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일상 속에서 깨어 있는 수행

“일상 속에서 깨어 있는 수행” / 법상 스님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이 성성히 깨어 있는 깨침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금 이 곳 현실까지 불러들여 집착하고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괴로움으로 지금 현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재, 바로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때는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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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를 살 수도, 미래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의 마음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이는 마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완벽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이 말하길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싸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평상심이 곧 道이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을 옳바로 가질 것을 경책하는 말입니다.

바로 현재를 옳바로 사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배고플 때 오직 먹기만 하고, 졸리면 온전히 자기만할 수 있다면 참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위에 충실히 온전히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온전히 밥 먹는 것에 집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고플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밥먹으며 딴 생각하고 딴 짓하고 밥 먹는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겉 모습은 똑같이 밥을 먹고 있더라도 이렇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나는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말씀하시길 “설거지를 위한 설거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설거지를 할 때에 오직 설거지만 할 수 있다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하기 싫고 짜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수행하기 싫고, 절하기 싫고, 남편 뒷바라지 하기 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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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빨리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나고 싫고 빨리 끝내려는 마음만 앞서게 됩니다.

이렇게 청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다만 깨끗하다는 결과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얼마나 깨끗할까요.

그러나 청소를 위해 청소를 한 수행자는 그 행위 속에 수행의 힘까지 남게 됩니다.

청소를 하며 마음을 집중하고 청소하는 그 마음에 온 힘을 기울였기에 청소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방하착 한 것이 됩니다.

빨리 하고 나서 쉬어야지 하는 게으른 마음에서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대학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에 충실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대학합격이라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면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일을 할 때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퇴근할 시간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일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봉급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우리는 돈은 벌 수 있을지언정 진정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그 자체를 위해 절하는 그 순간, 염불하는 그 순간이 그때 그때 목표가 되어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수행해서 성불해야지 라든가 빨리 수행해서 복 많이 짓고 편한 삶을 살고 집안이 편안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수행하고 절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른 시일안에 수행의 결과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을 때 개종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잘 되면 내탓 못되면 부처님 탓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남편 뒷바라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때에도 오직 그때 그때 내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그 뒷바라지 자체에 충실할 일입니다.

뒷바라지 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남편이 승진을 못할 때, 자식이 대학에 떨어질 때, 자신에게 잘 못해줄 때 괴로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데 하는 상(相)이 있으면 자식이나 남편이 내게 서운하게 대할 때면 괴로워집니다.

오직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부처님 시봉하듯이 현실, 현실을 충실히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모시며 시봉하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집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집에서 남편을 대할 때, 자식, 부모님을 대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시봉한다는 마음으로 현실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크나큰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상 하나 하나,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책 읽는 것,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 부모님 모시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 회사에서 일하는 것, 친구들과 모여 술마시러 가고 노래방가서 놀고 즐기는 그 속에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때 그때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상의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인 것입니다.

절에서 애써서 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행하는 삶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현실에 충실하는 그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현실을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현실을 옳바로 집중한다는 것은 항상 현실의 마음과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방하착(放下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옳바로 관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착(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에 얽매이면 우리는 이미 그 실체가 없는 괴로움에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리며 한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는 것을 옳바로 관찰하고 방하착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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