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공양하듯 베풀어라 사섭법(四攝法) ③ – 이행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의 세 번째는 이행섭(利行攝)이다.
이행섭의 뜻은 ‘이익이 되는 행위로써 중생을 포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다르게는 이행섭사(利行攝事), 이익섭(利益攝), 영입방편(令入方便), 도방편(度方便), 이익(利益), 이인(利人)이라고도 부른다.
중생을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방편 중에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조건은 없을 것 같다.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에게 실제로 이익을 베풀고, 그 이로움 때문에 중생이 보살에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이익에 의한 섭수는 항상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중생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섭수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섭도 애어섭도 모두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이 이행섭은 좀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섭법은 모두 중생이 처한 현실에 맞추어 보살이 대응하여 방편을 베푸는 행위로써 섭수한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이 중생을 위해 베푸는 행위 중에서 특히 이롭게 한다는 성격이 강조된 조건이 바로 이행섭(利行攝)이라 할 것이다.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에게 이익 베풀며 佛法 전하는 행위 단 그것이 현실에서의 이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섭법이라는 조건 자체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믿고 귀의하여 그 가르침대로 실천함으로써 아름다운 삶에 동참하도록 이끄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곧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그 탐욕스러움을 버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로움을 베푸는 행위가 되며,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는 그러한 삶이 지속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이행섭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인 갈망으로 가득한 존재이다.
그것은 때로는 철저히 이기적인 행동방식으로 나타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별개로 인식하는 순간, 모든 행위들은 자기만을 위한 행위로 귀결된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을 멸시하는 행동으로, 상대방이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시기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행동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그 행위로부터 때로는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환상에 굴복당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남을 이롭게 한 행위로 인해서, 자신이 남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며, 자신이 구원자와도 같다고 여기는 인식을 더하는 것이다.
동체(同體)의 정신에서 출발한 자비심이 어느새 자만심으로 변질되어 애초의 의도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다.
이행섭은 물론 사섭법 전체는 동체대비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의 과도한 확장은 늘 역설적으로 자기존중이 지닌 건전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개개 개체들이 지닌 고귀함과 완전성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가 행하는 이행하여 거두어들이는 행위들은, 오히려 함께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는커녕 그러한 삶을 가로막고 망가뜨리는 행위들로 작용하게 된다.
곧 이행섭은 우월한 자기인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온전한 존경심으로부터 출발하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엄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방세계 중생들이 여러 가지로 차별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받들고,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리키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하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을 수순하면 부처님을 수순하며 공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불교신문 2773호/ 12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