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夫婦)는 가장 귀한 도반
완연한 봄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아도, 이제 춥다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도 춥지 않기를 부처님전에 기원드립니다.
오늘 드릴 말씀의 주제는 부부(夫婦)입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도 대부분 결혼을 하셨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남편이, 혹은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도반입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변을 할 것입니까? 오늘 이 문제는 같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부는 믿음과 자비로 채워지는 것 어느 날, 모 기업체의 과정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구조조정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매스컴에서 나오자 남편은 마치 발가벗고 신체검사를 당하는 사람처럼 회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너무나 지루하고 혹독한 열병을 치르면서 겨울을 보냈는데, 봄에 들어서자마자 반으로 감원된 상태에서 두 배 이상 주어진 업무로 인해 남편이 과로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부인은 남편이 조금 더 자상하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토닥토닥 싸우면서 심술을 부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가느다란 주사바늘에 의지해 힘없이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알수 없는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쓰러져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남편이 퇴원하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조금 더 쉬게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핏줄로 이어진 관계도 아니고, 처음부터 같은 환경에서 자라 온 관계도 아니고, 꼭 같은 생각, 같은 느낌, 같은 목적을 향해 가는 관계도 아니면서 부부라는 관계가 묘한 인연을 느끼게 합니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 내내 잠만 자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혹은 화장도 안한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악착같이 아이들을 공부방으로 내몰고는 연속극을 보는 아내를 보면서 ‘아, 이 사람이 누구지? 정말 나와 살붙이고 사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간의 애정이 식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수도 있으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인간애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의 서로 무관심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변호사, 혹은 의사 남편이 결혼지참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내를 구타한 사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한없이 허망한 욕망에 끄달려 살고 있다지만 부부,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거룩해야 할 사랑마저 돈 때문에 무참히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부간의 정이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돈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부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과 자비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대장엄경론》 권2 제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족할 줄 알면 가난하다 할지라도 부유한 자라 하겠고, 족한 줄을 모르면 돈 많은 자라 할지라도 빈궁한 자라 할 수밖에 없다.
성지(聖智)가 가득한 사람이야말로 크게 부유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부부간의 애정,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도 족할 줄 알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도타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지가 가득한 사람이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원수와 함께 길을 간다면 아마 도착할 때까지 괴롭던지, 아니면 가던 길을 도중에 바꿔야 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길을 가더라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친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길을 간다면 항상 즐겁고 기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먼 인생을 함께 하는 관계이므로 원수 같은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평생을 함께 하기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미워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고, 병든 마음에서 진실로 행복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며,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성지(聖智)가 가득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부부란? 《잡아함경》 제36에 보면 부처님께 문안 드리러 온 청년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부처님, 누가 수레에 타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불이 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며, 나라의 됨됨이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아내의 됨됨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이까?” “깃발을 보면 수레의 누가 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고,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불이 난 것을 알며, 그 나라의 왕을 보면 그 나라의 형편을 알 수 있고, 그 남편을 보면 그 아내를 알 수 있느니라.” 그 남편을 보면 그 아내를 알 수 있듯이 아내를 보면 남편을 알 수 있으며, 그 부부를 보면 그 자식들과 가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지(聖智)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하는 부부란 어떤 부부이며, 그 방법을 무엇일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조선시대 성종 때 윤필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의정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녀가 많이 생활이 늘 빈한하여 어떻게 집도 좀 늘리고 살림도 마련했으면 하는 궁리를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성씨(成氏)는 부덕(婦德)하고 분수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살림살이 궁한 것을 걱정하면 그녀는 “이만하면 의식에 걱정이 없고 또 자손이 번성하니 이보다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재물이 많으면 시기도 많이 따르게 마련이니 그런 생각 마십시오. 어떻게 어려운 세상에서 시종여일 이대로 몸이나 보전해 나갔으면 좋겠는데 소첩은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전답(田畓)같은 것을 사려고 하면 부인은 “무엇이 부족해서 또 전답을 장만하려는 거야! 이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느냐?” 하며 꾸짖어 못 사게 하였습니다.
성씨 부인은 이처럼 남편이 재물을 모으려는 뜻을 막고 아들들이 전답 장만하는 것을 엄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윤필상은 자식들을 시켜 곡식을 내다 팔게 하고 그 돈으로 살림을 장만하여 많은 재물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곧 윤필상은 부자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습니다.
그후 연산군(燕山君)은 자신의 생모인 윤비가 폐출될 때 윤필상이 주청해서 구하지 못했음을 늘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데, 그에게 재물일 많다는 말을 듣고는 핑계를 만들어 귀양을 보내고 재산을 압류하였으며, 후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윤공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윤필상과 그의 자제들이 성씨 부인의 말을 듣고 치부(致富)하지 않았다면 화를 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남편과 자식을 위하는 아내라면 욕심을 버리고 바른길을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법을 수행하는 남편 오늘날에는 남편이라는 존재와 그 위치가 상당히 미약해져 가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아내의 존재와 위치가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남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부부라고 하지만 여기서 그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도 남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나갈 때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행복을 성취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우선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아함경》제60 〈사주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사위성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 에서 아난존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제 내 스스로 이익되고, 남에게 이익되며, 많은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고, 세상을 가엾게 여기며,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정의와 이익을 추구하고 평온과 즐거움을 찾는다.
나는 이제 법을 설하여 궁극적인 것을 이루었고, 청정함을 이루었으며, 범행(梵行)을 완성하였느니라. 나는 이제 태어남과 늙음과 병과 죽음과 근심, 걱정, 슬픔을 벗어나게 되었고, 이제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게 되었느니라.” 이는 부처님이 이루신 경지를 나타내는 말씀이지만 남편이라고 하는 위치도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편이 부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하는 위치는 보다 폭넓게 세상을 보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단지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고, 보다 큰 행복을 위하여 일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잡아함경》제35에 보면 “만일 네가 말한 것처럼 네가 스스로 실천한다면 (말과 행동이 걸맞는다면) 나는 너를 훌륭한 사내라고 인정하리라. 네 마음을 길들이고 고요히 쉬어 중생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 잡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법을 따르는 것이라 하나니, 마음을 길들이고 고요히 쉬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사공을 만나야 강물을 잘 건너갈 수 있듯이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훌륭한 남편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가정의 대포자라고 할 때 《사분율》제47 〈멸쟁건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열 가지 법을 갖추면 따로 논하여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힐 수 있느니라. 계를 잘 지키고, 들은 것이 많으며, 양편의 규칙을 잘 외우고, 그 이치를 널리 이해하며, 말이 분명하여 질문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어 듣는 이를 기쁘게 할 수 있고, 싸움을 잘 조정할 수 있으며, 편애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니라. 그러나 일을 판단하는 사람 가운데 계를 외우지 못하거나 계율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해서 정의(正義)를 버리고 법답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본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글자만을 말하는 사람이나, 말솜씨를 내세워 억지말을 하는 사람은 제외시켜야 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대표자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훌륭한 남편이 되는 길이란 한마디로 바른 법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부부는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5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고 합니다.
인연법이란 과거라는 시간들을 통하여 서로 만나서 같이 훈련되었고, 다듬어져서 모양이 만들어졌습니다.
톱니바퀴는 톱니바퀴끼리 맞물리게 되는 섭리와 법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연법을 깨닫고 그 겁생의 인연으로 만난 부부가 다시 좋은 인연의 울타리를 엮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론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많고, 즐거운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로 인해 즐겁고 행복해지는 상대를 위해 자비의 도를 다한다면 반드시 거듭거듭 행복의 뿌리가 내려질 것입니다.
행복의 뿌리를 내리는 부부, 그리고 그 뿌리에서 다시 행복의 꽃을 피워내는 부부가 되기 바랍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 보도록 합시다.
“선남자여, 만일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고 어여삐 생각하면 반드시 이익이 불어날 것이요, 흉하거나 쇠하지 않으리라.” 중아함경 제33권 “아내는 최상의 친구이다.
” 잡아함경 제1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