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에 이르는 길
모든 존재는 어떤 성질을 지녔으며 그것들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실로 부처님께서 밝히신 연기법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존재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가 해야할 실천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실천행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자신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행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그 이상향을 열반(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룬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일러준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이제부터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인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도 열반에 이르고 어떻게 살아야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지 함께 그 길을 찾아 걸어가야겠습니다.
1.고성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해 있는 불완전한 현실과 그 불완전한 존재를 유지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 노력을 고(苦)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체들이 자신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도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모든 존재들은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개체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렇게 힘들이는 모든 존재는 마치 병이 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苦)를 ‘괴로움’이라고 하여 오직 인간의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집성제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고(苦)의 상태에 있는가? 존재하려고 힘들이는 것은 갈애(渴愛)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갈애로부터 번뇌가 생깁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에 의해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을 열 두 가지의 인과의 고리로 설명한 것을 12연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 욕망, 질병, 충동, 노쇠, 질병, 죽음 등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커다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또한 생성소멸 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고(苦)도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3.멸성제 무지는 고(苦)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열반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입니다.
부처님은 무명을 타파하고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켜 열반에 이른 분입니다.
열반은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때문에 해탈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열반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을 성취하면 인간의 생존도 함께 소멸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꼭 죽음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올바른 열반관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나는 심지를 끌어내린다.
불길이 꺼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구제이다.
”란 말씀은 열반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죽은 후에 기대되는 낙원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지혜를 갖고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열반에 이른 사람은 세속의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현실 생활과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 노력합니다.
4.도성제 – 팔정도 그러면 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 길은 부처님 자신이 발견하여 걸어갔던 길로서 ‘여덟가지 거룩한 길’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의 삶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이루려는 사람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밀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그리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그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인 중도(中道)의 길입니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연기의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바른 생각(正思)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를 통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그 진리로 항상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을 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인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듯이, 마음이 오로지 진리를 향해 모으고, 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란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이 자신을 꽉 채운다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셋째, 바른 말(正語)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내 안에 품게 되면 결국 그 생각은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늘 진리를 향해 생각하면(正思) 진리의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 속에 돈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면 이자율과 부동산 시세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생각에 내 생각이 집중되어 있다면 나는 진리의 말을 하게 됩니다.
넷째,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의 올바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정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업은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업은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깨어 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 하나 하나가 진리를 향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진리를 품고 이루어지는 행위야말로 위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는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업으로 남지 않게 됩니다.
다섯번째, 바른 생활(正命)입니다.
진리에 비추어 이루어진 올바른 행위는 당연히 바른 생활을 하게 되며, 바른 직업을 통해서 바른 의식주를 영위하게 됩니다.
앞의 정업이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가 강조된 행위라고 한다면 정명은 사회지향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생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루에 모자를 백 개 만드는 사람이 그가 만든 모자를 자신이 모두 쓰고 다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쓰고 다닙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생활 속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사는 것을 정명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바른 노력(正精進)입니다.
병이 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번 먹고 낫기 어려운 법입니다.
병을 완치하려면 계속 약을 잘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에 이르려면 쉼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올바른 노력, 즉 정정진을 자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까지 포함합니다.
올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해탈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은 관심을 항상 지니고, 그에 맞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앞에 언급된 다섯 가지 연결고리가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정정진은 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일곱번째, 바른 집중(正念)입니다.
‘생각할 바에 따라서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실천이 항상 현재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실천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주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 바른 수행(正定)입니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음을 의미하는 올바른 삼매입니다.
바른 삼매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체현을 통한 무한한 자유이고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실천 덕목이라기보다는 진리체현의 길로서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정도를 통한 해탈은 나와 세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격을 완성하여 ‘깨달은 자’, 즉 붓다(Buddha)가 된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닦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란 말보다는 해탈이나 열반이란 말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