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문화 – 가람과 건축

불교의 문화 – 가람과 건축

가람과 건축   1.가람의 기원과 역사 ‘伽藍(가람)’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절’이란 뜻으로 써오던 말이다.

옛날부터 사용해오던 고대 인도어를 ‘범어(梵語)’ 또는 ‘산스크리트(Sanskrit)’라고 하는데 ‘가람’은 바로 산스크리트의 ‘상가람마(Sam·gha-ra-m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어로 번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를 줄인 말이다.

즉 ‘승가’는 ‘대중’을 의미하며, ‘람마(藍摩)’는 ‘원(園)’이란 뜻인데 이를 줄여 ‘가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람은 승가[大衆佛子]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사찰(寺刹)을 의미하며, 승원(僧園)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기의 사찰은 부처님께서 생전에 기거하시던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였다고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부처님의 탑을 중심으로 불교 가람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커다랗고 둥근 탑과 탑을 두른 담장 그리고 사방의 탑문 등, 웅장한 규모와 성스러운 장식으로 세워졌다.

사방의 탑문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나 생전의 행적을 일러주는 여러 가지 조각 그림이 등장하고, 담장 안의 탑 둘레에는 계단과 탑돌이 길을 마련하여 그 당시부터 ‘우요삼잡(右繞三餓)’ 즉, 탑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관습이 생겨났다.

그리고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로 계속 세워지면서 하나 둘씩 부속건물을 갖추어 이른바 가람을 형성했다.

탑과 가람의 형태도 불교를 받아들인 지역과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렇게 탑과 승원이 어우러진 종합 사원이 형성되었으며, 탑과 승원이 복합된 형식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원래 승원만 있던 곳에 불탑을 조성한 경우와 원래 불탑이 세워진 곳에 승원을 덧붙인 경우, 그리고 처음부터 탑과 승원을 함께 설계해서 완전한 종합 불교사원으로 건립한 경우이다.

후대에는 처음부터 종합 사원으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드시 탑이 있어야만 가람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말부터 특히 산지의 가람에서는 탑 없이 배치하다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탑이 사원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외곽지대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탑이 예배의 주요 대상일 때부터 탑은 사원의 중심이 되었고, 그 뒤 불상이 예배 대상으로 출현하자 불상을 봉안한 불전(佛殿), 즉 금당(金堂)도 탑과 같이 중시되어 탑과 금당이 병립했다.

그러나 불상이 불교신앙의 주체로 존숭받게 되면서부터는 금당이 주가 되고 탑은 종이 되는 식으로 사원 형식이 변한다.

가람의 형식을 구분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은 탑을 이용한 방법이다.

  2.우리나라의 가람배치 일탑일금당식(一塔一堂式)의 가람배치는 백제 사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백제 사찰 가운데 군수리 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 정연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평양의 청암리 사지(靑岩里寺址), 정릉사지(貞陵寺址) 등에서 그 유형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의 가람배치 또한 일탑일금당식이 기본이었으리라고 추정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탑이 법당 앞 양쪽에 짝을 이루고 서 있는 이른바 쌍탑가람(雙塔伽藍)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궁궐이나 사찰에서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관습이 우리나라로 전해온 것이다.

이러한 쌍탑가람으로 대표적인 사찰이 감은사지(感恩寺址), 실상사, 보림사 등이다.

이 때부터는 탑보다 법당의 규모가 훨씬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불자들의 불보(佛寶)에 대한 인식이 탑뿐만 아니라 불상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거대한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불상을 모실 대규모 법당을 지을 수 있는 건축술을 이미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탑 못지않게 실제로 부처님 모습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상을 모신 법당을 짓는 데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이 무렵부터 석탑이 크게 유행했는데, 재질이 무거워 목탑처럼 크게 세울 수 없었으므로 자연히 탑보다 법당 건물을 웅장하게 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본 가람배치는 전통적인 일탑일금당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엄정한 질서에서 자유로워지고 포용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

별도의 법당과 부속건물들을 전체 배치와 관계 없이 적절한 장소에 세웠고, 탑도 마찬가지로 절 한가운데가 아니라 절 안을 벗어난 곳에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주사나 운주사 등에는 여러 개의 탑을 세우는 다탑가람(多塔伽藍)이 조성된 적도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송광사와 같은 명찰(名刹)에서는 탑을 조성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처럼 가람배치면에도 우리 민족 특유의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많이 곁들이는 등,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한국식 민족종교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 불교가람 분위기는 비록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의 불교가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가람의 배치와 구조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찰은 평지가람(平地伽藍)과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뉜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세워진 사찰을 말하는데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사찰들은 왕도(王都)나 고을 한복판의 평지에 주로 세워졌다.

따라서 평지가람 중에는 대규모 사찰들이 많았다.

경주의 황룡사터, 익산의 미륵사터 등이 대표적인 평지가람이다.

또한 평지가람은 건물 배치방식이 궁궐건축의 중문(中門),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과 비슷해서 궁궐만큼이나 질서 있고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을 말한다.

산지가람은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부속건물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축대를 여러 단으로 쌓아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터를 다지고, 적절히 건물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진입로가 꺾이거나 휘어지기도 하고, 사찰 전경도 똑바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평지가람처럼 법당 주위로 회랑을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에 절 입구에서부터 일주문, 천왕문, 문루 등을 거칠 때마다 절 안의 광경이 새롭고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은 이러한 산지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건물 규모와 공간 배치형식을 결정할 때는 산세와의 조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산중에 이름난 가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부석사, 화엄사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지가람이다.

이러한 산지가람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 건축양식과 주변 환경을 잘 보존해온 문화유산이며, 고귀하게 보전해야 할 성보(聖寶)다.

  3.사찰의 건축물 불교 사원의 모든 구조물을 불교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건축 공간인 사원의 대지에서부터 건조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건축적인 모든 것을 통틀어 불교건축이라 한다.

(1) 산문(山門) 체계 산문 체계는 한 번에 깨닫는 것보다는 단계적으로 깨우쳐 나아가는 논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일한 산문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점증시켜가는 등 다양한 산문이 연속되어 있다.

사찰의 산문은 대부분 사찰의 신앙, 창건, 역사 등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① 일주문 (一柱門)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문이며, 개방적이고 표식적인 문이다.

일주문이란 실제로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옆에서 볼 때 기둥이 일렬로 늘어섰다는 의미다.

이렇게 기둥을 일렬로 배열하는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으로 당시 목수들의 뛰어난 기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의 뜻은 ‘하나(一)’라는 데에 있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대표적으로 범어사 일주문과 해인사 일주문을 들 수 있다.

② 천왕문 (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숭앙받았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문이 일주문과 불이문의 중간에 있는 이유는,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구도자의 일심이 숱한 역경에 의해 한풀 꺾이려 할 때,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이 힘을 내어 수미산 정상까지 오르도록 구도자를 독려하기 위해서다.

사천왕문 대신 금강문(金剛門)이 서 있는 곳도 있다.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가 자리잡고 불법을 수호하고 있으며, 사찰에 따라 금강문과 사천왕문이 같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천왕문은 법주사 천왕문과 완주 송광사 천왕문이다.

③ 불이문 (不二門) ‘불이(不二)’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오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불이문은 사찰에 따라 해탈문, 또는 극락문이라고도 한다.

불이문은 곧 불국토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불국토가 열린다는 뜻이다.

도갑사 해탈문과 건봉사 불이문이 대표적이다.

(2) 전각(殿閣) 주불전(主佛殿)은 그 사찰의 중심이 되는 신앙 대상인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말하며, 흔히 금당이라고 불린다.

부처님은 ‘금인(金人)’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신 집을 금당이라고 한 것이다.

금당은 탑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원 건물의 하나로, 대승불교시대에는 탑보다 금당이 절의 중심 건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는 부처님의 이름에 따라 금당의 명칭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금당이면 대웅전,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은 무량수전 또는 극락전, 약사불을 모시면 약사전, 관음보살을 모시면 원통전 등으로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

이 밖에도 주불전은 아니지만 수많은 불전들이 있다.

부처님과 보살을 모신 곳은 전(殿)이라 하며, 그 외에는 각(閣)이라 한다.

①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대상이 된다.

‘대웅(大雄)’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위대한 영웅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법화천태종(法華天台宗)의 금당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법화 계통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사원에서 주불전으로 사용했다.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이 남아 있다.

②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 또는 대적광전, 줄여서 대광전(大光殿)이라 부른다.

이것은 비로자나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이나 적광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봉안한 집이라는 뜻이다.

큰 불전일 경우 비로자나·석가모니·노사나 등 삼신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해인사 주불전 등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화엄경의 주불로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에 이 이름을 붙였고, 주불전이 아니면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했다.

대광전은 마곡사 등에 있다.

③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 비구로서,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의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부처님이 되었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이 백천억 겁으로 셀 수 없다고 해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곳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주불의 이름을 따서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무량사 극락전이 유명하다.

④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미륵부처님이 정화하고 펼치려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해서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를 취해서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전을 대표하는 건물로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을 들 수 있다.

미륵부처님은 현재 오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대부분 법당 밖에 크게 조성해서 모시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례이나 금산사와 같이 법당 안에 모신 곳도 있다.

⑤ 원통전(圓通殿)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주불전일 때 원통전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고 부른다.

송광사 관음전, 통도사 원통전 등이 대표적이다.

⑥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약사유리광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약사부처님은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약사전을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 다르게도 부른다.

약사부처님은 현세 중생의 모든 재난이나 질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은 약사부처님 좌우에서 진리 광명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제거해주신다고 한다.

⑦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다.

법주사 팔상전이 대표적이다.

⑧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나한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로, 소승불교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자를 말한다.

나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응진전이라 한다.

나한신앙은 대승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에 대한 숭배의 결과로 크게 성행해왔다.

특히 중국 전통의 선종이 유행하자 그 영향으로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크게 숭앙받았다.

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중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찰에는 나한전이 많다.

⑨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지장신앙이 크게 유행해서 어느 사찰에나 이 전각이 있었다.

개심사, 화엄사, 금산사, 동화사 등 많은 사찰에 남아 있다.

⑩ 대장전(大藏殿)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전각을 말한다.

대장전이라는 편액을 단 건물로는 경북 예천군 소재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군 소재의 금산사 대장전을 예로 들 수 있다.

⑪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을 가리켜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으며, 이들은 신앙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이 그곳이다.

⑫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은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절의 창건주, 역대 주지 등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당우를 말한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을 들 수 있다.

⑬ 삼성각(三聖閣) 법당의 뒤쪽 한켠에는 작은 규모의 전각이 있다.

이 전각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해서 모시고 있다.

즉 산신, 독성, 칠성 등을 모신 곳이 삼성각이다.

그 신상을 각기 다른 건물에 모실 때에는 그 전각의 이름도 신상에 따라 달라진다.

산신을 모시면 산신각, 칠성을 모시면 칠성각, 독성을 모시면 독성각이라고 부른다.

⑭ 범종각(梵鐘閣)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통과해서 경내에 들어서면 범종각이 자리잡고 있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놓은 곳으로 범종의 보호각 구실을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 등의 불전사물(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⑮ 누각(樓閣) 사찰의 주불전과 마주하는 곳에는 보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마당을 둘러싸고 요사채가 있다.

즉 뜨락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누각은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다.

누각은 사찰에 대중이 많이 운집하는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중문이 누각의 형태로 변하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4.불전(佛殿)의 조성 (1) 기초공사 불전의 건축공정에서는 우선 불전과 부속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터를 잡아 터닦기를 한 다음 건물을 세우기 위해 기단을 쌓는다.

이 때 기단은 막돌 쌓기, 바른 돌 쌓기, 허튼층 쌓기, 바른층 쌓기 등의 축조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축조법의 선택에 따라 구성미가 다양하게 드러나게 된다.

터 다지기와 기단 쌓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건물을 짓게 되는데 고전적인 방식에서는 질서정연한 석조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석조 기단을 석축기단으로 대체하거나 기단을 간략하게 하고 바로 낮은 토단 위에 기초공사를 하고 주춧돌을 놓기도 했다.

주춧돌도 고려시대까지는 방형 또는 원형의 주춧돌을 사용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 이후로는 ‘덤벙주초’라 하는 자연석 주춧돌을 대강 다듬어 쓰는 방식이 유행했다.

(2) 기둥과 지붕 기둥은 대체로 둥근 기둥을 썼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기둥의 중간부가 두툼해지는 이른바 배흘림기둥이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기둥이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나 당시의 승탑(부도)에서 배흘림 기둥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이러한 기둥 양식이 다시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중국 등지를 거쳐 신라에 전래됐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기둥이 탄탄해보이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기둥을 세운 다음에는 기둥과 기둥을 위쪽 부분에서 꿰뚫고 연결하는 창방(昌枋, 넓적한 도리)이 결구되고, 각 기둥 위에는 커다란 주두(柱頭)가 놓이며 그 위로 지붕을 떠받는 부재(部材)들이 놓인다.

지붕은 여러 부재들을 대규모로 결합한 구성물이므로 중량과 부피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구성하는 각 부재들은 역학적으로 치밀하게 짜맞추어져 지붕의 모양을 이루고, 동시에 육중한 지붕의 무게가 공평하고 안전하게 기둥으로 전달되도록 되어 있다.

(3) 공포의 구조 주두 위에서 지붕을 안전하게 떠받치는 첫번째 부재들의 뭉치를 공포(蛋包)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첨차(察遮)와 소루(小累)로 구성된다.

첨차는 처마 밑에서 지붕의 무게를 받아내는 여러 겹의 받침부재이며 소루는 이 받침부재들 사이에서 서로의 틈을 괴어주는 작고 납작하며 네모난 부재들이다.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놓는 형식이고, 다포식(多包式) 건물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놓는 발달된 형식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축물로는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으로 주심포식 건물이 더 많이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다포식이 중요한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4) 대들보, 도리, 서까래 공포의 구조를 이루는 첨차는 지붕 대부분의 무게를 지탱하는 대들보[大樑]와 도리(道里)를 받게 되고, 대들보는 지붕 전체를 가로받치게 된다.

도리는 서까래를 가로받쳐주는 긴 부재다.

그 가운데 지붕 내부의 맨 위쪽 한가운데를 받는 것을 종도리(宗道里), 중간 부분을 받는 것을 중도리(中道里), 기둥 안쪽을 받치는 것을 내목도리(內目道里), 기둥 위에서 서까래를 받는 것을 주심도리(柱心道里), 기둥 바깥쪽에서 받는 것을 외목도리(外目道里)라고 한다.

서까래는 지붕꼴을 이루는 뼈대로서 통나무를 세로로 벌여 구성하며, 통상 지붕 위에서 처마 끝까지는 두 개의 통나무를 엇걸기로 연결해서 한 골의 서까래를 이룬다.

또한 처마 끝을 길게 내어 햇볕이나 빗물을 차단하고, 아울러 처마의 맵시를 더하기 위해서는 한 토막씩의 서까래를 덧대는 덧서까래[附椽]를 설치하기도 한다.

처마의 네 귀는 서까래가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살짝 위로 들려 지붕 모양에 곡선미를 줌으로써 더욱 우아하게 보인다.

(5) 기와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얹고 진흙과 짚을 버무려 덮은 뒤에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무리한다.

이 때 덮는 기와는 대부분 두 종류다.

그 가운데 지붕 바닥에 놓여 기왓골을 이루는 넙적기와를 ‘암키와’라 하고, 암키와와 암키와 사이를 덮는 길쭉한 기와를 ‘수키와’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가장자리인 처마 끝을 마감하는 기와를 ‘막새기와’라 하는데, 여기에도 ‘암막새’와 ‘수막새’기와가 사용된다.

특히 막새기와에는 연꽃무늬, 당초무늬 등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새겨지므로 무늬를 보고 기와 제작시기를 밝혀내기도 한다.

(6) 바닥과 창호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전돌 또는 마루를 깔게 된다.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원래 중앙에 설치되고 좌우에는 살창만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이후로는 건물 앞면에 온통 창호(窓戶)를 달아 건물 내부가 밝아졌다.

창호는 띠살, 빗살, 꽃살 등으로 장식한다.

뒤에는 창문들을 좌우로 접히고 위로 들리도록 해서, 건물 내부가 훤히 개방되는 문달기 방식이 발전한다.

한편 앞쪽 전체에 창호문을 달면서, 가운데 칸은 부처님을 위한 상징적인 출입 통로가 되고, 실질적으로 신도들은 좌우 벽채의 앞쪽 출입문을 이용하게 되었다.

문은 뒷벽에도 설치된다.

뒷벽 중앙에는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 옆면에는 창호를 내는데, 예부터 건물 사방에 사문팔창(四門八窓)을 내던 조영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뒷벽의 창과 문의 사용례가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7) 불단(佛壇), 단청(丹靑) 불단은 불전 내부의 중간부 약간 뒤쪽에 설치된다.

불단 위에는 불상을 안치하고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를 건다.

마지막으로 불전 내외부의 벽채와 천장에 화려한 단청과 벽화 장식을 조성함으로써 건물이 완공된다.

기둥이나 천장 등과 같은 부재에 용, 연꽃 등 도안적인 그림을 그려 장엄하는 것을 단청(丹靑)이라고도 한다.

단청은 전각을 아름답고 숭고한 분위기로 장엄하는 구실을 하지만, 채색과 기름을 덧입혀 목재를 보호하고 조악한 면을 감추는 기능도 겸하고 있다.

    5.탑(塔) (1) 탑의 기원 탑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인 ‘투파’(thupa)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원래 ‘무덤’이란 뜻이다.

많은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고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다비했더니 수많은 신골(身骨)과 사리들이 나투었다고 한다.

이 때 제자들이 부처님 사리를 서로 더 많이 가져가 탑을 세우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가서 8기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경에 전해오는 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나중에 도착한 두 제자가 다비한 재를 가져다 탑을 세워 처음에는 10기의 탑이 있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최초의 탑을 ‘근본 팔탑(根本八塔)’ 또는 ‘근본 십탑(根本十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탑은 탑을 부처님의 무덤으로 여기는 신도들에 의해 생전의 부처님을 대신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당시는 탑만이 부처님과 동등한 숭배의 대상이었고, 사원의 공간 배치에서도 탑이 항상 중심부를 차지했다.

이러한 시기는 불상이 등장하기까지 약 5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불상이 만들어진 뒤에도 탑은 여전히 신앙의 핵심 대상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 탑의 종류 탑 자체의 구조는 인도의 산치탑처럼 복발탑(覆鉢塔)일 때와 목탑(木塔)이나 석탑(石塔) 등 여러 층일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탑의 재료나 형식에 따라서도 구조가 다양하다.

공통적으로 탑은 기초가 되는 기단부(基壇部)와 중심인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꼭지를 장식하는 탑두부인 상륜부(相輪部)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벽돌로 된 전탑이 유행했지만 금, 은, 동, 나무, 돌 등 다양한 재료로 탑을 만들 수 있다고 경전에 나와 있으며, 실제로 갖가지 재료로 만든 탑들이 남아 있다.

중인도에는 석재나 목재보다 벽돌이 알맞았기 때문에 전탑을 많이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받아 목탑보다 벽돌탑을 훨씬 더 많이 만들었다.

그곳 역시 중심부인 황하 일대가 황토지대여서 목재는 희귀하고 벽돌 재료인 흙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중국 전탑의 영향을 받은 모전탑(模塼塔)은 634년 분황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순벽돌탑은 신라 통일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목탑은 인도에서는 드물었고 중국에서 크게 성행했다.

중국 건축의 특색이 바로 나무를 주재료로 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실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선덕 여왕 때 세워진 높이 80m의 황룡사 9층탑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만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목탑이 많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석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탑이다.

일찍부터 양질(良質)의 화강함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석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부여 정림사 5층석탑, 익산 미륵사 석탑, 감은사 쌍탑 등 수많은 석탑들이 있다.

① 복발탑(覆鉢塔) 인도 탑의 초기 형태가 복발탑이다.

탑신이 마치 밥그릇을 엎어놓은 모양과 같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탑신 밑은 기단부이며, 탑신 위는 네모꼴의 석감(石龕), 그 위에 산개를 안치하는데 모양은 약간씩 다르다.

신라 고분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서 신라 고분에다 상륜부를 안치하면 거의 복발탑과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② 중층탑(重層塔) 다층 건물 모양을 탑에 응용한 것으로 짐작하며, 탑신의 모양은 다층 건물과 비슷하다.

중국의 기념비적 탑에서 유래한 목탑에서부터 다층탑이 크게 성행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이 다층 전탑을 발생시켰고 우리나라에서는 다층 석탑으로 번안되었다.

다층탑은 영원한 생명의 숫자인 3~13층까지의 홀수(3, 5, 7, 9, 11, 13) 탑이 보편적이었지만, 2층이나 10층 등 짝수도 진리를 상징할 경우에는 조성되었다.

■ 3층탑 : 우리나라 석탑의 대부분이 3층탑이다.

이유는 그다지 웅장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크기의 사찰에 가장 알맞고 만들기도 손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 5층탑 : 5층탑의 예는 꽤 많은 편이며, 우리나라의 정림사지 5층석탑이 유명하다.

■ 7층탑 : 저명한 중국의 자운사 대안탑이 있다.

■ 9층탑 : 신라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삼보의 하나로 당대에 가장 큰 탑이었다.

중국 북위 영령사 9층탑도 유명하다.

■ 10층탑 : 우리나라 원각사 석탑이 이에 속하는데, 원각 사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10층으로 조성했다.

■ 13층탑: 우리나라 경천사 13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③ 특이형 탑 앞의 두 형태와 다른 특이한 모양의 탑을 통틀어서 말한다.

이미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석탑의 조탑 수준이 절정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는 석탑의 형태에도 새롭게 응용한 것을 자유자재로 고안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등은 수준 높은 조탑술로 창작된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다.

탑 속에 《보협인 다라니경》을 봉안한 보협인탑도 이 부류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천안에서 발견된 석탑 한 예만 있을 뿐이다.

(3) 탑 안에 넣는 보물 탑에는 여러 가지 보물을 봉안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 즉 신골(身骨)만을 봉안했지만 신골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리 외에도 머리칼, 손톱, 발톱, 이(齒)는 물론, 법사리(法舍利)인 불경과 법신사리(法身舍利)인 깨끗한 모래, 수정, 금, 은 등의 보배까지 봉안했다.

사리는 작은 병이나 합에 넣고 이 병을 다시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에 차례로 넣어 사리공(舍利孔)에 봉안한다.

    6.부도와 승탑(僧塔) 불교에서는 세 가지 성스러운 보배인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를 숭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승보(僧寶)로 공경받는 많은 고승들은 백성의 스승인 국사(國師)와 국왕의 스승인 왕사(王師)의 칭호를 받았고, 이들은 교화는 물론 불법 탐구에도 정진해서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리하여 덕망 높은 스님이 일생을 마치면 평소에 스님을 받들던 제자와 신도들이 스승의 묘탑(墓塔)인 승탑(僧塔)과 탑비(塔碑)를 세웠다.

또한 승탑과 탑비는 왕명으로 탑호(塔號)를 받았다.

탑비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을 써서, 명공이 비석에 행적을 새겼다.

이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세워진 승탑과 탑비는 특히 신라 하대부터 장엄하게 조형되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진면목을 이루었다.

승탑은 탑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인도에서 사리불, 목건련 등 성제자(聖弟子)들의 묘탑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浮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도는 ‘붓다(Buddha)’의 음역이라고 하며, 원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고승을 부처님처럼 존경해서 부도라 일컬었다.

나아가 고승의 묘탑이 곧 불탑과 대등한 부도라는 뜻으로 굳어진 듯하다.

우리나라 승탑은 절 외곽에 따로 마련한 탑원(塔園)에 탑비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승탑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하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이 시기의 승탑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난 선종불교(禪宗佛敎)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상당한 지위와 덕망을 갖춘 고승에 한해 승탑이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승탑 중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신라 선종산문(禪宗山門)의 하나였던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시조 도의 국사(道義國師)의 탑으로 알려진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 부도(浮屠)이다.

통일신라 하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유행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은 계속 후대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계승되는데, 기본 형식은 변함 없지만 기단과 탑신의 조각은 승탑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승탑은 조선시대 전까지는 대부분 불탑과는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극히 일부의 승탑만이 석탑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 이후로는 석종형 승탑(石鍾形僧塔)과 석탑형 승탑(石塔形僧塔)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간단한 석종형 승탑이 크게 유행했다.

  7.석비(石碑) 원래 비석은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무덤 안에 관을 쉽게 내리기 위해 세우는 무덤 앞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때에는 이 돌기둥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했으며 일설에는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목비(木碑)가 있었다고 한다.

후한시대부터는 비의 머리가 지붕 꼭대기처럼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어지고, 비신(碑身)의 한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어 관을 내리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비의 테두리에는 용(龍), 꽃, 사신(四神) 등을 새겼는데, 현무(玄武)를 새겼던 아래쪽과 용을 새겼던 위쪽은 각각 댓돌과 머릿돌에 해당하는 귀부(龜趺)와 이수(栗首)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북돌과 용머리를 갖춘 비석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등장하고, 당나라 때에 들어서는 일정한 신분의 귀족들이 거북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비들 가운데 큰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고승비(高僧碑)와 사찰의 내력을 새긴 사적비(寺蹟碑)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불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석비의 발자취를 볼 때, 석비는 원시적인 석각(石刻)에서 출발해서 자연석을 사용한 비석을 거쳐 예술적인 비석으로 정착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석비가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신라 하대에 들어 선문 조사(禪門祖師)들의 비를 세우면서 석비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석비 형태는, 지상의 영물인 거북을 받침돌로 해서 비신을 받치게 하고, 거북의 등 위에는 구름무늬를 장식해 비석의 주인공이 천상에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에는 여러 마리의 용을 장식해서 역시 천상의 영물을 표현했으며 때로는 불교와 관련 있는 구룡(九龍)을 표현하기도 했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비(雙峰寺 澈鑒禪師碑)는 대표적인 통일신라 석비인 동시에 우리나라 석비 예술의 대표작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석비의 위용이 더욱 당당해지고 규모 또한 매우 장중해진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활기에 찬 용무늬 조각이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틀에 박힌 형식으로 바뀌고, 거북돌의 등가죽에는 왕(王)자, 만(卍)자, 꽃무늬 등을 새겨 장식이 다양해진다.

한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는 간략한 댓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빗돌 위에는 가옥형(家屋形) 지붕돌을 얹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석비의 형식으로 유행하고 있다.

  8.석등(石燈)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땅 위에 댓돌을 놓고, 중간부에는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는 연꽃 받침대를 장식하고, 그 위로는 불발기집[火舍石]을 얹게 되어 있다.

기본적인 평면 형태는 팔각형을 이루며, 기둥은 팔각기둥, 사자모양, 장구모양 등으로 표현된다.

고려시대부터는 사각형과 육각형 석등도 등장한다.

불발기집은 양면(兩面)이나 사면(四面) 또는 팔면(八面)으로 불빛창[火窓]을 내고, 테두리에는 비비람을 막기 위해 종이나 베를 씌운 창틀을 고정할 수 있는 못구멍을 내었으며, 창 주위에는 사천왕이나 보살상을 조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팔각기둥형 석등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부석사 석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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