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흥 · 경원 · 회령 · 종성 · 부령 · 온성 등의 각 고을 부근의 산골에 모여 살면서 머리를 깎고 고기를 먹으며 처자를 거느렸으며 출가자도 아니고 온전한 속인도 아닌 신분으로 모여 살던 특수한 무리들. 그들이 사는 마을을 산문(山門)이라 하고, 산문마다 불당(佛堂)이 있어 불상을 모셨으며, 혼인이나 장사 지내는 예식을 이 절에서 행하였다. 남자들은 종이를 만들고 여자들은 베를 짜며, 또 농사도 짓는 등 극히 하천한 계급에 속하며 일반 사람들과는 서로 혼인하지 않았다. 이들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그 하나는 조선 인조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간에 젖 큰 여자 3천명 · 암말 3천필을 청나라에서 요구할 때에 보내주기로 조약을 맺었으므로, 조정에서 여진족(女眞族)의 후손들을 모집하여 산 골짝에서 살게하다가 필요할 때에 뽑기로 한 것이라 하고, 또 하나는 고려의 윤관(尹灌)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구역을 정하여 살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 화상들은 가사도 입지 않고, 계율도 지키지 않고, 처자들을 데리고 살면서 물건을 운반하고, 길을 소제하며, 개울을 치고, 성을 쌓으며, 국경에 싸움이 있을 때에는 단결하여 나서서 방어하는 일에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