)의 합칭(合稱)으로서 주편(週遍)으로서 뜻을 삼고,佛은 각파(覺破)를 명칭한 것으로서 과만(果滿)으로서뜻을 삼고 화(華)는 비유(比喩)로서 만행교참(萬行交參), 연기집성(緣起集成)으로써 의(義)를 삼고 엄(嚴)은 수현(修顯)을 말한 것으로서 과만환저(果滿煥著)로서 의(義)를 삼고, 경(經)은 능전(能銓)의 교(敎)로서 관천봉조(貫穿縫組)로서 뜻을 삼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대방광은 우주의 진리인 법을 표현하고 불은 그 진리를 깨달은 성자를 표한 것이며 화엄은 그 진리를 깨달은 불타정각의 미를 비유한 것이고 경은 그 진리를 관천봉조(貫穿縫組)하여 유정을 교화섭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방광은 불의 형용이 되고 화엄은 불의 공덕이 되며 경은 불의 설이 된다.
그런데 이 불은 인도에서 탄생하여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성도하고 45년간 설법하고 80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 즉 석존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구원실상의 법신 즉 이불(理佛)을 뜻하는 것이다.
또 대방광불화엄경을 약칭하여 화엄경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화엄 두자에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래로 화엄두 자를 해석하여
「인(因)의 만행(萬行)인 분화(芬華)로서 과만(果滿)의 덕의(美德)을 엄식(嚴飾)한다.」
하였으니 그 인의 만행이란 자타일체를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대방광불을 억념하면서 여러 가지 업을 수습하여 중생과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피안을 향해 나아가는 대보살이다.
그리고, 이 만행에 의하여 성취된 과의 미덕이 그대로 대방광불을 장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화엄경은 대방광불이 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방광불을 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