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수능엄경(正本首楞嚴經) 08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이러한 중생 하나하나의 종류 가운데 각각 열 두가지 뒤바뀜을 갖춘 것이 마치 눈을 비비면 허공에 어지러운 헛꽃이 발생하는 것과 같아서 오묘하고 원만하고 참되고 바른 밝은 마음을 뒤바꾸어서 이와 같이 허망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나니라. 네가 지금 부처님의 삼마지를 닦아 증득하려면 그 근본 까닭이 되는 원래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점진적 순서를 세워 놓아야 바야흐로 제거하여 없앨 수 있으리니 이는 마치 깨끗한 그릇에 있는 독한 꿀을 제거하고 끓인 물에 재와 향을 섞어 그 그릇을 깨끗이 씻어낸 다음에야 감로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무엇을 세 가지 점진적인 순서라고 하는고 하면 첫째는 닦고 익힘이니 도 닦는데 방해되는 근본을 제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참된 수행이니 그 정성(正性)을 없애는 것이요, 셋째는 더욱 나아가는 것이니 그 현재의 업을 어기고 역으로 나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도와주는 원인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세계에 열 두 가지 종류의 중생이 스스로 완전할 수가 없어서 네 가지 식사방법에 의하여 살아가나니 그것은 이른바 씹어 먹는 것과 접촉으로 먹는 것과 생각으로 먹는 것과 의식으로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의 중생들이 모두 먹는 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한 것이다. 아난아! 일체 중생이 단 것을 먹기 때문에 살고 독한 것을 먹기 때문에 죽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삼마지를 구하고자 할진댄 마땅히 세상의 다섯 가지 냄새나는 채소를 끓어야 하나니라.
저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발생하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지나니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이 비록 十二부 경전을 설법한다고 하더라도 시방의 하늘이나 신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여 모두가 멀리 떠날 것이요 모든 아귀들은 그가 밥 먹을 적에 그 입술을 핥을 것이므로 항상 귀신과 함께 있게 되어 복덕이 날로 사라져서 영원히 이익이 없을 것이며 또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삼마지를 닦더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과 시방의 선신들이 와서 수호하지 아니하므로 힘센 마구니의 왕이 그 틈을 타서 부처님 몸으로 가장하고 나타나 설법을 하되 금하는 계율을 그르다고 비방하고 음행, 성냄, 어리석음을 찬양하리니 죽어서는 마왕의 권속이 되었다가 마구니의 복을 다 받게 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아난아! 보리를 닦는 자는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영원히 끊어야 하나니 이것은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첫 번째 차례라고 하나니라.
어떤 것을 정성(正性)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중생들이 삼마지에 들어가려면 먼저 청정한 계율을 엄하게 지켜서 음욕의 마음을 영원히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불로써 음식을 깨끗이 하여 날 것의 기운을 먹지 말아야 한다. 아난아! 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음란한 마음과 살생할 마음을 끊지 않고서는 삼계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이치가 없나니 마땅히 음욕이 독사보다 심하게 여기거나 원수와 도적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니라.
먼저 성문의 네 가지 또는 여덟 가지 내침을 당하는 계율을 잘 지켜서 몸을 가다듬어 흔들리지 말고 그런 다음에 보살의 청정한 율의(律儀)를 행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나니라.
음욕과 성냄을 완전히 끊어서 금하는 계율을 성취하면 곧 세상에서 서로 낳고 서로 죽이는 일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요 훔치는 것과 겁탈을 행하지 아니하여 서로 빚을 짓는 일이 없으면 역시 세상에서 갚아야 할 묵은 빚도 없어지리라.
이렇게 청정한 사람이 삼마지를 닦으면 부모가 낳아준 육신에 천안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시방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들어서 직접 성인의 뜻을 받들어서 큰 신통을 얻어 시방세계에 노닐면서 숙명(宿命)이 맑아져서 어렵고 험함이 없어지리니 어떤 것을 현재의 업장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렇게 청정하게 금하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마음에 탐욕과 음욕이 없어지면 밖의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에 대다수가 흘러서 빠지지 않게 되리니 흘러 빠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근원을 돌려 스스로 돌아가게 되나니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이 반연하지 않으면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상대할 것이 없어져서 흘러감을 되돌려 전일하게 되어서 여섯 가지 작용이 행해지지 아니하여 시방의 국토가 밝고 청정함이 마치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달아놓은 듯하여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서 오묘하고 원만하고 평등하여 크게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요 일체 여래의 긴밀하고 원만하며 청정하고 오묘함이 다 그 속에 나타나서 이 사람이 즉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나니라.
이로부터 점점 닦아서 가는 곳마다 행동을 발해서 성인의 위치에 편안히 서게 될 것이니 이것이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세 번째 차례이니라.
아난아!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중생이 여래의 혜명각성(慧命覺性)은 누구든지 다 갖추고 있나니 선남자와 성여인이 대승의 경지를 닦는 사람은 삼마지에 대해 가볍게 편안히 보아 비추어서 마음을 항복받고 기미를 기다려서 화합하고 응집해야만 바야흐로 부처님의 도를 이루나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욕애가 말라버려서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앞에 나타나는 남은 바탕이 다시는 계속하여 생기지 않을 것이요 집착하는 마음이 비고 밝아져서 순수한 지혜만 남게 될 것이며 지혜로운 성품이 밝고 원만해져서 시방세계가 환하게 통해서 그 지혜가 마른 것은 “간혜지(乾慧地)”라고 이름한다. 욕애의 습기가 처음으로 말라서 여래의 법류수(法流水)와 접하지 못하므로 모든 부처가 비로소 씨앗이 있는 터전에 응할 수 있는 때를 정하여 보배 구슬을 거두어 들여서 보호하면서 항상 이렇게 미묘한 법륜을 굴리셨으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지켜서 여래께서 수련하던 바른 길을 밟아서 더디게도 말고 속하게도 말아 정상적인 행동을 자세히 살펴야 하나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이러한 마음으로 가운데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면 오묘하고 원만함이 열려 퍼지리니 참되고 오묘하고 원만함을 따라서 거듭 참되고 오묘함을 발생하여 오묘한 믿음이 항상 머물러서 일체의 부질없는 생각이 남김없이 없어져서 중도가 순진하게 되는 것을 “신심주(信心住)”라고 하나니라.
참됨 믿음이 밝고 또렷해서 일체가 원만하게 통해서 오음과 십이처와 십팔계 이 세 가지가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못하며 이와 같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겁을 지내는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던 일체의 습기가 모두 앞에 나타나게 되면 이 선남자가 그것을 모두 기억해 생각해서 잊어버림이 없는 것을 “염심주(念心住)”라고 하나니라.
오묘하고 원만함이 순수하고 진실하여 참다운 정기가 조화를 발하여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의 습기가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으로 통해지거든 오직 정밀하고 밝음으로써 참되고 청정한 데에 나아가는 것을 “정진심”이라고 하나니라.
마음에 정기가 앞에 나타나서 순수한 지혜로 되는 것을 “혜심주(慧心住)”라고 하나니라. 지혜의 밝음을 잡아가져서 두루두루 맑고 고요하여 그 고요하고 오묘한 것이 항상 엉겨 있음을 “정심주(定心住)”라고 하나니라.
선정 속에 빛이 밝음을 발하여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서 오직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아니함을 “불퇴심”이라고 하나니라.
마음으로 나아감이 편안해서 이를 보호하여 지키고 잃지 않아서 시방 여래의 기분과 서로 접촉함을 “호법심”이라고 하나니라.
밝은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서 능히 오묘한 힘으로써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돌이켜서 부처를 향해 편안히 머무름이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빛을 서로 대하는 것과 같아서 그 가운데 오묘한 그림자가 거듭거듭 서로 들어가는 것을 “회향심”이라고 하나니라.
마음의 빛이 가만히 돌아와서 부처님의 항상 엉겨있는 위 없이 오묘하고 청정함을 얻어서 작용이 없는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서 잃음이 없는 것을 “계심주”라고 하나니라.
계에 머물러서 자재하여 시방에 노닐면서 가는 것마다 원하는 대로 됨을 “원심주”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참된 방편으로 이 열 가지 마음을 발하여 마음의 정기가 빛을 발해서 열 가지 작용을 거쳐서 하나의 마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발심주”라고 하나니라.
마음속에서 밝음을 발함이 마치 맑은 유리 속에 정밀한 금을 달아놓은 듯하거든 앞의 오묘한 마음으로 이를 밟아 지반(地盤)을 이루는 것을 “치지주”라고 하나니라.
심지(心地)에 들어감과 아는 것을 모두가 또렷이 밝음을 얻어서 시방에 노닐면서 머물거나 걸림이 없게 된 것을 “수행주”라고 하나니라.
행하는 것이 부처님과 같아서 부처님의 기분을 받음이 마치 중음신이 스스로 부모를 구할 적에 음계의 소식이 가만히 통하는 듯해서 여래의 종성(種性)으로 들어감을 “생귀주”라고 하나니라.
이미 도태에 들어서 친히 부처님의 아들을 봉양함이 마치 세상의 부녀자가 이미 아이를 배어서 사람의 모양이 결함이 없는 듯한 것을 “방편구족주”라고 하나니라.
용모가 부처님과 같으며 마음도 같은 것을 “정심주”라고 하나니라.
몸과 마음이 합하여 이루어져서 날로 점점 자라나는 것을 “불퇴주”라고 하나니라.
십신(十身)의 신령한 모양이 일시에 구족한 것을 “동진주”라고 하나니라.
형체가 이루어지고 태에서 벗어나서 친히 불자가 된 것을 “법왕자주”라고 하나니라.
성인임을 표시함이 마치 나라의 대왕이 모든 나라의 일을 태자에게 나누어 맡기고 저찰리왕의 세자가 장성하거든 이마에 물을 붓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관정주”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부처님의 아들을 성취하고 나서 여래의 한량없이 오묘한 덕을 완전하게 갖추어서 시방에 순하게 따르는 것을 ‘환희행’이라고 하나니라.
능히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요익행’이라고 하나니라.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여 거스리고 막는 것이 없음을 증득한 것을 ‘성냄과 원만한이 없는 행’이라고 하나니라.
갖가지 중생들이 생겨남에 따라서 미래제가 다하도록 삼세에 평등하며 시방에 통달함을 ‘다함이 없는 행’이라고 하나니라.
모든 것이 합해지고 같아져서 갖가지 법문에 차오(差誤)가 없게 되는 것을 ‘어리석고 어지러움을 벗어난 행위’라고 하나니라.
곧 같아진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나타내며 하나하나 다른 형상에서 각각 보는 것이 같은 것을 ‘잘 나타내는 행위’라고 하나니라.
이와 같이 시방의 허공에 이르기까지 작은 먼지까지도 만족하며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의 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고 경계를 나타내어도 서로 머물거나 걸림이 없음을 ‘집착이 없는 행위’라고 하나니라.
가지가지 앞에 나타나는 것이 모두 제일의 바라밀다인 것을 ‘존중행’이라고 하나니라.
이와 같이 원융해서 능히 시방 모든 부처님의 법칙을 이룩한 것을 ‘선법행’이라고 하나니라.
하나하나 모든 것이 청정하고 정기가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없어진지라 한결같이 참되고 작위가 없어서 성품 본래 그대로인 것을 ‘진실행’이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신통력을 만족하게 갖추어서 부처님의 일을 이루고 나서는 순결하게 정진해서 남아 있던 모든 시름이 멀어지거든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하는 상(相)을 없애고 작위가 없는 마음으로 돌아가서 열반의 길로 향하는 것을 ‘일체 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상을 여윈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무너뜨려야 할 것은 무너뜨리고 여의어야 할 것은 여의어야 하는 것을 ‘무너뜨릴 것이 없는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본래 깨달음이 맑고 고요해서 그 깨달음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음을 ‘모든 부처님과 같은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정밀하고 참된 것이 밝음을 발하여 지위가 부처님의 지위와 같아짐을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세계와 여래가 서로 들어가되 걸림이 없는 것을 ‘다함이 없는 공덕장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부처님의 지위와 같은 데서 그 지위 가운데 각각 청정한 원인이 생기고 그 원인에 의해 빛을 발휘하여 열반의 도를 취하는 것을 ‘평등한 선근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참된 선근이 이미 이루어져서 시방의 중생들이 모두 나의 본성인지라 그 성품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중생을 잃지 아니함을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것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일체 법에 나아가며 일체상을 여의나니 나아가고 여의는 두 가지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진여상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참되고 여여한 것을 증득해서 시방에 걸림이 없는 것을 ‘얽매임이 없이 해탈한 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성품의 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법계에 한량이 없어진 것을 ‘법계무량회향’이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이렇게 청정한 마흔 한 가지 마음을 다하고 다음으로 네 가지 오묘하고 원만한 가행(加行)을 이루나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나의 마음을 삼아 나갈듯하면서 나가지 못함이 마치 불을 피울 적에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을 ‘난온지’라고 하나니라.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밟아 오신 것을 이루어서 의지한 듯하면서도 의지하지 않음이 마치 높은 산에 오를 적에 몸은 허공에 들어갔으나 아래는 약간 걸림이 있는 것과 같음을 ‘정상지’라고 하나니라.
마음과 부처 그 두 가지가 같아서 중도를 잘 증득한 것이 마치 모든 일에 잘 참는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지도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는 것처럼 함을 ‘인내지’라고 하나니라.
헤아림이 없어져서 미각(迷覺)과 중도 그 둘 다 지목할 수 없음을 ‘세계일지’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큰 보리에 대해 잘 통달하여 그 깨달음이 여래와 통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다한 것을 ‘환희지’라고 하나니라.
다른 성품이 같은 데로 들어가고 같은 성품도 없어진 것을 ‘이구지’라고 하나니라.
맑음이 지극하여 밝음이 생김을 ‘발광지’라고 하나니라.
밝음이 지극하여 깨달음이 원만함을 ‘염혜지’라고 하나니라.
일체의 같고 다름이 이르지 못하는 것을 ‘난승지’라고 하나니라.
작위가 없는 진여가 되어서 성품이 맑아지고 밝게 드러나는 것을 ‘현전지’라고 하나니라.
진여의 끝까지를 다한 것을 ‘원행지’라고 하나니라.
한결같은 진여의 마음뿐인 것을 ‘부동지’라고 하나니라.
진여의 작용을 발하는 것을 ‘선혜지’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저 모든 보살들이 이로부터 이전에는 닦고 익히는 공부를 마치고서 그 공덕이 원만하여졌으므로 그 경지를 지목하여 ‘닦아 익히는 지위’라고 하나니라.
자비의 그늘과 오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은 것을 ‘법운지’라고 하나니라.
여래는 흐름을 거스리지만 이러한 보살은 순하게 행하여 이르러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 어울린 것을 ‘등각’이라고 하나니라.
아난아! 간혜의 마음에서부터 등각에 이르러야만 그 깨달음이 비로소 금강심 가운데에 첫 간혜지를 얻게 되나니라.
이렇게 거듭거듭 열 두 가지를 홑으로 겹으로 해야만 바야흐로 묘각을 다하여 위없는 도를 이루나니라.
이 여러 가지 지위에 모두 금강으로 허깨비와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여 사마타(奢摩他) 가운데 모든 여래의 비바사나로써 청정하게 닦아 증득해서 점차 깊이 들어가나니라.
아난아! 이것은 모두가 세 가지 증진법으로 수행한 것이므로 쉰 다섯 개 지위의 참된 보리의 길을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관찰하는 자는 올바른 관찰이라 하고 다르게 관찰하는 자는 사특한 관찰이라고 하나니라.”
그때에 문수사리법왕자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에게 아뢰기를 “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하며 저와 중생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습니까?”
부처님이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경전의 이름은 <대불정시다다반다라무상보인시방여래청정해안>이라고 하며 또 다른 이름은 친척과 그의 인연 있는 사람을 구호하여 아난과 이 모임 가운데 있는 성비구니를 제도하여 변지해(遍知海)에 들게 하는 것이며 또 다른 이름은 <여래밀인수증요의>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은 <대방광묘연화왕시방불모다라니주>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은 <관정장구제보살만행수능엄>이라고 하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