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문화 – 불교미술 개관

불교의 문화 – 불교미술 개관

불교미술 개관   1.불교미술이란? 불교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는 종교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미술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 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한다.

민중들에게 불교의 심원(深遠)한 교리를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시청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고졸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이든지 또는 우아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이든지 간에 어떤 식의 미를 형태로 조형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를 통해 불교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미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불교미술의 출발은 재가 신자들의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출가한 스님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본받아 엄격한 계율 아래서 수행에 힘써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때문에 부처님 열반 후 출가 수행자들은 조형미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재가 신자들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관계 있는 성스런 것을 예배하고 공양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세계에 가까이 가려 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더 깊어져서 단순히 교주라기보다는 그를 신격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다.

교세의 팽창과 더불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고, 따라서 탑(塔), 불상(佛像) 등과 같은 숭배 대상의 미술품이 조성되어 불교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2.불교미술의 의의 불교미술은 세계 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제일 아름다운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세계 곳곳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걸작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대한 대작에서부터 아주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역대 미술품 가운데 가장 수가 많아 어느 분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불교미술은 장식용이나 교화용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리의 상징인 불상에 대한 지극한 숭앙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예배용으로도 필요했다.

그래서 역대 제왕들은 국력을 기울여 불사(佛事)에 온 힘을 쏟았고, 귀족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남신녀(信男信女)들도 다투어 불사에 동참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불교미술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교미술의 성황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민족문화 유산 가운데 불교미술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미술이라기보다 예술성과 가치를 공인받은 우리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불교미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국보와 보물 등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가 약 42%, 시와 도에서 지정한 문화재가 33%(표1 참조)에 이른다.

이는 불교미술이 우리 문화의 바탕이자 큰 줄기임을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다.

  3.불교미술의 기원과 전파 불교미술은 인도 마가다왕국 때인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부처님 입멸 뒤에 조성된 탑에서부터다.

탑은 전생설화나 불전도들이 조각이나 회화로 표현되어 있고, 각종 무늬나 장식 등이 아름다운 부조(浮彫)로 장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소카왕 때에 이 불탑들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칙령을 새긴 돌기둥들도 함께 퍼졌는데, 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사자, 코끼리, 소 등 동물 형상과 각종 무늬들이 조각되어 위대한 미술의 전통을 세웠다.

이 당시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교주이자 예배 대상인 불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대신 보리수, 불족적(佛足跡), 삼보(三寶) 등으로 상징한 점이다.

불상이 없던 이 시기를 무불상시대 또는 초기 불교미술시대라 부르고 있다.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교미술은 획기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보리수나 족적, 삼보 대신 그 자리에 불상을 표현했으며, 급기야 단독 불상을 조성해 예배 공양하기에 이른다.

불상은 간다라지방과 마투라지방에서 처음 조성되었으며, 뒤에 두 지방의 불상 양식이 크게 성행해서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불교미술은 북방불교권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크게 번창했다.

특히 중국의 불교미술은 각 시대마다 위대한 불교미술의 전통을 확립했다.

중국은 한(漢)나라 때부터 불교미술을 받아들였지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더욱 성행했다.

이 시기를 흔히 중국 제1기의 불교미술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특히 세계적인 수준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나라 불교미술을 중국 제2의 황금시대라 부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초원지대나 그 너머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서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도 일찍부터 불교미술품이 많이 조성되었다.

호탄(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남부의 오아시스 도시)의 화엄종 미술이나 쿠처(중국의 자치구)와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등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불교미술품이 성황을 이루었다.

  4.우리나라 불교미술의 발달과 특징 우리나라 불교미술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조성되었는데, 수도 국내성에서 성문사와 이불란사가 건립되면서 성황을 이루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평양 천도와 더불어 더욱 발전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초기에는 강건미가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로 갈수록 온화한 분위기로 변한다.

백제는 384년 한산에 처음 절을 창건했으며, 공주와 부여의 수도 시절부터 본격적인 불교미술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부여시대에는 부드럽고도 세련된 풍조가 주를 이루어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가 들어와 법흥왕 때인 6세기 전반기부터 불교미술시대로 접어들지만, 고구려나 백제에 못지않게 성황을 이룬다.

명랑하고 쾌활한 미가 주류를 이루는 신라의 불교미술은 우리의 심성과 정서를 맑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이어 통일신라시대에는 7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불교미술이 융합된 위에 새로운 인도의 굽타(Gupta)와 중국의 성당(盛唐)의 불교미술을 받아들여 세련되고 사실적인 양식이 크게 유행하면서 황금기를 이룬다.

고려는 왕조 내내 불교국가였으므로 역대 어느 시대보다 불교미술이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남아 있는 찬란하고 화려한 고려불화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 등의 건축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축물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불교공예 또한 청자와 함께 은입사향로, 금고, 동종, 사리기 등의 예술성이 국제 수준을 능가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비록 숭유배불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았으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세조와 명종 등 호불 국왕과 조선 후기 사찰 중창의 호기를 맞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들이 풍성하다.

이처럼 불교미술품은 인류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세계적 또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강렬한 정신성을 내재한 인류의 영원한 미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미술은 다른 불교국과 어깨를 나란히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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