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보적삼매문수사리보살문법신경(佛說寶積三昧文殊師利菩薩問法身經)

불설보적삼매문수사리보살문법신경(佛說寶積三昧文殊師利菩薩問法身經)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최윤옥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열기(羅閱祇)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1,250명의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문 밖에서 있었다. 왜냐하면 때마침 부처님께서 삼매에 들으셨기 때문이었다. 오래지 않아 부처님께서는 깨어나 문수사리를 보시고, 곧 들어오라고 하셨다. 들어가 예배드리고 서 있자, 부처님께서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조금 전에 드셨던 삼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적(寶積)이라고 한다.”

문수가 다시 여쭈었다.

“어찌하여 보적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마니주(摩尼珠)가 본래 청정하고 훌륭하나, 다시 물로 씻어서 평지에 놓으면 더더욱 밝고 뚜렷해져서 보지 못하는 이가 없게 되는 것처럼 조금 전에 든 삼매도 동방의 셀 수 없이 많은 아승기(阿僧祇) 국토와 부처님을 본다. 설사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도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법의 본제(本際)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인(印)을 얻는 것이 되니, 마니보(摩尼寶)의 집에 네 모퉁이가 있는데 한 모퉁이에서 네 모퉁이를 빠짐없이 모두 다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본제를 본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본제를 아느냐?”

곧 말씀드렸다.

“압니다.” “그것이 처한 곳이 어디냐?”

대답하였다.

“제가 처(處)한 곳이 본제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처해 있는 모든 곳은 다른 제(際)입니다. 이 제에 있는 사람은 법(法)에 있지도 않고 또한 선악에 있지도 않으니, 모든 법도 이와 같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살펴서 그것을 압니다. 보통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없으며, 본래 전해진 습관을 따를 뿐 짓는 주체가 없으므로 도달하는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지혜[慧]라고 하느냐?” “살피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것이니, 그러므로 지혜입니다.”

다시 물으셨다.

“무엇을 도(道)라고 하느냐? 생각하는 것[念]을 도(道)라고 이름하느냐?”

대답하였다.

“생각하는 바의 도는 생각이 없으므로 도입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생각이 있는 것으로써[有念] 생각이 없다[無念]고 말한다면, 어떤 법으로써 새로 배우는 남자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하겠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나오는 바[所出]도 없고 또한 해탈[解]도 없으나, 음욕[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 끝이 없으니, 이러한 법으로써 모두를 가르쳐야 합니다. 원래 근(根)이 없으므로 나올 수도 없고 해탈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본제를 허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나는 태어남[生]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일을 버리지 않으면 도에 가까이 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범인(凡人)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법을 가지고 가르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 색(色)과 고통[痛庠]과 사상(思想)과 사생(死生)과 식(識)이니 무너지는 바가 없으며, 또한 무너지는 음란함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법을 얻도록 한다. 이러한 법으로 불도(佛道)를 이루려는 사람을 가르치니, 내가 이 법으로 인하여 스스로 부처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무너지는 바가 없는 법이기에 부처에 이르며, 얻을 바가 없는 법이기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부처란 곧 법신(法身)이며, 모든 종류의 힘[力]과 무소외(無所畏)가 모든 법신이 들어갈 곳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몸[一身]이 곧 법신이기 때문이다. 법신은 수(數)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범인(凡人)이고 이는 범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니, 흩어짐이 없는 몸[無所散身]이 바로 법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네 개의 강이 모두 바다에 들어가 합해져서 한맛이 되는 것처럼 천 가지의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 하나의 법신이 된다. 모든 종자에 각각 이름이 있으나 모두 합해서 곡식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세속의 일[俗事]이나 도의 일[道事]이나 모두 합해져 하나의 법신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세속의 일이라고 지적해 가리킬 수 없고 도의 일 역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속의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나, 또한 볼 수가 없다. 내가 말한 법신에 두 가지 앎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는 지은 악이 모두 없어진다.”

문수가 말하였다.

“법신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없고, 인간에 있는 것도 볼 수 없으며, 3도(道)에 있는 것도 볼 수 없고 또한 열반에도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말한 것처럼 그렇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너에게, ‘부처님께서 5도(道)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꿈에서 지옥[泥犁]에 들어가거나 금수(禽獸)나 벽려(薜荔)가 되거나 위로 천상에 있거나 사람이 되거나 하는 것을 보았더라도 깨고 나면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 법신은 드러나는 바가 없다고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수(數)가 있기 때문이니, 수가 있으면 세속에 떨어집니다. 나한(羅漢)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위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히 하나의 법신입니다. 왜냐하면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마치 약간의 보석은 분별하여 알 수 있지만 법신은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분별할 수 없으므로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기 때문입니다. 법신은 생기는 바도 없고 없어지는 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주(常住)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 왜냐하면 허물이 없기 때문이며, 해탈할 것도 없고 해탈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에게 물으셨다.

“법신을 아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만일 얻는다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세간이 있는 곳을 아느냐?”

곧 대답하였다.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곳이 그것이냐?”

문수가 말하였다.

“마치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세상에 처하는 것과 같아서 이 세간에 있는 것은 단지 이름뿐이요, 털끝만치 구하더라도 나를 위해서 말해줄 것이 없으며, 그 세상이라는 것도 법신을 여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세상은 어느 곳에 있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구름이 있는 곳과 같아서 있는 곳이 없으며, 또한 약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세상이며 세상의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너는 내가 없어진다[滅]고 생각하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법신은 생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김이 있다면 멸함이 있겠거니와, 법신이란 생김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 멸하지 않으시는 줄을 압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만일 과거의 항하(恒河: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부처님께서 모두 이미 열반[般泥洹]에 드셨노라고 한다면 네가 믿겠느냐?”

그러자 곧 말하였다.

“믿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믿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그 부처님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응화(應化)하신 것이며 응화하여 열반에 드신 것이므로 그것을 믿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네가 죽으려 하는 사람을 보면 그가 향하여 갈 곳을 아느냐?”

그러자 곧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향하여 가는 곳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모인 사람들에게 설법하여라.”

문수가 말하였다.

“누가 듣고자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듣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법을 설해야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신을 설하여라.”

곧 말하였다.

“법신은 볼 수 없거늘 무엇을 가지고 그것을 설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설한 법신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인 사람들 가운데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할 것이다.”

문수가 말하였다.

“만일 두려워한다면, 그 본제(本際)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제는 두려움이 없으므로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문수가 말하였다.

“모든 법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금강(金剛)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어찌하여 금강이라고 하느냐?”

대답하였다.

“아무도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름하여 금강이라고 하며, 부처님은 풀어서 밝힐 수 없고[不可議] 모든 법 역시 풀어서 밝힐 수 없으므로 금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점에서 금강이라고 하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모든 법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법마다 잘 살피시므로 금강불(金剛佛)이라고 합니다.” “어떤 인(因)으로써 금강이 되느냐?”

곧 대답하였다.

“소유(所有)와 무소유(無所有)에서 일일이 구하여도 있는 바가 없기에 공(空)이라고 하며, 공이란 바로 부처님이시니, 이로써 금강이 됩니다. 모든 법은 모두 부처님이시며 의지할 바 없는 데 의지하므로 금강입니다.” “무엇을 말미암아 금강이 되느냐?”

곧 말하였다.

“의지하는 바가 없으면 가까이할 것도 없으므로 금강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감응(感應)을 보이려 하니, 아난을 불러오너라. 왜냐하면 모두 법을 받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조금 전에 설법하신 바를 따르면 볼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거늘, 아난이 와서 무슨 법을 취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다, 장하다. 문수가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동방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기 국토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사리불(舍利佛)이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나와 문수가 있는 곳에 가서 보니, 자리에 없었으므로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문 밖에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을 불러들여라.”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본제(本際)와 법신(法身)에는 가운데[中]가 있고 밖[外]이 있고 안[內]이 있으니, 어느 곳에서 얻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시고, 다시 대답하시기를, “본제는 끝[際]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 또한 법신 가운데 있으니 그가 온 바를 좇아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사리불은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유한다면 여러 성문(聲聞)이 안에서 나와 함께 이야기하는데 네가 밖에서 때도 없이 들어온다면 번거롭지 않겠느냐?”

대답하였다.

“비록 밖에 있다 하여도 고통스럽지도 않고 번거롭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어찌하여 고통스럽지도 않고 번거롭지도 않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문을 위하여 설법하시면 저도 이와 같이 고통스럽지도 않고 번거롭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처소는 법신을 여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수는 다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알 수같이 오랜 겁 동안 부처님을 뵐 수 없고 또 들어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괴롭지도 번거롭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 역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법은 주인이 없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고통도 없고 번거로움도 없습니다. 모든 이름은 부처님께서 이로 인하여 사람을 가르치시는 것일 뿐이니,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이로써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멀리서 사리불에게 물으셨다.

“너는 문수가 한 말을 다 들었느냐?”

사리불이 말하였다.

“예, 부처님께서 몸소 수고하시지 마십시오. 이제 기꺼이 가서 그 법을 듣겠습니다.”

문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사리불을 들어오게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멀리서 사리불에게 앞으로 오라고 말씀하시자, 앞으로 와서 예배하고 자리에 앉았다.

문수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이 법 가운데 어느 것이 존귀하기에 들어와서 귀를 기울여 존귀한 법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 하였습니까?” “그리워하고 좋아하여 듣고 싶었으므로 들어와서 들으려 하였습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살펴보면 설한 것과 같이 이 법은 실로 존귀하며 매우 깊고 깊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에는 두 가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그대가 아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 그 안에는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한과 벽지불 또한 이와 같고 나아가서 불도를 구하는 이도 모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희망하여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래 청정하므로 모든 법도 역시 청정합니다.”

사리불이 나한이 그 속에 없는 까닭을 물으니, 문수가 말하였다.

“음란함과 성냄이 모두 바로 나한이 되며, 머무는 것도 없고 이루어지는 것도 없으니 어느 곳에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었으므로 이곳에 왔습니다. 단지 깊은 법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다시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나 법을 들을 때에는 진실로 피로하거나 싫증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때 문수가 말하였다.

“법에 싫증냄이 없다는 사리불의 말이 옳다면 법신에 받아들일 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싫증내는 일이 없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법신에는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그 본제(本際)에는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까?”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문수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본제가 받아들일 것이 없으므로 그대가 싫증내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문수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 본제가 법을 받아들인다면 그대에게 싫증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부처님 말씀을 제외하고 내가 말한 것은 견줄 바가 못됩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 법으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믿습니까?”

그러자 사리불이 말하였다.

“본래부터 그것으로써 모두 열반에 들었습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확실히 이것이 항상 흔들려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곧 대답하여 말하였다.

“법신은 생기는 바도 없고 멸하는 바도 없으므로 흔들려 변함이 없는 줄을 압니다.”

다시 물었다.

“나한이 남음이 없이 다하여 다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믿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그가 다시는 유(有)가 없는 줄 알므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는 바가 없으면 그치는 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한다’고 말합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나한이 다함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모든 법을 다 버려 얻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수가 물었다.

“그대는 항하의 모래알같이 수많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심으로써 열반에 드시지 않으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자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법신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므로 열반에 들지 않습니다.”

문수가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 한 분의 부처님이신 줄을 믿습니까?”

그러자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답하였다.

“법신은 하나이어서 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수가 물었다.

“모든 국토가 한 국토인 줄을 믿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대답하여 말하였다.

“모든 것이 다하기[盡] 때문입니다.”

문수가 다시 물었다.

“모든 법이 알 것도 없고 해탈할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는 줄을 믿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자연으로써 자연을 알 것이 없기 때문에 알 것도 없고 해탈할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습니다.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고 볼 것도 없습니다. 본제(本際)는 처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믿습니다.”

문수가 다시 물었다.

“법신이 머물되,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는 줄을 믿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또한 이 법이 아니면 생기는 것이 있고 없어지는 것이 있고 멈추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믿습니다.”

문수가 물었다.

“헤아릴 수 없는 법신이 나오는 그곳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대답하였다.

“법신이란 또한 음란함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처소가 없습니다.”

다시 사리불에게 물었다.

“그대는 모든 법이 부처님께 의지하고, 또 의지할 바 없는 데에 의지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대답하였다.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믿습니까?”

대답하였다.

“멈추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것이 없다는 것은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의지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은 경계를 내가 모두 물었고 그대가 모두 아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사리불이 문수에게 말하였다.

“지금 내가 들은 것을 생각하여 다시는 잊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남자와 여인이 이 법을 듣고 지니고 소리내어 독송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그 뜻을 해설해 주면 속히 원하는 것을 얻을 것입니다.”

문수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런 까닭에 과거의 부처님께 공양한 사람이 와서 모두 이 인(印)을 얻을 것입니다. 이 법은 무엇이라 하며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그러자 대답하셨다.

“문법신보적(問法身寶積)이라 이름한다. 본제를 지니되 처소가 없이 지니고, 모든 법을 지니되 걸림이 없게 하라. 이것을 듣는 사람은 곧 이 법으로 인하여 모두 얻게 될 것이니, 그들은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전전(展轉)하여 서로 개도(開導)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글이 간략하므로 설명을 많이 해야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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