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사제경(佛說四諦經)

불설사제경(佛說四諦經)

후한(後漢) 안식국삼장(安息國三藏)안세고(安世高) 한역 현성주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이 때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시니, 비구들은 대답하고 나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

부처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바르고 진실한 법이 있으니 네 가지 도리[四諦]라고 한다. 이 네 가지 도리는 바른 사유(思惟)ㆍ바른 견해[見]ㆍ바른 열림[開]ㆍ바른 앎[了]ㆍ바른 분별(分別)ㆍ바른 견해의 드러남[發見]을 갖췄느니라.

만일 여기에 있는 비구가, 지나온 세상의 여래(如來)ㆍ무소착(無所着)ㆍ정각(正覺)1)
께서 바르게 설하신 네 가지 도리를 따라 수행했다면, 이 네 가지 도리에서 바른 사유ㆍ바른 견해ㆍ바른 열림ㆍ바른 앎ㆍ바른 분별ㆍ바른 견해의 드러남을 갖췄으리라.

만일 여기에 있는 비구가 다음 세상에 가서도, 여래ㆍ무소착ㆍ정각의 바른 법을 따라서, 현자(賢者)의 네 가지 도리를 참답게 수행한다면, 위에 설한 바른 사유 등의 법을 갖출 것이니라.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여래ㆍ무소착ㆍ정각 또한 바른 이치로 이와 같이 네 가지 도리를 설하리니, 여기 비구들은 바른 사유ㆍ바른 견해ㆍ바른 열림ㆍ바른 앎ㆍ바른 분별ㆍ바른 견해의 드러남을 갖추리라.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舍利弗)2)
비구는 빠른 지혜ㆍ민첩한 지혜ㆍ예리한 지혜ㆍ넓은 지혜ㆍ깊게 사무친 지혜ㆍ미혹에서 벗어나는 지혜ㆍ싫증 없이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ㆍ구슬처럼 맑고 밝은 지혜ㆍ남의 마음을 따라 아는 지혜를 지녔느니라. 사리불 비구는 지혜가 훌륭하여[能], 상대를 잘 아느니라[所]. 사리불 비구는 현자(賢者)로서 네 가지 도리를 쉽게 설하는 능력을 갖췄느니라. 사리불 비구는 기인(奇人: 外道)을 상대로, 바른 사유(思惟)ㆍ바르게 보는 능력ㆍ바르게 여는 능력ㆍ바르게 아는 능력ㆍ바르게 분별하는 능력ㆍ바른 견해를 드러내는 능력을 자세히 설하여, 얼마간의 사람들을 도법(道法)으로 이끌었느니라. 사리불 비구는 누구보다도 매우 뛰어났으므로 사도(邪道)에서 잘 돌아왔느니라.

사리불 비구는 바른 도를 따르게 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목건련(目揵連) 비구는 바른 도를 성취시키는 능력을 갖췄으니, 사리불 비구는 자식을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건련 비구는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와 같다. 당연히 목건련 비구를 이와 같이 깨달은 자라고 해야 하리니, 마땅히 사리불과 함께 목건련을 섬겨야 하고, 받들어야 하며, 가서 물어야 하리라.

사리불 비구와 목건련 비구는 함께 배우는 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해 주면서, 다른 생각을 내지 않게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기원정사의 방으로 들어가셔서 잠시 사유(思惟)에 드셨다.

때에 현자(賢者) 사리불 비구는 중생에게 이로움을 베풀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세상에 계시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이제 대신 네 가지 도리를 설하게 되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괴로움[苦]이요, 둘째는 쌓임[習]이요, 셋째는 사라짐[盡]이요, 넷째는 닦는 길[道]입니다. 이 네 가지 도리를 받아 행해서 괴로움을 없애야 합니다.

무엇을 현자(賢者)의 괴로움의 도리라고 하는가.

태어남에 따른 괴로움ㆍ늙음에 따른 괴로움ㆍ병드는 괴로움ㆍ죽음에 이르는 괴로움ㆍ좋아하지 않는 것과 서로 만나는 괴로움ㆍ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구하는 대상을 얻지 못함도 역시 괴롭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五種苦: 五陰盛苦]이 현자들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라면, 사람의 종류는 저들마다 태어남을 따라 더욱 생겨납니다. 이어 따르며 존재하기를 성취하려는 데서,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생겨 생명의 기능[命根]을 이루니, 이를 태어남이라고 이름하며, 현자들의 태어나는 괴로움입니다.

무엇 때문에 태어남을 괴롭다고 하는가.

태어나는 사람은 몸을 소유하기 때문에, 접촉[更]되어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接觸)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痛]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意]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지각(知覺)의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감각의 고뇌(苦惱)와 마주치게 됩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각(感覺)의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意念]은 더욱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지각(知覺)의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심하게 피곤하고 더욱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은 더욱 심하게 괴롭고 피곤해져서 더욱 근심합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심하게 괴롭고 피곤해지며 생각을 따라 더욱 괴롭습니다.

더욱 심하게 피곤하고 괴로운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상 설한 것이 현자들의 태어나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현자들의 늙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늙음이란 무엇인가.

곳곳의 사람들은 저마다 지치고 쇠약한 사람을 늙었다고 합니다. 살갗은 쭈그러지고 머리털은 하얗게 변하며 동작은 무디어 힘이 듭니다. 늙고 꾸부러져 지팡이에 의지하며, 수염과 머리털은 떨어지고, 저승꽃은 검게 돋아나며, 군살은 뿌리를 내려 불거집니다. 그러면 몸은 무너지려 하고, 빛깔은 변해집니다. 이렇게 늙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늙음이라고 이름하며, 현자들의 늙는 괴로움입니다.

무엇 때문에 늙음을 괴롭다고 하는가.

사람이 늙어지면 몸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행(行: 遷流)의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意念]은 늙음에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함께 괴로워집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행(行)의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반복하여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意念]은 더욱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반복하여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서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심하게 괴롭고 피곤해져서 근심하며 고뇌합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서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감수하는 데서, 마음[意念]은 더욱 심하게 괴롭고 피곤해져서 고뇌하고 근심합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서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서로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심하게 괴롭고 피곤해져서 고뇌하며 근심합니다.

더욱 심하게 고뇌하고 근심하는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서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늙음을 괴롭다고 말합니다. 이상이 그 괴로움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현자들의 병드는 괴로움을 설하게 됩니다.

병이란 무엇인가.

머리에 드는 병, 배에 드는 병, 귀에 걸리는 병, 코에 걸리는 병, 입에 걸리는 병, 입술에 걸리는 병, 혀에 걸리는 병 등이 있고, 또 목구멍에 걸리는 병, 구역질나는 병, 증세가 변덕스러운 병, 설사병, 열병, 임질 등이 있으며, 그리고 미친 병, 목구멍에 혹이 있는 병, 심심병(尋尋病), 골절 병, 피부병, 지방(脂肪)이 과도한 병, 피가 뜨거운 병, 담(痰)병 등이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여러 종류의 병들과 함께 몸에 기생(寄生)하여 떠나지 않고, 다 몸에 붙어 있으니, 현자들의 병드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병을 괴롭다고 하는가.

사람이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몸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마음[意念]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함께 접촉되어 괴로워집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반복하여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괴로워집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반복하여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로워집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져서 근심하고 고뇌합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져서 근심하고 고뇌합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져서 근심하고 고뇌합니다.

더욱 심하게 근심ㆍ고뇌하는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반복하여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 위에 설한 것이 현자들의 병드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 인연을 따라서 현자들의 죽는 괴로움을 말하게 됩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존재는 허망합니다. 허망하게 존재한 사람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어서, 여기 저기서 버려지게 됩니다. 몸은 부서지고 무너져서 다시 볼 수 없고, 목숨의 기능이 다하고 나면 다섯 가지 쌓임도 흩어져 버립니다. 목숨의 기능이 이미 사라져서 죽을 때를 죽음이라고 이름하며, 현자들의 괴로움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음을 괴롭다고 하는가.

죽음은 사람의 몸을 접촉시켜 괴롭힙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이 접촉되어 괴로워집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이 접촉되어 괴로워집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이 더욱 괴로워집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이 더욱 괴로워집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져서 뉘우치며 고뇌합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피곤해져서 뉘우치며 고뇌합니다.

더욱 심하게 뉘우치며 고뇌하는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자들의 죽는 괴로움이 있다고 설한 것입니다.

역시 이 인연을 따라서 현자들의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서로 만나는 괴로움을 설하게 됩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 만남이란 무엇인가.

현자들이여. 또 사람은 여섯 가지를 스스로 끌어안고 있는데[內六處]3), 좋아하지 않아야 하고, 좋아할 수도 없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과 서로 만나서 하나의 무너지는 모양을 지니게 됩니다. 모이고 어우러져 함께 작용하다가 서로 떠나게 되면,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깥 경계[外六處]4)도 또한 그러하며, 식(識)5)도 그러하며, 사(思)6)도 그러하며, 통(痛)7)도 그러하고, 또 사상(思想)8)도 그러하며, 염(念)9)도 그러하며, 애(愛)10)도 그러하며, 육행(六行)11)
도 그렇습니다.

또 현자들이여, 사람은 여섯 요소(要素)를 지니고 있지만, 좋아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섯 요소란 무엇인가. 땅의 요소ㆍ물의 요소ㆍ불의 요소ㆍ바람의 요소ㆍ공(空)의 요소ㆍ식(識)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한데 모여 계속 쌓여 합쳐 있으면서, 함께 어울려 같이 작용하는 자체가 바로 괴로움이기 때문에, 현자들의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연으로 현자들의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현자들이여.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 작용하며 어울림이, 사람의 몸을 접촉시켜 괴롭히는 것입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이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이 접촉되어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로워집니다.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지고 괴롭습니다.

몸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마음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지고 괴롭습니다.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데서, 몸과 마음은 더욱 심하게 피곤해지고 괴롭습니다.

더욱 심하게 피곤하고 괴로운 몸과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다시 접촉되고, 접촉된 감수작용으로부터 반복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자들의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를 근거로 현자들의 좋아하는 것과 서로 헤어지는 괴로움을 설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과 헤어짐이란 무엇인가.

현자들이여, 또 사람들은 자신의 것[所自: 能取의 대상]과 자신의 소유[所入: 所取의 대상]로 여기며 좋아하지만, 여기에서 서로 헤어지고 없어져 버립니다. 서로 저마다 헤어져서 떠나버리니, 서로 함께 하지도 못하고, 어울리지도 못하며, 같이 있지도 못하고, 서로 만나지도 못하며, 접촉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괴롭게 여깁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바깥[外六處] 역시 그러하며, 식(識)도 그러하며, 접촉의 애착[觸愛: 觸欲]도 그러하며, 감수[痛]도 그러하며, 염(念)도 그러하며, 애(愛)도 그러하며, 여섯 가지 지님[六持: 六界]도 그렇습니다.

현자들이여, 또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를 지녔다고 좋아합니다. 여섯 가지 요소란, 땅의 요소ㆍ물의 요소ㆍ불의 요소ㆍ바람의 요소ㆍ공(空)의 요소ㆍ식(識)의 요소입니다. 여기에서 서로 헤어져서 없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로 저마다 떠나버려서, 화합되지 않고 멀리 흩어지며, 같이 있지도 못하고, 서로 만나지도 못하며, 같이 접촉하지도 못하니, 이것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자들의 좋아하는 것과 서로 헤어지는 괴로움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때문에 또한 이 인연을 따라서, 구하는 대상을 얻지 못함도 역시 괴롭다고 설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또 세상 법을 설해야 합니다.

현자들이여, 사람이 만일 태어남[生法]에 대해 태어나지 않겠다고 결단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자들이여. 사람들은 늙는 일[老法]에서도 이와 같이 늙음에서 벗어나 보려고[欲生], 늙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애를 써도 태어남과 함께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자들이여, 병드는 일[病法]도 그렇습니다. 병드는 일이 결정된 사실임에도, 병에서 벗어나 보려고 자신은 병의 괴로움을 받지 않겠다며 벗어나려고 합니다. 현자들이여, 죽음의 일[死法]도 그렇습니다. 죽음의 길[死有]은 결정된 사실임에도,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자신은 죽지 않겠다고 하지만, 병의 괴로움과 함께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자들이여, 또 사람들은 괴로움이 생기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요, 몹시 좋지 못한 일이요,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기분 좋지 않고 몹시 좋지 못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괴로움을 벗어나 보려는 데서, 괴로움을 기분 좋은 일, 몹시 좋은 일, 마음에 드는 일로 되돌리려고 하지만, 욕망대로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현자들이여. 또 사람이 사상(思想)을 추구한다면, 추구하는 생각의 즐김이나 애착이 소용없고, 의식(意識)을 둘 수도 없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일으킨 이가, 추구하는 생각의 즐김이나 애착이 소용없고, 의식을 둘 수도 없다고 하던 사상의 추구에 대해, 이 마음의 작용을 가능케 하고 뜻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은 이 마음으로 마땅히 즐김이나 애착을 작용시켜, 의식을 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현자들이여, 또 이 사람에게 접촉의 작용이 가능하고 뜻에 알맞은 일이 있기도 합니다. 가령 이 의식의 접촉이 이미 생기고 작용이 가능하여 뜻에 알맞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영원히 떠나지 않도록 한다면, 이 욕구(欲求)는 당연히 결단하지 못합니다.

현자들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사상(思想)을 일으켜서 즐기고 애착하며, 뜻에 알맞도록, 이것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 사상을 간직한 마음에 욕망을 일으키며, 뜻에 알맞게 하였을지라도, 항상 견고하게 이것이 서로 뗘날 수 없게 한다면, 이 소원은 결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도 역시 괴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본래부터 다섯 쌓임[五陰]을 괴롭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에서 나온 온갖 법은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불행한 변고와 질병[厄病]으로 무너지고 고통스러우며 시들어 노쇠해지니, 견고하지 않아 믿을 수가 없으며, 구르고 변하여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다섯 쌓임은 괴롭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과거 세상의 현자[賢者]들도 똑같이 괴로움의 도리라고 하였고, 미래 세상의 현자들도 또한 괴로움의 도리라고 할 것이며, 현재 세상의 현자들도 역시 괴로움의 도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달라짐이 없고, 뒤바뀌지 않으며, 미혹하지 않고, 있는 대로의 도리이며, 그대로 부합하는 도리로서 현자들의 도리입니다. 현자들은 이 도리를 알고 보고 해탈하여 그대로의 도리에 알맞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현자들의 도리라고 합니다.

무엇이 현자들의 괴로움의 쌓임[苦習]으로서 현자들의 도리라고 하는가.

현자들이여, 또 사람이 여섯 가지를 스스로 끌어안은 몸으로 계속 좋아하며, 저것을 애착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친근하게 지내니, 이것을 쌓임[習]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몸과 같이 바깥 쌓임[外身]도 또한 그렇게 식별[識]하여 접촉[更]하고 판단[知]하여 조작[行]하며 좋아합니다[哀].

현자들이여, 또 사람은 여섯 가지를 지녔다고 좋아합니다. 여섯이란 첫째는 땅이요, 둘째는 물이요, 셋째는 불이요, 넷째는 바람이요, 다섯째는 공(空)이요, 여섯째는 식(識)입니다. 저것들을 애착의 대상으로 삼고 서로 친근하여 왕래하니, 이것을 쌓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자식과 함께 아내와 딸린 종ㆍ마부ㆍ밭과 토지ㆍ사택(舍宅)ㆍ생활터전의 점포ㆍ잠자리의 기물[臥具]ㆍ돈놀이[便息] 등이 있어서, 애착하고 친근하여 접촉하고 왕래하며 구하니, 마땅히 이것이 애착의 쌓임이요, 괴로움의 쌓임으로서 현자들의 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자들은 과거 세상에 서도 역시 애착의 쌓임을 괴로움의 쌓임으로 여기며 현자들의 쌓임이라 하였고, 미래 세상에 서도 역시 애착의 쌓임을 괴로움의 쌓임으로 여기며 현자들의 쌓임이라 할 것이며, 지금 현재 세상에서도 역시 애착의 쌓임을 괴로움의 쌓임으로 여기며 현자들의 쌓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달라지지 아니하고, 있는 대로이며, 뒤바뀌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않는 참된 도리이니, 바로 있는 그대로 현자들의 도리입니다. 현자들은 이 도리를 접촉해서 보고 해탈하여 그대로의 도리에 서로 알맞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쌓임을 현자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사라진[苦盡] 현자들의 도리라고 하는가.

현자들이여, 어떤 사람이 자기 몸 속의 여섯 요소를 스스로 끌어안고 있을지라도,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기에서 해탈을 얻어 함께 접촉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끊어져서 치우침이 없고, 계속 벗어나서 다 사라지면, 다시 상대하는 일이 없어지고, 이미 다 없어져서 고요해집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사라짐입니다. 이 몸 속과 같이 바깥도 또한 그러하며, 식이 서로 친근하여 접촉[更]함ㆍ사상(思想)ㆍ간직된 생각의 작용[念行]ㆍ상대하여 좋아함[望愛]도 역시 그렇습니다.

현자들이여, 또 사람이 여섯 가지 곧 첫째 땅ㆍ둘째 물ㆍ셋째 불ㆍ넷째 바람ㆍ다섯째 공(空)ㆍ여섯째 식(識)의 지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해탈을 얻어 함께 접촉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끊어져서 치우침이 없어지고, 이미 버리어 달라지면서, 마음을 쓰지 않아도 고요해진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사라짐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자식이 있고, 집이 있고, 종이 있고 마부가 있는데 애착을 두지 않는다면, 밭과 토지ㆍ사택(舍宅)ㆍ생활터전의 점포[居肆]ㆍ잠자리의 기물[臥具]ㆍ이자돈놀이[賣買利息]에도 애착을 두지 않습니다. 서로 가까이 하지도 않으며, 구하는 마음을 내어 이것을 소유하는 일도 없습니다. 마땅히 이 애착이 다 없어짐이 괴로움의 사라짐이요, 현자들의 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자들이여, 과거 세상에 서도 역시 애착이 다 없어짐을 괴로움의 사라짐이요, 현자들의 도리라고 하였으며, 미래 세상에서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며, 지금 현재 세상에서도 역시 애착이 없어짐이 괴로움의 사라짐이요, 현자들의 도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달라지지 아니하고, 있는 대로이며, 뒤바뀌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않으며, 참된 도리로서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이미 다 사라진 것을 현자들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을 다 사라지게 하는데, 받아 행할 현자들의 도리인가.

여기에 현자들의 여덟 가지 닦는 길이 있으니, 첫째는 바른 소견이요, 둘째는 바른 다스림이요, 셋째는 바른 말이요, 넷째는 바른 실행이요, 다섯째는 바른 생활이요, 여섯째는 바른 방편이요, 일곱째는 바른 생각이요, 여덟째는 바른 선정입니다.

현자들의 바른 소견이란 무엇인가.

만일 현자들이 도를 배워 덕[道德]을 갖춘 제자 라면, 괴로움에 대해서는 괴로움을 생각하고, 쌓임에 대해서는 쌓임을 생각하며, 사라짐에 대해서는 사라짐을 생각하고, 닦는 길에 대해서는 닦는 길을 생각하여, 분별의 관찰력 [分別觀]을 얻고, 능숙하게 법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상상(想像)이 능숙하고, 관찰하여 상상함이 능숙하며, 격에 맞는 상상이 능숙하고, 받아들여 행함이 능숙해진다면, 이를 바른 소견이라고 이름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도 닦는 일[道德]에 대해 일찍 행해야 한다는 마음을 간직하면, 보고 행하며 잘못을 뉘우쳐서 받아들인 감각을 소멸하여 안정[受止]시킵니다. 거짓 없는 생각[無爲念]으로 고요히 소멸하고 안정시켜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분별하면서 도리의 관행(觀行)14)
을 계속 행하고, 마음을 법에서 관찰하여, 계속 떠나지 않고 계속 모아 받아들인다면[會受], 이것을 바르고 곧은 소견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만일 현자들이 도를 배워 덕을 갖춘 제자라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쌓임을 쌓임으로 생각하며, 사라짐은 사라짐으로 생각하고, 닦는 길을 닦는 길로 생각합니다. 만일 연달아 집중되는 생각을 따라 행한다면, 이것을 바른 다스림이라고 이름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닦고 배운 행을 계속 마음에 간직한다면, 행을 따라 관찰하며 잘못을 뉘우치게 됩니다. 거짓이 없어져서 고요히 받아들임이 소멸되어 안정되면, 집착할 대상이 없어지면서 해탈을 얻습니다. 마음으로 관찰하여 안정시키고, 추구할 대상과 집중할 대상에, 다스리는 행을 간직하여 다스리는 행을 따른다면, 이것을 바른 다스림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말이란 무엇인가.

똑같이 현자들이 도를 배워 덕을 갖춘 제자라면, 괴로움을 따라서 괴로움을 생각하고, 쌓임을 따라서 쌓임을 생각하며, 사라짐을 따라서 사라짐을 생각하고, 닦는 길을 따라서 닦는 길을 생각하면서, 입으로 범하는 네 가지 죄와 그 외 다른 구업(口業)의 나쁜 행을 소멸시켜 평정(平靜)합니다. 이로부터 평정하여 벗어남을 얻고, 평정하여 계속 벗어나며, 입을 거두어 지키면서 짓지 않아야 할 일은 짓지 않습니다. 받을 죄에서 받을 죄가 없도록 이미 소멸하여 평정되었다면, 이것을 바른 말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이미 행하는 일마다 닦는 길을 생각하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행을 따라 잘못을 뉘우쳐서 마음이 평정되고, 거짓이 없어져서 세속을 벗어납니다. 고요히 마음에 알맞게 소멸되고 안정되어 집착할 대상이 없어지면, 해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분별하고 관찰하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나쁜 짓이 없어져서, 여의고 평정되며 계속 벗어나게 됩니다. 입을 단속하여 지키면서 짓지 않아야 할 일은 짓지 않고, 받을 죄에서 받을 죄가 없도록 이미 소멸하여 안정되었다면, 이것을 바른 말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실행이란 무엇인가.

현자로서 도 닦는 덕을 마음에 간직한 제자라면, 괴로움에서 괴로움을 생각하고, 쌓임에서 쌓임을 생각하며, 사라짐에서 사라짐을 생각하고, 닦는 길에서 닦는 길을 생각하면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없앱니다. 또한 몸으로 짓는 그 외 다른 나쁜 짓을, 여기에서 소멸하고 평정하여 벗어나게 되면, 몸을 단속하여 지키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받을 죄에서 받을 죄가 없도록 이미 소멸하여 평정되었다면, 이것을 바르고 곧은 실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도덕의 행으로 세상에서 행동하기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소견이 잘못을 뉘우쳐 안정되고 거짓이 없어져서 세속을 벗어납니다. 소견이 고요히 소멸하여 안정되고 거짓이 없는 데서 세속을 벗어나 집착하지 않으니, 해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뜻으로 관찰하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없앨 수 있다면, 역시 몸으로 짓는 그 외 다른 나쁜 짓도 제거하고 벗어나서 평정하며 계속 벗어나게 됩니다. 몸을 단속하여 지키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받을 죄에서 받을 죄가 없도록 이미 소멸시켜 평정되었다면, 이것을 바르고 곧은 실행이라고 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생활이란 무엇인가.

만일 현자들이 도 닦는 덕을 갖춘 제자라면, 괴로움은 괴로움에서 괴로움을 생각하고, 쌓임은 쌓임에서 쌓임을 생각하며, 사라짐은 사라짐에서 사라짐을 생각하고, 닦는 길은 닦는 길에서 행하여 이루면서, 구해서는 안될 대상과 행해서는 안될 대상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여러 축생(畜生)의 삶은 삿된 행위로 자신을 살리려고 하니 이것을 삿된 삶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세상에서 행해온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행하여 이룬 도를 가지고 세상에서 행하기를 생각하면, 관찰하고 뉘우쳐서 소멸하고 평정시켜 세속에서 벗어납니다. 거짓이 없는 관찰로, 고요히 소멸하여 안정되면, 세속을 벗어나서 집착하지 않으니, 해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이뤄진 관찰을 통해서 마땅히 구하지 않아야 할 것은 구하지 않으니, 여러 축생이 자기 목숨만을 살리면서 살아가는 행위를 벗어나고 평정하며 계속 벗어나게 됩니다. 생활을 단속하고 지키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받을 죄에서 받을 죄가 없도록 이미 소멸하고 평정되었다면, 이것을 바르고 곧은 생활이라고 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방편이란 무엇인가.

현자들이 도 닦는 덕을 갖춘 제자라고 한다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쌓임을 쌓임으로 생각하며, 사라짐을 사라짐으로 생각하고, 닦는 길을 닦는 길로 생각하여, 정진(精進)의 대상ㆍ방편(方便)의 대상ㆍ벗어남의 대상ㆍ주지(住止)의 대상ㆍ주체적 대상ㆍ펼침의 대상ㆍ기쁨의 대상을 헐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으면서 바른 평정[正止]을 마음에 간직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르고 곧은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이룩한 행으로 세상에서 행하기를 생각하며, 보고 뉘우쳐 평정하면, 소견이 세상을 벗어나서 거짓이 없어집니다. 고요히 안정되고 집착하지 않는 데서, 이미 도의 관찰력을 얻고 해탈합니다. 정진의 대상ㆍ방편의 대상ㆍ벗어남의 대상ㆍ주지의 대상ㆍ펼침의 대상ㆍ기쁨의 대상에 대해, 헐거나 없애지도 않고, 바르게 거둬들여 안정된 방법을 마음에 간직하면, 이것을 바르고 곧은 방편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의 곧고 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만일 현자들이 도 닦는 덕을 갖춘 제자라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쌓임을 쌓임으로 생각하며, 사라짐을 사라짐으로 생각하고, 닦는 길을 닦는 길로 생각하여, 계속 생각하고 생각을 따라 생각마다 잊지 않으며, 말을 적게 하여 바른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곧고 바른 생각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이룩한 도행(道行)으로 세상에서 행하기를 마음에 간직하면, 뉘우칠 필요가 없는 경지에서 거둬 평정하고, 세속을 벗어나서 거짓이 없어집니다. 고요히 안정된 가운데 하나의 덕성(德性)을 보면, 집착할 대상이 없어져서, 해탈한 것과 같습니다. 뜻으로 바른 생각을 관찰하고 바른 생각을 간직하여, 생각마다 잊지 않고 말을 적게 하며, 바른 생각을 벗어나지 않으면, 이것을 곧고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의 바르고 곧은 선정이란 무엇인가.

만일 현자들이 도 닦는 덕을 갖춘 제자라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쌓임을 쌓임으로 생각하며, 사라짐을 사라짐으로 생각하고, 닦는 길을 닦는 길로 생각합니다. 뜻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안으로 흔들리지도 않고 밖으로 달아나지도 않습니다. 이미 거둬 평정(平靜)하였기 때문에 뜻과 생각이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곧고 바른 선정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의 일을 관찰하여 지니고, 역시 해탈을 체득한 뜻과 생각으로 세상의 행위를 보고, 뉘우치며 거둬 평정하면, 세속을 벗어나서 거짓이 없어지고, 소견도 마땅히 얻은 그대로 집착할 대상이 없어집니다. 해탈한 인연을 따르니, 마음이 뜻한 대상을 향하여 관찰할지라도, 평정(平靜)한 중정(中正)이요, 안전한 하나입니다. 안으로 미혹하거나 밖으로 달아나지 않게 거둬들여 평정시키고, 염(念)과 정(定)을 바르고 곧은 두 생각[二念]에 둔다면, 이것을 바르고 곧은 선정이라고 이름하며,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현자들이여, 과거 세상에서도 역시 이것을 괴로움이 다 사라질 때까지 받아 지녔던 현자들의 도리었고, 미래 세상에서도 역시 여기에서 받들어 닦아야 할 현자들의 도리이며, 지금 현재 세상에서도 역시 여기에서 받아 행하여 괴로움을 없애는 현자들의 도리입니다.

이와 같이 달라지지 아니하고, 있는 대로이며, 잃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 참된 도리이니, 본래대로 덕이 있는 그대로 도덕의 도리입니다. 현자는 이 도리를 접촉해서 보고, 도리에 알맞은 해탈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다 사라질 때까지 여기에서 행하니 도덕의 도리라고 이름합니다. 끝으로 줄여서 말한다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쌓임과 괴로움의 사라짐을 모두 이 닦는 길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행은 이렇게 한량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이와 같이 설하니, 비구들은 받들어 행하여 숙명관(宿命觀)[대안반(大安般)에 이르기를, “본생(本生)의 인연을 확신하여 앎은 숙명(宿命)을 통해서 이뤄지니, 또 바른 견해[直見]라고 이름한다” 하고, 뜻을 결정하여 말하기를, “이전의 일[前事]을 미래의 일[後事]과 같이 앎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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