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05.네 가지 진리

5. 네 가지 진리

“여러분이여, 모든 동물의 발자취는 다 코끼리의 발자취 속에 들어온다. 코끼리의 발자취는 그 크기가 동물 중에 으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여, 모든 착한 진리는 다 네 가지 성제안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란 고(苦)의 성제, 고의 발생의 성제, 고의 멸진(滅盡)의 성제,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中部經典] 28 象跡喩大經. 漢譯同本, [中阿含經] 30 象跡喩經)

여기에 든 ‘코끼리 발자취로 비유한 경’이라는 이상스런 이름을 가진 경전이며, 이 경의 주인공은 붓다의 으뜸가는 제자라는 사리푸타(舍利弗, Sariput -ta)이다. 그가 자주 스승인 붓다를 대리하여 붓다의 젊은 제자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해설했던 일이 여러 경전에 나타나 있거니와, 여기서도 그는 스승이 설한 ‘네 가지 성제’를 설명하기위해 그 첫머리에 코끼리 발자취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비유는 아마도 코끼리가 많은 인도 특유의 것이리라. 뭍에서 가장 큰 그 동물의 발자취는 물론 매우 커서, 다른 동물의 발자취는 모두 그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그는 가장 포괄적인 것을 코끼리의 발자취에다 비유한 것이겠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그것에 의해 붓다가 설한바 온갖 가르침 속에서 차지하는 ‘네 가지 성제’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경([中部經典] 63 摩羅阿小經. 漢譯同本, [中阿含經] 221 箭

喩經)에 의하면 붓다는 마룬캬(Malunkya)라는 제자를 상대로 다음과 같이 설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마룬캬여, 내가 설하지 않은 일은 설하지 않은 채로 수지(受持 ;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지니는 것. 즉 받드는 것)함이 좋고, 또 내가 설한 일은 설한 대로 수지함이 좋으니라. 그러면 마룬캬여, 내가 설한 것이란 무엇이던가? ‘이는 고(苦)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또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마룬캬여, 왜 나는 그것들을 설했던가?

마룬캬여, 그것들은 정말 도움이 되며, 범행(梵行 ; 청정한 행위. 욕망을 끊는 것)의 기초가 되며, 적정 , 증지 , 등각 , 열반에 이바지 하느니라. 그러기에 설했음을 알라.”

마룬캬라고 불리는 이 제자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철학 청년이라고나 할까? 이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못하는가, 또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당시에 유행하던 이런 문제를 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전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것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젊은이가 어느 날 붓다를 찾아와서 그 불만을 털어 놓았을 때, 그에게 ‘화살의 비유’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가서 힘을 주어 한 말씀이 이것이었다. 거기에서 붓다는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채 수지하라.” 또 “내가 설한 것은 설한대로 수지하라.”고 하여 매우 힘 있게 끊어서 말하고 있거니와, 그러면 대체 붓다가 설한 것은 어떤 내용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성제’였다고 붓다 자신이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성제’는 붓다의 가르침의 중심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저 다섯 비구를 상대로 설해진 이후, 그 생애를 통해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내용이었던가? 지금은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중심 문제요, 그 사상을 설명하는 것은 주제가 아니나, 먼저 얼마라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최초의 설법소식은 완전히 그 안목(眼目)을 잃고 말는지 모른다.

‘네 가지 성제'(cattari ariyasaccani)는 흔히 줄여서 ‘사성제’ 또는 ‘사제’라고 일컬어진다. ‘제’는 sacca(Pali) 혹은 satua(Skt)의 역어로 ‘진리’를 뜻하는 말이거니와, 그것은 아울러 ‘엄숙한 단언’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히려 ‘엄숙하게 진리를 말씀한 단언적 명제’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그 뜻에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붓다는 아마도 그 생애를 통해 이것을 숱하게 되풀이해서 설했으려니와, 이제 여러 경에 나타난 바를 검토할 때, 가장 간명한 형식은 앞서 인용한 마룬캬에게 설명해 주던 그 양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고(苦)이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

“이는 고의 멸진(滅盡)이다.”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여래소설(如來所說)’이라고 불리는 첫 설법에서는 이것이 더 상세하게 나온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세우는 것이라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生)은 고이다. 노(老)는 고이다. 병은 고이다. 죽음은 고이다. 시름, 근심, 슬픔, 불행, 번민은 고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고이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이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後有 ; 과보(果報))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 ; 욕망에 빠지는 것)가 그것이다. 그것에는 욕애(欲愛 ; 탐내는 생각을 일으켜 무엇을 욕구하는 것. 주로 성욕)와 유애(有愛 ; 개체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와 무유에(無有愛 ;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 아무 집착도 없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도(道)가 그것이니,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니라.”

여기에서 “마땅히 들어라.” 이하의 설명을 빼어 버리고 그 항목만을 열거하면 이렇게 된다.

1) 고의 성제

2) 고의 발생의 성제

3) 고의 멸진의 성제

4)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

이전부터 불교인들은 이것을 간략히 하여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제(四蹄)라고 했다. 둘째 것을 ‘집’이라고 한 것은 한역(漢譯)에서는 예전에 ‘발생’을 ‘집기(集起)’라고 번역했던 까닭이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비로소 ‘네 가지 성제’라고 불리는 설법의 구조가 이해된다. 붓다는 먼저 네 개의 단언적인 명제를 내세우고 나서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설명해 갔을 것이 틀림없다. 맨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이는 고(苦)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성제이다.”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과제의 제시이다.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생, 노, 병, 사, 즉 사고(四苦)가 모든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법구경]의 게(128)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렇게 된다.

하늘 위에 오르고, 바다 밑에 잠기고

산골짜기 깊숙한 동굴 속에 숨는대도

죽음의 검은 손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있음 없어라.

그것뿐이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한다(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헤어질 때가 온다(愛別離苦)., 또 채워지지 않는 욕심도 허다하다(求不得苦).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괴로움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붓다는 이런 현실에 갑자기 생각이 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저 크나큰 포기(출가)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런 현실위에 “이는 고(苦)이다.”라는 제1명제가 세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두 번째로 제시된 명제는 “이는 고의 발생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인생의 현실을 통찰한 다음, 그 발생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이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 저항할 길 없는 운명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우리는 무력한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대체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붓다가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크나큰 깨달음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물음은 연기의 법칙, 즉 일체의 존재는 어떤 조건(인연)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자아(自我)니 실체(實體)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의해 훌륭히 해결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갈애(渴愛, tanha), 즉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에나 비겨야 할 불타는 욕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제시된 것은 “이는 고의 멸진이다. ” 또는 “이것은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라는 명제이다. 인생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괴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면 무엇으로 이런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 불타는 욕망을 가라앉히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세 번째의 명제이다. [법구경]에서

모름지기 이 길을 걸어간다면

괴로움이 마침내 스러지리라.

욕망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깨달아 나는 이를 설함이로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인생을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하는 원인이 갈애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철저히 뿌리 뽑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여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에는 기적도 없고 신비도 없다. 그것을 서운하게 여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붓다란 그런 분이며 불교란 그런 종교인 것이다. 그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불교에는 불가사의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붓다 이전에 이 당연한 이치에 눈뜬 사람이 있었던가?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위대한 평범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래 진리란 그런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범부라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요 깨달음인 것이겠다.

네 번째로 제시된 것은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라고 하는 명제다. 이것은 실천론이다. 제3의 명제에 의해 수립된 원칙에 입각하여 고(苦)를 없애기 위한 실천 방법을 보인 것이 제4의 성제이다. 그 내용은 이른바 성스러운 여덟 가지 정도(八正道, ariyo atthangiko maggo), 즉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며, 이것들은 모두 전장(前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입각하는 실천, 곧 관찰(정견)과 행위(정사, 정어, 정업)와 생활(정명)과 수행(정정진, 정념, 정정)에 관한 여러 항목을 열거한 것이다.

미가다야(鹿野苑)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성제’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붓다는 그 단언적인 명제들을 먼저 제시한 다음에 차례차례 설명을 덧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이 결코 그들 다섯 비구에 의해 대번에 이해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낡은 문헌(이를테면 [중부경전]26 성구경)의 기록도 그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은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 명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얻어 온 것으로 여섯이서 생활했다.”

이런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콘단냐(僑陣如 Kondan -na)가 그 사상 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경전은 그것을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안(法眼 ; 바른 이치를 보는 눈)을 떴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기뻤으려니와, 아마도 그 이상으로 좋아한 이는 붓다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그때의 붓다의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말 가운데는 이제껏 혼자서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던 깨달음의 내용을 가까스로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던 붓다의 무량한 감개가 함축되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콘단냐는 ‘안냐타 콘단냐(Annata Kondann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깨달은 콘단냐’라는 뜻이어서 “콘단냐는 깨달았다.”고 외친 붓다의 말씀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를 상상하게 해준다.

이윽고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마침내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이 세상에는 여섯 분의 성자가 계셨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또 그때 십천세계(十千世界 ; 소천세계 열이 모인 것. 매우 광활한 세계라는 뜻)가 진동했으며 무한한 광명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대사(大事)의 성취를 표현하는 고대적인 수법이거니와, 그 대사가 바로 불교의 성립을 뜻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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