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의 개요
반야부 계통의 경전 가운데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이 경은 반야부 계통의 다른 경전처럼 분량이 방대하지도 않고 ‘반야심경’과 같이 간략하지도 않다. 금강경은 또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사상(空思想)을 설하고 있지만 공(空)이란 글자를 전혀 사용치 않으면서도 공의 이치를 유감없이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이 경의 성립시기에 대해 학자간에 이견을 낳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공이란 말이 보이지 않고, 교리적 표현이나 경의 형식이 소박하기 때문에 이 경의 성립 시기를 원시대승(原始大乘 : 대승불교 최초기) 시대라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한편 이 경의 한역으로는 구마라집의 역본이 최초의 번역이다. 한역된 경전의 경우 그 경의 성립시기를 한역되기 100년 전으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즉 기원 전후로부터 용수(龍樹, Nagarjuna)까지가 초기대승, 용수로부터 무착, 세친까지가 중기대승, 무착, 세친 이후를 후기 대승시대로 분류한다. 그러나 용수의 저작에는 이 경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지 않으며, 경의 내용 중 ‘후 5백세(後五百歲)’라는 문구가 보이고 있는 점등을 들어 이 경의 성립을 대승불교 중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이 경은 인도에서부터 매우 중시되어 왔으며 무착(無着, Asanga), 세친(世親 혹은 天親, Vasubandhu) 등이 이 경과 관련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또 중국에서는 승조(僧肇)를 위시한 수많은 스님들이 금강경의 주석서를 남겼다. 특히 중국 선종에서는 제 5조 홍인(弘忍) 이래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봉독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의 원효스님이 ‘금강경소’를 저술한 것을 비롯해 많은 주석서가 전해 오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금강경은 사교(四敎 : 능엄, 반야, 기신, 원각)의 하나로 분류되어 스님들의 전문 교육기관인 강원의 교재로 사용될 만큽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종파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고 있어 금강경이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 금강경의 이름
‘금강경’의 범어 원제는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로, 이 경을 처음으로 한역한 구마라집은 이를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 번역했다. 흔히 이를 줄여서 ‘금강경’ 혹은 ‘금강반야경’이라고도 부른다.
바즈라(Vajra)는 금강석(金剛石)을 의미하는 것인데 금강석이란 단단하고(堅), 날카로우며(利), 밝게 빛나(明)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단단하기 때문에 아무리 두터운 무지(無智)라도 능히 파괴할 수 있으며, 예리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능히 절단할 수 있다. 그래서 금강경은 모든 보석가운데 밝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에 비유되는 것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유명한 불교학자인 막스뮐러(F. Max M ller)는 ‘바즈라’를 다이아몬드(Diamond)라고 옮겼으며 이에 따라 ‘금강경’을 ‘다이아몬드 수트라(Diamond Sutra)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예리해서 무명을 잘라 내고 밝게 빛나는 지혜의 완성을 설하는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과는 다른 해석도 있다. 구마라집과 함께 2대 역경승으로 불리는 현장의 해석이 그것이다. 현장은 이 경의 이름을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 번역했다.
금강경을 이렇게 번역할 경우 구마라집의 해석과는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여기서 금강(金剛)은 지혜를 나타내는 반야의 형용사가 아니라 번뇌(煩惱)를 비유하는 것이 된다. 즉 인간에게서 번뇌란 금강석처럼 단단해서 그 무엇으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설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번뇌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현장은 이 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살은 분별(分別)로써 번뇌를 삼는다. 그런데 분별이라는 번뇌의 견고함은 금강에 비유되므로 이 경에서 설하는 무분별혜(無分別慧)는 능히 금강과 같이 견고한 번뇌를 모두 끊음(除斷)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반야란 번뇌를 끊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반야란 지혜라고 해석하는데, 혜(慧) 는 지(智)의 인(因)으로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고, 지(智)는 혜(慧)의 과(果)로 모든 것의 실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의 뜻은 이보다 더 함축적이고 뛰어나기 때문에 그 뜻을 살리기 위하여 원음(原音)을 그대로 놓아둔 것이라 한다.
또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바라밀을 도피안(度彼岸)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아 번뇌로 가득 찬 이 언덕(此岸)을 떠나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러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經)은 범어 수트라(Sutra)의 번역어로 그 의미는 관선섭지(貫線攝持)이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패엽에 써서 끈으로 엮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혹은 계경(契經)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는 불경(佛經)의 가르침이 중생의 근기와 마음에 계합(일치)됨을 강조한 것이다.
‘금강경’은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반야’라도고 불리며, 이 경은 대승에의 입문(入門)이며 성불(成佛)에의 시초라 하여 대승시교(大乘始敎)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 금강경의 구성
‘금강경’은 상, 하 권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금강경’은 표현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므로 승조(僧肇)는 ‘금강경소’에서 전반은 중생공(重生空) 후반은 법공(法空)을 설했다고 했다. 또 천태지의와 길장(吉藏)은 중설중설(重說重說)이라고 하여 전반은 전회중(前會衆) 후반은 후회중(後會衆), 또 전반은 이근(利根), 후반은 둔근(鈍根)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또 전반은 연(緣)을 다하고 후반은 관(觀)을 다한 것이며, 혹은 전반은 관행(觀行)을 밝힌 것으로 그리고 후반은 관주(觀主)를 제멸(除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불멸 후 약 900년경 무착이 ‘무착론(無着論)’ 2권을 짓고 ‘금강경’을 총 십팔주위(十八住位)로 과판(科判)하였다. 또 그의 친동생인 세친은 이 무착론을 토대로 다시 27의(二十七疑)로 분류하는 ‘천친론(天親論)’을 지었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양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501-531)가 다시 이를 32분절로 구분해서 오늘날까지 금강경의 분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한편 경의 구성은 동진의 도안(道安, 314-385) 이래 전통적으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분하고 있다.
- 금강경의 내용
이 경의 전편에 흐르는 사상은 다른 반야부 계통의 경전과 같이 공사상(空思想)이다. 철저한 공사상에 의해 번뇌와 분별심을 끊음으로써 반야지혜를 얻어 대각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공사상에 가장 밝은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존자라는 점은 이 경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다. 즉 수보리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최고의 진리를 배우고 닦으려는 마음을 낸 선남선녀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부처님은 이에 답하시게 되니 이 경의 주요 내용은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엮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경전의 내용 가운데에는 수 차례에 걸쳐 사구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구게야말로 이 경전 전체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에는 모두 4수의 사구게가 있는데 이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여리실견분의 다음 게송이다.
“무릇 있는 바 상은(凡所有相)
모두 허망한 것이니(皆是虛妄),
만약에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若見諸相非相)
곧 여래를 보리라(卽見如來)”
이 사구게를 수보리의 질문 내용과 비교해 보면 첫째와 둘째 구절은 모든 존재의 허망함을 일깨운 것으로 현실을 바로 보게 한 내용이다. 곧 수보리의 첫 번째 질문인 ‘마음 자세’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다음 셋째와 넷째 구절은 허망한 가운데 허망치 않은 존재(여래)를 말씀하신 것으로 참된 수행방법과 목표의식을 뚜렷이 설파하여 마음을 다스리도록 한 부분이다. 이는 두 번째 질문인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예로부터 금강경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구절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중국 선종의 제 6조인 혜능으로 하여금 발심케 한 대목으로 ‘금강경’의 핵심적인 문구이며, 선가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어구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이 경에서는 무집착을 강조하기 때문에 평등 즉 차별, 차별 즉 평등이라는 중도(中道)의 진리가 선명하게 설해지고 있다.
- 전파지와 번역본
‘금강경’은 세계 각지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는 경전으로 범어 원본 외에 한문과 티벳 번역은 물론 중앙시아어로도 번역되었고, 19세기에는 영, 불, 독의 3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한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6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경전 이름 | 번역자 | 번역시기 |
---|---|---|
금강반야바라밀경 | 구마라집 | 402년 |
금강반야바라밀경 | 보리유지 | 509년 |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 | 진제 | 562년 |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 1권 | 달마급다 | 590년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1권 | 현장 | 648년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1권 | 의정 | 703년 |
그런데 이 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연대는 문헌상에 보이지 않고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권4에 보면 신라 진흥왕 26년(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이 불교의 경전과 논장 등 1,700여 권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진흥왕 37년(576)에 안흥법사가 구법차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능가경’, ‘승만경’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때를 전후하여 ‘금강경’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효스님의 ‘금강반야경소’ 3권이 있는 점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글로 시도된 번역은 조선조 세종 때 시작하여 성종 때에 완성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라는 번역본이 있고, 세조의 명으로 한계희(韓繼禧), 노사신(盧思愼) 등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와 ‘금강경육조언해’ 등이 있다.
- 금강경의 주석서
이 경에는 예로부터 8백여 가지의 주석서가 있다고 한다. 단일경전에 대한 주석서로는 그 수에 있어 단연 으뜸이다. 또 그 주석가를 보면 교가(敎家), 선가(禪家)는 물론이요 유가(儒家), 도가(道家)들 마저 있어서 그 학구 범위의 방대함은 실로 경탄치 않을 수 없다.
이 경의 주석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듯이 이미 인도에서의 찬술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중국,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7세기경부터 이경에 대한 주소류가 저술되기 시작하여 명치시대에 이러면 이미 그 수가 100여 종에 이러게 된다.
인도에서 찬술된 주석서로 한역된 것은 다음과 같다.
원저자 | 저서명 | 번역자 |
---|---|---|
무착 | 금강반야바라밀경론 2권 | 달마급다 |
무착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 1권 | 의정 |
세친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3권 | 의정 |
천친 | 금강반야바라밀경론 3권 | 보리유지 |
공덕시 |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2권 | 지바하 |
중국에서 저술된 것으로는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374-414)에 의해 ‘금강반야경주(金剛般若經注)’ 1권을 위시해서 수나라의 지의(531-597)가 ‘금강반야바라밀경의소’ 4권을 썼고, 그 이후 당, 송, 원, 명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禪), 등 모든 종파의 학승들에 의해 많은 주석서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원효이래 다음과 같은 주석서가 나왔다.
저자 | 저서명 |
---|---|
원효(618-686) | 금강반야경소 3권 |
경흥(681-) | 금강반야경료간 3권 |
태현(753-) | 금강반야경고적기 1권 |
함허(1376-1433) | 금강경설의 1권, 금강반야참문 2권 |
혜정(1685-1741) | 금강경소찬요조현록 1권 |
연담(1720-1799) | 금강경사기 1권 |
인악(1746-1796) | 금강경사기 2권 |
긍선(1767-1852) | 금강경팔해경 1권, 금강경팔강요기 1권 |
98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