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지혜롭게 마음 쓰는 방법

지혜롭게 마음 쓰는 방법

-법상스님-

남을 돕는 것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최고의 보시 행위다.

보시는 남을 돕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돕는 것이다.

남을 도울 때 내 안에 ‘넉넉함, 풍요, 따뜻함, 행복, 사랑, 일체감’ 등의 실질적인 지혜와 자비의 파동이 일어나고, 그 파동은 곧 우주에 있는 동일한 파동을 유유상종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면 머지 않아 더 많은 풍요와 부, 행복과 기쁨들이 내 삶에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무한 가능성의 파장이기 때문에 마음에 연습하는대로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주는 마음’을 연습하면, 계속 줄 수 있는 상황, 즉 풍요와 부가 넘쳐나서 계속 줄 수 있는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반면에 내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나, 주기 싫은 마음에는 ‘가난, 결핍, 부족, 분리감’ 등의 에너지가 파동치게 된다.

주기 싫은 마음을 연습하면 주지 못하는 현실, 즉 줄 것이 없는 가난한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음의 상태는 이처럼 고스란히 그 상태가 계속되도록 만들어주는 상황을 끌어온다.

나누게 되면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상황을 끌어오고, 행복하면 더 많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며, 칭찬하면 더 많이 칭찬할 수밖에 없는, 즉 내 입에서 칭찬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기분 좋은 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편의 수많은 단점들을 욕하고 살지, 작은 장점일지라도 그것을 칭찬해주고 살지는 내가 결정한다.

그 결과 또한 스스로 받을 뿐이다.

자식에게 공부 잘 하라고, 성적 좀 잘 받아오라고 하면 할수록, 나와 자식의 마음 속에 ‘더 좋은 성적’을 원하는 상황이 계속 만들어진다.

‘더 좋은 성적’이 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성적을 원하는 상황’이 온다.

즉, 더 좋은 성적을 원하려면 계속 나쁜 성적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자식 성적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자녀의 성적은 오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급에 대해 크게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 속에는 ‘진급이 안 되면 어쩌지’ 하는 근심이 연습되고, 결국 ‘진급’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진급을 바라는 상황’, 즉, 진급이 안 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진급을 계속 바라는 마음이 연습되니까, 그 마음이 계속되도록 우주법계가 도움을 주게 되고, 진급을 바라는 상황이 계속되려면 진급이 안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자체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자의 마음에 무엇이 연습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보시를 했더라도 마음 속에서 주기 싫은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건 다 헛고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보시를 했지만, 실제 마음 속에 연습되는 것은, 아깝다는 마음, 주기 싫은 것 주어서 내 것이 사라졌다는 가난한 마음들이다.

이러한 마음의 이치 때문에 불교에서는 찬탄하고 수희동참하는 공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남들이 보시를 했을 때 내가 한 것처럼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고 찬탄한다면 그 수희와 찬탄의 공덕은 내가 직접 보시한 것과 동일한 복덕이 된다고 한다.

사실은 물질적인 보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보시를 행하는 자의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은 환영과도 같고 신기루와도 같다.

꿈과 같은 텅 빈 세상을 마음으로 짓고 무너뜨리며 사는 것이다.

마음에서 만들어 낸 상념은 사라지지 않고 어떤 방법이든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은 곧 마음이 투영된 것이고,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면 그 다음에 물질이 따라오는 것이다.

물질은 마음의 부수작용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을 보시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직접 물질로 보시를 하지 않더라도 보시하는 자를 찬탄하고 함께 기뻐하게 되면 그 마음에는 보시하는 자와 똑같이 보시의 공덕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마음 속에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가.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텅 빈 마음 속에 하루하루 무엇을 채워가고 있는가.

내가 채우는 것이 곧 내가 현실에서 체험하게 될 삶을 결정짓는다.

문제는 외부의 것들이 아니다.

외부의 물질이나, 지위나, 직업이나, 학력이나, 큰 집, 좋은 차, 외모, 좋은 옷, 명품가방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를 물질로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그 마음 안에,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이 존재한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잘 보이려고 좋은 옷, 명품가방, 좋은 차로 나를 감추는 것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사실 ‘나는 못났다’라는 사실을 강화시킬 뿐이다.

얼마나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면 고작 외적인 물질들로 나를 덮어 씌워 남들을 속이려 하겠는가.

그 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이 있다.

그렇게 되면 ‘남들이 나를 잘 보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려면 나는 지속적으로 못난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정확히 그것이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당황스런 현실인 것이다.

오늘 하루도 나는 마음에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지, 마음으로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사유해 보라.

외부의 것들에 대한 신경을 잠시 꺼 두고,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내부로 들어가, 마음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 반대의 현실을 여실히 살펴보라.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헛짓꺼리를 해 왔는지, 완전히 거꾸로 삶을 만들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곧장 지금 이 순간부터 마음을 여실히 지켜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매일같이 일터로 뛰어나가기 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로 뛰어 들어드는 순간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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