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보살본업경(佛說菩薩本業經)

불설보살본업경(佛說菩薩本業經)

오(吳) 월지(月氏)우바새 지겸(支謙) 한역

1. 서품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마갈(摩竭)의 도량에서 노니셨다. 처음 부처가 되셨을 때 모습이 매우 밝았고, 저절로 된 연꽃 보배 사자좌는 옛날의 모든 부처님이 앉으셨던 것처럼 모두 다 그러하였다. 도덕과 위의와 상호가 하나 같고 몸과 뜻이 청정하며 복행을 두루 갖추고 광명은 사람과 국토와 법을 밝게 비추어 과거·미래·현재에 걸림이 없으며 세상에 나오시매 일체에 다 평등하셨다.

그 때 모인 보살들은 다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신통을 묘하게 통달하여 시방에 두루하면서 중생들을 인도해 이롭게 하며 불법의 창고를 열어 열반의 중요한 곳을 보이고, 사람들의 근기에 깊이 들어가 숙명지(宿命智)의 덕과 좋은 방편으로 차츰 가르쳐 교화하며 안팎의 법을 알아 끝내 흔들리지 않고, 모든 불토에 평등하여 분별함이 없으며 부처님의 이름을 칭송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3도(塗)의 일을 모두 통달하였다. 그리고 모두 찬탄하여 말했다.

“부처님은 우리들을 생각하시어 큰 뜻을 세우시고, 우리들에게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선악과 뛰어난 국토와 부처님이 노니시는 곳과, 도의 교화를 일으킴과 법의 뜻을 열어 보임과 부처님의 본업과, 10지(地)·10지(智)·10행(行)·10투(投)·10장(藏)·10원(願)·10명(明)·10정(定)·10현(現)·10인(印)을 다 나타내 보이셨고, 우리들의 흠[瑕疵]홈과 의혹을 끊어 주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행·부처님의 지혜·부처님의 신통·부처님의 힘·부처님의 선정과 무량한 변화의 때를 따름과 4사(事)로 보호하지 않음과 4무소외(無所畏)와 18의 끊어지지 않음[不絶]과 일체의 슬기와 최상의 도덕과 온갖 일의 드러남을 다 나타내신다.”

동방으로 끝없이 가면
향(香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명호는 입정진(入精進)이요,
그 보살의 자(字)는 경수(敬首)다.



남방으로 끝없이 가면
낙림(樂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명호는 불사락(不捨樂)이요,
그 보살의 자는 각수(覺首)다.



서방으로 끝없이 가면
화림(華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습정진(習精進)이요,
그 보살의 자는 보수(寶首)다.



북방으로 끝없이 가면
도림(道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행정진(行精進)이요,
그 보살의 자는 혜수(慧首)다.



동북방으로 끝없이 가면
청련(靑蓮)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비정진(悲精進)이요,
그 보살의 자는 덕수(德首)다.



동남방으로 끝없이 가면
금림(金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진정진(盡精進)이요,
그 보살의 자는 목수(目首)다.



서남방으로 끝없이 가면
보림(寶林)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상(上)정진이요,
그 보살의 자는 명수(明首)다.



서북방으로 끝없이 가면
금강(金剛)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일승도(一乘度)요,
그 보살의 자는 법수(法首)다.



하방(下方)으로 끝없이 가면
수정(水精)이라는 불찰이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범(梵)정진이요,
그 보살의 자는 지수(智首)다.



상방(上方)으로 끝없이 가면
욕림(欲林)이라는 불찰 있는데
그 부처님 이름은 지(至)정진이요
그 보살의 자는 현수(賢首)다.

이 현수 등은 모두 다 거기서 제일의 제자인데 각각 무수한 상인(上人)들과 함께 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쪽 연꽃 위에 앉았다. 그 때 경수보살이 부처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찬탄했다.

“장하십니다. 지금 상인(上人)들의 모임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 머무르는 곳을 보면 불국이 청정하고 의복까지도 다 여래의 덕과 계행에 걸맞습니다. 수행은 미묘하고 각(覺)·근(根)·력(力)을 성취하여 경법 (經法)을 연설하며 부처님의 위신을 얻어서 국토의 청정함과 탁함을 따라 사람을 구제함에 다함이 없으며 도의 교화를 널리 펴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이 국토의 특수한 것은 억백천해(億百千女亥)로서 어질고 어리석고, 아름답고 추하고, 길고 짧고, 오래 살고 요절하고 등 갖가지로 말이 달라 부처님의 덕을 듣고, 각각 이름하되 혹 어떤 이는 부처님을 큰 성인이라 하고 어떤 이는 큰 사문이라 하며 혹은 중우(衆祐)라 하고 혹은 신인(神人)이라 하며 혹은 용지(勇智)라 하고 혹은 세존(世尊)이라 하며 혹은 능유(能儒)라 하고 혹은 승선(昇仙)이라 하며 혹은 천사(天師)라 하고 혹은 최승(最勝)이라 하였으니, 이와 같이 시방 모든 하늘과 사람이 일컫는 부처님 이름은 억만 무수(無數)였다. 이들은 다 부처님이 본래 발심하신 뒤로 널리 교화하여 가르친 무리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발바닥의 상륜(相輪)에서 광명을 놓아 부처 세계의 모든 작은 국토를 다 비추었다. 한 작은 국토란, 한 수미산의 해와 달이 돌면서 비추는 4천하를 말하는데 동쪽의 불우체(弗于逮)와 남쪽의 염부제(閻浮提)와 서쪽의 구야니(拘耶尼)와 북쪽의 울단월(鬱單越)이다. 이 주위에는 큰 바다가 있고 그 주위에 철위산이 있으며 위로는 28천이 있다. 이런 것을 한 작은 국토라 하며 그 주위의 시방을 합하면 백억이 된다. 이 때에 백억의 수미산과 백억의 일월(日月)과 사천왕천(四天王天)·도리천(忉利天)·염천(炎天)·도술천(兜術天)·불교락천(不憍樂天)·화응성천(化應聲天)·범천 (梵天)·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청명천(淸明天)·수행천(水行天)·수미천(水微天)·수무량천(水無量天)·수음천(水音天)·약정천(約淨天)·변정천(遍淨天)·정명천(淨明天)·수묘천(守妙天)·미묘천(微妙天)·광묘천(廣妙天)·극묘천(極妙天)·복애천(福愛天)·애승천(愛勝天)·근제천(近際天)·선관천(善觀天)·쾌견천(快見天)·무결애천(無結愛天)·식혜천(識慧天)·무소염혜천(無所念慧天)과 나아가 28무색천(無色天)이 다 나타나 각각 백억이 있으니, 이것을 한 불찰이라 하고 그 이름을 인세계(忍世界)라 하며 석가모니불이 그 몸을 백억으로 나누어 그 가운데 두루하신다.

마치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았다.

2. 원행품(願行品)

지수보살이 경수보살에게 물었다.

“본래 어떻게 수행하여야 부처님의 성도(聖道)를 이룰 수 있습니까?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하고 남의 악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단점을 보지 못하게 하며 자비심이 지극히 크고 안의 성품[內性]이 밝으며 제자들의 별각(別覺)보다 수승하고 일체의 삿됨이 그를 흔들지 못하게 하며 출생이 단정하고 그 모습이 견줄 데 없으며 가문이 존귀하고, 불법을 존중할 줄 알며 스스로 지키는 의지가 강하고, 항상 높은 재능과 영민함과 정진과 용기 등 네 가지를 행하며, 온갖 덕의 근본을 익혀 끝없이 사람을 제도하고 행하는 일이 무량하며 항상 복된 땅에 태어나고, 그가 하는 말은 신임을 받으며 마음을 항복 받고 뜻을 바루며 생각을 거두어 선정에 들고 공·무상·무원의 법을 깨치며, 4대(大)·5음(陰)·6입(入)·12연기(緣起)에 드나들고 7각(覺)에 걸리지 않으며, 10력(力)의 지혜를 통달하고 모든 길에 두루 들어가 위험과 재액을 구제하며, 석범(釋梵)의 존경을 받고 촛불처럼 어둠을 제거하며 해와 달처럼 천하를 밝히고 사공처럼 사람들을 건네 주며 그 어짊이 삼계에 뛰어나 으뜸이 되는 등 이런 도를 이루고자 하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경수보살이 답하였다.

“장합니다. 불자여, 뜻과 추구하는 바가 드높고 자비가 지극하여 시방 중생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만일 족성자(族姓子) 족성녀로서 불도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몸을 바루고 말과 생각이 일치하며, 입으로는 경전을 익히고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과거를 고치고 미래를 닦으며 도의 뜻을 버리지 않고 덕과 선을 쌓으며 은혜를 베푸는 것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지금 질문하신 바를 다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로서 는 반드시 분명한 불법의 가르침을 받들어 증감(增減)이 없게 하고 스스로 세간의 편안함을 생각하고 계를 받들고 원을 행하여 덕의 근본을 세우기를 서원하십시오.”

가정에 머문다면 계율을 받들고,
중생이 다 탐욕의 마음
풀어지기를 원하고.



불법에 든다면
효로서 부모 섬기고
중생이 다 모든 것을 잘 지켜
불도 이루기 원하고.



처자를 가르치면
중생이 다 애욕의
감옥을 벗어나
연모하는 마음 없기를 원하고.



만약 5욕(欲)을 얻었다면
중생이 다 청정함에 들어가
마음에 집착 없기를 원하고.



만일 기악(伎樂)을 즐긴다면
중생이 다
법의 즐거움과
기쁨의 인(忍) 얻기를 원하고.



보배 영락을 차면
중생이 다
아름답고 만족함이 없는
무거운 짐 벗기를 원하고.



아름다운 여자 보면
중생이 다
색의 사랑 버리고
음탕한 태도 없기를 원하고.



누각에 오르면
중생이 다
모두 법당에 올라가
불경을 받들기를 원하고.



방안에 있을 때는
중생이 다
오로(惡露)를 깨닫고
다시 즐거움 없기를 원하고.



보시를 받을 때는
중생이 다
복을 지어 가난을 구제하고
간탐에 떨어지지 말기를 원하고.



가정에 염오가 생기면
중생이 다
빨리 해탈을 얻어
아무 얽매임 없기를 원하고.



만일 집을 버리고 나오면
중생이 다
고뇌의 죄를 떠나
정도(正道)에서 편안함 얻기를 원하고.



부처님의 종묘에 들어가면
중생이 다
불법을 가까이하고 법을 행하되
아무 장애 없으라 원하고.



스승에게 나아가면
중생이 다
문을 열고 정도에 들어
다 소원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죄를 버리기 원하면
중생들이 다
그 뜻을 성취하여
학문을 중단하지 말기를 원하고.



흰옷을 벗으면
중생들이 다
도를 알고 덕을 닦되
게으름이 없기를 원하고.



가사를 받아 입으면
중생이 다
법복을 입고 수행할 때
마음에 더러움이 없기를 원하고.



수염과 머리를 깎으면
중생이 다
장식을 버리고
온갖 괴로움 없기를 원하고.



이미 사문이 되었거든
중생이 다
부처님의 뜻을 받아 행하여
천하를 다 깨우치기를 원하고.



계를 받아 성취하면
중생이 다
방편과 지혜 바라밀로
도를 얻기 원하고.



도와 계율 지키거든
중생이 다
모든 법과 계율을 받들어
법의 가르침을 범하지 말기를 원하고.



처음 화상을 받들거든
중생들이 다
선정의 뜻을 따라
해탈을 생각하기 원하고.



크고 작은 스승을 받들거든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것을 잊지 말기를 원하고.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거든
중생들이 다
큰 도를 몸소 알고
위없는 뜻을 내기 원하고.



스스로 법에 귀의하거든
중생들이 다
경장(經藏)에 깊이 들어가
지혜가 바다 같기를 원하고.



스스로 승(僧)에 귀의하거든
중생들이 다
성중(聖衆)에 의지하여
정도에서 구제 받기를 원하고

무릇 문을 열면
중생들이 다
도법(道法)을 개발하여
열반에 이르기를 원하고.



문을 닫거든
중생들이 다
악도(惡道)를 아주 닫고
죄를 모두 없애기를 원하고.



방안에 들어가거든
일체 중생이
안온하고 고요하여
지관(止觀)의 뜻을 얻기 원하고.


자리를 펴거든
일체 중생이
대승의 도에 들어가
천하를 편안하게 하기를 원하고.



고요히 앉거든
일체 중생이
부처의 도수(道樹) 아래 앉아
마음에 의지함이 없기를 원하고.



대중 속에 들어가면
일체 중생이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 이루기를 원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행할 때는
일체 중생이 다
가정을 아주 버리고
세간 생각 없기를 원하고.



뜻을 지키거든
일체의 중생들
마음이 방일하지 않고
잡된 생각 없기를 원하고.



일찍 일어나거든
일체 중생이
비상(非常)함을 깨닫고
정진의 뜻을 일으키기 원하고.



법상에서 내려오거든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자취 밟고
마음이 흔들리지 말기를 원하고.



옷을 입거든
일체의 중생들이
항상 부끄러움을 알고
뜻을 거두어 도를 지키기 원하고.



띠를 매거든
일체의 중생들이
띠를 매고 선을 닦되
마음에 게으름 없기를 원하고.



다음으로 중의(中衣)를 입거든
중생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교만함이 없기를 원하고.



윗법복 입거든
중생들이 다
성인의 표식(表式) 입고
도행(道行)에 민첩하기를 원하고.



대변이나 소변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더러움을 버리고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기를 원하고.



대소변을 마치고 씻을 때에는
중생들이 다
유연하고 온화하며
청정하고 근신하기를 원하고.



물로 다 씻었거든
중생들이 다
법으로 깨끗이 씻고
다시는 나쁜 짓 없기를 원하고.



손에 칫솔 잡거든
중생들이 다
법의 글귀를 배워
모든 더러움 후벼내기를 원하고.



양치질을 할 때는
중생들이
정성(情性)을 씻어 버리고
청정하게 머무르기를 원하고.



손을 씻을 때에는
일체 중생이
부드럽고 깨끗한 손을 얻어
경전의 도를 받아 가지기를 원하고.



얼굴을 씻을 때에는
일체 중생이
항상 청정함을 향하여
마음에 아무 티가 없기를 원하고.


문을 나서면
일체 중생이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삼계를 아주 벗어나기를 원하고.



도를 향할 때에는
일체 중생이
위없는 도를 향하여
그 뜻이 물러나지 않기를 원하고.



도를 행할 때에는
일체 중생이
무제(無際)에 노닐면서
중간에서 쉬지 말기를 원하고.



언덕에 오를 때에는
일체 중생이
최상의 도를 즐겨 오를 때
아무 어려움 없기를 원하고.



언덕에서 내려올 때는
일체 중생이
넓고 미묘한 법 속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고.



구부러진 길을 갈 때에는
중생들이 다
그릇되고 굽은 뜻을 버리고
시기하거나 해치지 말기를 원하고.


곧은 길을 갈 때에는
중생들이 다
바른 뜻을 가지고
말에 아첨 없기를 원하고.



바람이 티끌을 날리는 것 보면
중생들이 다
경전의 밝은 행을 닦아
그 마음이 어지럽지 말기를 원하고.



비가 티끌 적심 보면
중생들이 다
대자(大慈)로 뜻을 다스려
온갖 생각 일으키지 말기를 원하고.



나무 밑에 앉아 쉴 때는
중생들이 다
마음을 도에 두고
경의 뜻을 다스림에 피곤하지 않기를 원하고.



숲속으로 들어가거든
중생들이 다
배워서 유림(儒林)이 되고
덕으로써 제자를 기르기 원하고.



걷다가 높은 산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뜻을 높고 크게 갖고
덕을 쌓되 싫증 내지 말기를 원하고.


가다가 가시덤불 보거든
중생들이 다
3독(毒)을 없애고
해칠 마음 없기를 원하고.



잎이 좋은 나무를 보거든
중생들이 다
도의 제 그늘로
삼매에 들기를 원하고.



꽃이 번성한 나무 보거든
중생들이 다
32상과 80종호를
원만히 갖추기 원하고.



좋고 충실한 과일 보거든
중생들이 다
도수(道樹)의 행을 일으키고
최상의 결과 이루기 원하고.



흘러가는 물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바른 도의 흐름을 얻어
부처 바다의 지혜에 들기 원하고.



저 모든 못을 보거든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의 공덕과 슬기의
행이 충만하기를 원하고.


만일 샘물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부처님 몸의 지혜에 들어가
그 물음이 무궁하기를 원하고.



멀리 강과 바다를 바라보거든
중생들이 다
깊은 부처 창고의
무궁한 법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우물을 긷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마음을 열어 법을 듣고
한맛의 도를 얻기 원하고.



다리를 건너갈 때에는
중생들이 다
법의 다리를 만들어
사람들 건네 주기에 쉬지 않기를 원하고.



논밭을 다스리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더러운 잡초를 뽑아
욕심의 뿌리를 내지 않기 원하고.



전답의 곡식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복덕을 두루 심어
재해를 입지 않기 원하고.


좋은 논밭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도법(道法)의 기구들을
풍부히 가지기를 원하고.



마을의 집들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항상 자비와 지혜 속에 살아
도에 위태함이 없기를 원하고.



정묘한 학당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경전을 강독하되
날로 나아가 쇠퇴하지 않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음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공덕이 원만한 부처가 되어
그 제자들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한가히 사는 사람들 보거든
중생들이 다
편안하고 무위(無爲)하여
경전에 오로지 뜻을 두기를 원하고.



사문(沙門)을 볼 때에는
중생들이 다
많이 듣고 계율 갖추어
게으름 없이 사람을 가르치기 원하고.


다른 도를 믿는 사람 보면
중생들이 다
삿된 견해를 멀리 떠나
8정도(正道)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선인(仙人)을 보면
중생들이 다
뜻과 행이 구족하여
소원을 다 성취하기를 원하고.



성곽(城郭)에 이르거든
중생들이 다
계율을 완전히 가져
마음에 이지러짐 없기를 원하고.



궁궐을 바라보거든
중생들이 다
총명을 멀리 비추고
모든 선을 두루 세우기 원하고.



만일 제왕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성인의 교화 받들어
정도(正道)대로 가르치기를 원하고.



제왕의 아들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불자의 행을 따라
법에서 화생(化生)하기를 원하고.


만일 고관들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도리에 매우 밝아
천하를 도와 이롭게 하기를 원하고.



모든 관리들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충성하고 선량하여
도적의 마음 없기를 원하고.



갑옷 입은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맹세코 법의 갑옷을 입고
본래의 원을 어기지 않기를 원하고.



우둔한 사람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도의에 용맹스러워
4무외를 이루기 원하고.



걱정하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온갖 두려움을 떠나
다시는 근심치 않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사람들 보거든
중생들이 다
무상을 즐김과
5욕 즐김을 버리기 원하고.


고생하는 사람들 보거든
중생들이 다
열반의 도를 얻고
모든 재액 면하기를 원하고.



안락한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안락하고 상쾌하기 부처 같고
담박하여 근심 없기를 원하고.



앓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공하여 몸이 없음을 알아
아프다는 마음 없기를 원하고.



건강한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금강 같은 몸을 얻어
노쇠함이 없기를 원하고.



누추한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추악한 행 버리고
선(善)으로 장엄하기를 원하고.



단정한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뜻과 행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도법을 사랑하기 원하고.


은혜 갚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부처의 은덕 생각하고
보살행을 행하기 원하고.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마음을 항복 받아
모든 악을 버리기 원하고.



탐욕스런 사람 보거든
중생들이 다
천하에 법보시하되
간탐이 없으라 원하고.



석장(錫杖)을 갖고 다니거든
중생들이 다
법의 지팡이 짚고
덕의 교화를 두루 펴기를 원하고.



발우를 가지거든
중생들이 다
받고 줄 줄을 알고
6중법(重法) 닦기를 원하고.



마을에 들어 걸식하거든
중생들이 다
계법을 따라 구하여
의심 받지 않기를 원하고.


남의 문 앞에 이르거든
중생들이 다
총지(摠持)의 문에 들어가
모든 법을 다 보기 원하고.



사람의 방에 들어가거든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성당에 올라가
미묘한 법을 깊이 행하기 원하고.



사람이 음식을 주지 않거든
중생들이 다
반야의 뜻을 얻어
바라지도 아끼지도 말기를 원하고.



주인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거든
중생들이 다
3악도를 멀리 떠나
기갈(飢渴)의 생각 없기를 원하고.



빈 자루를 주거든
중생들이 다
모두 공에 이르러
욕심 없는 성품 얻기를 원하고.



가득한 발우를 받거든
중생들이 다
도품(道品)의 법을 모두
만족히 성취하기를 원하고.


발우의 밥을 받을 때엔
중생들이 다
법을 위해 공양하고
뜻을 큰 도에 두기를 원하고.



청렴한 사람과 앉거든
중생들이 다
청렴하고 부끄러움 알아
하는 일이 망령되지 않기를 원하고.



탐욕스런 사람과 앉거든
중생들이 다
뻔뻔스런 얼굴과
비루한 마음 없기를 원하고

맛난 음식을 얻거든
중생들이 다
절제를 알고 욕심 적으며
그 마음에 집착이 없기를 원하고.



맛나지 않은 음식 얻거든
중생들이 다
몸은 환술과 같아
좋고 나쁨이 다름 없음 알기를 원하고.



음식을 떠서 입에 넣거든
중생들이 다
온갖 경전의
불법의 맛을 얻기 원하고.


여러 맛의 음식을 씹거든
중생들이 다
맛마다 부처 같이
감로(甘露)로 변하기를 원하고.



음식을 다 먹었거든
중생들이 다
덕행이 충만하여
10력(力)을 이루기 원하고.



경을 강(講)하고 법을 설명하거든
중생들이 다
뜻과 마음이 탁 트여
법을 듣고는 곧 깨치기 원하고.



축원문을 외우거든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12부경을 통달하기 원하고.



앉았다가 물러날 때는
중생들이 다
일체를 성취하여
세 가지 감로 얻기를 원하고.



물에 들어가려 할 때는
중생들이 다
몸과 입과 뜻을 깨끗이 하고
3도(塗)에 평등하기를 원하고.


몸의 때를 씻거든
중생들이 다
마음의 때를 씻고
생사의 끝 보기를 원하고.



여름 더위가 극심하거든
중생들이 다
맑고 시원한 선정을 얻어
일체의 고통을 멸하기 원하고.



겨울 추위가 극심하거든
중생들이 다
마음을 차게 하여 애욕을 없애고
다시는 정욕이 없기를 원하고.



경전의 게송을 독송하거든
중생들이 다
모든 법을 널리 알아
다시는 잊지 않기를 원하고.



부처님을 보게 되거든
중생들이 다
항상 부처님을 만나고
7각의(覺意)를 행하기 원하고.



부처님의 화상을 보거든
중생들이 다
시방을 두루 보매
눈에 장애 없기를 원하고.



부처님께 예배할 때는
중생들이 다
도를 얻어 부처님처럼
그 정수리를 볼 수 없게 되기를 원하고.



예배하고 일어날 때는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마음처럼
위없이 존귀하기를 원하고.



탑돌이를 하려 할 때는
중생들이 다
복을 널리 보시하고
도의 뜻을 통달하기 원하고.



탑을 세 번 돌 때에는
중생들이 다
한결같은 뜻을 얻고
4희(喜)를 끊지 않기 원하고.



다니면서 경전을 읊을 때는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은덕을 생각하고
법의 공양 행하기를 원하고.



다 마치고 부처님을 찬탄할 때는
중생들이 다
광명과 신력이
부처 법신 같기를 원하고.



저녁에 발을 씻을 때에는
중생들이 다
네 가지 신족 얻어
시방을 두루 다니기를 원하고.



밤에 자려 할 때에는
중생들이 다
어둠을 아주 떠나
다시는 5개(蓋) 없기를 원하고.



자다가 깰 때에는
중생들이 다
부처님의 18가지
끊이지 않는 법 얻기를 원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계와 원을 함께 행하고
평등한 사랑을 널리 베풀어
시방을 버리지 않는 것이네.

3. 십지품(十地品)

이리하여 인(忍) 세계의 백억 제석천들은 도리천의 자감전(紫紺殿) 위에서, 변화로 7보의 사자좌를 만들고 교로장(交露帳)을 치고 자주색 비단을 깔고는 각각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뜻을 아시고 곧 몸을 나누어 모든 제석천의 궁전에 두루하셨는데 그 낱낱의 부처님께는 여러 보살이 따랐으니, 일체 제석천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그 밑에 있는 백억의 작은 나라들은 계속하여 부처님을 보는데 부처님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셨다.

그 때 시방 국토에서 다시 구름처럼 보살이 모여드니 그들은 법의(法意) 보살·수의(首意)보살·현의(賢意)보살·근의(勤意)보살·사의(思意)보살과 지의(知意)·심의(審意)·전의(專意)·중의(重意)·진의(盡意) 보살 등으로서 각각 시방으로부터 무수한 보살들과 함께 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쪽에 있는 연꽃 위에 앉았다.

그러자 법의보살은 곧 조상(彫像)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바로 앉아 뜻을 고요히 하여 무량한 회견(會見)삼매에 들어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을 다 보았다. 그 부처님들께서는 각각 오른손을 펴서 법의보살의 머리를 만지시며 말씀하셨다.

“장하구나. 법의여, 그대는 용감하여 이런 삼매를 얻었구나. 그대는 시방의 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께 다 예배하고 공덕을 이루며, 미묘한 변재를 닦고 공(空)에 집착하지 않는 행을 알며 법요를 통달하고 모든 부처님의 말에 통하며 중생들의 뜻을 안다. 그대는 이미 행을 갖추었으니 오래지 않아 부처가 될 것이다. 지금 그대로 하여금 보살의 10주(住)를 설명하게 하여 모든 학자들이 행할 바를 널리 알게 하리라.”

그리하여 법의보살은 부처님의 변재를 얻어 명철하고 진실하며 잊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가문의 아들들이여, 부처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10지주(地住)가 있으니 삼세 부처님이 다 이로써 부처가 되었고 중우(重祐)께서 찬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량에 합하는 것으로서 이제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그대로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발의(發意)요, 둘째는 치지(治地)며, 셋째는 응행(應行)이요, 넷째는 생귀(生貴)이며, 다섯째는 수성(修成)이요, 여섯째는 행등(行登)이며, 일곱째는 불퇴(不退)요, 여덟째는 동진(童眞)며, 아홉째는 요생(了生)이요, 열째는 보처(補處)입니다.

무엇을 발의라 하는가? 보살의 법주(法住)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처음 부처님을 뵈옵고 열 가지 공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단정(端正)함을 보고, 둘째는 몸과 색상(色相)의 갖춤이며, 셋째는 신족(神足)과 변화요. 넷째는 도덕이 심오함이요, 다섯째는 의법(儀法)이 비길 데 없음이요, 여섯째는 사람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경전의 가르침을 밝히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말을 자세히 이해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생사의 고통을 보는 것이요, 열째는 몸소 불법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금 깨달아지면 곧 뜻을 일으키니, 이는 부처님의 10력(力)의 지혜를 알고자 함입니다. 이를 위한 공부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모든 부처님을 예의로 섬길 줄 알고 보살의 덕에 대한 말씀을 깨달으며, 생사의 근본을 분명히 알고 귀함을 닦고 복을 다스리기를 원하며, 그 행이 삼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하고 모든 부처님 공덕의 업을 배우며, 모든 부처님을 다시 보기를 구하고 모든 깊은 삼매를 익히며, 죄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생사의 윤회를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 첫째의 발의지(發意地)입니다.

치지(治地)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法住)에는 다음으로 배우는 열 가지 일[事]이 있는데 첫째는 사람의 선을 생각하고, 둘째는 마음을 깨끗이 하며, 셋째는 뜻을 부드럽게 하고, 넷째는 뜻을 고요히 하며, 다섯째는 항상 보시하고, 여섯째는 자애(慈愛)를 행하며, 일곱째는 천하를 이롭게 하고, 여덟째는 도움을 공평히 하며, 아홉째는 남을 제 몸처럼 보고, 열째는 사람을 스승과 같이 공경하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경전을 많이 외우는 것이요, 고향을 멀리하는 것이며 밝은 스승을 가까이하는 것이요, 선한 말을 배우는 것이며 때를 아는 것이요, 정진하는 것이며 법요에 들어가는 것이요, 새벽에 행하는 것이며 잊지 않는 것이요, 뜻을 편히 하는 것이니, 이것을 다음 차례의 치지(治地)의 행이라 합니다.

응행(應行)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열 가지 일이 있어 여경(如經)에 들어가는데, 첫째는 무상(無常)을 봄이며, 둘째는 생의 고통을 봄이며, 셋째는 행의 공(空)을 봄이며, 넷째는 몸 아님을 봄이고, 다섯째는 주인 없음을 봄이며, 여섯째는 탐할 것이 없음이고, 일곱째는 집착할 것이 없음이며, 여덟째는 함이 없음이고, 아홉째는 욕망이 없음이며, 열째는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사람을 생각하고 국토를 생각하며, 법을 생각하고 지종(地種)을 생각하며, 수(水)종을 생각하고 화(火)종을 생각하며 풍(風)종을 생각하고 욕계를 생각하며, 색계를 생각하고 무색계를 생각하며, 마음에 사모함이 없는 것이니 응행(應行)의 지(地)를 분별한 것입니다.

생귀(生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부처님의 행을 따르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삿된 도(道)에 들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부처를 향하는 것이고, 셋째는 법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며, 넷째는 공덕의 행을 관찰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사람을 허깨비와 같다고 보는 것이며, 여섯째는 국토를 꿈과 같다고 보는 것이고, 일곱째는 재앙과 복을 공(空)이라 보는 것이며, 여덟째는 모든 법이 환술과 같다고 보는 것이고, 아홉째는 고락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며, 열째는 열반의 깨끗함을 아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과거 부처님의 뜻도 공이요, 미래 부처님의 뜻도 공이며 현재 부처님의 뜻도 공이다. 과거의 불법도 깨끗하고 미래의 불법도 깨끗하며 현재의 불법도 깨끗하다. 과거의 부처님도 자연이요, 미래의 부처님도 자연이며 현재의 부처님도 자연이다. 모든 부처님의 나오심은 평등하여 다 다름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을 평등한 생귀지(生貴地)라 합니다.

수성(修成)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열 가지 일이 있어 사람을 구제하는데, 첫째는 사람에게 방편이 되고, 둘째는 사람을 안온하게 하며, 셋째는 천하 사람을 구제하고, 넷째는 일체를 어여삐 여기며, 다섯째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여섯째는 남을 기쁘게 하며, 일곱째는 사람과 물건을 보호하고, 여덟째는 도를 따르도록 권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청정을 나타내고, 열째는 열반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중생에게 중요한 것이 없고 종자가 없으며, 그 수가 없고 지음이 없으며, 바름이 없고 생각할 수 없으며, 일컬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갖추어 말할 수 없고 일체가 다 공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성스러운 행[聖行]의 수성지입니다.

행등(行登)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제도함을 이루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을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이 선하다거나 보살이 악하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사람들이 서로 비판하는 말을 듣고 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사람이 많다거나 사람이 적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는 경전이 많다거나 경전이 적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생이 즐겁다거나 생이 괴롭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사람을 제도하기 어렵다거나 제도하기 쉽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법이 흥한다거나 법이 쇠한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도가 있는 때를 만났다거나 도가 없는 때를 만났다거나 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마음에 생각이 없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몸을 헤아리지 않고 내 것이 없으며, 견해가 없고 주인이 없으며, 받음이 없고 허깨비와 같다 하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며 소유가 없다 하는 것이니, 이것이 믿음을 다하는 행등지입니다.

불퇴전(不退轉)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뜻이 견고해지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부처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법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부처를 구한다거나 구하지 않는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처를 얻는다거나 얻지 못한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는 옛날에 성도(聖道)가 있었다거나 없었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지금 성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미래에 성도가 있을 것이라거나 없을 것이라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3도(塗)가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부처의 지혜가 다함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미세한 지혜를 열어 큰 지혜에 들어가고, 큰 지혜를 열어 미세한 지혜에 들어가며, 한 법을 나타내어 여러 경전에 들어가고, 여러 경전을 나타내어 한 법에 들어가며, 중생을 알아 공요(空要)에 들어가고 공요를 알아 중생에 들어가며, 생각 있음을 이해해 선정에 들어가고, 선정을 이해해 생각 있음에 들어가며, 조금 깨끗함을 해석해 많은 생각에 들어가고, 많은 생각을 해석해 조금 깨끗함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더욱 나아가는 불퇴지입니다.

동진(童眞)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들어감을 따르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몸과 입과 뜻으로 범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일체에 결점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뜻이 한결같이 생김에 있는 것이요, 넷째는 사람을 보거든 마음 속의 자비를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사람 마음의 믿는 바를 아는 것이요, 여섯째는 사람 뜻이 이해하는 바를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남의 잡된 생각을 받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모든 국토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을 아는 것이며, 아홉째는 신족으로 빨리 시방에 두루 이르는 것이요, 열째는 원만히 모든 법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 배움이 있는데, 즉 부처 세계를 배워 알고 부처의 지혜와 능력 같기를 배우며, 부처의 신족행을 나타냄을 배우고 모든 불찰을 장엄함을 배우며, 모든 국토를 두루 노닐기를 배우고 대중의 물음에 법으로 답하기를 배우며, 나타내지 않음이 없는 변화를 배우고 부처의 소리로 모든 법을 내는 것을 배우며, 시방을 두루 돌기를 배우고 한 찰나에 무수한 부처 보기를 배우는 것이니, 이것이 청정한 동진지입니다.

요생(了生)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지혜의 견(見)을 받는 열 가지 일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일체가 어떤 길에 나는가를 알고, 둘째는 중생들의 습기의 결박을 알며, 셋째는 사람이 본래의 곳에 다시 옴을 알고, 넷째는 사람이 행한 바를 따라 재앙과 복의 갚음을 알며, 다섯째는 사람이 어떤 법을 받아 행하는가를 알고, 여섯째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는 좋고 나쁨을 알며, 일곱째는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변화함을 알고, 여덟째는 시방 국토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알며, 아홉째는 3도(塗)의 무량한 지혜를 알고, 열째는 응대하여 말할 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 열 가지가 더 있는데 즉 법왕의 바른 행을 배우고 법왕의 예의를 배우며, 법왕의 일어남을 배우고 법왕의 들고 남을 배우며, 법왕의 돌아다님을 배우고 법왕의 위엄을 배우며, 법왕의 앉고 서고를 배우고 법왕의 명령을 배우며, 법왕이 사람에게 절함을 배우고 법왕이 국토를 순행함을 배우는 것이니, 이것이 결정을 받는 요생지입니다.

보처(補處)란 무엇인가? 보살의 법주에는 다른 지혜가 미치기 어려운 열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수한 나라를 감동시킬 것을 생각하고, 둘째는 무수한 나라를 위해 밝음을 나타내며, 셋째는 무수한 나라를 위해 법을 세우고. 넷째는 무수한 나라를 깨우쳐 구제하며, 다섯째는 무수한 나라를 이롭고 편안하게 하고, 여섯째는 무수한 사람을 깨우치며, 일곱째는 중생의 뜻을 관찰해 알고, 여덟째는 중생의 다함 없는 생각을 알며, 아홉째는 무수한 사람을 법에 들어가게 하고, 열째는 차례로 사람의 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요생(了生)이 보처(補處)에 미치지 못하는 열 가지이니, 아무도 그의 몸의 일과 뜻의 행과 신족과 선정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옛을 통달하며 현재를 알고, 뒤의 밝은 곳을 보며 국토의 법을 닦고, 성스러움을 뜻하는 일과 부처가 하고자 하는 것 등을 닦습니다.

또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즉 3도(塗)에 대한 부처님의 끝없는 지혜를 배우고 모든 불법을 구족하기를 배우며, 법에 집착 없음을 배우고 모든 부처님의 밑없는 창고를 배우며, 신성한 지혜로 그 국토를 이룸을 배우고 광명으로 시방을 비춤을 배우며, 부처님의 선정이 모든 나라를 감동시킴을 배우고 권력 있는 부류들을 마음대로 교화함을 배우며, 가르쳐서 두루 성취시킴을 배우고 모여서 법륜 굴림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우는 까닭은, 일체를 알아서 일체에 민첩하여 다시는 배울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보처라 하는 것이니, 중중한[十十] 법을 이룸으로써 현세에서 위없는 정진(正眞) 도의 대를 잇고 최상의 정각이 되어 천하를 제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법의 보살이야말로 불자라 할 수 있구나. 일체 시방의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법에서 나오셨다. 이 법은 끝이 없고 비치는 바가 무량하며 건지는 사람이 무궁하고 지혜로운 마음이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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