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용서받지 못할 일은 본래 없다

용서받지 못할 일은 본래 없다

-법상스님-

세상을 살다보면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같은 사람이 밉기도 했다가 좋아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사람이 밉다거나 좋다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기에 오히려 그런 쾌 불쾌, 사랑 미움의 감정이 없다는 것은 건강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미워지거나 좋아질 때 우린 그 사람 자체를 증오하고 혹은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닌 미움이란 감정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상황’ ‘인 연’에 불과합니다.

좋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닌 좋도록 만들어진 ‘상황’ 인 것입니다.

좋거나 밉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인가요? 나를 째려보고 욕을 했다면 그 사람의 눈을, 욕을 한 그 사람의 입 자체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몸뚱이를 보고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욕을 하게 되었던 그 상황이 미운 것이지 결코 그 사람의 눈 자체가, 입 자체가 나아가 그 사람 자체가 미운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이 미워질 때 그 사람의 몸 자체가 미워지는 것이라 한다면, 미래의 어느 때에 그 사람의 일상과 행동에 큰 변화가와 예전의 밉상스런 모습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맑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계속 미워 해야 할 것입니다.

몸 그 자체가, 그 사람 자체가 미웠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을 유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사람이 변하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까지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미워한다고 했을 때 미움이란 잠시 인연생기하여 일어난 그 상황, 인연이 미움이지 그 상황을 연출한 사람 그 자체가 미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스런 모습엔 사랑을 느끼며, 동시에 밉상스런 모습엔 미워하는 마음도 가지고 삽니 다.

어제 미웠던 모습도 새삼스런 애교에 오늘 다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노릇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 수행자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앞뒤가 끊어진 삶이라야 합니다.

그 어떤 마음이라도 오래 고정짓고 머무르면 병통이 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일들은 나 자신을 대입해 보면 더욱 명확해 집니다.

‘나’ 스스로를 한번 돌이켜 봅시다.

우린 나 자신을 스스로 좋아하기도 했다가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는 ‘나’ 이기에, 떼어 내려고 해도 도저히 떼어 낼 수 있는 ‘나’ 이기에 밉다고 내 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좋다고 나를 향해 격한 사랑에 빠질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한 특정한 행동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나 자신을 아무리 미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엔 나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가는 길이란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으나 사나, 좋으나 싫으나 우린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미워졌다가도 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다시금 새로운 나의 모습을 사랑하며 아낄 것은 분명한 노릇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나 자신이 잠시 미워지더라도 나라는 존재 자체를 미워할 수 없듯, 상대가 미워지더라도 우리는 상대 그 자체를 미워해선 안됩니다.

잠시 인연따라 만들어진 그 ‘미운 상황’이 탐탁치 않은 것 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란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내가 화를 낸다고 그 상황이 우리에게 싸우려고 대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요하여 가만히 있는 상황에 괜히 우리만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것이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고정된 대상이 없는 줄도 모르고 비 실체적인 환영 같은 대상에 대고 화도 내고 사랑도 하니 말입니다.

상대의 모습이란 영락없는 내 모습의 투영입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세상엔 결코 절대적으로 미운 사람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도 없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내 모습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업식이 인연따라 잠시 나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바로 알고 매이지 않으면 수행자요, 어리석게 그걸 모르고 신기루를 잡으려 하면 중생인 것입니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잡으려 하다보니 못 잡았을 때 괴롭고 미워지며 잡았을 때 행복하고 사랑하게 되므로 인해 또 다른 업식을 만들어 냅니다.

특히 가정을 이루고 사는 부부거나 형제, 친지들 사이의 인연에서 미워하고 원망스런 일이 생겨나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 정신 바짝 차려 바로 관해야 할 일입니다.

한 번 가깝게 지어놓은 인연은 그 끝이 아름다워야 하는 법입니다.

가깝게 지은 인연, 이를테면 부부, 부자, 형제, 친지, 사제등의 인연이란 무언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풀어야 할 인연의 끄나풀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부부간에 이혼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작년 한 해 이혼률은 가장 높았다고 하는데 4쌍 가운데 1쌍 이상이 이혼을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참으로 가까운 인연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한 일입니다.

이혼을 한다는 것은 이번 생에 인연을 풀려고 왔다가 오히려 더욱 크고 복잡하게 인연을 얽매이고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음생이 되었든, 혹은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되었든 그 이상의 더욱 큰 괴로움을 동반한 채 다시 무겁고 어두운 인 연을 짓게 됩니다.

그렇게 지은 인연이란 차라리 이혼하지 않고 지금 같이 살며 괴로운 것보다 수십 아니 수백배 더 큰 괴로움으로 우리의 미래를 옭아맬 것 입니다.

겁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또 남편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결점이란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의 결점이며 업식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성격과 남편의 성격이 다른데 뭘 그러나 하시겠지만, 나는 성격이 좋고 남편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실 테지만, 그것 또한 내가 가지고 태어났어야 할 업식을 대신해서 남편을 만남으로, 남편의 모습으로 대신 받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혼한다는 것은 내 업식 만큼의 인연을, 내 업식 대신 받고 나온 남편을 다시말해 나 자신의 업식을 외면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외면한 과보는 몇 배 더 큰 업식으로 미래를 옭맬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했다가 미워지는 것은 순리입니다.

내 안에 악업과 선업이 있는 이상 그 어떤 완벽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를 미워하며 좋아하기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순리이기에 작게 보면 미움과 사랑이지만 크게 보면 정작 자연스러움이며 돌이켜 아름다움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눈밝은 수행자라면 그런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세상 모든 이와의 인연이 마찬가지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일이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란 본래 없으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맞서 용서와 화해의 밝은 등불을 밝힐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미움과 죄업을 용서한다는 말은 내 안에 너무 크게 자리한 악업의 업식을 녹인다는 말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수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다 받아들여 다 용서하고 다 녹이겠다는 마음이 수행자의 세상을 대하는, 경계를 대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미운 것, 괴로운 것, 답답한 것…

내것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가 대신 받아줍니까.

다 받아들이고 다 녹일 수 있는 바다와 같은 수행자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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