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천송반야경 11. 깨달음의 경지

팔천송반야경 11. 깨달음의 경지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의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법은 부처님의 위신력의 도움에 의한 것이옵니다. 부처님에 대한 보살의 체험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며, 그 중간도 없는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요소이든 정신적 요소이든 그 작용적 현상이 끝없는 것처럼 부처님에 대한 보살의 체험도 끝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연기이므로 공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부처님과 보살님 조차도 그 어떤 실체가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거나 포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부처님과 보살님의 경지라고 하는 것을 얻은 바도 없고, 마음에 둔 바도 없습니다.

이러한 제가 어떤 보살에게 무슨 반야바라밀을 가르쳐 보일수 있겠습니까? 보살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명칭일 뿐입니다. 명칭은 실체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은 보통 ‘자아, 자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자아조차도 결국에는 적멸(寂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에는 자성(自性), 즉 실체가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자성, 즉 실체가 없는 것은, 그 어디에서 생겨 일어난 것도 아니며, 꺼지는 것도 아니므로 관찰할 수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것이옵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요소들조차도 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존재와 진공(眞空)은 둘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고 있을 때, 이와 같은 설법을 듣고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기가 꺾여 있지 않고, 침잠해 있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큰 두려움에 빠져 있지 않는다면, 바로 그 보살대사야말로 참으로 반야바라밀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대사의 경지는, 물질(物質)이 곧 진공(眞空)이요, 진공이 곧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진공은 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사리불 장로가 수보리 장로에게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설법 중에서 ‘보살이란 어디에서 생겨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장로 수보리여, 어째서 보살은 온갖 중생을 위해 어려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보살은 중생들을 대신하여 괴로움을 받는 그 일을 왜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수보리 장로가 사리불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리불 장로여, 보살이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사리불 장로여, 만약 보살이 고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추구하는 것은 보살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에게 고행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보살은 중생구제의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으로, 또는 자기의 아들이나 딸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또는 자기자신을 위한 일처럼 중생의 행복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언제나 참된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즉, ‘나는 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나로 인하여 이 모든 중생이 자기의 끝없는 번뇌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기를 원한다’ 라고.”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진공(眞空)의 산물이니, 보살 또한 진공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본성조차도 마찬가지로 공입니다. 그리고 중생 또한 공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살은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바 없이 구제하고, 중생은 또한 구제 받는 바 없이 구제 받으니,보살대사의 모든 행동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것
입니다.”

팔천송반야경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