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수경(佛說數經)

불설수경(佛說數經)

서진(西晋) 사문 석법거(釋法炬) 한역이미령 번역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사위성(舍衛城) 동쪽 동산에 있는 녹강당(鹿講堂)에 계셨다.

그 때 수(數) 바라문이 점심 뒤에 이리저리 거닐다가 세존의 처소에 이르러 서로 안부를 주고 받은 뒤 한편에 물러앉아 세존께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으니 저의 물음을 허락해 주소서.” “그대의 물음을 듣겠으니 바라문이여, 마음대로 말하라.” “구담이시여, 이 녹(鹿)강당은 차례로 짓고 차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담이시여, 이 녹강당은 처음 사다리를 올라가서 이렇게 2층·3층·4층을 차례로 올려 만들었습니다.

구담이시여, 코끼리를 부리는 자는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게 하니, 이른바 손에 갈고리를 쥐고 하는 것입니다. 구담이시여, 말을 타는 자도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니, 이른바 굴레를 쓰는 것입니다. 구담이시여, 찰리종(刹利種)도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니, 이른바 활과 화살을 쥐는 것입니다. 구담이시여, 이 바라문도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니, 이른바 시(詩)와 글을 배우는 것들입니다.

구담이시여, 우리들은 수(數)를 배우는데 수로써 생활을 이어갑니다. 수제자(數弟子)에 어린이가 있으면 처음에 하나 둘을 헤아리도록 하고, 둘·셋 ·열·백, 혹은 더욱 그 숫자를 불려 나가며 헤아리게 합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우리들은 수를 배우되 수에 생명을 두고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니 이른바 수를 배우는 일입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이 법과 율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것을 배워서 알게 됩니까?” “그대 수목건련(數目健連)이여, 만약 그대가 차례로 가르치고 차례로 배우느냐고 묻는다면 계(戒)를 행하고 학문을 배운다고 말한다. 목건련이여, 만약 그대가 나의 법과 율에서도 차례로 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법과 율에서도 차례로 가르치나니 차례로 계를 행하며 차례로 배운다.

목건련이여, 어떤 이가 비구가 되어 처음 배워 오래지 않아 이 법과 율에 이르렀으나 또한 아직 여래로부터 가르침의 말을 듣지 못하였을 때 이 비구가 몸의 행(行)을 한가지로 청정하게 행하고 입과 뜻도 한가지로 청정하게 행한다.

목건련이여, 만약 비구가 몸의 행이 한가지로 청정해지고, 입과 뜻도 한가지로 청정해지면 저 여래 위없는 이는 그를 길들여서 이 비구가 안으로 몸[身]과 몸의 상(相)을 관하고 행하여 머물고, 느낌[痛]과 뜻[意]과 법(法)에 이르기까지 법과 법의 상을 서로 관하여 행하고 머물게 한다.

목건련이여, 비구가 안으로 몸과 몸의 상을 관하여 행하고 머물고 느낌과 뜻과 법에 이르기까지 법과 법의 상을 관하여 행하고 머문다면 여래 위없는 이는 그를 더 가르쳐서 이 비구로 하여금 5관(官)을 수호하여 스스로 그 뜻을 수호하고 스스로 그 생각을 수호하여 함께 행하고 정진하게 한다. 그는 눈으로 색(色)을 보되 생각을 느끼지도 않고 다른 생각도 느끼지 않는다. 증상의 인연인 까닭에 눈의 감각기관[眼根]을 수호하여 부끄럽거나 탐내고 근심하는 뜻이 없으며,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있지 않고 그는 안근을 지키며 배우는 가운데에 있게 된다. 이렇게 귀·코·혀·몸과 뜻의 감각기관[意根]에서도 그와 같이 하여 뜻으로 법을 알되 생각을 받지 않고 다른 생각도 받지 않으니 더하는 인연인 까닭이다. 이 뜻의 감각기관에 부끄러움·탐냄·근심의 생각이 없고 착하지 않는 법이 뜻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며 그 가운데서 스스로 뜻의 감각기관을 지키며 배운다.

목건련이여, 비구가 모든 감각기관의 문에서 스스로 그 뜻을 지켜서 뜻에 물듦이 없이 뜻을 수호하고 뜻과 생각을 함께 행해 정진하면 그는 눈으로 색(色)을 보아도 또한 생각을 받지 않고 다른 생각도 받지 않으니 더하는 인연인 까닭이다. 안근(眼根)이 구족하여 부끄러움·탐냄·근심의 생각이 없고 착하지 않은 법이 뜻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눈의 감각기관을 수호하며, 이렇게 귀·코·혀·몸과 뜻의 감각기관에서도 그와 같이 하여 법을 알되 또한 생각을 받지 않고, 내지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뜻의 감각기관을 지키며 배우면 저 여래는 그를 가르쳐 더 나아가게 한다. 그리하여 더 나아가서 평등하게 행하며 관(觀)한다. 그는 관한 뒤에 몸을 굽히거나 펼 때, 승가리와 발우를 지니고 있을 때, 가고 머물고 앉으며 잠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할 때에도 평등하게 행한다.

목건련이여, 만약 이 비구가 더 나아간 뒤에 평등하게 행하는 경지에 이르면 여래 무상사는 그를 가르쳐서 이 비구로 하여금 침상에 누워도 자기가 누워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만약 고요한 곳에 있거나 나무 아래 있거나 빈 산골의 굴 안이나 노지에 풀을 깔고 앉거나 숲속이나 무덤 사이와 같은 고요한 곳에서 그는 니사단을 깔고 가부를 맺고 몸을 바로하고 뜻으로 빌되 뜻을 가장 앞에 두는데, 탐심과 질투의 뜻이 없고 성냄이 없이 머물며 남의 재물을 탐하여 다른 이의 물건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청정해져서 탐내는 뜻이 없고 이렇게 하며 성내거나 게으르거나 졸거나 들뜨거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의심과 탐냄을 버리고 삿된 견해를 버리고 의심을 버리고 모든 유예법(猶豫法)1)을 버려서 의심의 뜻이 청정해진다. 그는 5개(蓋)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지혜로워지고 음탕한 마음에서 해탈하여 4선(禪)에 머물게 된다.

을 버려서 의심의 뜻이 청정해진다. 그는 5개(蓋)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지혜로워지고 음탕한 마음에서 해탈하여 4선(禪)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이 목건련이여, 비구는 음욕에서 해탈하며 4선에서 머문다. 목건련이여, 여래는 처음으로 배우는 비구를 위해서 온갖 많은 이익이 생기게 하니, 이른바 학업을 가르치고 수행을 가르치는 일이다. 목건련이여, 그 모든 비구들이 높고 훌륭한 이며, 모든 왕이 아는 바인데 게으름 없이 머무르며 범행(梵行)을 행하는 이라면 여래 무상사는 이들을 가르치니, 이른바 궁극에 모든 번뇌를 전부 없앤 경지에 이르게 한다. 사문 구담의 모든 제자는 이렇게 가르침을 받고 이렇게 배워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지만, 목건련이여, 모두가 다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행하지 않기도 한다.” “구담이여, 어떤 인(因)이 있고 어떤 연(緣)이 있기에 열반이 있고 열반도를 구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사문 구담께서 가르침을 잘 베풀며 머무시는데 무슨 인연으로 어떤 비구는 이렇게 가르침을 배우고 닦아서 마침내 열반에 나아가고, 또 다른 비구는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이런 까닭에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 마음대로 대답하라. 목건련이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라열기(羅閱祇)로 가는 길을 잘 아는가?” “구담이시여, 저는 라열기의 길을 잘 압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라열기 왕의 처소에 가고자 하여 그대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하자.

‘목건련 바라문이여, 수(數)를 잘 아는 이여, 라열기의 길을 아신다기에 내 라열기 왕의 처소에 가고자 하여 길을 묻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당신은 이 길로 바로 가시오. 바로 가다가 저 마을에 가고 저 마을에서 어느 곳으로 가시오. 이렇게 해서 그대는 차츰 라열기로 나아가다 도착하는 것이오. 또 라열기는 동산이 쾌락하고 숲이 쾌락하고 땅이 쾌락하고 못이 쾌락하고 강물이 시원해 안온하고 쾌락하니,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오.’ ‘그가 만약 그대가 가르치는 대로 곧 그 길로 바로 가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바로 그곳에 이르렀다가 도리어 딴 길을 잡아서 제길에서 어긋나게 간다면 그는 라열기의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함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이 있어 라열기에 가고자 하여 그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목건련 수바라문이여, 수를 잘 아는 이여, 내가 라열기에 가고자 지금 당신에게 길을 묻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대는 이 길로 바로 가시오. 바로 가서 저 마을에 이르고 저 마을에서 다시 어떤 마을에 이를 것이오.’

그는 그 말대로 하여 차츰 라열기로 나아가서 라열기의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한 것을 알고 보았다고 하자.

목건련이여, 어떤 인(因)이 있고 어떤 연(緣)이 있어 저 라열기가 있고 라열기의 길이 있어 그대가 가르쳐 주는데, 그 처음 사람은 가르침을 얻어도 가르침대로 얻지 못하고 딴 길을 잡아 등지고 가서 라열기의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함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그리고 그 두 번째 사람은 가르침대로 그 가르침을 받아 그 길을 취하여 차례로 라열기에 이르러 라열기의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함을 곧 알고 보는 것인가?” “구담이시여, 어떻습니까. 저 라열기가 있고 라열기의 길이 있어서 내가 일러 주었는데 그 처음 사람은 가르친 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고 딴 길을 잡고 갔으므로 라열기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함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며, 그 두 번째 사람은 가르친 대로 그 가르침을 받고 그 길을 취하여 차례대로 라열기에 이르러 라열기의 동산이 쾌락하고 내지 안온하고 쾌락함을 알고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건련이여, 나도 또한 어떤가 하면 저 열반이 있고 저 열반의 길이 있어서 내가 가르쳤는데 혹 한 비구는 가르친 대로 가르침과 같이하여 마침내 열반에 이르고, 또 다른 이들은 그러하지 못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목건련이여, 그 비구는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세존의 대중 안에서 가르침과 수기를 받은 뒤 마침내 번뇌가 다 사라진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다.” “구담이시여, 이미 알았습니다. 구담이시여, 이미 알았습니다. 구담이시여, 마치 매우 좋은 땅에 사라(娑羅)숲이 있고 그 사라숲을 지키는 사람이 부지런해서 게으름이 없이 스스로 힘껏 사라나무의 뿌리가 때로 손상될까 지켜 보고 비료를 그 속에 뿌리고 물을 주는데, 만약 모자라는 것은 흙을 채워 주고 주변의 풀을 뽑아 버리며, 또 넝쿨 풀이 감고 올라가면 굽어지고 곧게 자라지 못하는 폐단이 있으므로 넝쿨도 뽑아 줍니다. 그는 또 막 새로 자라나서 긴 것은 수시로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물을 잘 대 줍니다.” “그와 같이 구담이시여, 좋은 땅의 사라나무 숲은 나중에는 매우 무성해 지는 것처럼, 구담이시여, 어떤 사람이 아첨하고 환(幻)을 짓고 믿지 않고 게으르며 뜻이 어지럽고 정(定)을 닦지 않고 나쁜 지혜로써 뜻이 어지럽고 감각기관의 다스려지지 않고 계행(戒行)을 부지런히 닦지 않으며 사문의 행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사문 구담이시여, 함께 자서도 안 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살아서도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사람은 범행(梵行)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만약 저 사람이 아첨함이 없고 또한 삿된 뜻이 없으며 믿음으로 행하고 정진하며 뜻이 항상 머무르고 정(定)에 머물며, 지혜롭고 계학(戒學)을 공경하고 사문의 행을 잘 분별한다면, 사문 구담이시여, 그는 집착함이 없으므로 이런 사람과 함께 기거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사람은 범행을 함에 있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비유하자면 모든 뿌리향[香] 중에는 가라(迦羅)가 으뜸인 것과 같으니, 저 가라는 모든 뿌리향(香) 중에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모든 사라(娑羅)향 중에서도 붉은 전단(栴檀)이 으뜸인 것과 같으니, 왜냐 하면 구담이시여, 모든 사라향에서도 붉은 전단향이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온갖 물에서 피는 꽃 중에 푸른 우발(優鉢) 꽃이 으뜸인 것과 같으니, 왜냐 하면 구담이시여, 온갖 물에서 피는 꽃 중에 푸른 우발꽃이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모든 육지(陸地)의 꽃 중에서 구모니파리사(拘牟尼婆利師)가 으뜸인 것과 같으니, 왜냐 하면 구담이시여, 모든 육지의 꽃 중에 파리사가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구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모든 세상의 논(論) 중에서 사문 구담의 논이 으뜸인 것과 같으니, 왜냐 하면 사문 구담의 논은 일체 이학(異學)을 포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스스로 법(法)에 귀의하고 또 비구승에게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우바새의 계를 지키고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귀의하고 상수(常數) 목건련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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