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논란 (論難)
의론가(議論家)이고 궤변가인 뛰어난 지성의 총명한 밀린다 왕은 지혜를 계발하기 위하여 나아가세나 존자를 방문했다.
나아가세나의 비호 아래 있으며 질문을 함으로써 지혜를 계발하는 자가 되어 삼장(三藏)에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한 밤, 고요한 곳에 홀로 가서 가르침(九分敎)을 연찬(硏鑽)하여 풀기 어렵고 논난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난문(難問)을 발견했다.
왕은 이렇게 생각했다.
‘세존(法王)의 가르침은 차례로 설명된 것도 있고, 연관해서 설명된것도 있다. 그리고 진리 그것(本質)을 설명한 것도 있다.
세존께서 설하신 난문에서 그 뜻을 식별하지 못하면 장차 논쟁이 일어나리라.
이제 나는 나아가세나 논사(論師)를 믿고 난문을 풀 것이며, 그가 보여 주는 길을 따라 미래의 광명을 얻으리라.’
날이 밝고 아침 해가 돋았을 때, 밀린다 왕은 머리를 감고 합장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 완전히 깨달은 부처들(正等覺者)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여덟 가지 서약(誓戒)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혼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7일 동안 나는 여덟 가지 덕목(德目)을 지키고 고행(苦行)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고행을 닦으므로 스승을 만족시키고 여러 가지 난문을 물을 것이다.’밀린다 왕은 평복을 벗고 여러 가지 장식을 푼 다음, 가사(袈裟)를 몸에 걸치고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침묵하는 성자(聖者)의 모습으로 8 가지 덕목을 지키기로 맹세했다. 즉 ‘이 7일 동안 나는 왕으로서 할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나는 탐내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된다. 미망(迷妄)을 수반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된다. 모든 종과 사역인(使役人)과 시신(侍臣)들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할 것이다. 몸으로 짓는 행실(身業)과 말로 나타내는 행위(業)는 악한 탐심으로부터 막아야 한다. 여섯 가지 영역도 남김 없이 악으로부터 수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意)의 작용은 자비의 실천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8가지 덕목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의 작용을 이 8가지 덕목에 집중시켜,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7일이 지나 8일째 된 날, 날이 밝자 왕은 일찍이 아침밥을 마쳤다. 그리고 눈을 내리숙이고 말을 삼가하며 위의(威儀)를 바르게 갖추었다. 그리고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가다듬고 춤출 듯이 기뻐 만족하고 깨끗한 신심으로 나아가세나 장로에게로 갔다.
장로의 발에 머리 숙여 경례하고, 한편으로 비켜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나는 그대와 조용히 담론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그대 옆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8가지 조건(八支)을 구비하고 출가한 자에게 알맞은 조용한 장소, 마을에서 떨어진 숲속(阿蘭若)에서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무 것도 숨기고 감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깊은 담론에 들어갈 때, 나는 비장된 가르침(秘密義)을 들을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비유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이를테면 재보(財寶)를 숨기려고 할 때, 땅만큼 숨길 만한 곳이 다시 없는 것 처럼, 우리가 깊은 담론에 들어갈 때, 나는 비장된 가르침을 들을만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스승과 함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담론하려고 하는 사람이 피해야 할 곳이 8곳이 있습니다. 그 8가지 장소에서 지자(智者)는 담론하지 않습니다. 만일 담론을 한다면, 문제가 산란되어 결론에 이르지 못합니다. 8개의 장소란, 즉 평탄하지 않는 곳, 위험한 곳, 바람이 지나치게 센 곳, 은폐된 곳, 신역(神域), 도로, 다리, 수영장(水泳場)들 입니다. 이 8개 장소는 피해야 합니다.
장로는 물었다.
그러한 곳에는 어떠한 결점이 있습니까.
나아가세나 존자여, 평탄하지 않은 곳에서 담론하면 문제가 흩어지고 흘러버려 결론에 이르지 못하며, 위험한 곳에서는 두려움에 쌓여 문제를 바르게 관찰할 수 없으며, 바람이 센 곳에서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 않으며, 은폐된 곳에서는 사람들이 엿들으며, 신역에서는 문제가 심각해지기 쉬우며, 도로에서는 문제가 공허하게 되며, 다리에서는 문제가 흔들리며, 수영장에서는 통속적인 이야기로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탄하지 않은 곳, 위험한 곳, 바람이 지나치게 센 곳, 은폐된 곳, 신역, 도로, 다리, 수영장 등 이들 8개 장소는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또 다음 8종류의 사람은 담론할때 담론하는 문제를 손상시킵니다. 8가지 사람이란, 탐욕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 성내는 생활을 하는 사람, 미망(迷妄)의 생활을 하는 사람, 오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 탐욕에 찬 사람, 태만한 사람,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 바보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8종류 사람은 담론하는 문제를 손상시키는 자들입니다.
장로는 물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결점이 있습니까.
나아가세나 존자여, 탐욕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은 탐욕스럽기 때문에 담론하는 문제를 손상시키며, 성내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화를 내기 때문에 담론하는 문제를 해치며, 미망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미망으로 인하여 담론하는 문제를 해칩니다. 오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오만 때문에, 탐욕적인 사람은 탐욕 때문에, 태만한 사람은 게으름 때문에, 한가지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한가지에만 집념하기 때문에, 바보같은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에 담론하는 문제를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탐욕에 찬 사람(貪者)과, 성내는 사람(瞋者)과, 미망에 찬 사람(癡者)과, 오만한 사람과, 탐욕적인 사람과, 게으른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들은 담론하는 문제를 손상시킨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다음의 9종류 사람은 이야기한 비밀을 폭로하여 비밀을 지키지 못합니다. 9종류 사람이란, 탐욕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 성내는 생활을 하는 사람, 미망의 생활을 하는 사람, 소심한 사람, 재물을 중시하는 사람, 부녀자, 술을 좋아하는 술고래, 거세 당한 사람(黃門, 또는 宦官)들입니다.
장로는 물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결점이 있습니까.
나아가세나 존자여, 탐욕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은 탐욕스럽기 때문에, 성내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화를 내기 때문에, 미망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미망 때문에, 소심한 사람은 소심하기 때문에, 재물을 중시하는 사람은 재물(財物) 때문에, 부녀자는 지혜가 저열(低劣)하기 때문에, 술고래는 스라아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거세 당한 사람은 정욕이 과도하게 억제되기 때문에, 어린애는 마음이 잘 흔들리기 때문에, 각각 이야기한 비밀을 폭로하여 비밀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탐욕적인 사람과 성내는 사람과 미망된 사람과 소심한 사람과 재물을 중시하는 사람과 부녀자와 술고래와 거세 당한 사람과 어린애 등, 이들은 세상에서 저열하고 경박하여 잘 흔들리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게서는 이야기한 비밀이 잘 폭로되어 곧 속된 것이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지혜(覺)는 8가지 방법에 의하여 발전되고 성숙합니다. 8가지는 이러합니다. 즉 지혜는 나이가 듬에 따라 발전 성숙하며,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발전 성숙하며, 질문을 함으로 발전 성숙하며, 조사(祖師)와 함께 살므로 발전 성숙하며, 바른주의력을 가짐으로(如理作意) 발전 성숙하며, 대담(對談)하므로 발전 성숙하며, 친애할 만한 사람과 사귐으로 발전 성숙하며, 알맞은 곳에 살므로 발전 성숙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늘어남과 명성이 자라남과 질문하는 것과 조사와 함께 사는 것과 바른 주의력을 갖는 것과 대담해지는 것과 친애할 만한 사람을 사귀는 것과 알맞은 곳에 사는 것 등 이들 8가지 방법(八支)은 지혜를 순수하게 하고 또 이런 것을 구비한 사람에게 지혜의 꽃은 핀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이곳은 담론에 관한 8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난 곳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담론에 있어 비밀을 잘 지킬 수 있는 최상의 친구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또 나는 8가지 방법에 의하여 지혜를 발전시켰습니다.
나와 같은 제자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르게 실천하는 제자에 대하여 스승은 25 가지 스승의 덕을 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25 가지 덕은, 스승은 제자에 대하여 반드시 계속해서 보살펴야하며, 제자가 배워야 할 것과 배워서는 안 될 것을 가려 주어야 하며, 제자가 열심인가 태만한가를 알아야 하며, 제자가 잠자는 시간을 알아야 하며, 제자가 건강을 잘 유지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제자가 먹어야 할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알아야 하며, 제자의 특성을 알아야 하며, 바루의 음식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며, 성적이 나아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어야 하며, 다른 사람과의 교제 관계를 알아야 하며, 마을에서 누구와 교제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며, 승방에서 누구와 교제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며, 제자와 쓸데 없는 이야기를 말 것이며, 제자의 허물에 대하여 관대해야 하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며, 빠뜨리지 않고 가르쳐야 하며, 숨기지 않고 가르쳐야 하며, 남겨 두지 않고 가르쳐야 하며, ‘나는 학예(學藝)에 있어 이런 제자를 낳았다.’고 그를 자식처럼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제자는 퇴보하지 않을 것인가’고 그를 향상 시키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나는 학예(學藝)에 있어 그를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제자를 유능하게 만들 결심을 해야하며, 인자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어려운때 버려 두지 말 것이며, 제자에게 해주어야 할 일을 등한히 해서는 안되며, 제자가 실패했을 때는 똑바로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목(德目)으로 그대는 나를 대해야 합니다.
존자여, 나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난문(難問)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하여 장차 논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대 같이 지혜 있는 분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난문에 대하여 나에게 지혜의 광명을 주어 반대자의 논난을 극복하게 해 주십시오.
장로는 왕의 말을 승낙하고, 재가 신도가 지켜야 할 열 가지 덕목을 설했다.
대왕이여, 신도의 덕목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즉 신도는 승단과 고락을 같이 해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길잡이로 해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보시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함을 보면 회복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며, 흥미를 끄는 일에 마음이 쏠리지 말며, 생계를 위하여 딴 스승을 쫓아 다니지 말아야 하며, 몸과 말로 짓는 행위(身業과 口業)을 삼가해야 하며, 화합(和合)을 기뻐하고 좋아해야 하며 시새우지 말고, 또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승단에 귀의(歸依)할 것 들입니다. 대왕이여, 이 열 가지 덕목은 모두 그대가 실천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함을 보고, 번창시키려 함은 그대에게 알맞고 정당하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그대가 말씀하는 것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질문해 보십시오.
01. 부처님에 대한 공양(供養)은 결과를 맺는다
그때, 밀린다 왕은 질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 스승의 발 아래 머리 숙여 합장 예배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다른 학파(異學)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면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般涅槃) 즉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드셨을 리가 없다. 부처님은 아직도 세상에 묶여 있고, 세상 안에 있으며, 아직 세상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위하여 공양을 드리는 것은 헛된 일이고 결과도 없는 일이다. 또 만일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셔서 세상을 떠나 있고 세상에 있지 않다면, 부처님은 공양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열반에 든(사멸한) 사람은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는 사람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결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고.
이것은 양도논법(兩刀論法 즉 두 뿔 사이로 피하는 딜렘마)입니다. 이것은 깨치지 못한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뛰어난 사람들에게 적합한 문제입니다. 부디 이 사견(私見)의 그물코를 풀어서 결론을 내려 주십시오. 이 난문을 그대에게 제출합니다. 미래의 불자(佛子)들에게 지혜의 눈을 열어 반대자의 논난을 굴복시키도록 해 주십시오.장로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사멸)에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공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조차 공양받는 일을 버리셨는데, 윤회하지 않는 열반의 경계(無餘依涅槃界)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신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당연합니다. 대왕이여, 법장(法將) 샤아리풋타 장로는 이렇게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이 세상 무엇과도 비길 때 없는 부처님, 여러 신과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으시지만, 이러한 공양도 예배도 바라지 않으시니, 이는 부처님의 본성(本性)이니라.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아들이 아버지를 칭송하거나 또는 아버지가 아들을 칭찬하거나 그것은 반대자를 굴복시키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칭찬은 다만 그들 서로의 신뢰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여기서, 그대 자신의 입장을 세워 사견(私見)의 그물코를 풀어헤쳐 나의 질문에 충분한 해답을 주십시오.
장로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공양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과 사람들은 이미 공양을 받지 않는 부처님의 유골(駝都寶)과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여 바른 행동을 한다면,세 가지 경계(三成就) 중 한가지에 이릅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불덩어리가 다 타서 꺼졌다고 합시다. 그때 불덩어리는 마른풀이나 땔나무를 필요로 합니까.
존자여, 당장 타고 있을 때도 커다란 불덩어리는 풀이나 땔나무 같은 마른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정신작용이 없는 불덩어리가 소멸했을 때, 다시 연료를 필요로 하겠습니까.대왕이여, 불덩어리가 소멸했을때, 세상의 불은 완전히 없어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땔나무는 불의 연료가 되고 불을 일으키는 소재가 됩니다. 불을 바라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정력과 힘과 노력으로 나무(鑽木)을 마찰시켜 불을 일으켜서 불이 필요한 일을 합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공양을 받지 않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결과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다른 학파 사람들의 말은 틀렸습니다. 대왕이여, 커다란 불덩어리가 타는 것처럼, 부처님도 수만 세계에서 광명을 비칩니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다 타고 꺼지는 것처럼 부처님도 수만 세계에서 광명을 비친 다음, 윤회하지 않는 열반의 경계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미 소멸한 불덩어리가 마른 풀이나 땔나무와 같은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을 이롭게하는 부처님은 공양을 받는 일을 그만 두셨습니다. 대왕이여, 불덩어리가 꺼지고 연료가 다했을 때, 사람들은 정력과 힘과 노력으로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켜 불이 필요한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신과 사람들은 완전한 열반에 들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는 부처님의 유골과 지혜에 의지하여 바른 행동을 할때, 세 가지 경계 중 하나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대왕이여,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사멸)에 드셔서 이미 어떠한 공양도 받으시지 않지만,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지도 않고 결과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대왕이여, 아직도 그대의 의심이 그치지 않는다면, 그 밖의 또 다른 비유를 들으시오. 대왕이여, 큰 바람이 불다가 그쳤다고 합시다. 그쳐버린 바람이 또 다시 불려고 하겠습니까.
존자여, 이미 그쳐 버린 바람은 또 다시 불 생각이나 계획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은 정신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또 이미 그쳐 버린 바람에 대하여 ‘바람’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다아라 나무 잎사귀(多羅葉)와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입니다. 더위에 눌리고 열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아라 나무잎사귀나 부채를 가지고 정력과 힘과 노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가라앉히며 열을 완화시킵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공양을 받지 않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효과 없는 일이라’고 한 다른학파 사람들은 잘못입니다. 대왕이여, 큰 바람이 부는 것처럼, 부처님은 수만 세계에서 자비에 넘치는 시원한 바람과 훈훈한 바람과 잔잔한 바람과 산들산들한 바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다가 멎는 것처럼, 부처님은 자비에 넘치는 바람을 보낸 다음, 윤회하지 않는 열반의 경계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그쳐버린 바람이 또 다시 불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부처님은 공양을 받는 것을 그만 두셨습니다. 대왕이여, 사람들이 더위에 눌리고 열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여러 신이나 사람들은 세 가지 번뇌불(貪=탐욕, 瞋=노여움, 癡=어리석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아라 나무 잎사귀나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인 것처럼, 부처님의 유골(遺骨)과 지혜는 세 가지 경계에 도달하는 수단입니다. 더위에 눌리고 열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다아라 나무 잎사귀나 부채를 가지고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가라앉히고 열을 완화시키는 것처럼,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셔서 이미 공양을 받지 않지만, 여러 신과 사람들은 부처님의 유골과 지혜를 공양하고 받들므로서 선근(善根)을 심고 그 선근에 의하여 3가지 번뇌불을 소멸시켜 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셔서 이미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지만, 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반대자의 논난을 굴복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비유를 들으시오. 어떤 사람이 큰 북을 쳐서 소리를 낸다고 합시다. 북소리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 소리는 또 다시 울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 북소리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 북소리는 또 다시 울려는 생각이나 계획을 하지 않습니다. 그 북소리는 한 번 울렸다가 사라지면 이미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존자여, 그러나, 큰 북은 소리를 울리기 위한 도구,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가 필요할 때 자신의 노력으로 큰 북을 쳐서 소리를 울립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계행(戒行=戒)과 마음의 통일(定)과 지혜(慧)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解脫)와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통찰력(解脫知見)으로써 충만되어 있는 부처님의 유골과 교법(法)과 교계(敎戒=律)를 스승으로 삼은 뒤, 윤회하지 않는 열반의 경계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셨을 때, 세 가지 경계에 도달할 가능성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생존(有)을 위한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有情)들이 부처님의 유골과 교법과 계율(戒律)을 의지(緣)하여 세 가지 경계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누구나 거기에 도달 성취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이러하여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지만, 그 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지 않으며 결과를 가져 옵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미래의 가능성을 이렇게 보고 말씀하고 지시해 주셨습니다. 즉 ‘아아난다야, 너희들은 ‘스승의 말씀은 이미 끝났고 이제 스승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아난다야,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주고 가르쳐 준 진리의 가르침(法)과 계율(律)을 내가 죽은 뒤 너희들은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지만, ‘부처님을 향하여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효과없는 일이라’하는 다른 학파 사람의 말은 잘못이오, 거짓이며 진실치 못한 것이오, 허망한 것이오, 틀린 것이오, 전도(顚倒)된 것이오,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이오, 괴로운 결과를 낳는 것이오, 악한 생활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 밖의 비유를 또 하나 들으시오. 대왕이여, 이 대지는 ‘일체 종자야, 내 속에서 생장하라’고 바랍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어찌하여 종자는 그렇게 바라지도 않는 대지 속에서 성장하여 뿌리를 강하게 붙이고, 줄기와 가지를 뻗고, 꽃과 열매를 맺습니까.
존자여, 대지는 그것을 바라지 않지만, 종자가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되고, 반연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종자는 발판을 의지하고, 반연을 따라 자라서 뿌리를 강하게 붙이고, 줄기와 가지를 뻗으며,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다른 학파가 만일 ‘공양 받지않는 부처님에 대하여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효과없는 일이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학설에 의하여 파멸되고 격파되고 배반됩니다. 대왕이여, 여래(如來)와 아라한(阿羅漢)과 무상정등각자 (無上正等覺者)는 마치 넓은 대지와 같습니다. 대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여래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종자가 대지를 의지하여 성장하고 결실을 맺는 것처럼,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지만, 모든 신과 사람들은 여래의 성골보(聖骨寶)와 지혜보(智慧寶)에 의지하여 선근(善根)을 뿌리박고, 마음을 통일하는 줄기와, 진리의 가르침인 뼈대(髓)와, 계행인 가지를 뻗치며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꽃과 출가자의 깨침인 열매(즉 預流,一來,不還,羅漢의 四沙門果)를 맺습니다. 대왕이여, 그러기 때문에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지만, 여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지 않고 결과를 가져 옵니다.
대왕이여, 그와 꼭 같은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이유를 들으시오. 낙타와 물소와 노새와 양과 숫소와 인간은 자기들 뱃 속에 기생충(키미)이 생기기를 바랍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러면 어찌하여 기생충들은 동물이 바라지도 않는데 그들의 뱃 속에 생겨서 무수한 자손을 번식시킵니까.
존자여, 악업(惡業)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아무것도 받지 않지만 여래의 성품과 지혜의 힘에 의하여 여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지 않고 결과를 가져 옵니다. 대왕이여, 그와 꼭 같은 또 하나의 이유를 들겠습니다.
대왕이여, 사람들은 자기들 몸에 98 가지 질병이 생기기를 바랍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런 질병이 생깁니까.
전생(前生)에 행한 악행에 의하여 그러한 질병이 생깁니다.
대왕이여, 만일 사람이 전생에 행한 악행의 결과를 이 세상에서 받게(感受) 되는 것이라면, 전생이나 현세에서 행해진 악행은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아무것도 받지 않지만, 여래를 향하여 드리는 공양은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에 난다카라고 하는 마귀(夜叉)가 샤아리풋타 장로를 해치려다 땅 속으로 빠져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존자여,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샤아리풋타 장로는 악마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까.
존자여, 모든 천계(天界)와 인간계가 파멸되고 해와 달이 떨어지고 산중의 왕인 수메루 산왕(須彌山王)이다 분쇄되는 한이 있더라도 샤아리풋타 장로는 남이 고통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샤아리풋타 장로는 성내는 원인이 배제되어 뿌리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존자여, 그러기 때문에 샤아리풋타 장로는 자기의 생명을 앗아 가려는 자에 대해서까지도 화를 낼리가 없습니다.
대왕이여, 만일 샤아리풋타 장로는 난다카가 땅 속으로 빠져 버리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난다카는 땅속으로 빠져 들어 갔습니까.
난다카는 자신의 악행의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왕이여, 만일 자신의 악행의 힘에 의하여 난다카가 땅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면, 벌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저지른 행위(죄악)도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에게 드리는 공양은 가치있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 세상에서 땅 속으로 떨어진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그 점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까.
존자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해 보십시오.
친챠야라는 바라문 여인과 샤카족의 숩파부다와 데바닷타 장로와 마귀 난다카와 난다라는 바라문 청년입니다. 이들 다섯 사람은 땅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은 누구에게 죄를 지었습니까.
세존과 그분 제자들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세존이나 그분의 제자들은 그들이 땅속으로 떨어지기를 바랐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어떠한 공양도 바라지 않으신데도, 그분에게 드리는 공양은 가치있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는 심오한 질문을 잘 해결해 주시고 해명해 주셨습니다. 오묘한 뜻(秘義)을 명백하게 해 주고, 얽어진 마디를 풀어 주고, 답답한 밀림(密林)을 개선해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대론자의 주장은 논파되고, 그릇된 의견(謬見)은 잘못임이 입증되었으며, 여러 학파들도 가장 뛰어난 그대를 만났을 때 빛을 잃었습니다.
02. 부처님은 전지자(全知者)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무엇이든지 알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이 모든 것을 아심은 숙고(熟考=傾注)에 의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숙고하시면,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존자여, 부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 추구(尋求)하므로 도달 되는 것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아셨을리 없습니다.
대왕이여, 여기 쌀 7암마나(약 두 말)반 씩을 실은 수레 100대가 있다고 합시다. 사려없는 사람이 그것을 잠깐 훑어보고, 쌀알이 모두 얼마나 될런지 셈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마음(心)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미망(癡)과 번뇌와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몸과 계행과 마음과 지혜의 수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사고력이 약하고 행동이 느립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수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대(竹)를 끌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즉, 대가 번성하여 넓게 퍼져 있고 축 늘어져 있으며 얼크러져 있고 가지들이 서로 맞물고 있는 것을 끌어 낼 때 그 동작은 둔하고 더딥니다. 왜냐하면 가지들이 복잡하게 얼크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아까 말한 사람들의 마음은 활동이 느리고 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가지 번뇌로써 일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째 종류의 마음(第一心)입니다.
다음에 이것과 구별되는 둘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악한 생존의 길이 막히고, 정견(正見)을 얻어 스승의 가르침을 식별하여 성자류의 경지에 든 사람들은 세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에 있는 한, 마음의 활동은 빠르고 동작은 쉽습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영역에 관해서는 마음의 활동이 더디고 행동이 어려워 집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三處)에 있어서는 마음이 청정하지만, 그 이상의 영역에서는 여러 가지 번뇌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마디까지 매끄럽고(淸淨), 그 윗 부분은 가지들이 휘감겨 맞물고 있는 큰 대를 끌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를 끌어당길 때, 매끄러운 세 마디까지는 쉽게 움직이지만, 그 윗쪽은 꼼짝도 않습니다. 이것이 둘째 종류의 음(第二心)입니다.
다음에 이것들과 구별되는 셋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탐욕과 노여움과 미망이 줄어들어 단한 번만 망집(妄執)하는 생존으로 돌아오는 경지에 이른(一來果) 사람들은, 다섯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五處)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용이 빠르고 동작이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영역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용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에서는 마음이 청정하지만, 그 이상의 영역에서는 여러 가지 번뇌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 마디까지는 매끄럽고 그 윗 쪽은 가지들이 휘감겨 얽히어 맞물고 있는 큰 대를 끌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를 끌어 당길 때, 매끄러운 다섯마디까지는 손쉽게 움직이지만, 그 윗쪽에는 꼼짝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탐욕과 노여움과 미망이 줄어 들어 단 한 번 망집하는 생존으로 돌아오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다섯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에 있어서 마음의 활동이 빠르고 동작이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높은 영역에서는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이것이 셋째 종류의 마음(第三心)입니다.
다음에 이것들과 구별되는 넷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감각적 욕망이 생존을 일으키는 하위의 다섯 가지 속박(五下分結)을 벗어 나서 두 번 다시 생존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不還果) 사람들은 열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十處)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동은 빠르고 동작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영역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왜냐하면, 열 가지 속박을 벗어난 상태에서 마음이 청정하지만, 그 이상의 높은 영역에서는 여러 가지 번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열 마디까지는 매끄럽고 그 윗 부분은 가지들이 휘감겨, 맞물고 있는 큰 대를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를 끌어 당길 때, 매끄러운 열 마디까지는 손쉽게 움직이지만, 그 윗부분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넷째 종류의 마음(第四心)입니다.
다음에 이것들과 구별되는 다섯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더러움이(四대악)이 그치고, 마음의 때를 씻고, 번뇌를 내쫓고, 청정한 수행을 완수하고, 해야 할 선행을 마치고, 속박의 짐을 버리고, 참뜻(眞實義)을 성취하고, 윤회하는 생존에 집착하는 속박을 끊고,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는 지혜에 이르러 부처님의 제자로써 청정한 수행도를 성취한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치는 경계(聲聞境)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동은 빠르고 동작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스스로 깨친 사람의 경계(緣覺境)에 있어서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왜냐하면 성문(聲聞)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청정하지만, 스스로 깨친 연각(緣覺)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줄기에 달린 모든 가지가 제거된 큰 대를 끌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를 끌어당길 때, 모든 마디가 매끄럽고, 대 줄기에 얽히고 걸려있는 것이 없으므로 빠르고 쉽게 끌어당길 수 있는 것처럼,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성문의 경계에서는 마음의 활동이 빠르고 동작이 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스스로 깨친 사람의 경계에서는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이것이 다섯째 종류의 마음(第五心)입니다.
다음에 이것들과 구별되는 여섯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스스로 깨친 사람(緣覺)들은 독존(獨存)하고, 스승도 바라지 않고, 외뿔소처럼 홀로 행하고,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 청정 무구(淸淨無垢)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는 마음의 활동은 빠르고 동작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높은, 모든 것을 깨쳐 안 사람의 경계에서는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 마음이 청정하지만, 모든 것을 깨쳐 안 사람의 경계는 보다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 있는 조그마한 시내는 밤낮 마음대로 두려움이 없이 건너는데, 깊고 넓고 깊이도 헤아릴 수 없으며, 끝이 없는 대양(大洋)을 보면 놀라고 주저하여 감히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는 친숙해 있지만, 대양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깨친 사람들 즉, 독존하고 스승도 없고 외뿔소처럼 홀로 행하고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 청정 무구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 마음의 활동이 빠르고 동작이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경계에서 마음의 활동은 둔하고 행동은 느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경계에 있어서는 마음이 청정하지만, 모든 것을 깨쳐 안 사람의 경계는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종류의 마음(第六心)입니다.
다음 이것과 구별되어야 할 일곱째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대왕이여, 전지자요 열 가지 지혜의 활동을 지닌 자(十力者)는 네 가지 두려움 없는 자신(四無所畏)을 갖고, 열여덟 가지 뛰어난 부처님의 특성을 갖춘 승자(勝者)요, 무애의 지자(智者)입니다.
완전히 바르게 깨친 사람(佛陀)은 어느 곳에서나 마음의 활동은 빠르고 행동은 쉽습니다. 대왕이여, 잘 닦아 녹이 슬지 않고, 마디가 없으며 날카로운 촉이 붙어 있고, 휘거나 구부러짐이 없이 똑바르게 생긴 화살이 있다고 합시다. 그 화살을 힘센 궁수가 부드러운 마지나 면직이나 좋은 모직물에 쏘아댄다면 화살의 활동은 둔하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녁 바탕(布地)은 아주 훌륭하고, 화살은 고도로 조절되어 있고, 궁수는 힘이 세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내가 말한 부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佛陀)은 어느 곳에서나 마음의 활동이 빠르고 행동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면에 있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종류의 마음(第七心)입니다.
대왕이여, 이들 일곱 가지 마음 가운데서 모든 것을 깨쳐 안 부처님의 마음은 활동력에 있어 나머지 여섯 가지 마음의 활동에서와 같은 계량(計量)을 초월하여, 마음의 청정함과 활동의 민활함을 우리들이 추측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이 행하는 마음의 활동력은 청정하고 민활하기 때문에, 그는 두 가지 신통 변화(神變)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신통 변화에서 ‘모든 부처님의 마음의 활동은 그처럼 민활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는 그 이상 아무런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신통 변화는 전지 전능한 부처님의 마음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셈하거나 계산하거나 쪼개거나 분간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모든 것을 아시는 부처님의 지혜는 숙고에 의합니다. 심사 숙고한 뒤,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압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사람은 이 쪽 손에 있는 것을 저 쪽 손에 옮겨 놓기도 하고, 입을 열어 말을 하기도 하고, 입에 들어간 음식을 뱉기도 하고, 눈을 감았다 떳다 하기도 하고, 팔을 폈다 굽혔다 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부처님의 지혜보다도 느립니다. 대왕이여, 모든 것을 아시는 부처님의 지혜는 보다 더 빠르고, 활동이 보다 더 용이하며, 심사숙고는 보다 더 빠르고 용이합니다. 심사숙고한 뒤 알고자하는 것을 아신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을 심사숙고하지 않고 계신다는 이유로 부처님을 전지자(全知者)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숙고(傾注)는 추구(尋求)에 의하여 행해집니다. 이제 여기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이 사실을 확신시켜 주십시오.
대왕이여, 큰 재산가요, 많은 금,은부치며 재보와 곡식을 가진 사람이 사아리 미(米)와 비이히 미와 보리와 정미(精米)와 밀과 콩과 완두콩과 그 밖의 모든 식용의 곡식과 버터기름과 버터와 우유와 굳기름(凝乳)과 벌꿀과 설탕과 흑설탕 등, 이 모든 것을 단지와 항아리와 남비와 갖가지 그릇에 담아서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고 합시다. 그 집에서 환대받을 만찬 손님이 환대를 기대하고 찾아 왔는데, 요리된 음식은 이미 먹어 없어졌으므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항아리에서 정미(精米)를 꺼내 음식을 만든다고 합시다. 식사때도 아닌 때, 먹을 음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잣집 사람을 빈곤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왕중의 왕 전륜왕(轉輪王)의 궁전에서도, 식사 때 외에는 요리된 음식이 갖춰 있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반 사람들 가정에서이겠습니까.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숙고(傾注)를 결하고 계실 때에도 모든 것을 아시는 지혜(一切知智)를 가지고 계시며, 숙고하신 뒤 무엇이든 마음대로 파악하십니다. 대왕이여, 한 그루의 나무에 과일이 열려 그 과일 무게 때문에 가지들이 휘어질 정도로 늘어져 있으나, 단 한개의 과일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시다. 떨어진 과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과일은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과일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마음대로 그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숙고는 지혜의 필요한 조건입니다. 부처님은 숙고하심으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아십니다.
존자여,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숙고하실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마치 전륜왕이 그의 윤보(輪寶)가 나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일으키자 마자 윤보가 나타나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는 숙고를 하시자마자 따라 일어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것은 그대가 ‘부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확고한 이유입니다.
나는 ‘부처님은 전지자이시다’고 확신합니다.
03. 데바닷타(提婆達多)는 어찌하여 출가하게되었는가
나아가세나 존자여, 데바닷타를 출가시킨 이는 누구였습니까.
대왕이여, 6명의 귀족(크샤트리아) 청년 즉, 밧디야, 아누룻다, 아아난다, 바구, 킴빌라, 데바닷타와 일곱번째 이발사인 우파알리등, 이들은 모두 세존께서 깨침을 얻었(覺證)을 때, 마음 속에 환희를 느끼고 샤카 족 가문을 떠나 세존을 따라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뒤 승단(和合僧)에 분열을 일으킨 것은 데바닷타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데바닷타는 출가한 뒤 승단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속인도 비구니도 사미(沙彌)도 승단에 분열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일정한 계율 아래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일정하게 제한된 지역, 즉 결계(結界, 즉 攝僧界와 攝衣界와 攝食界)에서 생활하는 정규 비구입니다.
승단을 분열시키는 자는 어떤 업보(業報)를 받습니까.
1겁(劫, 칼파) 동안 줄곧 계속되는 업보(業報)를 받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러면 부처님은 데바닷타가 출가 한 뒤, 승단에 분열을 일으키고, 그 행위의 과보로 1겁 동안 지옥고(地獄苦)를 받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만일 부처님이 데바닷타가 출가한 뒤 승단에 분열을 일으킬 것이오, 그 과보로 1겁 동안 지옥고를 받을 것을 알고 계셨다면, ‘부처님은 모든 생명체(有情)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이롭게 하고, 해로운 것을 없이해 유익하게 하여 준다.’고 한 말씀은 잘못입니다.
또, 만일 그러하리라는 것을 모르고 데바닷타를 출가시켰다면, 부처님은 전지자였을리가 없습니다.
이 양도논법(兩刀論法)의 난문이 또 하나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이 난문을 풀어 반대자의 논난을 타파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그대의 역량을 보여 주십시요.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자비롭고 전지 전능하신 분입니다. 세존께서는 데바닷타가 어떻게 업 위에 또 업을 쌓아왔다는 그의 생애(生涯)를 아셨습니다. 또 자비와 전능하신 지혜로 그가 1겁 동안 지옥에서 지옥으로 지옥고를 치르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출가한다면, 그의 끝없는 업(業)은 종막을 고할 것이며, 전생에 지은 업에 의지하는 고통도 종막을 고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출가하지 않는다면, 그 어리석은 자는 1겁 동안 업고를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자비심으로 그의 출가를 허용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렇다면 부처님은 사람에게 먼저 상처를 입힌 다음, 기름약을 발라 주고, 벼랑에서 떨어뜨린 다음 도움의 손 길을 펴 주시며, 죽인 다음 소생하기를 구합니다. 즉 부처님은 먼저 고통을 준 다음 그 결과로 오는 즐거움을 더해 주십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벼랑에서 떨어뜨리고, 사람의 목숨을 끊는 까닭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대왕이여, 마치 부모가 자식의 이익될 날을 생각하여 그들을 때리고 넘어뜨리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만일 데바닷타가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속인으로서 많은 악업을 짓고, 십만 겁(劫) 동안 지옥에서 지옥으로 전전하며 더 많은 지옥고를 받게 됩니다. 세존은 그의 운명을 알고 자비를 내려 출가시켰습니다. 또 출가한다면 데바닷타는 괴로움에 종막을 고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비를 내려 무거운 괴로움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재산,명성,명예,가문 좋고, 권세 있는 사람이, 친구나 친척이 무거운 형벌을 받았을 때, 왕이 자기를 대단히 신임하는 덕으로 무거운 형벌을 가볍게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은 데바닷타가 십만 겁 동안 지옥고를 받을 것을 아시고, 그를 출가시켜 계행(戒)과 마음의 통일(定)과 지혜(慧)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힘(解脫力)을 얻게 하여, 십만 겁 동안 치뤄야 할 무거운 고통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대왕이여, 또, 이를테면 독 있는 화살에 맞은 상처를 잘 치료하는 의사가, 화살을 맞고 중태에 빠진 환자에게 유효한 약을 써서 거뜬히 낫게 해 주는 것처럼, 세존께서는 데바닷타가 막중한 고통을 받을 것을 아시고, 그 고통을 가볍게 해주는 방법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출가시켜 진리의(法) 약을 가지고 그의 고통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대왕이여, 데바닷타에게 막중하게 받아야 할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심으로써, 세존은 무슨 잘못(非福)을 범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부처님은 추호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왕은 이것이 세존께서 데바닷타를 출가시킨 이유라고 충분히 믿으시오.
대왕이여, 세존께서 데바닷타를 출가시킨데 대한 또 하나의 이유를 들으시오. 사람이 어떤 강도를 붙잡아와서, ‘대왕이여, 이 사람은 강도입니다. 적절한 처벌을 내려 주소서’라고 했다 합시다. 그래서 왕은 그들에게 ‘여봐라, 이 강도를 교외로 끌어 내다 목을 베어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면 부하들은 왕의 분부대로 그 사람을 교외 참수대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명성과 재산이 있고, 말에 무게가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강력히 실행하는 한 대신이 그 광경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일어나, 끌고 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들, 잠깐 자네들은 그 사람의 목을 잘라서 무슨 좋은 일이 있지. 그 사람의 손이나 발이나 자르고 목숨은 살려주게.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대왕께 말씀 올릴 터이니.’라고. 그래서 그들은 유력한 대신의 말대로 강도의 손이나 발만을 자르고 목숨은 살려 주었다고 합시다.
자아, 강도에 대하여 그렇게 해준 유력한 대신은, 강도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까.
존자여, 대신은 강도의 생명을 건져 주었습니다. 생명을 건져 주었는데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유력한 대신은 강도가 손이나 발을 잘리는 고통을 받은(感受) 데 대하여 무엇인가 잘못(非福)을 범하지 않았습니까.
존자여, 강도는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결과로 그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의 생명을 건져 준 대신은 강도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않았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세존은 자기 가르침에 따라 출가한다면, 데바닷타의 고통은 경감(輕減)되리라 하여 사랑(慈悲)으로 그를 출가시키셨습니다.
대왕이여, 그리하여 데바닷타의 고통은 경감되었습니다. 그리고, 데바닷타는 임종할 때, 최상자 중의 최상자(最上者)이시고, 신 중의 신이시고, 신과 인간의 도사(導師)이시며, 세계를 두루 보시는 눈을 가진 분이시고, 백 개의 선복의 특징을 지니신 분인, 부처님께, 생명이 존속하는 한 신명(全身全靈)을 다하여 귀의(歸依)합니다.
하고 자기 생명이 존속하는 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대왕이여, 1겁을 6등분 한다면 데바닷타가 승단을 분열시킨 것은 첫 1분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5등분 시기 동안 지옥에서 지옥고를 치르고, 그는 앗티사라라고 하는 스스로 깨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은 데바닷타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부처님은 데바닷타를 위해서 잘못하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왕이여, 그러나, 데바닷타는 승단을 분열시킨 뒤, 지옥에서 지옥고를 받았습니다. 세존께서는 그가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하여 무슨 잘못(非福)이라도 범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데바닷타는 자기가 지은 죄과로 1겁 동안 지옥에서 지옥고를 치뤘습니다. 그의 고통을 경감시켜 준 세존은 조금도 그를 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왕은 이것을 세존께서 데바닷타를 출가시킨 이유라고 충분히 믿으시오.
대왕이여, 데바닷타를 출가시킨 이유를 또 하나 들으시오. 이를테면, 독시(毒矢)의 상처를 잘 치료하는 의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의사는 화살이 오목한 곳에 꽂혀 고름과 피 범벅이된 상처(풍과 담즙(膽汁)과 가래(痰)가 화합된 것, 계절의 변화,불규칙한 생활,심한 상처를 입고 썩은 시체와 같은 악취로 찬 상처)를 치료할 때, 그는 상구(傷口)에 강력하고 극렬한 약을 발라 부풀어 오르게 한 다음, 말랑말랑해진 상구를 칼로 째고, 부식침(腐蝕針)으로 태우고, 그 다음 알카리 액을 뿌려 약을 발라 상처를 완치합니다. 대왕이여, 말해 보시오. 그 의사가 극약을 바르고, 칼로 째고, 부식침으로 태우고, 알카리 액을 뿌리고 한 것이 잔인하기 때문입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환자를 생각하는 친절한 마음으로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그러한 처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한 처치를 하므로 환자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 의사는 그 점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상처를 치료해 주고 환자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친절한 생각에서 그러한 처치를 했습니다. 어찌 거기에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는 오히려 천국에 태어날 축복을 받을 만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데바닷타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출가시키셨습니다.
대왕이여, 데바닷타를 출가시킨 데 대한 이유를 하나 더 들으시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가시에 찔렸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이 친절한 마음으로 그를 치료해 주려고, 날카로운 침이나 칼로 찔린 곳을 째고 피를 흘리게 해서 그 가시를 빼 냈다면, 그는 잔인한 생각으로 그러했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친절한 마음으로 남을 이롭게 해 주기 위하여 가시를 빼내 주었습니다. 만일, 가시를 빼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죽었거나 죽을 만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여래의 자비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데바닷타를 출가시켰습니다. 만일 그가 데바닷타를 출가시키지 않았더라면, 데바닷타는 십만 겁(劫) 동안 세세 생생(世世生生) 지옥에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여래는 번뇌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데바닷타를 그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게 하시고, 밀림(密林) 속에서 길을 잃은 그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고, 벼랑에서 떨어진 그에게 발 디딜 곳을 마련해 주시고, 파멸의 구렁에 떨어진 그에게 평화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 같이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떤 출가자도 거기 대한 이유와 의미를 교시해 줄 수 없습니다.
04. 벳산타라 왕의 보시(布施)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아, 대지 진동(振動)을 일으키는 데는 8가지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八因과 八緣)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총괄적이고 보충할 여지가 없는 말씀이오, 완전무결한 말씀입니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아홉 번째 원인(이유)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만일, 아홉 번째 원인이 있다면 세존께서는 그 원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밖의 원인이 없으므로 부처님은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벳산타라 왕이 보시할 때 대지가 일곱 번 진동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대지 진동에 대한 아홉 번째 원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만일 대지 진동이 일어나는데 8가지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만이 있다고 한다면,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가 일곱 번 진동했다고 한 말은 잘못입니다. 또 만일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가 일곱 번 진동했다면, 대지 진동이 일어나는 데 8가지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만을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이 양도론법(兩刀論法)의 난문도 미묘하여 해명하기 어렵고 현묘하여 뜻이 깊습니다. 이 난문이 이제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그대같이 지혜있는 분(具眼者)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도 이 난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대지진동에 8가지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이 있다고 하셨으며, 또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는 일곱 번 진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야 할 때 정상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8가지 원인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8가지 직접원인 중의 하나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세상에서 아는 비는 3종, 즉 장마철의 비와 겨울철의 비와 여름철의 비가 있습니다. 이 3종의 비를 제외한 딴 비는, 내리더라도 일반적인 비속에 넣지 않고 ‘철을 벗어난 비’라고 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가 일곱 번 진동한 것은 정상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8가지 원인속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8가지 직접 원인 중의 하나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또 이를테면 히말라야 산으로부터 5백개의 강이 흘러 내리는데, 그 중 10개 만이 강 수에 계산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간지스,줌나,아지라바티이,사라부우,마히이,인더스,베트라바티이,비탐사아,사라스바티이,잔다바아가아 등입니다. 그밖의 강들은 언제나 넘실넘실 흐르지 않기 때문에 강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또 이를테면 왕의 신하가 1, 2백 명 있는데, 그 중 6명의 장관 만을 국왕의 신하로 간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령장관(司令長官),수상 겸사제장(首相兼司祭長),대법원장,재무장관,지산장관(持傘長官),지검장관(持劍長官)들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직무는 왕의 대권(大權)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신하로 간주 하지 않고 관료라고만 부릅니다. 대왕이여, 이런 경우 처럼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가 일곱 번 진동했지만, 그것은 정상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8가지 원인 속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8가지 직접 원인 중의 하나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왕이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헌신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행위를 하여 지상에서는 물론 신들에게까지 그 명성이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일곱 명 있습니다.
누구 누구입니까.
꽃집 주인인 수마나, 바라문인 에카사아타카, 하인인 푼나, 왕비인 말리카아, 고파알라의 어머니로 알려진 왕비, 여신도인 숩피야아, 하녀인 푼나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헌신하므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과보를 받았으며, 그 명성은 신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또 전생에 공덕을 지어 인간의 육신을 가진 채 33 천계(天界)로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 누구입니까.
음악가인 굿틸라, 사아디이나 왕, 니미 왕, 만다아타아 등입니다. 이 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채 33 천계에 승천했으며, 또 행하기 어려운 선행을 오래 오래 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또 전생과 현세에서 이러 이러한 보시를 행할 때, 한번, 두번 또는 세번 대지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대왕이여,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통달하여 박식하며, 그 가르침을 잘 외우고, 또 듣기를 좋아하고, 질문을 하며, 스승을 섬겨 왔지만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지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이여, 캇사파 존자와 샤아카 세존 사이에 천만년이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이러 이러한 보시를 행할 때, 한번 두번 또는 세번 대지가 진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이여, 대지는 노력과 정진에 의해서는 진동하지 않습니다.
대지는 공덕의 무게에 눌리거나, 청정한 활동에 의한 공덕의 짐을 지고 그것을 지탱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흔들리고 진동하고 떱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수레에 과도하게 짐을 실을 때, 바퀴통과 바퀴가 쭈그러지고 굴대가 꼬여 부러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늘이 비바람에 휩싸이고, 무거운 비구름에 눌리며,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칠때, 천지가 찌지적거리고 진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이 대지는 벳산타라 왕의 막대한 보시력의 짐을 지고 그것을 지탱할 수 없을 때 진동하고 떨고 움직였습니다.
왜냐하면, 벳산타라 왕의 마음은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미망이나 자만심이나 잘못된 생각이나 번뇌나 논쟁이나 불만족에 의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고, 오직 보시를 위해서만 세차게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은 항상 ‘보시 받고 싶은 사람으로 아직 보시 못받은 사람들을 모조리 오게 하리라. 또 찾아온 사람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흡족히 보시하리라’고, 한 없이 보시에 대하여만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왕은 항상 변함없이 열 가지 마음의 상태, 즉 자제(自制)와 평정(平靜)과 인내(忍耐)와 자율(自律)과 억제(抑制)와 제어(制御)와 분노하지 않음과 잔학(殘虐)하지 않음과 진실함과, 청정함에 마음을 집중시켰습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왕은 욕정에 대한 추구를 버리고, 생존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고, 청정한 수행 생활에 대해서만 알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왕이여, 그는 자기를 돌보는 것을 버리고 남을 돌보는 일에만 헌신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늘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을 화평하게 하며, 무병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왕은 보시를 행할 때, 행복한 상태로 태어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보수를 받기 위해서, 의례적인 사교를 위해서, 오래 살기 위해서, 좋은 가문에 태어나기 위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자기의 명성을 얻기 위해서, 자손의 번영을 위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깨달은 최고의 지혜와 그 지혜의 보배를 얻기 위하여 비길 데 없는 최상 보시를 행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깨달은 최고의 지혜에 도달했을 때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 아들 자알리도, 내 딸 캉하아지나아도, 정숙한 내 아내 맛디이까지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도 없이 보시했다.
나는 다만 깨침을 얻기(成佛) 위하여 그런 일을 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대왕은 유화(柔和)로 성낸 자를 이기고, 선으로 악한 자를 이기고, 보시로 인색한 자를 이기고, 진실로 거짓말 하는 자를 정복하고, 정의로 모든 악을 굴복시켰습니다.
그가 이같이 보시를 행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파악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 때, 그가 행하는 보시에서 생기는 광대한 작용력과 활동력은 땅속에서 바람을 일으켜, 몇 번이고 미칠듯이 상하좌우로 불어 제쳐 잎이 떨어진 큰 나무들이 넘어졌습니다. 구름은 차례 차례로 뭉게뭉게 둥치를 이루어 하늘을 달리고, 먼지를 가득 안은 바람은 맹렬하게 하늘을 감돌며 사납게 날개쳤습니다. 또 소름끼치는 큰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리고 강풍이 휘몰아쳐 물이 서서히 움직이고, 물이 흔들려 악어와 거북은 놀라 뛰고, 물결이 솟구치고 물속 동물들은 당황하여 떨었습니다. 큰 파도가 일어 으르렁거리고, 무서운 물거품이 일어 물거품 고리가 생기고, 대양의 물이 넘쳐 사방을 할퀴고, 조류(潮流)가 미친듯이 날뛰어 4방으로 부딪쳤습니다. 이리하여 아수라와 금시조(金翅鳥)와 용과 야차는 ‘어쩐 일인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대양이 뒤집히려고 하는구나’고 공포에 떨며 도망갈 길을 찾았습니다. 조수가 격동하고 휘몰아칠 때, 대지는 산과 바다와 함께 진동하고, 수메루 산은 딩굴어 산꼭대기가 크게 변했습니다. 뱀과 망구우스(大黃鼠)와 고양이와 시랑이와 돼지와 사슴과 새 들은 당황했으며, 대지가 진동하고 있을 때, 힘 약한 야차는 눈물을 흘리고 힘센 야차는 즐거워 했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큰 솥에 물을 가득 채워 쌀을 넣은 다음 솥 밑에서 불을 때면, 맨 먼저 솥이 뜨거워지고, 다음에 물이 끓고, 그 다음에 쌀이 뜨거워집니다. 쌀이 뜨거워질 때, 물거품 고리가 생기는 것처럼 벳산타라 왕은 세상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고, 그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는 보시를 행했기 때문에, 땅속 대풍이 견디지 못해 격동하고, 대풍이 격동하자 바닷물이 진동하고, 바닷물이 진동하자, 대지가 진동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풍과 물과 대지는 큰 보시로 인하여 생기는 광대한 작용력과 활동력에 의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왕의 큰 보시력에서와 같이 위력을 가진 보시는 세상에 다시 없었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땅 속에 많은 귀중한 보석이 있다고 합시다. 즉 인다니이라, 마하아니이라, 조오티라사, 베루리야, 움마아프파, 시리이사프파, 마노하라(魅惑), 누리야칸타(太陽), 잔다칸타(月), 바지라, 캇조팟카맛카, 풋사라아가, 로히탄카, 마사아라가스라등. 그러나, 전륜왕의 마니보주는 모든 보석 중의 우두머리요, 그 광채에 있어 모든 보석을 능가하여 1 요자나 사방을 두루 비친다고 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행해진 최대 최상의 보시 중에서 벳산타라 왕의 보시는 모든 보시를 능가한다고 합니다. 대왕이여, 벳산타라 왕이 보시를 행할 때 대지가 일곱 번진동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는 구도 수행을 하고 계시던 보살(菩薩) 때도 세상에서 비길 데 없는 참으로 끈기 있고, 아주 온화하고, 확고한 의지로 끊임없는 노력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랍고 전에 없는 일이 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는 보살의 권능(權能)을 명시하시고, 또 부처님의 최고 실천 덕목(實踐德目)을 아주 밝은 광채로 비쳐 주었습니다. 그대는 부처님이 청정 고결한 생활을 할 때, 그가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얼마나 높은 존재였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승자(勝者)의 가르침은 칭송받고, 최고 실천 덕목은 해명되었으며, 다른 학파들이 논난하는 그물코는 풀리고, 논난을 일삼는 반대자의 항아리는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심오한 난문은 환하게 풀리고, 밀림은 확 트인 땅으로 변하고, 승자의 도제(불제자)들은 미혹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아아, 모든 학파의 지도자들 중 최상자여,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 나는 믿습니다.
05. 눈을 보시한 시비(尸毘) 왕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 비구들은 말하기를, ‘시비왕은 자기 눈을 달라는 사람에게 두 눈을 주고 장님이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새로운 눈(天眼)이 주어졌다’
고 합니다. 이 말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비난받을 점이 있고 잘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에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그 이상 어떠한 원인이나 근거가 없을 때는 천안(天眼)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만일 시비왕이 눈을 달라는 사람에게 자기 두 눈을 주었다면, 새로 하늘눈이 주어졌다는 말은 잘못이오, 또 만일 천안이 새로 주어졌다면, 시비왕이 눈을 달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두 눈을 주었다는 말은 잘못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도 양도론법의 난문으로서, 어려운 문제보다 더 얽혀 있고, 화살보다 더 뾰족하고, 밀림보다 더 빽빽합니다.
그대에게 제출된 이 난문에 대하여 반대자를 논파할 발원을 세워 주십시오.
대왕이여, 시비왕은 눈을 달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두 눈을 분명히 주었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의혹을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시비왕에게는 그 대신 하늘눈이 생겼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의혹을 두지 마십시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러나,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그 이상 어떠한 원인이나 근거도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늘눈이 생길 수 있습니까.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그 이상 어떠한 원인이나 근거도 없는데 하늘눈이 생깁니까. 우선 그에 대한 이유를 들어 확신시켜 주십시오.
대왕이여, 이 세상에 진실은 존재하고, 그 진실의 맹서(誓言)에 의하여 참으로 믿는 자들은 진실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그런 것이 있습니다. 진실에 의하여 진실을 실행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맹서(誓言)에 의하여 비를 내리게 하고, 불을 꺼지게 하고, 독의 효력을 없애 주며, 그밖에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많은 일을 성취합니다.
대왕이여, ‘시비왕에게 하늘눈이 생긴 것은 진실(眞實)의 힘에 의했다’는 점에서, 상응(相應)되고 들어맞습니다. 아무런 원인도 현존하지 않지만, 진실의 힘에 의하여 하늘눈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진실 그것이 하늘눈이 생기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마술사(魔術師)가 ‘큰 비야, 내리라’고 주문(呪文)을 외우자, 큰 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이때, 하늘에 비가 내릴 원인이 축적되어, 그 원인에 의하여 큰 비가 내렸겠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주문(呪文) 자체가 큰 비를 내리는 원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시비왕의 경우, 하늘눈이 생기는 통상적인 원인, 즉 자연인(自然因)은 없습니다. 진실 자체가 하늘눈이 생기는 충족 이유(根據)입니다.
대왕이여, 또 마술사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덩이야 꺼져라’고 주문을 외운다고 합시다. 주문을 되풀이 하는 순간 불은 꺼졌습니다. 거기에 불을 끄는 결과를 가져올 축적된 원인이 미리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거기서는 주문 자체가 순간적으로 불을 끄는 근거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시비왕의 경우 하늘눈이 생기는 통상적인 원인은 없습니다. 진실 자체가 천안이 생기는 충족 이유입니다.
대왕이여, 또 마술사가 ‘이 해로운 독(毒)을 치료약으로 변하게 하라’고 주문을 외웠다고 합시다. 주문을 되풀이 하는 순간 해로운 독은 치료약으로 변했습니다.
거기에 해로운 독을 치료제로 바꾸는 원인이 미리부터 있었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주문 자체가 해로운 독을 물리쳐 약으로 바꾸는 원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하늘눈이 생기는 통상적인 원인은 없습니다. 그 경우 진실 자체가 천안이 생기는 충족 이유입니다.
대왕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깨달음에는 딴 원인은 없습니다. 이 진리는 진실(眞實)의 실행에 의해서만 깨달아집니다.
대왕이여, 중국에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간혹 대양(大洋)에 진상을 드리고자 주문을 외우며 사자가 끄는 궁정수레를 타고 1 요자나 쯤 대양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수레 머리 앞에 큰 파도가 밀어 닦쳤습니다. 그 파도가 물러가면, 그 자리에 또 다른 파도가 밀어 닦쳤습니다. 그러한 대양을 신이나 사람들의 보통 체력으로 밀어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존자여, 신이나 사람들의 보통 체력으로는 조그마한 연못의 물도 밀칠 수 없습니다. 어찌 대양의 물을 밀칠 수 있겠습니까.
대왕이여, 이것으로 진실의 힘을 알 것입니다. 진실에 의하여 이르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대왕이여, 아쇼카 법왕이 파아탈리풋타에서, 시민과 지방민과 근신(近臣)과 군대와 대신들 가운데 서 있을 때였습니다.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신선한 물이 뚝까지 가득 채우고 흘러가는, 너비 1 요자나, 길이 5백 요자나의 간지스강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봐라, 이 간지스 강 물줄기를 거슬러 흐르게 할 사람은 없는가’고.
신하들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침 그때 강가 군중속에 빈두마티이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왕의 질문을 되풀이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파아탈리풋타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가장 미천한 창녀입니다. 임금께 제가 맹서에 의하여 진실을 실행하는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고.
그리고, 그녀는 진실을 실행할 것을 맹서했습니다.
그 순간 대 간지스 강은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굉장한 소리를 내며 거꾸로 흘러갔습니다.
그때 왕은 대 간지스 강 물이 소용돌이치며 거슬러 흐르는 소음을 듣고 깜작 놀라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근신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봐라, 어떻게 해서 대 간지스 강 물이 거꾸로 흐르느냐’고.
근신들은 이러이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왕에 게 아뢰었습니다. 왕은 몸소 급히 창녀에게 가 그녀에 게 물었습니다.
‘네가 진실로 실행하는 힘으로 이 간지스 강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한 것이 사실인가”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왕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너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 아니 너의 말을 들어주는 자는 대체 누군가. 하찮은 네가 무슨 힘으로 이 간지스강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저는 진실의 힘에 의하여 이 간지스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였습니다.’
왕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너에게 진실의 힘이 있을 수 있는가. 너야말로 부도덕한 자요, 타락한 자요, 불성실한 자요, 방탕자요, 죄 많은 자요, 방종자요, 범법자요, 눈먼 바보들로부터 돈을 갈취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닌가.”대왕이여,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는 바로 그러한 족속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진실을 실행하는 힘이 있어 제가 하려고 하면, 진실의 실행력에 의하여 신과 인간 세계를 변전(變轉)시킬 수 있습니다.’
왕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에게서 진실을 실행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나에게 들려 달라.”대왕이여, 저는 귀족이든 바라문이든 평민이든, 노예든, 저에게 돈을 주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평등하게 대합니다. 귀족이라 해서 존경한다거나, 노예라 해서 경멸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친애와 혐오(嫌惡)를 떠나 저의 몸을 사는 사람에게는 평등하게 봉사합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제가 진실을 실행하는 근거이며, 그 힘에 의하여 저는 대 간지스 강 물을 거슬러 흐르게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진실에 의거하여 사는 사람으로, 이익을 향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시비왕은 눈을 달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두 눈을 주고 하늘 눈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진실을 실행함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에 ‘육안(肉眼)이 없어지고 그것에 대한 원인과 근거가 없어질 때, 하늘눈은 생길 수 없다’고 한 것은, 단지 수행을 통하여 생긴 지혜의 눈에 관해서 말한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경전의 뜻을 그렇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훌륭합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는 내가 제출한 난문을 훌륭하게 풀어 주시고, 난점을 똑바로 해명하였으며, 반대론자를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나는 믿습니다.
06. 수태(受胎)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아, 세 가지 것이 화합(三事和合)해서 수태가 된다. 즉 부모가 교합하는 것, 어머니는 월경(月經)을 거친 여자라는 것, 수태를 맡는 간달바 신이 있다는 것, 이 세 가지가 화합해서 수태가 된다.’
이 말씀은 보충할 여지가 없는 말씀이오, 완전무결한 말씀이오, 총괄적인 말씀이오, 숨김 없는 말씀으로, 신과 사람들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것이 화합해서 수태된 일도 있습니다. 즉, 수반나 사아마 동자(童子)는 도구우라 고행자(苦行者)가 파알리카 고행니(苦行尼)의 월경기에 바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배꼽을 만져 주어 탄생했습니다. 또 만다브야 소년도 마아땅가 선인이 바라문 처녀 월경기에 바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배꼽을 만져 주어 탄생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만일 세존께서 ‘비구들아, 세 가지 것이 화합해서 수태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면, 수반나 사아마 동자와 만다브야 소년이 배꼽을 만져 줌으로 수태되어 탄생했다고 한 말은 잘못입니다. 또 만일 수반나 사아마 동자와 만다브야 소년은 배꼽을 만져줌으로 수태되어 탄생했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세 가지 것이 화합해서 수태가 된다고 한 말씀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양도론법의 난문으로서, 심오하고 현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풀어 주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난문이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의혹의 길을 끊고 뛰어난 지혜의 등불을 밝혀 주십시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것이 화합해서 수태가 된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수반나 사아마 동자와 만다브야 소년은 배꼽을 만져줌으로 수태되어 탄생했다는 것도 인정하셨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러면 이 난문을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는 실례를 들어 설득시켜 주십시오.
대왕이여, 그대는 상킷자 동자와 이시싱가 고행자와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가 어떻게 태어났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들었습니다. 즉, 두 마리 암사슴이 암내난 시기에, 우연히 두 고행자가 오줌을 싼 곳으로 가, 그들의 정자(精子)가 섞인 오줌을 마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상킷자 동자와 이시싱가 고행자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우다아인 장로가 비구니 사는 곳으로 가 욕정이 발동하여 비구니의 음부를 뚫어 지게 보고 있다가 속옷에 정액(精液)을 쌌습니다. 우다아인 장로는 그 비구니에게, ‘여보세요, 물을 좀 길어다 주오. 속옷을 빨아야 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존자여, 제가 빨아드리겠습니다.’고 비구니는 말했습니다.
그때 비구니는 월경기였는데, 그 옷에 묻은 일부의 정액을 입에 넣고 일부를 음부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가 태어났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그런 말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나는 그들이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무엇입니까.
존자여, 잘 성숙되어 있는 카랄라속에 정자(精子)가 떨어져 그것이 빨리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존자여, 마찬가지로 월경을 거친 비구니는 카랄라가 온전하고, 갑자기 출혈이 멎고, 월경기에 정자를 자기카랄라 속으로 집어 넣음으로 잉태했습니다. 그리하여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가 태어난 것으로 압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나는 ‘태(胎)속에 들어감으로 수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가 수태된 것을 인정합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편에 가까와졌습니다. 수태에 대하여 한 가지만 말해도 그대는 나의 이야기에 따를 것입니다. 두 마리 암사슴이 고행자의 오줌을 마시고 수태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먹고 마시고 씹고 맛 본 것은 무엇이나 카랄라로 가, 거기서 터를 얻어 자라납니다.
마치 모든 강물이 대양으로 흘러 들어가, 거기서 불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입을 통해서도 수태가 된다’고 믿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대는 한층 더 내편에 가까와졌습니다. 입을 통해서도(부모의 교배가 없이) 두 가지 화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대는 상킷자 동자와 이시싱가 고행자와 쿠마알라 캇사파 장로가 수태된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그것은 화합(和合)에 의한 것입니다.
대왕이여, 배꼽을 만져 수태된 수반나 사아마 동자나 만다브야 소년도 다 같이 세 가지 화합에 의하여 수태되었습니다. 상킷자 동자가 입을 통해서 수태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그 사실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대왕이여, 도오쿠우라 고행자와 파알리카아 고행니는 둘 다 숲 속에서 수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고독한 생활에 전념하고, 최상의 도리를 탐구하며, 고행(苦行)의 위력에 의하여 범천(梵天) 세계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고행을 했습니다. 그때 인드라(帝釋天)는 시중들러 조석으로 거기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그들을 애경(愛敬)으로 살펴보고 그들이 다 장차 두 눈을 실명하게 될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대들이 아들 하나를 낳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 아들이 장차 그대들을 받들어 부양할 것입니다.”천제여, 그만 두십시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고, 천제의 말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동정심 많고 남을 복되게 하려고 한 천제는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 번 다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천제여, 그만 두십시오. 그대는 우리에게 무익한 것을 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육신은 언젠가는 없어질 운명이 아닙니까. 괴멸(壞滅)을 본질로 하는 이 육신은 반드시 없어질 것입니다. 대지도 암석도 허공도 일월도 괴멸할 것인데, 세상일을 즐길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후로 다시 우리 앞에 와서는 안됩니다. 만일 오신다면, 남들은 그대를 분명히 무익한 일을 하는 분으로 알 것입니다.’
천제는 그들의 이해를 얻을 수가 없어 외경하는 마음으로 합장하고 다시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만일 내 말씀을 받아드릴 수 없다면, 고행니가 월경기에 존자의 바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배꼽을 만져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를 배게 될 것입니다. 배꼽을 만지는 교합(交合)으로도 수태가 됩니다.”천제여, 그 말씀은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고행이 금이 갈리는 없습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때 천계(天界)에 한 천자(天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선근(善根)을 거듭 거듭 닦고 심어, 세수(世壽)가 다할 때,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곳이면 전륜성왕의 집에라도 태어날 만한 분이었습니다. 인드라는 그 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햇빛이 비치고 목적을 달성할 날이 다가 왔습니다. 전에 내가 그대를 위하여 시봉(侍奉)으로 갔던 즐거운 곳에 그대는 살 것입니다. 알맞은 집에 태어날 것이며, 훌륭한 부모 밑에서 길러질 것입니다. 자아, 내말을 들으십시오.’
인드라는 머리 위에 합장하고 두번 세번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제여, 그대가 두번 세번 되풀이해서 칭찬한 그집은 대체 어떤 집입니까.”도오쿠우라 고행자와 파알리카 고행니가 사는 곳입니다.’
천자는 이 말에 만족하여 승낙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제여, 잘 알겠습니다. 그대가 바란다면 좋습니다. 나는 난생(卵生)이든 태생(胎生)이든 습생(濕生)이든 화생(化生)이든 어떤 집에 태어날까를 생각했습니다. 천제여, 나는 태생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때 인드라는 그가 출생할 날을 계산한 다음, 도오쿠우라 고행자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고행니께서는 아무 날 월경기가 될 것입니다. 그때 존자께서, 바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배꼽을 만져 주십시오.’
그날이 와 고행니는 월경기가 되었고, 천자는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행자는 바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고행니의 배꼽을 만져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세 가지 것이 화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배꼽을 만져 주므로 고행니에게 성욕이 생겼는데, 그 성욕은 배꼽을 만져 줌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대는 세 가지 것의 화합을 성교(性交)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놀이로 하는 것도 삼사 화합(三事和合)의 근거가 되고, 말로 하는 것도 삼사화합의 근거가 되며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삼사화합의 근거가 됩니다. 성욕이 일어나 만짐(摩觸)에 의하여 삼사화합이 이루어지고, 그 화합에 의하여 수태가 됨으로, 성교하지 않더라도 만짐으로 수태가 됩니다. 대왕이여, 그것은 마치 타고 있는 불에 갖다 대지 않아도 가까이 있는 것의 차가움을 없애 주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생물(有情)의 수태는 네 가지 힘에 의해서 이루어 집니다. 즉 업(業)에 의하여, 태(胎)에 의하여, 가계(家系)에 의하여, 청원(請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
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업으로부터 생겨나고 업으로 부터 나타납니다.
대왕이여, 생물의 업에 의한 수태는 이러합니다. 대왕이여, 선근(善根)을 닦아 쌓은 생물은 귀족의 가문이든, 바라문의 가문이든, 백만장자의 가문이든, 어떤 신이든, 또는 난생의 태든, 태생의 태든, 습생의 태든, 화생의 태든 각기 원하는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큰 재산가요, 큰 부호인 부자로서, 막대한 금,은,보화와 많은 곡식을 가지고 있고, 많은 친척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부자가 남종이건 여종이건 토지건 농지건 마을이건 읍이건 도시건 무엇이든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면 두 곱 세곱의 돈을 치르고라도 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닭은 바람에 의하여 수태하고, 학(鶴)은 우뢰 소리에 의하여 수태하며, 모든 신은 수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태에 의하는 생물은 여러가지 방법에 의하여 수태됩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사람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만 가리고, 어떤 사람은 뒤만 가리고, 어떤 사람은 발가벗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빡빡 깍으며, 어떤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동여 묶고, 어떤 사람은 까까머리에 노랑옷(袈裟)을 입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동여 묶고 노랑 옷을 입으며, 어떤 사람은 나무 껍질로 몸을 두르고, 어떤 사람은 가죽 옷을 입는 등, 사람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저들 생물은 모두 갖가지 방법으로 수태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생물은 여러 가지 태(胎)에 의하여 수태됩니다.
생물의 가계에 의한 수태는 이러합니다. 대왕이여, 가계란 난생,태생,습생,화생 등, 네 가지 가계를 말합니다. 만일, 간달바(香音) 신이 어디로부터든 난생의 집에 태어났다면, 그때 그것은 난생이 됩니다. 이와같이 간달바 신이 난생,태생,습생,화생 등 어떤 집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각각 그 가계에 상응(相應)한 생물이 태어났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어떤 짐승이든 새든 간에 히말라야의 수메루 산에 가까이 가면, 그것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빛깔을 잃고 황금빛으로 되는 것처럼, 간달바 신이 어디로부터든지 와서 난생의 태에 들면 그 고유한 자성(自性)을 잃고 난생이 됩니다. 태생,습생,화생의 경우도 각각 그러합니다. 이와같이 생물은 가계에 의하여 수태됩니다.
생물의 청원에 의한 수태는 이러합니다. 대왕이여, 여기 재산이 많고 신앙이 두텁고 계행(戒行)을 잘하는 유덕자로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 집에 어린애가 없으며, 또 한 쪽에는 선근(善根)을 닦아 쌓고 임종에 가까운 한 천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때 인드라가 어린애 없는 집을 불쌍히 여겨 임종에 닥친 천자에게 이렇게 청원했습니다.
‘천자여, 그대는 저 집 첫 째 부인의 뱃속에 태어나고 싶다고 발원하시오,’ 그래서 그 천자는 천제의 청원에 따라 그 집에 태어나기를 발원했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복덕(福德)을 사람이 바라는 훌륭한 수행자가 자기 집에 오면 온 가정이 행복하게 된다고 하여, 그 수행자를 자기 집에 오게 하는 것처럼 인드라는 그 천자에게 청원하여 그 집으로 가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생물은 청원에 의하여 수태됩니다.’
대왕이여, 수반나 사아마 동자는 복덕을 짓는 행위를 했고, 그 부모는 계행을 잘 지킨 유덕자요, 청원한 이는 유능한 분이었습니다. 이들 3자(동자,부모,청원자)의, 마음의 서원(誓願)에 의하여 수반나 사아마 동자는 태어났습니다.
대왕이여, 여기 씨를 뿌리는 데 솜씨 있는 사람이 있어, 잘 갈아 놓은 논에다 씨를 뿌린다고 합시다. 그가 종자의 발육에 장해(障害)되는 것을 피해서 씨를 뿌릴때, 종자의 발육에 무슨 장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장해를 받지 않은 씨알은 빨리 발육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수반나 사아마 동자는 출생의 장해를 벗어나 3자의 마음의 서원에 의하여 태어났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일찍이 선인(仙人)들의 노기로 인하여 부유하고 번창하여 주민이 많은 큰 지방이 파멸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들었습니다. 단다카 숲과 멧자 숲과 카알랑가 숲과 마아탕가 숲은 모두 도시가 숲으로 변화해 버린 것입니다. 또 이 지방은 모두 선인들의 마음의 노기로 인하여 파멸되었습니다.
대왕이여, 만일 선인들의 노기(瞋意)로 인하여 번창했던 지방이 파멸되었다면, 선인들의 마음의 청정(淸淨)에 의해서 도대체 무엇이 창조되었습니까.
존자여, 창조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수반나 사아마 동자는 3자의 강력한 마음의 청원에 의하여 태어났습니다. 즉 선인에 의하여 창조되고 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복덕(福德)의 행위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대왕이여, 이것을 기억해 주시오.
대왕이여, 여기 세 사람의 천자는 인드라의 청원을 받고 좋은 가문에 태어났습니다. 세 사람은 즉, 수반나 사아마 동자, 마하파나아다 왕, 쿠사 왕입니다. 이들은 모두 보살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난문은 훌륭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수태에 관하여 잘 해명되고, 그 이유는 잘 논의되었으며, 어둠은 광명으로 변하고, 얽힌 실마리는 죄다 풀리고, 반대론자의 논난은 불식되었습니다. 그대가 말씀한 것은 그대로 나는 믿습니다.
07. 부처님 가르침(正法)의 존멸(存滅)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난다(阿難)야, 이제 올바른 가르침(正法)은 5백년간 존속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세존께서는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실 때(즉 임종시에), 수밧다(須跌陀)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야, 만일 비구들이 이러한 조직을 가지고 완전한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아라한(聖者)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말씀인데, 잘 분별할 수 없습니다. 존자여, 만일 첫 번째 말씀이 옳다면 두 번째 말씀이 잘못이오, 만일 두 번째 말씀이 옳다면 첫 번째 말씀은 잘못입니다. 이것도 양도논법의 난문으로서, 밀림보다도 빽빽하고 강자보다도 강력하고 얽힌 매듭보다도 더 얽혀 있습니다. 이 난문이 이제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태양에 있는 마카라바다에 사는 거대한 짐승처럼 그대의 지력(智力)이 광대함을 보여 주십시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그대가 이용한 두 가지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자는 뜻으로나 문장상으로 나 각기 다릅니다,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속할 기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오, 또 하나는 종교적 생활의 실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양자는 크게 다릅니다. 이를테면 하늘과 땅이 현격하고, 지옥과 천상(天界)이 현격하고, 선과 악이 현격하고, 환락과 고통이 현격하게 다른 것처럼. 그러나, 그대의 질문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는 본질 문제에 관련시켜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세존께서’아아난다야, 이제 올바른 가르침은 5백년간 존속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다하는 시기를 언명함으로써 앞으로 그 가르침이 존속할 나머지 기간을 한정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아아난다야, 만일 여자가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올바른 가르침은 천년간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아아 난다야, 여자가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규율(律)에 의하여 출가했으므로, 이제 올바른 가르침은 5백년간만 존속할 것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올바른 가르침을 깨치는 것을 책망한 것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그것은 이미 없어진 것을 언명하심으로써 올바른 가르침이 존속할 나머지 기간을 한정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재산이 줄어진 사람이 남은 재산을 확인하고, ‘내 재산은 이만큼 없어지고 아직도 이만큼 남아 있다’고 사람들에게 공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 가지로 세존께서는 이미 없어진 것을 언명하심으로써 올바른 가르침이 5백년 밖에 존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든 신(神)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아아난다야, 이제 올바른 가르침은 단지 5백년 간만 존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속할 기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이여, 세존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 수밧다의 질문을 받고 ‘수밧다야, 만일 비구들이 바른 조직을 가지고 완전한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출가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종교적인 생활실천, 즉 종교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종교적 생할의 실천을 말씀하신 것과 올바른 가르침이 존속할 기간과 혼동했습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두 가지를 같은 성질의 것으로 다루어 설명하겠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명심해서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를테면 신선한 물이 가장자리까지 가득 차 있는 저수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저수지는 튼튼한 뚝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 물이 마르기 전에 큰 비가 계속 내려 고인다면 저수지 물은 닳아 없어지겠습니까.
존자여,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왕이여, 어째서 그 저수지물은 닳아 없어지지 않습니까.
비가 계속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최상승자(勝者, 즉 부처님)에 의한 올바른 가르침의 저수지는, 의무와 덕과 도덕과 청정한 생활의 실천이라는 깨끗하고 신선한 물로 가득차 있고, 계속 넘쳐 흘러 최상의 천계(天界)에 까지 넘칩니다. 만일 거기에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의무와 덕과 도덕과 청정한 생활의 실천이라는 비를 더 계속해서 내리게 한다면, 최상승자의 올바른 가르침은 오래 오래 존속할 것이며, 또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런 뜻으로 ‘수밧다야, 만일 비구들이 바른 조직을 가지고 완전한 생활을 한다면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불덩어리가 타고 있을 때, 사람들이 마른 잎과 마른 나무와 마른 쇠똥을 갖다 댄다면 그 불덩어리는 꺼지겠습니까.
아니올시다. 존자여, 불덩어리는 더욱 더 타오르고 빛날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최상승자의 올바른 가르침은 의무와 덕과 도덕과 청정한 생활의 실천에 의하여 일만 세계에 타오르고 빛날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 위에 또 만일 부처님의 아들이 열심히 힘써야 할 다섯 가지 덕목(五支精勤 또는 四正斷)을 갖추고 언제나 부지런히 힘쓰면, 계행(戒)과 마음의 통일(定)과 지혜(慧) 등 세 가지 길(三學)을 열심히 익히며, 선을 짓는 계행(作持戒)과 악을 짓지 않는 계행(止持戒)을 환전하게 지킨다면, 최상승자의 올바른 가르침은 더욱 더 오래 존속할 것이며,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이여, 부처님께서는 이 뜻으로 ‘수밧다야 비구들이 이러한 조직을 가지고 완전한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반들 반들하고 반듯하고 잘 갈아져 있어 반짝거리고 때가 묻지 않은 거울을, 부드럽고 결이 가는 분가루로 닦는다면 그 거울은 표면에 더럼이나 때나 먼지 같은 것이 생기겠습니까,.
아니올시다. 존자여, 정말 전보다 더 깨끗해질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최상승자의 가르침은 본래 때가 없으며, 번뇌의 때나 먼지가 묻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부처님의 아들들이 의무와 덕과 도덕과 청정한 생활과 번뇌를 끊는 실천을 함으로써 최상승자의 가르침을 익힌다면, 최상승자의 가르침은 오래오래 존속할 것이며, 또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런 뜻으로 ‘수밧다야, 비구들이 바른 조직을 가지고 완전한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아라한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실천을 본질로 합니다. 실천이 없어지지(隱沒) 않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속할 것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올바른 가르침이 없어진다고 할때, 그 없어짐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대왕이여, 거기에는 세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세 가지란 올바른 가르침(正法)에 대한 깨침(證得)이 없어지는 것,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실천(行道)이 없어지는 것,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외적 특징(外相)이 없어지는 것 들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깨침이 없어질 때는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사람도 그 가르침을 깨치지 못합니다. 또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실천이 없어질 때는 승단 생활의 규율(學處의 制定)은 없어지고 그 가르침의 모양만이 남습니다. 또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외적 특징이 없어질 때는 전통의 상속이 끊어집니다. 이것들이 세가지 양상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는 심오한 난문을 잘 설명해 주고 맺혀진 매듭을 풀어 주었습니다. 또 모든 학파의 지도자들 중에 최상자인 그대는 모든 반대자들의 논의를 타파하여 산산 조각이 나게 하고, 그들의 의론이 잘못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08. 세존께서는 모든 죄악을 소멸하고 부처님이되셨는가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는 모든 죄악을 다 태워 없애고 부처님이 되셨습니까. 아니면 죄악(不善)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부처님(全知者)이 되셨습니까.
세존께서는 모든 죄악을 다 태워 없애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세존에게 죄악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존자여, 부처님(如來)도 육신의 고통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라아자그리하(王舍城)에서 바위 조각에 발을 상한 적이 있으며, 또 이질과 설사병에 걸렸을 때 지이바카(耆婆)가 하제(下劑)를 복용하게 한 일이 있으며, 또 오한 때문에 떨 때 시중드는 장로가 부처님께 백비탕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존자여, 정말 부처님(如來)께서 모든 죄악을 다 태워 없애고 부처님이 되셨다면, 부처님께서 바위 조각에 발을 상하시고, 또 이질병에 걸리셨다는 말은 잘못입니다.
또 만일 부처님께서 참으로 바위 조각에 발을 상하시고, 또 이질병에 걸리셨다면, 부처님게서 모든 죄악을 태워 없애고 부처님이 되셨다는 말은 틀림 없이 잘못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처도 입고 이질병에도 걸리셨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부처님은 모든 죄악에서 벗어 났을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업이 없으면 고통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통은 업(業)에 근거하며 업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것도 양도론법의 난문으로써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그대는 이것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대왕이여, 고통이 모두 업에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8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며, 많은 사람들(衆生)은 그 원인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8가지 원인이란, 위장 내 가스의 과잉, 담즙의 과잉, 가래(痰)의 과잉, 이들 세 가지의 화합, 계절의 변화, 불규칙한 섭생, 심한 상해(외부로부터의 작용에 의한), 업(보)등 입니다. 고통은 이러한 원인들로부터 생기며, 이들 8가지 원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업(業)에 의하여 고통을 받으며, 업 이외에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도 없다’는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존자여, 업(보) 이외의 일곱 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고통도 근본적으로는 업에 의하여 생긴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질병이 정말 업에서 유래한다면 그것들을 서로 구별짓는 특징은 없을 것입니다. 위장내가스가 난동하는 것은 열 가지 원인 즉 차가움, 뜨거움, 굶주림, 목마름, 과식, 너무 오래 서 있음, 과로,너무 빨리 달림, 상해(傷害), 업의 결과(業報) 등에 의합니다. 열 가지 중 앞의 아홉 가지는 과거나 미래에는 작용하지 않고, 현재의 생존에서만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고통이 업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답즙이 교란되는 것은 세 가지 원인, 즉 차가움, 뜨거움, 알맞지 않은 음식등에 의합니다. 또 가래가 난동하는 것도 세 가지 원인, 즉 차가움, 뜨거움, 음식물 등에 의합니다. 가스와 담즙과 가래가 난동하고 뒤범벅될 때, 각기 다른 고통이 생기며, 또 계절의 변화와 불규칙한 섭생에 의하여도 각기 다른 고통이 생깁니다. 그런데, 심한 상해로부터 생기는 고통은 우연히 생기기도 하고, 업보(業報)에 의하여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업보로 생기는 고통은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적고, 우연히 생기는 것이 더많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은 업의 결과(業報)로 생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업의 작용 범위를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바위 조각에 발을 상하신 때 받은 고통은, 위장 내, 가스나 담즙이나, 가래나, 또는 이 세 가지의 화합이나, 계절의 변화나, 불규칙한 섭생이나, 업의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한 상해로 인하여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데바닷타는 수십 만년 동안 부처님께 증오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증오감 때문에 커다란 바위를 밀어다 부처님의 머리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른 두 개의 바위가 튀어나와, 데바닷타가 떨어뜨린 바위가 부처님의 발에 떨어져 피나는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세존께서 받은 고통은 업의 결과로 생긴 것이던가 아니면, 우연한 작용으로 생긴 것이던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밖에 딴 원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밭이 나쁘던가 씨앗이 좋지 않든가 해서 씨앗이 싹트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 위에 결함이 있는가 음식이 나쁘던가 해서 음식물이 소화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존에게는 업의 결과로 생기는 고통이나 불규칙한 섭생에 의하여 생기는 고통은 없으며, 그밖의 여섯 가지 원인으로부터 생기는 고통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통에 의하여 세존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46요소로 이루어진 이 육신에는 쾌와 불쾌, 청정과 부정(不淨)이라는 감각이 생깁니다. 대왕이여, 가령 공중에 내던져진 흙덩이가 다시 땅 위로 떨어진다고 합시다. 흙덩이는 전생에 지은 어떤 행위(業)의 결과로 땅 위에 떨어지겠습니까.
아니올시다. 존자여, 대지에는 선 악 간에 업보를 받는 원인은 없습니다. 흙덩이가 대지로 떨어지는 것은 전생의 업이 아니라 현재의 원인에 의합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마치 넓은 대지처럼 볼 것입니다. 흙덩이가 대지로 떨어지는 것이 전생의 업에 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세존의 발에 바위 조각이 떨어진 것도 전생의 업에 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왕이여, 또 사람들이 땅을 갈고 하는 것이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로 그러합니까.
존자여,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바위 조각이 세존의 발에 떨어진 것도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또 가스나 담즙이나 가래나 이들 세 가지의 화합으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세존에게 생기는 육신상의 질병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업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고, 나머지 여섯 가지 원인 중 하나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인 중의 성인인 세존께서는 상윳타 니카아야(相應部)의 최고 묘전(妙典)에서 모올리야시이바카의 물음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시이바카야,이 세상에는 담즙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는 고통이 있다. 시이바카야, 담즙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너는 응당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담즙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는 고통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이바카야, 수행승과 바라문들 가운데는 개체가 받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 들이 모두 전생에 지은 업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그런 생각은 확실성을 넘어 있고, 또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넘어 있으므로, 나는 그러한 수행승과 바라문들은 잘못된 견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이바카야, 가래를 원인으로 하여 생기는 고통등과 세 가지 기액(氣液)의 화합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불규칙한 섭생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심한 상처로부터 생기는 고통도 있고, 업보에 의하여 생기는 고통도 있다. 시이바카야, 업보에 의해서도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너는 응당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업보에 의하여 고통이 생겼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이바카야, 그러나 수행승과 바라문들 중에는 개체가 받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들이 전생에 지은 업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그러한 생각은 확실성을 넘어 있고, 또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넘어 있으므로, 나는 그들의 견해는 잘못이라 말하는 것이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모든 고통이 업의 결과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모든 죄악을 다 태워 없애고 부처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정말 그렇습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믿습니다.
09. 부처님(如來)에게 다시 더 수행해야 할 것이 있는가 -명상의 유익함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 비구들은 말하기를’부처님(如來)은 성취할 모든 것을 보리수 아래서 이미 다 이루시어, 그 이상 수행해야 할 아무것도 없다. 이미 성취한 것에 더 부가해야 할 아무 것도 없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성도한 뒤 곧 석 달동안 홀로 무아의 명상에 잠기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첫 번째 말이 옳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잘못이오, 또 만일 두 번째 이야기가 옳다면 첫 번째 말이 잘못입니다. 성취할 것을 이미 다 이룬 사람은 홀로 명상에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해야 할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앓는 사람에게 의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 의약이 필요치 않는 것과 같으며,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지, 배가 찬 사람에게 먹을 것이 필요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도 양도논법의 난문으로써, 이제 그대에게 제출되었으니, 그대는 이 난문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대왕이여, 두 가지가 다 진실입니다. 무아의 명상에는 많은 공덕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如來)은 홀로 무아의 명상에 들어 부처님(全知者)이 되었고, 그 선공덕(善功德特益)을 회상하면서 명상의 수행을 실천했습니다.
이를테면 왕으로부터 높은 지위를 얻고 많은 재산을 받은 사람이, 그로 인한 복을 누리면서 끊임없이 왕에게 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부처님은 홀로 무아의 명상에 들어 부처님이 되었지만, 그 선공덕을 회상하면서 더욱 명상의 수행을 실천했습니다.
또 중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 사람이 약을 써 건강을 회복하고서도, 그 약의 효능을 회상하면서 계속 약을 복용하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들은 부처님이 된 다음에도 그 선공덕을 회상하면서 더욱 명상의 수행을 실천했습니다.
대왕이여, 명상의 선공덕(特益)은 28가지이며, 모든 부처님은 그러한 선공덕을 감지하면서 명상의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28가지 선공덕이란, 명상하는 자를 수호하며, 장수하게 하며, 체력을 주며, 잘못이 생기지 않게 하며, 불명예를 제거하고, 명성을 주며, 불만족을 없애고, 즐거움(滿足)을 주며, 공포를 없애고, 자신을 주며, 게으름을 없애고, 분발시키며, 탐욕을 없애고, 노여움을 진정시키고, 미망(迷妄=癡)을 없애며, 자만심을 죽이고, 모든 의심을 타파하고, 마음을 평화(專一)롭게 하고, 마음(意)을 부드럽게 하고,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존엄(存嚴)하게 하고, 이익되게 하고, 존경을 받게하며,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모든 형성 작용(諸行)의 무상한 본성을 보여주며,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고, 출가자의 모든 지위(沙門位)를 얻게 합니다. 대왕이여, 이것들이 명상의 28가지 선공덕으로, 모든 부처님은 그러한 선공덕을 감지하며, 명상의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은 열반적정한 상태의 기쁨인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갈망하기 때문에, 목적을 확립하고 홀로 명상의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이 명상의 수행에 전념한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이유 즉 안락하게 살기 위하여, 공덕을 결함없이 풍요하게 하기위하여, 명상은 예외 없이 신성한 것에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명상을 칭찬하고 찬미하고 칭송하고 찬탄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명상의 실수(實修)에 전념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든 부처님이 명상의 실수에 전념하는 이유입니다. 대왕이여, 이같이 모든 부처님은 수행해야 할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거나, 이미 성취한 것에 더 부가해야 할 어떤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명상의 뛰어난 선공덕을 감지하기 때문에 홀로 명상의 실수행에 전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정말 그렇습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믿습니다.
10. 신통력(神通力)을 칭찬하는 이유
나아가세나 존자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아아난다(阿難)야, 부처님(如來)은 네 가지 신통력의 근거(四如意足, 또는 四神足)를 생각하여 철저하게 훈련하고 닦아서 그 근거에 도달했으며, 그것을 정신의 발전 수단과 계발 근거로서 사용할 수 있도록 통달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1겁이나 1겁의 남은 기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이 시간으로부터 석달이 지나면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死滅)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두 가지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 옳다면, 두 번째 말씀은 잘못이오, 또 두 번째 말씀이 옳다면, 첫 번째 말씀은 틀림 없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아무 때나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또 사람을 현혹시키는 말을 하지 않으며, 진실이나 사실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매우 미묘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양도논법의 난문입니다. 이 난문이 이제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이단(異端)의 그물코를 풀어 헤쳐 한 쪽으로 치우고 반대자의 논리를 타파해 주십시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두 가지를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겁(劫)은 인간의 수명의 기간을 뜻합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치켜 올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신통력을 크게 칭찬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이를테면 어떤 왕이 아주 빠른 발을 가지고 바람처럼 달릴 수 있는 준마(駿馬)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왕은 그 말의 빠른 속력을 칭찬하기 위하여, 시민과 지방민과 병사와 시신과 바라문과 장자(長者)와 신하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준마는 원한다면 바다로 둘러 싸인 대지를 잠깐 사이에 건너 뛰었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왕은 지금 그 준마가 아주 빨리 달리는 것을 저 많은 사람들에게 실지로 보여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준마에게 그처럼 빠른 주력이 있고, 또 그 준마는 잠깐 사이에 그러한 대지를 건너 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통력을 크게 칭찬하여, 모든 사람과 신들에게 세 가지 명지(三明,또는 三達)와 여섯가지 신통력(六神通)을 지닌 사람들, 즉 청정하고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아라한들 가운데 앉아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아난다야, 부처님은 네 가지 신통력의 근거를 생각해 내어 철저하게 훈련하고 닦아서 그 근거에 도달했으며, 그것을 정신의 발전 수단과 계발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통달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자기가 바란다면, 1겁이나 1겁의 남은 기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그러한 신통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또 그 신통력에 의하여 그 기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저 대중 속에서 그런 신통력을 실지로 보이시지는 않았습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미래 생존의 모든 조건(有)에 관한 욕구를 벗어나, 모든 생존(有)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인분(糞)은 아무리 소량이라도 악취가 있는 것처럼, 나는 미래의 생존(有)에 털끝만큼도 매력이 없다. 손가락을 탁 튕기는 일 찰나의 생존이라도 나는 그것을 칭송하지 않는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모든 종류와 조건의 미래 생존(有)을 인분처럼 보셨는데, 다만 신통력을 지녔다고 해서 미래 생존(有)에 대한 탐착을 마음에 품으셨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존께서 그러한 사자후(獅子喉)를 외치신 것은 신통력을 크게 칭찬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나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