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불교의 뿌리 /보조 지눌스님 <1>
보조지눌(普照知訥) -‘韓國禪’ 확립한 고려불교의 巨峰- (1) 시대적 배경 知訥이 살았던 12세기 고려불교는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계속되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불교가 함께 휩쓸리어 종교적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안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 또한 심하였다.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1158)부터 희종 6년(1210)까지 4대에 걸쳐 53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지만, 전 고려사를 통하여 이 시기는 극도의 변란과 불안의 시대로 특징 지어진다.
예종까지의 융성기를 지나 고려를 변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지눌이 태어나기 각각 32년, 23년 전의 일이었으며, 의종 말 명종 초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한 이른바 무신의 난은 그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었다.
그 후 계속되는 무신들간 권력으로 서로를 모략하고 살육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지눌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상호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세습정치를 하기는 그가 38세 때의 일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는 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종교 본연의 위치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고려불교는 태조 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왕실이 정치적인 혼란에 휩쓸릴 때 불교는 초연할 수 없었다.
때로는 승려들이 직접 무력적인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명종 4년 왕실파의 입장에 서 있던 승려들이 정중부 토벌운동에 앞장서 백여 명의 승려가 희생당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승려들이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는 가운데 고려불교는 종교적 위치를 크게 벗어나 승려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옹호를 받은 불교는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은 특혜를 이용,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고 노비를 사유하여 사원을 利窟化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궁중불교로 정치적 와중에 휩쓸리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되어 정법과 멀어진 것이 지눌 당시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외적인 문제였다면, 불교 내적 으로도 또한 선과 교가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敎外別傳 不入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종지를 가진 선이 신라 말에 전래되어 고려 초까지 9산선문을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되자, 재래의 敎佛敎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이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불교와 마찰을 일으킴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눌보다 100여년 앞서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의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 갈등은 지눌 당시에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상황 상황에서 선·교를 회통시켜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정법을 구현하는 일은 당시 고려불교가 요청 하는 시대적인 과업이었다.
지눌은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한국불교를 바로잡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