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넉넉한 세상의 기초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해가는 방법은 다양해서 하나로 설명하기는 쉬지 않지만, 핵심적인 원리로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연기(緣起)와 만나 전개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좀더 부드럽게 하고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 가르침으로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이 보시입니다.
보시는 베풂을 근본으로 그것이 물질과 진리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자연스레 이끌러가는 윤활유와도 같은 보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초발심자경문에 보면 열 가지의 가르침 가운데 두 번째에 보시의 이야기가 언급이 됩니다.
삼악도(三惡道)의 괴로움을 가져오는 데는 탐욕으로 지은 업이 첫째가 되고, 육바라밀 중에서는 보시가 으뜸이 되느니라. 간탐은 능히 착한 길을 막고 자비로 보시하면 반드시 악한 길을 막느니라. 만일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넉넉지 못하더라도 아끼지 말라. 올 때도 한 물건 없이 왔고 갈 때도 또한 빈손으로 간다.
나의 재물에도 연연할 것 없거늘 다른 이의 재물에 어찌 마음을 둘까보냐? 살아생전 아무리 많이 장만해도 죽은 다음 가져갈 것은 오직 지은 업뿐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탐물(貪物)은 하루아침의 티끌이 되느니라. 노래하노라. 어찌하여 괴로운 삼악도가 생겼는가. 다생토록 탐하고 애착가진 때문일세. 부처님의 가사 발우 이대로 살만한데 무엇하러 쌓고 모아 무명만 기르는고. 여기서 챙겨볼 것은 첫째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욕심이고 스스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보시라는 것입니다.
탐진치의 삼독으로 우리는 끝없는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헤매는 것이고 기도와 수행의 공덕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남을 위한 베품, 즉 보시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욕망을 통해 나의 괴로움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재산을 가졌어도 만족하면 행복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은 고통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기준은 객관적이 아니라 다분히 주관적인 가치관을 통해 형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보시는 무슨 의미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 보시의 정의 보시(布施)는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보(布)는 나의 재물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뜻이고, 시(施)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산(散) 또는 사(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 의복이나 음식, 재물 등의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공포를 제거하여 안심케 해주는 무외시(無畏施)의 3종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을 도와주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돕는 것이 아니라, 돕는 그 자체로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푼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시라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대승에서 강조하는 이타적 자비행의 근본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첫째 재시는 물질을 원인으로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물질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모두에게 물질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는 별 노력도 없어 보이는데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주어진 물질적 환경은 궁핍하기 말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경우의 불교적 해석은 삼세인과로 설명이 되는데 과거 전생에 이미 이생을 살아갈 복력을 지어서 지금의 노력과 상관없이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상은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또다시 맞이할 미래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가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남과 더불어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할 때 현재는 따뜻하고 미래는 평화스러워짐이 재보시입니다.
그러나 재보시의 목적이 미래에만 있다면 상거래와 같이 삭막해지기 때문에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그것은 염두에 두지 않음이 좋겠다는 내용이 삼륜청정이라는 말입니다.
삼륜청정이란 보시하는 자와 보시 받는 자, 그리고 보시하는 물질이 모두 청정한 것, 즉 조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금강경》 〈妙行無住分 第四〉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수보리여, 참으로 보살은 경계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형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마음의 대사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이 참으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니밋따(겉모양) 산냐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는 그러한 보시를 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는 자, 그의 공덕의 무더기는 쉽게 그 양을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동쪽 방향의 허공의 양을 쉽게 잴 수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다시)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남, 서, 북, 아래, 위의 방위와 간 방위 들 -이들 모든 열 가지 방향에서 허공의 양을 쉽게 잴 수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이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는 자, 그의 공덕의 무더기는 쉽게 그 양을 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니밋따(겉모양)산냐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는 그러한 보시를 해야 한다.
” 어떤 기대나 조건 등 이유를 달지 않고 보시할 때 진정한 보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베풂에 또 다른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니지만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보시는 여유 있는 자가 자비를 앞세운 동정심으로 조건 없이 베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적극적이고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내 놓는데 사치스러울 정도에 이르러서는 안 되며, 대면하는 사람을 선택하여야 한다.
기만하여 속이고 강요하는 자에 게는 비록 구걸하더라도 주어서는 안 된다.
흉포하거나 호강하는 자에게는 재물을 베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
” 아무에게나 좋은 것이 좋다고 무턱대고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폭력이나 위협으로 탈취하려는 자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입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는 유명했던 영화 <친구>의 감독이 영화의 자료를 제공해준 조직 폭력배 친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돈을 건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경우인데 일반적인 법의 상식에서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친구에게는 우정의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돈은 이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조직 폭력배의 운영과 유지자금으로 밖에 써지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베풀어도 죄가 되는 경우가 있고, 주지 않아도 복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진 자의 마음은 자비를 가져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부(富)란 분뇨(糞尿)와 같아서 쌓아두면 냄새가 풍기고 흩으면 대지를 비옥하게 한다.
”라고 했습니다.
물질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지만 욕심으로 취하면 오히려 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베풀 수 있을 때 베푸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 봅시다.
둘째는 법보시인데 이것은 정신적으로 궁핍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좋은 말씀으로 그를 평안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출가 초기 뭐가 뭔지도 잘 모르던 20대 초 대학을 다니던 때에 노 보살님 한 분과 법회를 마치고 함께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젊어서 홀로 되어 자식을 키우며 살아오셨는데 어렵게 모은 재산을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못 받게 되어 크게 상심하고 있었답니다.
환갑을 넘긴 노 보살님이 어린 사미인 나에게 아픈 가슴을 열고 고민을 이야기할 때 머리로만 이해했던 전생의 빚 갚음의 이야기를 제가 들려주었습니다.
아마도 과거 전생에 그 사람에게 진 빚을 이제야 갚게 된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분은 세상이 달라지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고뇌하던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전생에 진 빚 다 갚은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다시 세상살이에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져서 너무도 즐거워졌다는 말을 그다음 법회 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게는 그토록 간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말이지만 그 노 보살님에게는 인생이 뒤바뀌는 거룩한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기가차서 찾아온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바람이 뭔지 잘 이해 못할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30대도 되지 않았을 때니까요. 그런 내개 하소연을 하는 보살님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연이 다하면 다시 일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다소 방황하는 인연이 도래했으니까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그런 상황에 직면한 삶과 직면하지 않은 사람이 반응하는 것은 분명 다를 일이지만 그 한마디가 고뇌하던 인생을 바꿔놓는 결과를 가져올 때 이것이 법보시입니다.
고뇌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의 평안을 얻도록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는 행위가 법보시인 것입니다.
돌아보면 주변에는 의외로 진리에 목말라하는 마음 아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장황한 이론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마디라도, 마치 체한 사람에게 침을 한방 따끔하게 놓듯이 어리석음을 깨트릴 수 있는 한마디가 아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범망경》은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구하는 온갖 것을 주어야 하는데, 만약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하나, 풀 한포기도 보시하지 아니하며, 법을 구하는 이에게 한 구절의 법문과 한 마디의 게송과 작은 법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을 퍼붓는 것은 보살의 바라이 죄이니라.” 물질을 보시하면 얼마간의 고뇌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베풀면 평생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일체가 내 것이라는 뜻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을 돌이키는 원천은 곧 진리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베풀면 큰 힘을 얻고 입을 것을 베풀면 잘생긴 얼굴을 얻으며 탈 것을 베풀면 안락을 얻고 등불을 베풀면 밝은 눈을 얻으리라. 집으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면 모두를 주는 것이고 법으로 중생을 가르치면 감로를 베푸는 것이니라. 감로는 세상에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요. 셋째로는 무외시입니다.
무외시란 다른 생명의 공포심을 제거해주는 행동입니다.
즉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나의 자애로움이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쉽기로 말하면 세수하면서 코만지는 것보다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쉬우냐 어려우냐는 내 마음에 자만심이 존재하느냐 자비심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입니다.
노 보살님이 오셔서 세상사를 하소연하시는데 공감이 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단독 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두들 표정이 없고 인사도 안한다고 불만을 하셨습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눈인사나 목례, 내지는 미소라도 짓는다면 덜 어색할 텐데 원수를 만난 듯이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그 시간이 너무도 싫다는 말속에 불교적인 무외시의 사회적 확대가 아쉽다고 느꼈습니다.
요즘 백화점이나 공항에 가면 인형 같은 미모의 차림새로 차량을 유도하는 깜찍하고 친절한 도우미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어쩌면 그들은 진심이라기보다 직업정신이 더 작용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진심에서 행해지는 것이 무외시입니다.
많은 이에게 따뜻함과 편안함, 그리고 편리함까지 주자는 가르침이 무외시입니다.
여기에는 넉넉지 않은 물질로도 가능하고 글자한자 몰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실천 원리입니다.
무외시를 이해하고 실천하고자하는 마음하나면 여기가 곧 극락이 됩니다.
그래서 밝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원리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생활논리입니다.
# 생활 속의 보시 이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보시를 행하면서 살 것인가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연도속업경》에 보면 부처님은 재산을 활용하는데 따라 부자를 세 부류로 나눈다고 가르치십니다.
재물을 긁어모으면서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를 하재(下財)라고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입지도 먹지도 않으며, 부모에게 공양하지도 않고 바른 삶을 지도하는 성자나 수행자에게 공양하지도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지성으로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고 손님과 권속을 정으로 돌보는 자를 중재(中財)라고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뒷날의 복을 바라지는 않으나,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끝으로 부모에게 효순하고 규범을 잘 지키며, 가난한 자와 못난이를 돌보아주고,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면서 재산을 베푸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상재(上財)라고 하며, 이들은 세상에서 더 견줄 데가 없는 대장부가 됩니다.
물질을 모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보시하기 위한 것일 때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재산을 모으기 만하고 쓸 줄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음입니다.
모으는 목적은 잘 쓸 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모으는데 일등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없으면서 쓰기에만 바쁜 사람이 있습니다.
다 잘못 사는 경우입니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쓰기도하고 체면치레도하는 경우는 내 것 내가 먹고 남의 것 탐내지 않으니 잘 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얌체 밖에는 안 됩니다.
아니면 깍쟁이 정도이지 결코 잘 사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상재(上財)가 이상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인 부모에게 효순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심성으로 수행자를 공경하는 일은 모두의 희망입니다.
《증지부경》에서 부처님은 부의 축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하인과 일꾼과 남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친구와 동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정치적 재난, 수재나 화재와 같은 자연적 재난, 도둑이나 전쟁에 의한 인위적 재난, 유산의 상속 등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친족과 손님과 국가와 조상과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은 인내와 겸손으로 진리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재산을 모으는 목적이 자신을 위함보다는 결국 타인에게 복리를 분배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함께할 때 의미가 더욱 커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풀기 위해서 모으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지, 베풂이 없이 모으기만 한다면 모으는 목적도 분명히 모르는 욕심 덩어리일 뿐입니다.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 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렇습니다.
베풂도 남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남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과의 과보는 나에게 복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법입니다.
보시도 남을 통해 나의 복전을 일구는 수행이라고 본다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서 하는 참선, 참회, 염불, 사경 등의 기도나 삶 속에서 자신과 이웃을 향한 자애로운 마음을 통한 자비보시가 다같이 나를 수행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조건 없는 보시, 남을 위하지만 자신을 위하게 되는 보시, 세상을 위한 자비보시의 보편화가 이 세상을 넉넉하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성불하십시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아미타 개공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