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 의 일대기
- 달마의 생애 – 설화 중심으로
중국에 선종을 전한 인물로 알려지는 초조 달마대사.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어느 것이 진실인지 확실치 않다. 여기에서는 널리 알려진 여러 설화를 통해 달마의 일생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 내용들은 거의 설화 및 에피소드에 기초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껏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초조 달마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역사적인 고찰은 후에 자세히 하기로 한다.
1) 달마는 누구인가
보리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을 세테이리(刹帝利)라고 했다. 단, 달마는 인도가 아닌 페르시아 출신이라고도 하며, 刹帝利라고 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인도 4성계급 중에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어느 날 ‘반야다라’라고 하는 고승이 널리 가르침을 베푼다는 말을 듣고 국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청하였다. 국왕은 반야다라의 가르침을 받고는 왕에게 광채가 나는 보석을 공양하고 신자가 되기로 하였다.
한편 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월정다라’라고 불렀으며, 염불삼매의 행을 닦았다. 둘째는 ‘공덕다라’라고 하는데,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셋째는 ‘보리다라’라고 불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이에 반야다라는 세 왕자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이 보석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겠습니까?” 월정다라가 대답하였다. “이 보석은 우리 나라의 보물입니다. 이 세상에 더 훌륭한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공덕다라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보리다라가 말하길, “스승님, 이런 보석은 감히 최상의 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보물은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할 뿐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물은 여러 가지 법 중에서 부처의 가르침이고, 사람이 지닌 뛰어난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는 지혜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그
리고 지혜 중에서는 마음의 지혜가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보물이 가장 훌륭할 것입니다.” 반야다라는 그가 큰 그릇 임을 알고 크게 칭찬하였다.
얼마 후에 국왕이 승하하자 보리다라는 반야다라를 따라 출가하여 불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에 이름을 ‘보리달마’라고 하였다. 달마가 스승 밑에서 수행하기를 40여 년, 반야다라는 임종에 이르러 달마에게 유언을 남기며 입적하였다.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전법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이에 달마는 훗날 스승의 명을 받아 중국이라는 나라로 향하게 된다.
반야다라에게는 달마 이외에 불대선, 불대승이라고 하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스승의 사후 그 종지가 6종(六宗)으로 나뉘어졌으니, 유상종(有相), 무상종(無相), 정혜종(定慧), 계행종(戒行), 무득종(無得), 적정종(寂靜)이었다. 각기 주장을 달리하여 서로 다투고 갈등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대사가 생각하기를 ‘이처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부처님의 뜻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해탈에 이르는 길이 멀어질 것이다.’하고는, 6종의 종사와 대면하여 일일이 그 고집을 꺽어 놓았다. 그리하여 6종이 모두 달마에게 귀의하였고 그의 명성은 전 인도에 널리 퍼져나갔다.
한편 달마의 첫째 형인 월정다라의 아들 이견왕이 즉위했을 무렵이었다. 이견왕은 불법이 국민과 조상을 현혹하고 있다고 오해한 나머지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달마대사가 그것을 알고는 어찌하면 그를 설복시킬까 생각하였다.
이에 달마의 제자 종승이 말하길, “제가 천박하오나 어찌 왕을 위하는 일을 마다하리까?”라고 하자 대사는 “너는 아직 도력이 온전치 못하니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종승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홀로 왕궁에 나아가서 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의 물음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사이에, 대사는 이를 눈치채고 다른 뛰어난 제자인 바라제를 보내어 종승을 구원토록 하였다.
바라제가 신력을 빌려 구름을 빌어 타고 왕의 앞에 이르러 가만히 머물렀다. 이때 왕은 바라제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 종승을 밖으로 쫓아내고는 바라제와 문답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바라제는 왕의 물음에 답하여 불성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니, 왕은 이에 마음이 열리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을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한편 쫓겨난 종승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높은 벼랑에서 몸을 던졌으나,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한 신선이 그를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계속해서 수양 정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종승은 기뻐하며 바위 사이에 앉아 불법을 닦았다.
이때 이견왕이 바라제에게 물었다. “이토록 뛰어난 법문을 전수한 스승님은 누구십니까?” 바라제가 대답하기를, “나의 스승님은 곧 왕의 숙부이신 보리달마 그 분이십니다.
” 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자신의 죄를 탓하며 곧 대사를 맞아들이게 하는 한편 종승을 부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종승은 산속에 숨어 선을 닦을 뿐, 세상에 나오기를 부끄러워하였다. 궁중에서 달마는 깊이 있게 법을 전수해주었다.
얼마 후 왕이 병을 얻어서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대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의 병을 구원하길 청하였다. 대사는 곧 왕궁에 와서 병을 위문하고, 자비를 베풀고 죄를 참회토록 함으로써 왕의 병을 낫게 하였다.
2)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언 60여년, 반야다라가 유언한 햇수가 흘렀다. 이제 본국에서 할 일을 어느 정도 끝마쳤다고 생각한 달마는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는 왕을 찾아갔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지만 달마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왕은 꼭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달마의 항해를 준비하였다.
달마는 우선 제자 불타야사에게 사전답사를 떠나게 했다. 불타야사는 오랜 여정 끝에 겨우 중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접한 광경들은 달마의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들이었다. 중국의 승려들은 달마의 사상을 낯선 것으로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에 불타야사는 크게 낙심하여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달마는 뛰어난 제자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면서 참된 불교의 마음을 전해주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한편 달마가 바닷길을 출발하는 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대사가 배를 타려고 항구에 이르자 수 백년 묵은 큰 고기가 배 드나드는 길목에 와서 죽어있는데 배가 그 길목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며, 차츰 썩어서 냄새가 풍기어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고 하였다.
대사는 그런 불편을 없애주는 것이 모두 중생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여, 나무 숲 속에 들어가 조용히 선정에 들어서 그 정신이 몸을 벗어나 신력으로 고기시체를 운반하여 먼바다에 내다버리고 돌아와 보니, 웬걸 자신의 몸은 오간 데 없고 어떤 선인의 괴이한 몸이 있었다.
대사가 혜안으로 관찰해보니, 그 나라의 이름높은 오통선인이 숲 속에 도인의 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몸을 벗어버리고 대사의 몸을 바꾸어 가지고 갔다.
달마의 몸은 원래는 매우 빼어난 모습인데 그 바꾼 몸은 눈이 새파랗고 수염이 많아서 얼른 보면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후대에 전하는 달마도의 모습은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튼 어려운 항해를 마치고 중국의 광주에 도착한 것이 양무제 보통(普通) 원년(520) 9월 21일이었다고 한다. 광주자사 소앙이 바로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알리자 무제는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달마를 궁궐로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달마는 11월 1일 도읍인 건강에 도착하여 무제와 회견하게 되었다. 양무제는 역대 중국 왕들 중에서도 열렬한 불교 신자로 이름난 인물이다. 이제 많은 군신들 앞에서 대사와 무제 사이에 세기의 문답이 벌어진다.
양무제가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절을 짓고 경문을 직접 옮기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승려와 비구니를 육성했소. 그러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보답을 받겠소? 가르쳐 주시오.”
기존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최대의 자비를 베푼 황제에게는 최대한의 보답이 있는 것이 당연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선행과 공덕이 넓고도 크므로 부처님으로부터 최고의 보답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황제는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마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 것은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드디어 달마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무엇이라고?” 황제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달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공덕이라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렇단 말이오? 이 정도의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그건 말이 안되오.” 황제가 말했다. 달마가 응답하길 “그런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황제는 이 대답을 듣고는 화가 치밀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음과 지혜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 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러면 불법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첫 번째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이에 달마는 최후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 것은 나는 모릅니다.”
달마와 황제의 문답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 문답은 달마에 관한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양무제에 대해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달마는 허무한 마음과 함께 돌아서야만 했다. 양무제 역시 달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후에 무제는 이 일을 몹시 후회했다고 하나, 이미 때는 늦은 법이다.
남쪽 나라에 아직 자신의 불교를 널리 퍼트릴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달마는 조용히 양나라를 떠나 북쪽 위나라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때 달마가 갈대를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달마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일화인 듯 하다.
이제 달마대사는 후위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에 낙양에 도착하여, 접경지역에 있는 숭산 소림사를 찾아가 그곳에 머물며 힘껏 정진에 몰두한다.
3) 달마와 그의 제자들
달마는 소림사에 자리를 잡고 법을 전할 제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좌선에 잠긴다. 아무 말 없이 주야로 얼굴을 벽에 대고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니 당시 사람들은 달마를 ‘벽관바라문’이라고 불렀다. 벽을 바라보는 바라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수행을 수년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그럴 때에 어느 날인가 신광이라는 수도자가 달마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불법의 깊은 이치에 정통하였으나 아직 무엇이 부족한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리하여 달마가 깊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마에게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달마는 늘 벽을 대하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눈오는 날, 뜰 앞에 신광이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대사가 말하길, “네가 눈 가운데 서서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신광이 말했다. “바라건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시어 널리 중생을 제도케 하소서.”
대사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정진하시어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으셨나니 어찌 적은 덕과 지혜를 가지고 최상의 도를 구하려고 하는가.”
신광이 그 말을 듣자 차고 있던 칼로 왼팔을 끊어서 대사 앞에 바치자 대사는 그가 법을 이어 받을 그릇임을 알았다. “모든 부처님이 처음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하여 신명을 잊었나니 네가 이제 내 앞에서 구도하는 정성이 가상하도다.”라고 감탄하였다.
신광이 물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스승님은 저에게 안심케 하소서.”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안심케 하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의 마음을 편안케 했느니라.”
이제 신광은 달마의 가르침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달마의 뒤를 이을 제자가 되었다. 이에 이름을 고쳐 혜가라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달마와 혜가의 일화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가가 팔을 자른 것 등은 정확한 사실인지 확실치가 않다. 아무튼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일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위나라에 머문 지 9년에 대사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국으로 갈 때가 되었으니 너희들은 각자 얻은 바를 말하라.” 도부라는 자가 먼저 말하기를,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으며 도의 응용으로 삼나이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도다.”
비구니 총지가 말했다. “저의 아는 바로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지 못합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 도육이 말하길, “저의 본 것으로는 한 가지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도다.”
마지막으로 혜가가 나와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진수를 얻었노라.” 라고 하며 혜가를 돌아보며 말씀하시길, “옛날에 여래께서 정법안을 가섭에게 부촉하여 전전히 나에게 이르렀나니, 내가 이제 너에게 부치노니 너는 마땅히 호지하라.”하고 아울러 가사를 전해주면 법의 증표로 삼았다.
법의를 전해 증표를 삼았다는 이야기는 실상은 후대에 와서 꾸며진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는 큰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이리하여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혜가에게 가사와 ‘능가경’ 등을 전해주며 법을 전수함으로써 이제 이조 혜가대사의 시대가 열려오게 되었다.
4) 다시 서쪽으로
달마가 혜가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뒤 다섯 번 독약을 만났다. 내가 항상 시험하여 약을 돌 위에 놓아두니 돌이 갈라졌다. 내가 본래 중국에 온 것은 법 구하는 사람을 위함이었다. 이제 너를 얻어 법을 전하였으니 내 일은 이미 끝났도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내비쳤다.
달마대사가 본디 인도에서 건너와 사뭇 새로운 선불교를 널리 가르쳤기 때문에, 기존의 불교 학자들에게는 달마가 좋지 않게 보였을 듯하다. 그리하여 여러 불법학자들이 달마를 해칠 마음을 먹고 여러 번 달마에게 독약을 보냈다.
그 독을 먹어도 도력으로 다 다른 음식물과 같이 소화되었는데, 여섯 번째 독약에 이르러 법을 전할 사람을 얻었으므로 독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양나라 대통 2년(528)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 시신을 웅이산에 장사지냈다.
그때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이 파미르고원에서 대사를 만났다. 대사는 주장자에 신 한 짝을 꿰어들고 유유히 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서천으로 가노라. 너의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송운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하고 귀국해보니 과연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 왕이 즉위했다.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무덤을 파보도록 하였다. 다만 관속에는 신이 한 짝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추모하는 비문을 기록해본다.
……슬프도다. 보고도 보지 못했고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 지난 일, 오늘날에 뉘우치고 한됨이 그지 없도다. 짐은 한낱 범부로서 감히 그 가신 뒤에 스승으로 모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