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경전사에 수록된 Buddha(붓다, 부처님)에 대하여

초기 경전사에 수록된 Buddha(붓다, 부처님)에 대하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아라한이며 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그분 세존께 귀의합니다)   Ⅰ. 강의 주제 1. 초기 경전사에 수록된 Buddha(붓다, 부처님)에 대하여     1) 붓다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2) 남들은 붓다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토대로 검토.   Ⅱ. 불자란 어떤 자를 불자라고 하는가? 1. 부처님에 대한 믿음   1)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信心)과 그 믿음을 토대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2) 빅쿠 수행자란      ① 외적으로는 계를 받고 붓다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      ② 내면적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를 말하면 한국불교의 문제는 계와 믿음에 문제가 많다.

2. dhamma(법)에 대한 호기심(흥미)을 갖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초기 불교에 대한 재미 또는 행복감) 붓다의 말씀을 소개. 3 붓다에 대한 지식 습득.   Ⅲ. 붓다에 대해 붓다 자신과 남들은 붓다를 어떻게 말했는가? 1. 붓다는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Upaka(우빠까, 사람이름)의 일화.   1) upaka-sutta. (MN.Ⅰ.525. 우빠까경)     가. 붓다는 최초로 깨달은 내용을 5비구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바라나시의 Migadaya(녹야원)를 향하여 길을 가든 중 자이나 교도(‘jinā’ 라는 단어로 추증)[1]인 upaka를 만난다.

     나. 우빠까는 붓다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당신의 5근이 청정하고 빛이 난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이 누구냐? 또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2]     다.

“나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다        집착하지 않고 애욕에서 벗어났다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물들지 않는다        나는 욕망을 버렸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그러한 내가 누구를 스승으로 모실 것인가        나와 같은 이는 없다        신을 포함해서 나와 견줄만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참으로 나는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원한 사람이고 완전히 불꽃이 꺼진 사람이다.

       나는 유일한 삼마삼붓다(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분)이다.

       나는 담마의 수레바뀌를 굴리기 위해서 가시의 도시로 간다.

         벗이여, 그대는 스스로를 공헌하십니다.

       승리자[3]들이란 지나와 같다.

       지나를 나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

       흐름을 부순 사람이다.

       모든 악한 것들을 정복한 승리자다.

    *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말하고 나서 머리를 갸우뚱(긍정 반 부정 반) 떠난다.

고로 붓다는 첫 번째 법을 펴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upaka는 속퇴해서 결혼, 아이까지 두었으나 다시 붓다을 찾아가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2) vibhajjavādin(교리를 가르치는 사람, 분별론자): 4가지 (부처님을 vibhajjavāvadin이라 강조)      가. 4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4](記問: 질문을 다루는 네 가지 방식)         ① 즉시 대답하는 방식(절대 물러나지 않는)         ② 질문에 분석적으로 답할 것은 분석적으로 답하고.         ③질문에 되물어야 할 것은 되묻는다.

        ④ 질문에 제쳐둬야 할 것은 제쳐두는 방법.   3) Nagara -sutta(나가라경)     가. 붓다는 부처가 되기 전 보살[5]이었을 때, 나고 죽음이 없는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늙고 죽음이 없을 수 있을까, 을 늘 고민하다 연기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6]     나. 깨달음이란 어느 순간에 뻥 터지는 것이 아니라 nagara-sutta에 의하면 부처님은 보살로써 매우 철저하게 사유해 나가고 있다.

한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선정이나 고행이 깔려 있다.

(후대의 위빠사나).     다.

yoniso manasikāra(일부러, 또는 철저히 주의하는) 를 통해서 paññā(지혜, 통찰지)를 얻게 되고, paññā를 통해서 이치를 알게 됨. 태어남이 있으므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 그 이전에 bhava(有, 존재)가, bhava가 있음으로 jāti(생, 태어남)가 있고 bhava이전에 upadana(取, 취)가 있고…… 이런 식으로 점점 근원에 접근 해 가는 여정, 그렇게 “samudayo (nagara-sutta. s.Ⅱ…105.3) samudayo 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samuday(≠nirodaya)”라고 하는 것 이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은 전혀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그런 것으로 그런 이치”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adi가 일어났고 paññā,가 일어났고, vijjā(≠avjjā)가 일어났고 āloko가 일어났다.

여기에 의하면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사유를 yoniso manasikārā를 통해서 samudayo(생성) 를 알게 되고, 다음에는 nirodha(소멸)를,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자신이 진리의 발명자가 아니라 발견자다.

“옛 성과 도시를 발견한 자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경에는 12연기 다가 나오지는 않는다.

    5) 탄생 게(DN. Ⅱ.)에서 자신을 소개   태어나서 곧 바로 사방으로 칠보를 걸으면서 “이 세상에서 나는 최고다.

이 세상에 최고 앞장서 있는 사람이 붓다 이다.

(삼각자. 좋은 의미의 앞잡이) 세상을 끌고 나가는 seṭṭhoham(가장 좋다.

수승한), 이것이 anitimā jāti 즉 이 생이 마지막이다.

나의 마지막 생이다.

이 이후로는 다시 될 일이 없으리라” 라고 붓다는 자신이 스스로 최고라고 말씀하신다.

  aggoham(최고.위.상), jeṭṭhoham(가장 먼저), seṭṭhoham(제일 좋고) 등과 같은 좋다는 것은 모두 동원해서 나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최고라고 했고(태어나자 마자) 깨닫고 나서는 상당히 당돌했으며 다른 이에게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 비판이 외도들에 의해 행해 진 기록이 있다.

스스로를 kamma vādin(업을 말하는 자), kiriya vādin(단지 작용만을 말하는 자), viriya vādin(노력을 말하는 자)이라 한다.

  [AN.Ⅰ.287.12] 에 “비구들이여, 현재의 나는 아라한이고, 삼마삼붓다이고 kamma를 이야기하고” 라고 하신다.

kamma를 수행으로 이끌어 가신 분, kamma는 “업”, kiriya는 “행”, viriya는 “노력”이다.

실천력. 힘. 에너지. 노력 이 셋 중에 부처님의 의도가 있다.

붓다가 강조한 것은 viriya다.

kamma가 운명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viriya가 있으면 kamma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운명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절대로 나두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kamma는 운명적으로 꼼짝 못하는 사람은 kamma에 지배를 받고 그 사람에게는 운명론이 맞다.

예를 든다면, “말하기를 하다” 라고 했을 때, ‘말하기’는 kamma이고 ‘하다’는 kiriya이다.

말은 말이다 ‘하기’는 kamma로 볼 수 있다.

말하기를 ‘하는 것’ 지금하고 그런 것은 행위로 옮겨 지는 것은 kiriya로 볼 수 있다.

내가 행동을 했고 행동에 옮기고 있는 그것은 kiriya이고 행동을 해 버린 것은 kamma이다.

viriya, 즉 자기 의지와 함께 섞인 행위 바로 그런 것들이 kamma에 대한 붓다의 정의이다.

  막깔리 꼬살라는 바로 이것이 없다.

이 세상에 법을 설하고 깨달음을 얻는 붓다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안위를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막깔리 꼬살라는 세상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

그것은 kamma와 kiriya와 viriya를 말하고 있지 않고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kamma, kiriya, viriya를 함께 이야기를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이로움으로 이끈다.

    6) 붓다는 ‘magga(도. 방밥, way)’ 방법론 자이다.

    magga는 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방법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영어의 ‘way’는 ‘길’ 이자 ‘방법’ 이다.

길을 가는 대는 길만이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수행에 있어서는 ‘방법’ 그것이 강하다.

대표적인 출처는 satiphatana(알아 차림의 확립)이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   붓다가 그 시대에 많은 사람을 끌어 모울 수 있었던 것은 이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붓다 만큼 이 방법을 확실하게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 재정리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방법론을 제시하고, 가는 길에 잘못된 악영향 등을 최소화하고 그리고 좋은 것들만 제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ānāpānasati-sutta(들숨 날숨 경, 안반수의경)이다.

배경을 설명할 때 8정도로 결론지음.  도를 가장 대표적으로 말하는 것은 ariya athaṃgika magga(8정도)를 이야기 한다.

결과 총을 매우 자유롭게 둘이 아주 조화롭게 방법론을 제시하신 분이다.

  붓다는 magga(도. 방밥, way)를 잘 시설해 놓으신 분, 붓다는 dhammayāna(법의 수레)를 말씀 하신 분, 붓다는 옛날 길을 발견하시고 그 길을 제자들이 올 수 있도록 수선도 하시고 팻말도 설치하고 누구든지 dhammayāna(법의 수레)로 가게 했다.

  dhammayāna(법의 수레)가 어느 날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수레를 이야기 하기됐다.

수레만 이야기 하다 보니 magga(도. 방밥, way)는 사라져 갔다.

길은 mahayāna(대승불교)에 오면서 수레만 강조, 처음에는 magga(도. 방밥, way)와 dhammayāna(법의 수레)를 함께 불가분의 관계로 이야기 하고 있다.

길이 있으면 yāna(수레)가 필요하다.

길은 안중에도 없고 좋은 차만 생각을 하게 됨.   수레는 큰데 길은 무너졌다.

이제는 도로가 무너져 어디가 도로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부처님은 magga(도. 방밥, way)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고, 함께 갈 수 있는 dhammayāna(법의 수레)를 말씀하신 분이다.

  2. 부처님 당신은 누구인가요?   1) Yakkho(AN.Ⅱ.38)     “devo no bhavaṃ bhavissatiti” Doṇa가 붓다에게 물었다.

그렇게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은 뭘 위해서 수행하느냐?[7] 당신은 신(deva. Gandhabba. yakka. mannusa)이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나는 이런 것들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sammāsambuddha다 만일 내가 流漏의 흐름을 버리지 않았다면 deva(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하게 āsava(유루. 번뇌)를 버렸다.

  뿌리째 완전히 코코넛 나무 목을 자르듯이 짤라 버려야 한다.

나는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이 세상에 의해서 물들지 않은 붓다다.

브라만이여, 기억해달라. 세상에 물들지 않고 동하지 않은 연꽃에 비유.     2) Dona-sutta (AN.Ⅲ.223)     도나[8]가 붓다 에게 말한다.

고따마시여, 늙고 나이 먹고 연장자이고 매우 오래 산 바라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또 반기지도 않고 만나면 자리도 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연장자에게 버릇없이 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붓다는 매우 당돌한 그런 분이고 자기가 생각했을 때 그럴만한 인간이 아니면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 같다.

붓다는 변명을 한다.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Dona-sutta이다.

“그대여 그대가 브라만이라 하는데 네가  브라만을 제대로 아느냐? 순수브라만 혈통이 어떤 사람을 순수브라만이라 하는가?” 에 대한 답으로 외도들이 말하는 붓다는 행동상 비난 받을 만한 부분도 있었다.

    3) Ambaṭṭha-Sutta(DN.3)     뽁카라사띠 바라문에게 암밧타라는 바라문 학도가 도제로 있었다.

그는 그를 붓다에게 보내어 붓다가 정말 잘난 사람인지 염탐 좀 해 오라고 시킨다.

  상가 외부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붓다는 모든 것을 총정리 해서 말한다면 Itipi so이다.

그것을 우리는 ṇava guṇa(여래9호)하며, Iti 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이와 같이 그 분 세존은 아라한이고 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분이고 밝은 지혜와 실천을 구족한 분이고 피안에 잘 가신 분이고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고 최상의 사람 길들이는 분이고 신과 인간의 스승이고 불.세존이시다) 이다.

  붓다에 대한 소문이 이 세상에 자자했다.

이 소문에 의해서 세상 사람들은 붓다를 더 보고 싶어 했다.

이 iti pi so는 밖에서뿐 아니라 상가 안에서도 수행의 방법[9]으로 사용했다.

줄이면 Namo tassa …로 줄일 수 있다.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Tathagato bodhi saddha이다.

즉,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 것이다.

깨달음을 믿는 다고 하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Iti pi so이다.

깨달음과 연관 지어 줄이면 Araha sammāsambuddho이며, 자기 신앙심과 함께 Namo tassa ……로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행했으며 이는 의도적으로 상가의 구성원들이 퍼트린 경향도 있다고 볼 수 있다.

    4) Dhānañjānī: 여인 다난자니의 굳은 신심.     붓다 당시 깨달은 자 붓다는 그 당시 일반인들의 신앙의 대상인 신들이나 그 무엇의 믿음의 대상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구체적인 바탕은 Iti pi so이다.

불교는 이런 신심이 어떤 구애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Saddha(믿음)는 항상 모든 것이고 제대로 된 것이라면 viriya(노력, 정진)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심(信心)은 실천력을 가져야 한다.

행동력 없는 신심은 제대로 된 신심이라 볼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신심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종교이다.

  빠라나야 왓까의 마지막 삔기야 존자가 신심의 대명사처럼 된다.

신심으로 해탈한 경우로 빠라나야 마지막인 삔기야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

  빠라나야 왓까는 보다와리라는 강둑에 바와리라는 존자가 살고 있었다.

거지브라민이 바와리에게 동냥을 하려 왔다 .하지만 바와리는 아무것도 줄게 없었다.

거지브라민은 저주를 하였다.

“그대는 7일 후에 머리가 7쪽이 나서 죽을 것이다.

” 그러자 바와리가 멀리 계시는 붓다 에게 제자를 보낸다.

붓다 인지 확인하고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오라고, 그러자 제자는 어떻게 붓다 인지 알아볼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자 바와리는 제자에게 ①붓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위대한 분의 표시가 있다.

②붓다는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가 묻고자 하는 질문을 알아서 답을 줄 것이다.

이는 외도들에 의해 붓다에 대한 검증을 시도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5) Mayavt : 환. 요술쟁이     upāli는 브라민이며 자이나교의 재가 신도로 최고의 후원자이다.

그는 말을 잘했다.

빠야시라는 자이나교의 제자가 붓다를 만나고 와서 kamma(업)와 dāna(보시)에 대해 논란, 행위가 kamma(업)의 가장 강한 것이라 주장. 붓다는 심리적인 것을 강조. 자이나교에서 다시 upāli를 보낸다.

우빠리가 붓다에게 가서 고따마를 묵사발을 만들고 오겠다고 한다.

우빠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주는 우빠리를 보내지만 우빠리 또한 불교도로 개종한다.

  mayaī란 요술장이란 뜻으로 모두를 불교도로 개종시키는 마술사라는 뜻이다.

  *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과거에 지은 삼업(身. 口. 意)의 과보를 받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운명론으로 흐르기 싶지만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좋은 방향(해탈열반)으로, 자기 의지로 본인 스스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다는 붓다의 사상이야 말로 만고의 진리라 할 수 있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서로 의존해 있고 끊임없이 변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물질과 심리현상)들을 잘 분석하고 분해 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통찰지가 생긴다고 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수행 이론이다.

물질인 우리 몸을 관찰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3가지이다 (초기 불교, 아비담마는 5가지) 즐거운 느낌과 고통스러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그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즐거운 느낌은 사라지고, 괴로운 느낌이나 싫어하는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또한 집착하게 되면 불선업이 쌓이니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위빠사나 수행 이론이 생각나서 몇자 적어 봅니다.

-끝 [1] 어떤이는 막칼리 고살라가 교주인 아지와까 교도로 보는 이도 있다.

이 교단은 니간타 나타붓다의 자이나교도와 비슷한 교설을 펼쳤고, 이들도 역시 나체수행자며, 이들의 주장은 ‘숙명론’이며,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는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간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오랜 세월 윤회하다 보면 ‘스스로 잠에서 깨듯이’ 언젠가 해탈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업을 자유의지로 해석하는 불교의 연기론적 업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숙명론적인 관점을 가진 아지와까교도들을 사명외도라 하여 혹평한 것이다.

[2] ariyapariyesana sutta : the noble search (MN26 PTS: M.I.160) [3] jina(승리자)는 자이나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로 승자, ‘승리’ – 성공/ 불교에서는 ‘승리’, ‘성공’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①승리자 : 본인 스스로의 문제(개인, 인격)를 극복한 자로 붓다는 승리자 탐.진.치를 끊는데 성공한자를 말함. ②성공 : 사회적인 성공, 치적. [4] 중국에서는 四記論(四記答)으로 표현: 타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4종의 방법 ①決定答(ekaṃsavyākaraṇīyo): 즉시 긍정하는 방법. ②分別記(vibhajjavyākaraṇiyo): 問意를 분별하여 몇 개의 경우로 나누어 대답하는 방법. ③ 反問記(paṭipucchāvykaraṇīyo): 반문하여 問意를 확인하여 대답하는 방법. ④捨置記(ṭhapanīyo):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대답하지 않는 방법. [5] bodisattha : sattuvā로 번역,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으로, 이미 깨달았지만 중생의 습이 남아 있어서 중생처럼, 중생이 하는 행동들을 한다고 함. 대승불교의 이상상이다.

[6] yoniso manasikāra (사유방식): yoniso: 근원. 뱃속에 있을 때 생각. 근원에 입각한. 이치에 맞게 사유하다.

붓다는 나고 죽음이 없는, 어떻게 하면 나고 죽음이 없는가를 사유해 들어가다 연기를 발견하셨다 [7] 당시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수행했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8] 도나 바라문은 부처님 입멸 후에 부처님 사리분배를 담당한 바로 그 바라문이다.

[9] 사마타를 닦는 40가지 명상 주제 중 cha-anussatinddheso(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隨念)의 첫 번째 buddhānussatikathā(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 彿隨念)에 속한다(청정도론. 각묵스님 번역본. Ⅰ.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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