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도 가지도 머물지도 않는 삶
우리는 삶의 와중에서 가끔 ‘경이감’에 휩싸이곤 한다.
나는 어디서 왔나?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숙생이라는 유행가에서 노래하듯이 인생은 ‘나그네 길’에 은유할 수 있지만, 이와 똑같은 의문을 반야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從何處來 至何處去)?” 이에 대한 반야경의 답은 ‘불래불거(不來不去)’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또 “오거나 가지 않는다면 그대로 머물고 있겠구나!”라고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머물지도 않는다(不住)”는 말을 덧붙여서 ‘불래불거부주(不來不去不住)’라고 답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이다.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상의 실상을 망각하고서 ‘인생’이나 ‘나’를 고정된 실체로 상정한 다음에, 그런 실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의문을 품는 것이다.
‘주어’를 잘못 설정한 ‘허구의 의문’이다.
‘인생’도 매 순간 변하기에 하나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고, ‘나의 심신’ 역시 매 순간 변하기에 ‘나’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허구의 주어에 근거하여,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품는 의문 역시 허구의 것이다.
매순간 변함으로 포착할 수 없어 먹이취득 짝짓기 통해 다음세대로… “온다”거나 “간다”는 술어 역시 ‘인생’과 ‘나’에 대해서 적용할 수 없는 술어다.
명멸한 모닥불에 대해서 왔다거나 갔다고 말할 수 없듯이… . 불교에서는 이렇게 반야공관을 통해 ‘경이감’을 해소함으로써, 사견(邪見)으로 빗나감을 막아준다.
생명체의 모습에 대한 ‘경이감’ 역시, ‘허구의 느낌’이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해소된다.
내가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이지, 원래 있거나 다른 어디서 오거나, 조물주가 있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앞 단계의 사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무명(無明)에 의존하여 행(行)이 있고, 행에 의존하여 식(識)이 있으며 …… 유(有)에 의존하여 생(生)이 있고 생에 의존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 연기의 원리를 우리의 행위와 체험, 삶과 죽음에 적용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모든 생명체는 원래 그렇게 있었거나,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앞 단계의 사태에 의존하여 변화하며 진행한다고 설명하는 점에서 진화론은 십인연기의 가르침과 그 방식을 같이 한다.
전문적인 불교교리 가운데 ‘육인오과설(六因五果說)’이란 것이 있다.
원인(또는 조건)과 결과의 연기관계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석이다.
원인에는 능작인, 구유인, 동류인, 상응인, 변행인, 이숙인의 여섯 가지가 있고 그에 대응하는 결과는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의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진화론의 연기는 이 가운데 ‘능작인(能作因)-증상과(增上果)’의 인과관계에 해당한다.
능작인은 ‘결과가 발생할 때 조력하는 조건’인 ‘여력(與力)능작인’과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역할을 하는 조건’인 ‘부장(不障)능작인’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씨에서 싹이 틀 때 흙과 물, 햇볕과 공기는 여력능작인이고, ‘홍수가 일어나지 않은 것’, ‘산불이 나지 않은 것’ 등은 부장능작인이다.
장기간에 걸친 진화의 과정에서 ‘포식자의 공격’과 ‘기상재해’라는 악조건을 피하고, ‘먹이 취득’과 ‘짝짓기’에 성공할 때 그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한다.
여기서 전자는 부장능작인이고, 후자는 여력능작인이다.
진화론은 연기론이다.
생명의 모습에 대한 정견(正見)이다.
[불교신문 2818호/ 5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