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눈으로 세상을 보자”
蛇飮水(사음수)하면 成毒(성독)하고 牛飮水(우음수)하면 成乳(성유)하나니… 뱀이 마시는 물은 독이 되고, 소가 마시는 물은 우유가 되나니… – <초발심 자경문> 중 “불교란 무엇인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행하라. 이것이 제불의 가르침이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也)”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 아닌가?” “그렇소, 그러하나 팔순 된 노인도 행하긴 어려운 것이 이것이지요.” 위의 글은 당대 대학자인 백낙천과 도림스님 간에 나눈 대화였다고 한다.
대화 중 도림스님의 답변은 ‘칠불통게(七佛通偈)’ 혹은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도 일컫는 것으로, 과거세 제불보살님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위의 대화를 처음 접한 것은 필자가 아직 출가도 하기전인 고등학교 시절, 갓 불교에 입문하여 한창 불교학생회에서 열의를 갖고 공부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땐 ‘과연 옳은 말씀이다’ 생각하면서도 ‘그래 도라는 게 별거 있겠느냐!’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쉬운 것을 다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혹여 알되, 철저히 알지를 못함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부분만 보아 알고, 잘못 보아 알고, 편견에 사로잡힌 눈으로 보아 알고…. 불자다운 삶의 시작은 팔정도 세상 바로 보는 ‘정견’ 있어야 제악을 막작하고 중선을 봉행하는, 그야말로 불자다운 삶의 시작점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며, 그 중에서도 으뜸은 ‘정견(正見)’이다.
그런데 그 정견이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본단 말은 또 무엇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을 말함일까, 두 눈을 지그시 뜨고 보는 것을 말함일까, 날카롭고 차갑게 보는 것을 말함일까…? 그런 것을 말함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을 바라본 관점’을 말함일 것이다.
그것은 곧 연기론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고, 우린 그 연기관의 눈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는 ‘정견의 안목’을 획득했다 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결국 세상의 천만사를 연기관에 입각하여 파악하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 파악한 답 ‘부처님의 말씀(중선, 衆善)’을 부처님의 몸을 받들 듯 봉행하는 일이다.
또한 정견은 양극단을 여읜 ‘통찰안(洞察眼)’이니 인과(因果)적으로 봄이요, 전체적으로 파악함이다.
그렇게 파악된 사실에는 편견이 없고, 곡해가 없으며, 꼼수와 아전인수가 없는 그야말로 진실안(眞實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견은 지심(至心)을 낳고, 그 지심의 일파(一波)는 십파(十波)로, 백파(百波), 천파(千波), 만파(萬波)로 세상에 공명.공감을 불러오고, 땅 위에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의 가슴을 평화와 행복의 바이러스로 물들이고야 말 것이다.
땅 위에 흐르는 같은 물이로되, ‘뱀이 마시는 물은 독이 됨이요, 소가 마시는 물은 우유가 됨’이라. 서양의 한 철학자는 이르되,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FTA로 대변되고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기본 룰로 인정하는 신자유주의(후기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작은 먹이일 뿐인 현대인들은 ‘나를 잃어가는’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거대한 메커니즘일지라도, 그것을 운전하는 기동(起動)의 스위치는 역시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불자로서, 오늘의 내 견해가 정녕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연기관의 바탕위에 서 있는지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켜 되물어 볼 일이다.
[불교신문 2809호/ 4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