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체제불경계지엄경(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
양부남(梁扶南) 승가바라(僧伽婆羅) 한역 최윤옥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 꼭대기에 있는 법계궁전(法界宮殿) 위에서 2만 5오천 명의 큰 비구(比丘)들과 함께 계셨다. 모두 아라한(阿羅漢)으로서 모든 번뇌[漏]를 이미 다하여 다시는 번뇌가 없으며, 마음을 잘 해탈하고 지혜를 잘 해탈하여 모든 감관[根]을 조복시킨 깨달은 이[摩訶那伽]로서 하여야 할 일을 다하였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다. 무거운 짐을 모두 벗고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며,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를 끊어 마음이 자재(自在)하였다. 그들은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과 여덟 명의 대성문(大聲聞)이었다.
또 72억 나유타(那由他)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었다. 그 이름은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ㆍ행길(行吉)보살ㆍ불길(佛吉)보살ㆍ약왕(藥王)보살ㆍ상기(常起)보살마하살 등이었다. 능히 물러섬이 없는 법륜(法輪)을 펴며 비할 데 없는 보정수다라(寶頂修多羅) 등을 잘 듣고 법운지(法雲地)에 머무르며 지혜가 수미산(須彌山)과 같았다. 항상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ㆍ무생(無生)ㆍ무체(無體)의 깊은 법을 닦아 광명과 공덕이 원만하고 위의(威儀)를 구족하였다. 수없이 많은 나유타의 세계에 계신 여래께서 보내셨으며 큰 신통(神通)으로 무성상(無性相)에 머물렀다.
이 때 세존께서 ‘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항하사같이 많은 세계로부터 이곳에 있으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법을 말해주어 큰 힘을 얻도록 하여야겠다. 모든 보살들이 나에게 묻도록 하기 위해서 신통스러운 모습을 나타내어 큰 광명(光明)을 놓으리라’고 생각하시고, 곧 대광명을 놓아 시방의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삼천대천의 티끌과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그러자 시방의 낱낱 방면으로 열 군데 부처님 세계에 있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천만억 나유타의 티끌과 같이 많은 보살들이 각각 본래 있던 세계에서 불가사의하고 한량없는 신통으로 이곳에 와서 모였다. 그리고 다시 불가사의한 공양물로써 여래께 공양하였다. 뜻에 따라 만든 연화좌(蓮華座)로서 부처님 앞에 앉아 세존을 우러러보되 눈을 잠시도 떼지 못했다.
이 때 법계궁전(法界宮殿) 위에서 대보련화사자장좌(大寶蓮華師子藏座)가 솟아올랐으니, 너비와 길이가 무량억(無量億) 유순(由旬)이었다. 무량광명마니주(無量光明摩尼珠)로 이루어지되, 전등(電燈)마니주가 섞여 있고 불가사의력(不可思議力)마니주를 기둥으로 하며, 무비유(無譬喩)마니주를 권속으로 하였으니 모든 비유(譬喩)마니주로 장엄한 것보다 훌륭하였다. 자재왕(自在王)마니주가 지붕이 되고, 여러 가지 마니보(摩尼寶)로 옆을 둘렀으며, 온갖 색의 깃발[幢]을 매달았다. 저 대마니주(大摩尼珠)가 빙 둘러싸 열 가지 무량억 나유타의 광명을 내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이 때 말할 수 없이 많은 백천만억 나유타의 티끌과 같은 수의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ㆍ석(釋)ㆍ범(梵)ㆍ사천왕(四天王)이 시방의 열 군데 부처님 세계로부터 이곳에 와서 모였다.
어떤 여러 하늘은 보정궁전(寶頂宮殿)을 타고 오고, 수없이 많은 불가사의한 천녀(天女)는 백천만억 나유타의 음악을 연주하며 이곳으로 와서 모였다. 또 어떤 여러 하늘은 보화궁전(寶華宮殿)ㆍ용보전단신주(龍寶栴檀神珠)궁전ㆍ진주(眞珠)궁전ㆍ보의(寶衣)궁전ㆍ금광명마니주(金光明摩尼珠)궁전ㆍ염주제금(閻浮提金)궁전ㆍ무량광명마니주(無量光明摩尼珠)궁전ㆍ자재왕마니주(自在王摩尼珠)궁전ㆍ여의마니주(如意摩尼珠)궁전ㆍ복제석마니주(覆帝釋摩尼珠)궁전ㆍ대해취청정보장엄(大海聚淸淨寶莊嚴)ㆍ보광명대마니주의정(寶光明大摩尼珠意頂)궁전을 타고 수없이 많은 불가사의한 천만억 나유타의 천녀와 함께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이곳으로 와서 모였다. 그리고 모두 불가사의하고 무수히 많은 공양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부처님께 공양하고 나서 각기 앉고 싶은 곳에 앉아 세존을 우러러보되 눈을 잠시도 떼지 못했다.
이 때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염부제금색(閻浮提金色)을 띠었다. 그리고 온갖 마니주가 나무로 바뀌어 천화수(天華樹)ㆍ보의수(寶衣樹)ㆍ용보전단수(龍寶栴檀樹)로 장엄하였다. 해와 달과 번개의 등(燈) 등에 마니주가 얽히었고, 온갖 깃발이 드리워져 세계를 두루 덮었으며, 수없이 많은 천만억 나유타의 천녀들은 갖가지 영락(瓔珞)과 보화(寶華)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대보련화사자좌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伽陀]이 흘러나왔다.
그대들은 이제 편안히 앉으시오.
내가 진실을 말하겠소.
인왕(人王)의 사자좌는
여래의 공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오.
내가 오늘 원(願)이 가득 차
양족존(兩足尊)께 공양하리니
세존께서 오늘
칠보연화좌(七寶蓮華座)에 앉으시리이다.
큰 광명을 놓으시어
나와 모두를 비추시고
위없는 묘한 법을 말씀하시어
모든 천(天)과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실 것이오.
중생이 법을 들으려 하매
사자좌에 앉으시리니
이 같은 큰 광명은
여래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오.
무량세계 비추시어
모두 환희케 하시리니
도사(導師)이신 천중천(天中天)께서
이제 나를 섭수(攝受)하실 것이오.
내가 옛날 이곳에서
이미 8억 부처님 뵈었으니
오직 이제 세존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꼭 거두어 주시기 바란다오.
이 때 세존께서 광명좌(光明座)에서 일어나시어 보련화장사좌(寶蓮華藏師座)에 결가부좌하시고 앉으셨다. 그리고 보살들이 모두 다 모인 것을 보시고는 보살들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려고 공법(空法)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다. 이 때 모든 보살들이, ‘문수사리동자(文殊師利童子)보살이 여래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여쭈어 봐야 하리라.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이 법을 듣지 못하였다’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 문수사리는 여래께서 법상(法相)을 말씀하시려 하는 것과 모든 보살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서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는 법은 그 모습[相]이 어떻습니까?”
문수사리가 이것을 게송[祇夜]으로 아뢰었다.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는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대모니존(大牟尼尊)이시여,
비유로써 말씀하여 주소서.
이 모든 대중이
그 이치를 듣고 싶어
모두 와서 모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해설하여 주소서.
여러 부처님께서 보내신
모든 보살들도
지금 모두 미묘한 법상(法相)을
듣고 싶어합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장하다, 장하다. 네가 지금 묻는 것은 능히 모든 세상에 큰 이익을 줄 수 있고, 모든 보살로 하여금 불사(佛事)를 짓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너는 자세히 듣고 놀라거나 의심하지 말라. 문수사리여,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면 그것이 곧 여래이다. 문수사리여, 비유하면 마치 대지가 유리(瑠璃)로 되어 있어 제석(帝釋)의 비사연궁전(毘闍延宮殿)과 공양물 등이 그 가운데 비추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염부제(閻浮提) 사람들이 유리로 된 땅에 궁전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고 합장하고 공양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이와 같은 궁전에 태어나 제석 등처럼 유희(遊戱)하게 해 주소서’라고 원한다. 저 중생들은 이 땅이 곧 궁전의 그림자인 줄 모르고 보시(布施)ㆍ지계(持戒)와 같은 온갖 공덕을 닦아 이러한 궁전의 과보를 얻으려 한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은 궁전은 사실 생멸(生滅)이 없다. 땅이 청정하므로 그 가운데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 궁전의 그림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중생이 부처님을 보는 것도 이와 같으니, 그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불신(佛身)을 보는 것이므로 불신은 무위(無爲)하여 생기지도 않고[不生] 일어나지도 않으며[不起] 다하지도 않고[不盡] 없어지지도 않는다[不滅]. 색(色)도 아니고 색 아닌 것도 아니며, 볼 수도 없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세간도 아니고 세간 아닌 것도 아니며, 마음[心]도 아니고 마음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면 여래의 몸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며 온갖 공양을 하면서, ‘내가 이와 같은 색신(色身)을 얻게 하여 주소서’ 하고 원하며, 여래의 미묘한 몸을 얻으려고 보시하고 지계하며 모든 공덕을 쌓는다. 문수사리여, 여래가 신력(神力)을 세간에 나타내는 것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큰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중생견(衆生見)에 따른다.
이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여래는 상주(常住)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아니고 색(色)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유리로 된 땅에서
궁전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으니
이 그림자는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면
여래의 몸을 보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또한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마치 해가 처음 떠서 먼저 높은 산을 비추고 다음에 중간 산을 비추고 나중에 낮은 땅을 비추는 것처럼 여래 또한 이러하다.
마음[心]도 뜻[意]도 식(識)도 없고 모습[相]이 없어 모습을 여의어 모든 모습을 끊는다. 저곳에도 집착하지 않고 이곳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이 언덕에도 머물지 않고 저 언덕에도 머물지 않으며 중간 흐름에도 머물지 않아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니 생각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없는 것도 아니며, 번뇌도 아니고 번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진실도 아니고 허망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고 지 아닌 것[非智]도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염(念)하는 것도 아니고 염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고 마음 아닌 것도 아니다. 뜻하는 것도 아니고 뜻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이름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붙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색(色)도 아니고 무색(無色)도 아니며, 취하는 것도 없고 취하지 않는 것도 없다.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도사(導師)도 아니고 도사 아닌 것도 아니며, 과(果)를 얻는 것도 아니고 과를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로운 광명이 삼계를 비출 때 마치 태양이 높은 산을 비추듯이 먼저 보살을 비추고, 다음에 연각과 성문이 되려 하는 사람을 비추고, 나중에 선근(善根)을 좋아하는 사람과 내지 깨달음이 없는 중생을 비춘다. 이는 선법(善法)을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며 미래의 인연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평등하여 상ㆍ중ㆍ하가 없고 항상 차별 없는 마음을 행한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에게는 수승한 법을 말해줄 것이며, 이러한 중생에게는 수승하지 않은 법을 말해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이 중생은 뜻이 크고 이 중생은 뜻이 중간쯤이고 이 중생은 뜻이 작다. 이 사람은 선법(善法)을 좋아하고 저 사람은 악법(惡法)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정정취[正定]이고 저 사람은 사정취[邪定]이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래의 지혜 광명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니, 이미 모든 분별상(分別想)을 끊었기 때문이며, 중생에게 온갖 선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지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수사리여, 큰 바다 속에 만일체중생소원(滿一切衆生所願)이라는 마니주가 있어 깃대 위에 안치하면 중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만 그 마니주에는 마음과 뜻과 식이 없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과 뜻과 식이 없고 측량할 수도 없으며, 이를[到]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으나 잘못을 없애고 무명(無明)을 없앤다.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밝게 비추는 것도 아니고 밝게 비추지 않는 것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세간 아닌 것도 아니다. 깨달음도 없고 보는 것[觀]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도 없고 몸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으며, 한량없고 끝없다. 말할 수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기뻐하는 것도 없고 기뻐하지 않는 것도 없다. 수(數)가 없어 수를 여의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행하는 곳이 없어 모두 취(趣)를 끊으며,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으며 헤아림도 없다. 빈 것[空]도 아니고 비지 않은 것[不空]도 아니며, 화합하는 것도 아니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깨달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다. 업(業)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다. 소유(所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모습[相]이 없어 모든 모습을 여의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중간도 아니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여래는 청정하게 큰 자비의 깃대에 머물러 중생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온갖 몸을 나타내어 온갖 법을 말한다. 문수사리여, 마치 소리 따라 메아리가 생기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고 또한 중간도 아니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은 것처럼 문수사리여, 여래도 그러하니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고 또한 중간도 아니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되, 모든 중생에 따라 온갖 모습으로 나타내 보인다.
문수사리여, 모든 초목이 땅에 의지하여 자라나지만 땅은 평등하여 모든 분별을 여의는 것처럼 모든 중생의 선근도 여래에 의하여 자라난다.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 내지 나형(裸形)의 니건자(尼乾子) 등에 이르는 모든 외도(外道)의 선근(善根)도 여래에 의지하여 자라나지만, 여래는 평등하여 분별이 없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허공이 평등하여 상ㆍ중ㆍ하가 없는 것처럼 여래도 평등하지만, 중생이 스스로 상ㆍ중ㆍ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 중생은 뜻이 열등하니 낮은 신분으로 나타내야겠다. 이 중생은 중상(中上)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중상의 몸으로 나타내야겠다. 이 중생은 뜻이 열등하니 하승(下乘)을 말해주어야겠다. 이 중생은 뜻이 중간쯤이니 연각승과 성문승을 말해주어야겠다. 이 중생은 뜻이 높으니 대승(大乘)을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 중생이 보시를 좋아하니 내가 보시에 대하여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중생이 보시를 좋아하니 내가 보시에 대하여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戒)ㆍ인(忍)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도 역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마음과 뜻과 식을 여의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모든 법이 다 평등하며, 평등하므로 머묾[住]이 없고 머묾이 없으므로 움직임[動]이 없다. 움직임이 없으므로 의지하는 것[依]이 없고 의지함이 없으므로 처하는 곳[處]이 없다. 처하는 곳이 없으므로 생기지 않고[不生] 생기지 않으므로 없어지지도 않는다[不滅]. 만일 능히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마음이 전도(顚倒)되지 않을 것이며, 전도되지 않으므로 여실(如實)하고 여실하므로 행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행하는 것이 없으므로 오는 것이 없고, 오는 것이 없으므로 가는 것이 없으며, 가는 것이 없으므로 여여(如如)하고, 여여하므로 법성(法性)을 따르며, 법성을 따르므로 움직이지않을 것이다. 만일 법성을 따르기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법성을 얻을 것이며, 만일 법성을 얻는다면 구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도(道)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일 도를 얻었다면 모든 법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므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을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중생이 모든 법에 집착한다면 번뇌를 일으킬 것이며, 번뇌를 일으키므로 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리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근(根)이 없고 처소가 없으면 이것이 여래이니 보리를 얻는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근(根)이 되며 무엇이 처소가 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근이 되고, 진실하지 않은 생각이 처소가 된다. 문수사리여, 여래의 지혜는 보리와 평등하고 모든 법과 평등하다. 그러므로 근(根)이 없고 처소가 없어 보리를 얻는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적정(寂靜)이다. 무엇이 적정인가? 안이 적정하고 밖이 적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눈이 곧 공(空)이어서 나[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도 아니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공하여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공한 줄 아는 까닭에 색에 작용하지 않으면 이를 적정이라 하며, 이와 같이 귀가 공한 줄 아는 까닭에 소리에 작용하지 않으면 이를 적정이라 한다. 코 내지 뜻에 이르기까지 공한 줄 아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움직이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곧 여실(如實)함과 같다. 여실함과 같다는 것은 이 언덕도 보지 않고 저 언덕도 보지 않는 것이고, 이곳도 저곳도 보지 않으므로 모든 법을 보며, 모든 법을 보므로 여래라고 칭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상(相)도 없고 연(緣)도 없다. 무엇이 상이 없는 것이고, 무엇이 연이 없는 것인가? 안식(眼識)을 얻지 않으면 이것이 상이 없는 것이고, 색(色)을 보지 않으면 이것이 연(緣)이 없는 것이다. 이식(耳識)을 얻지 않으면 이것이 상이 없는 것이고,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이것이 연이 없는 것이다. 내지 의법(意法)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3세(世) 등이 아니니, 3세의 유전(流轉)을 끊는다. 문수사리여, 어찌하여 유전을 끊는가? 과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미래의 식(識)이 행해지지 않고, 현재의 의(意)가 움직이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형상(形相)도 없고 하는 일도 없다[無爲]. 어찌하여 형상이 없는가? 6식(識)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는 일이 없는가? 생기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3세의 유전을 끊는다고 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깨뜨릴 수 없는 구(句)이다. 무엇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며, 무엇이 구인가? 무상(無相)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여실(如實)하다는 것이 구이다. 머무는 곳이 없음[無住處]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법계(法界)가 구이다. 움직이지 않음[不動]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공성(空性)이 구이다. 얻지 않음[不得]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무상이 구이다. 깨달을 수 없음[不覺]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짓지 않음[不作]이 구이다. 희망하지 않음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무자성(無自性)이 구이다. 중생에게 자성이 없음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허공이 구이다. 얻을 수 없음[不可得]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생기지 않음[不生]이 구이다. 없어지지 않음[不滅]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무위(無爲)가 구이다. 행하지 않음[不行]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보리(菩提)가 구이다. 적정(寂靜)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열반(涅槃)이 구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음[不更生]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태어나지 않음[不生]이 구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몸으로 깨달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이란 아는 것[知]이 없어 초목과 같고 마음이란 허광(虛誑)하여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보리를 몸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가명(假名)에 의한 것이니, 진실한 이치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허망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과 같아 처소가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름[名字]도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모든 법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진실이 아니니, 언어도 없고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취할 수 없으므로 처소가 없다. 어찌하여 취할 수 없으며, 처소가 없는가? 안식(眼識)을 취할 수 없어 색(色)을 볼 수 없으므로 처소가 없으며, 이식(耳識)을 취할 수 없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처소가 없으며, 코 내지 의법(意法)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보리란 깨달을 수 없다. 눈이 취하지 않으므로 색(色)을 볼 수 없고, 색을 볼 수 없으므로 식(識)이 머무는 곳이 없다. 귀가 취하지 않으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식이 머무는 곳이 없다. 내지 의법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공(空)을 말한다. 모든 법이 공하므로 공은 곧 여래가 아는 것이며, 공은 곧 여래가 깨달은 것이다. 문수사리여, 공(空)과 유(有)를 따르지 말라. 공은 여래가 깨달은 것이니, 왜냐하면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문수사리여, 보리의 인지(因智)도 역시 이 공성(空性)이니, 왜냐하면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공(空)과 보리는 모두 소유(所有)가 없으며, 둘도 없고 수(數)도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모습[相]도 없다.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을 여의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행(行)도 없고 처소[處]도 없으며, 소리도 아니고 말도 아니다. 문수사리여, 단지 명자(名字)로써 말하는 것뿐으로, 실은 말할 수 없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 마음과 뜻과 식을 여읜다는 사실을 안다. 이와 같이 아는 까닭에 이와 같이 해설하되, 또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허공과 같다. 허공이란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보리도 또한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와 같은 법상(法相)은 여래가 깨달은 것이다. 문수사리여, 가장 미세한 물질과 티끌이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이와 같으니, 진실지(眞實智)로써 능히 알 수 있다. 문수사리여, 어찌하여 진실지로써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며, 생기고 나면 곧 없어지므로 저 모든 법이 생기는 것도 없고 거두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여실한 구(句)이다. 여실한 구란 보리의 모습과 같아 여실(如實)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여실(如實)을 여의지 않아 보리의 모습과 같다. 지계(地界)가 여실을 여의지 않으며, 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도 여실을 여의지 않아 보리의 모습과 같다.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가 여실을 여의지 않으며, 내지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에 이르기까지 역시 여실을 여의지 않는다. 이것을 여실구(如實句)라고 한다.
문수사리여, 보리란 행(行)으로써 행이 없는 데[無行]에 들어간다. 문수사리여, 무엇이 행이며 무엇이 행이 없는 것인가? 행이란 모든 선법(善法)에 연결되는 것이고, 행이 없다는 것은 모든 선법을 얻지 않는 것이다. 행이 있으면 마음이 머물지 않고, 행이 없으면 상(相)이 없어 해탈한다. 행이 있으면 헤아릴 수 있고 행이 없으면 헤아릴 수 없다. 어찌하여 헤아릴 수 없는가? 알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보리는 흘러나오는 것[漏]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다. 흘러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은 네 가지 흐름을 없앴기 때문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욕심의 흐름[欲流]과 유의 흐름[有流]과 견해의 흐름[見流]과 무명의 흐름[無明流]이다. 이 네 가지 흐름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네 가지 흐름을 없앴다고 한다. 취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네 가지의 취하는 것을 없앴기 때문이다. 무엇이 네 가지 취하는 것인가? 욕심을 취하는 것[欲取]과 견해를 취하는 것[見取]과 계를 취하는 것[戒取]과 나의 말을 취하는 것[我語取]이다. 이것이 네 가지의 취하는 것이다. 이 취하는 모든 것은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渴愛)에게 속아 연속하여 서로 생기는 것이므로 문수사리여, 여실지(如實智)로써 취하는 근[取根]을 끊으면, 취하는 근을 끊었으므로 몸이 청정하게 된다. 몸이 청정하다는 것은 바로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생멸이 없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식이 일어나지 않아 사유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분별이 있으면 무명(無明)을 이룰 것이니, 이 무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12인연이 없으며, 12인연이 없는 것이 곧 생기지 않는 것이고[不生], 생기지 않는 것이 바로 도(道)이다. 도는 요의(了義)이며, 요의는 제일의(第一義)이고, 제일의는 무아의 이치[無我義]이다. 무아의 이치는 곧 말할 수 없는 이치이고, 말할 수 없는 이치는 바로 12인연의 이치이며, 12인연의 이치는 곧 법의 이치[法義]이고, 법의 이치는 바로 여래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만일 12인연을 본다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면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보는 것이 없다.
문수사리여, 보리는 청정하여 더러움도 없고 번뇌도 없다. 문수사리여, 공(空)하면 곧 청정한 것이고, 모습이 없으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짓는 것이 없으면[無作]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또 생기지 않으면 곧 청정한 것이고, 하는 일이 없으면[無爲]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없어지지 않으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또 자성(自性)이 곧 청정(淸淨)이며, 청정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또 분별이 없는 것이 곧 청정한 것이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분별을 없애는 것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여실(如實)한 것이 곧 청정한 것이고, 법계가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진실관(眞實觀)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허공이 곧 청정한 것이고, 허공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허공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내신지(內身智)가 곧 청정한 것이고, 내행(內行)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내외(內外)를 얻지 않는 것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음을 아는 것[知陰]이 곧 청정한 것이고, 계자성(界自性)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모든 입(入)을 버리지 않는 것이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지(智)를 다한 것이 곧 청정한 것이고, 미래에 대한 지(智)가 생기지 않는 것이 곧 더러움이 없는 것[無垢]이며, 현재의 법계지(法界智)가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이것을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번뇌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적정(寂靜)이다. 적정이란 내외(內外)가 적정한 것이다. 내외가 적정한 것이 곧 대적정이며, 대적정인 까닭에 모니(牟尼)라고 이름한다.
문수사리여, 허공과 같은 것이 곧 보리이고, 보리와 같은 것이 곧 모든 법이며, 모든 법과 같은 것이 곧 모든 중생이고, 모든 중생과 같은 것이 곧 경계이며, 경계와 같은 것이 곧 니원(泥洹)이다. 문수사리여, 모든 법은 니원 등과 같다. 최상(最上)이고 끝이 없으므로[無邊] 대치할 것이 없으며, 대치할 것이 없으므로 본래 청정하고 본래 더러움이 없으며 본래 번뇌가 없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여래가 모든 법을 깨닫고 나서 온갖 중생을 보고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중생들이 청정하며 더러움이 없고 번뇌가 없는 곳에서 유희(遊戱)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모든 보살이 보살행(菩薩行)을 행하느냐? 문수사리여, 보살은 사유(思惟)하지 않고 없애지 않고 생기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다.
또 문수사리여, 보살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없어져 행하지 않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도달하지 않아 행하지 않고, 현재의 마음이 비록 있으나 역시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이를 보살이 보살행을 행한다고 한다.
문수사리여, 보시(布施)와 여래가 두 모습이 없으면 곧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戒)ㆍ인(忍)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도 여래와 두 모습이 없이 하는 것이 곧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보살이 색(色)이 공하다고 행하지 않으면 곧 보살행이고, 색이 공하지 않다고 행하지 않아도 곧 보살행이다. 왜냐하면 색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공(空)하거나 공하지 않거나 행하지 않으면 곧 보살행이다. 왜냐하면 마음과 뜻과 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모든 무소유법(無所有法)을 닦아야 하고 증득해야 할 것이니, 만일 증득한다면 번뇌가 일어나는 일도 없고 번뇌가 없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수사리여, 생멸(生滅)이란 가짜 이름으로 말한 것이니, 실상(實相) 가운데는 일어나는 것이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문수사리여, 가령 6취(趣) 4생(生) 중생이 만일 색(色)이 있거나 색이 없거나 생각[想]이 있거나 생각이 없거나 다리가 둘이거나 다리가 넷이거나 다리가 많거나 다리가 없거나 모두 사람 몸을 얻고, 사람 몸을 얻었으므로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을 내고 나서는 낱낱이 보살이 되어 항하사(恒河沙) 같은 모든 부처님ㆍ보살ㆍ연각ㆍ성문에게 음식과 의복과 와구(臥具)와 의약과 온갖 악기를 공양하기를 항하사 겁만큼 하고, 내지 열반에 드신 후에는 칠보탑을 만들되 높이가 백 유순이 되게 하고, 보개(寶蓋)로 위를 덮고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매달아 장엄하고, 온갖 번개(幡蓋)를 달되 자재왕마니주(自在王摩尼珠)로 교착시킨다 할지라도 어떤 보살이 청정한 마음으로 이 『도일체제불경계지엄경(度 一切諸佛境界智嚴經)』을 듣고, 듣고 나서 환희하며 수지하고 믿고 이해하며 내지 남에게 한 게송 한 구절이라고 말해준다면, 앞의 공덕보다 훌륭할 것이니, 백분(百分)이니 천분이나 만분이나 억분이나 산수(算數) 비유로써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경은 불가사의하고 청정하고 모습이 없는 미묘한 법신(法身)을 자세히 설했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만일 항하사같이 무수한 모든 보살이 항하사같이 무수한 모든 불세계를 모두 염부금(閻浮金)으로 만들고, 내지 나무와 꽃과 과일도 모두 염부금으로 만들어 천의(天衣)로써 그 나무를 장엄하고, 모든 광명마니주(光明摩尼珠) 그물로 그 위를 덮고, 자재왕마니주(自在王摩尼珠)로 궁전을 만들고, 전광마니주(電光摩尼珠)로 계단을 만들고, 많은 보배 깃발을 매달아 날마다 이렇게 항하사같이 무수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무수겁이 지나도록 할지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경을 정념(正念)하고 혹 한 구절이라도 선설(宣說)한다면, 앞에서 보살이 보시한 공덕은 이 공덕과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산수로 비유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그 밖의 모든 공덕은 이 경의 공덕과 비교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때 세존께서 다음과 같은 게송[祇夜]을 말씀하셨다.
만일 이 미묘한
법신경(法身經)을 수지한다면
얻는 공덕과 이익은
헤아릴 수 없도다.
가령 온갖 중생이
모두 사람으로 태어나
모두 보리심을 내고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며
이러한 모든 보살이
모두 크게 시주(施主)하여
온갖 공양물로써
무수한 부처님과
모든 보살과
연각과 성문에게 공양하며
나아가 멸도하신 후에는
높이가 백 유순이고
온갖 보배로 장식한
칠보탑을 각기 세운다 하여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지니고
혹 한 구(句)나 게(偈)만이라도 말한다면
그 공덕보다 훌륭하기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리라.
이 경에서 말한 것은
무상법신(無相法身)이니
지혜 있는 사람은
응당 수지하고
독송하고 베껴 쓸 것을 염(念)하고,
꽃과 향으로 공양하라.
얻는 공덕과(功德果)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니
오래지 않아 도량에 나아가
악마를 항복시켜 정각을 이루리라.
이와 같은 경[修妬路]은
모든 부처님께서 칭양하신 것이니,
모습도 없고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묘법신(妙法身)이로다.
그러므로 수지하는 사람은
공덕이 헤아릴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