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제(苦聖諦, catu ariya sacca)
고성제(苦聖諦, catu ariya sacca) Ⅰ.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로 포섭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선법(善法)]이던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발생)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M28) §2」 붓다는 깨달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초기불전 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무명 등의 연 기의 구성요소가 빛 바래어 소멸한 것으로 나타난다.
4성제란. 4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으로 ‘깨달음은 4성제를 꿰뚫고 관통하고 알고 보아서 실현 되는 것으로 초기경들은강조하고있다.
12연기의 무명은 4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위 경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되고 중생들이 고통 받는 원인인 고를 멸하기 위해서는 고를 보아야 한다.
고를 본 자만이 고의 원인을 찾고 그에 대한 처방전을 찾을 수 있기에 고성제가 무엇인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Ⅱ.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고성제는 일반적으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로 번역되며, ‘삶이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불교가 염세주의적인 사상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한정되고 안이한 번역과 피상적인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염세주의도 아니고 낙천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인생과 세계(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극히 현실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붓다는 사람들을 하늘에 태어나 영생할 수 있다고 유혹하지 않으며, 허구적인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나 죄의식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고뇌하도록 하지 않는다.
붓다는 인간과 세계의 실상에 대하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해 주며 완전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적정(寂靜)과 행복을 얻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Ⅲ. 고의 문자적 고찰 1. 고(苦)를 표현하는 빨리어인 dukkha(둣카)가 고통. 고뇌. 슬픔. 비탄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대표하는 진리로서의 dukkha라는 말은 더욱 깊은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휠씬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2. Dukkha는 고통이라는 일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더불어 현실에 대한 진단으로 불완전. 무상(無常). 공(空) 등의 더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3. dkkha가 지닌 모든 뜻을 함축한 번역어를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dukkha를 고난. 고통 등으로 안이하게 번역하여 부정확하고 잘못된 인식을 유도하기보다는 번역하지 않은 채 그대로 ‘dukkha’로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4. 붓다는 괴로움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그렇다고 삶에 있어서 행복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 속을가리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인정하였다.
앙구따라니까야에서는 가정생활의 행복, 은둔의 행복, 애착의 행복, 이욕의 행복,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등 여러 종류의 행복이 열거되어 있지만 이모든행복이dukkha에 해당된다.
또한 명상의 실천으로 얻어지는 선정(禪定)도 dukkha에 포함된다.
붓다는 맛지마 니까야에서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후에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되기 쉽다고 말했다.
여기서 dukkha는 일상적인 의미의 고(苦)가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
’라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인 것이다.
Ⅳ. 고성제 괴로움(苦聖諦, dukkha-ariya-sacca), 즉 고성제는 4고팔고와 삼성(三性)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4고8고(四苦八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5) 일반적으로 사고팔고로 정의된다.
①生 ②老 ③病 ④死 ⑤愛別離苦 ⑥怨憎會苦 ⑦求不得苦 ⑧略 五陰盛苦(五聚蘊苦). 정리하면 생사문제가된다.
출가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2. 삼성(三性) :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 “도반 사리뿟따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괴로움의 성질[苦性, 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 – (괴로움 경(S38:14) §3 – 잠부카다까 유행승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화) 1)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보편적인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 生. 老. 炳. 死.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陰盛苦 즉 사고팔고로 정리된다.
2) 괴고성(壞苦性, viparinna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이라도 끝내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삶에 있어서 행복 한 느낌이 나 조건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만간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 시에는 고통. 고난. 불행이 뒤 따른다.
이러한 변화가 괴고성이다.
3) 행고성(行苦性, saṃkhāra-dukkhat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형성(조건지어진)된 것, 조합된 것이기 때문에 苦다.
붓다가 말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 힘이나 에너지로의 결합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五陰盛苦’이다.
붓다는 언제나 분명하게 고를 五蘊으로 정의했다.
(즉 아뜨만이 없기 때문에 괴롭다.
) 3. 변하지 않은 실체는 없다.
‘존재’. ‘개체’.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오온의 결합을 일컫는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모두 무상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dukkha).」 이는 「오온이 바로 고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이다.
연속되는 두 순간은 동일하지 않다.
A와A는 서로 같지 않다.
그것은 순간적인 생성과 소멸의 흐름 속에 있다.
붓다는 라타팔라에게 「세상은 끝없는 흐름 속에 있으며 무상하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물이 사라지면 그것은 인과의 연속에 따라 다음 사물이 나타날 조건이 된다.
그 속에서 불변의 실체는 없다.
영원한 자아. 개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인 오온이 하나의 육체적. 정신적 기관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함께 움직인다면’나’라는 관념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행온의 52가지 작용(52가지 마음부수, 심소) 중의 하나, 즉 자아의 관념일 뿐이다.
보통 ‘존재’라고 불리우는 ‘오온’은 行苦性(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합된) 그 자체이다.
이 五蘊의 배후에서 苦를 경험하는 存在나 自我는 없다.
붓다고사의 말처럼 「단지 괴로움이 존재할 뿐 괴로와 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 운동의 배후에서 도사리고 앉아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
단지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삶이 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삶 자체가 운동이다.
삶과 운 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생각의 배후에 있는 생각의 주체는 없다.
생 각자 체가 생각의 주체이다.
생각이 없었다면 생각의 주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삶에는 그 시초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살아 있는 존재의 흐름은 불가사의 한 것이다.
즉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셨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여. 이 윤회의 순환에는 볼 수 있는 끝이라고는 없다.
무명으로 덮여 있고 갈애(渴愛)의 족쇄에 묶여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의 첫 번째 시초는 인지될 수 없다.
」 그리고 삶의 윤회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에 대해 「무명의 첫 번째 시초는,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는 무명은 없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는 인지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서는 삶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고성제의 의미이다.
이 고성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붓다가 말했듯이 고를 본 자만이 고의 원인(集)과 고의 소멸(滅)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언제나 미소 짓는 붓다.
삶이 고라고 해서 불교인들의 삶을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반대로진정한불교인은가장행복한존재이다.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이나 근심도 없다.
왜냐하면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행.불행이 모두 나의 과거의 행위에 대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는 항상 고요하고 평온하며, 변화나 재난에 처해서도 좌절하지 않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인이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결코 음울하거나 슬픈 사람이 아니었다.
붓다의 동시대인들은 붓다를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삶에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지만 불교인이라면 그 때 문에 우울해하거나 그에 대해 성내거나 못 견뎌 해서는 안된다.
붓다의가르침 중에삶 의 근본적인해로운법중의하나가 증오이다.
증오는 살아있는 존재, 고통, 고통과 관계된 것에 대한 악의(惡意)라고 한다.
그것은 불행 한 상태나 악행의 원인이 된다.
고통은 못 견뎌 하거나 화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이 어 떻게 발생했으며,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고 인내. 지성. 결단. 용기로써 그 괴로움을 없 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Ⅴ. 결론 붓다는 현실진단으로 사성제를 설했다.
단순히 진단만 한 것이 아니라 처방까지도 했다.
즉 팔정도의 제시다.
팔정도를 통해서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가 만지는가?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나는 누가 만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만지고 있을 뿐이다.
” 행위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삶은 과정일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방대하고(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유식, 여래장, 티벳밀교, 중국의 선불교 등) 번잡하지만 그 핵심은 무아,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이 우주를 움직이고 인간을 조종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타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조작(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불안전하고 무상하며 공이다 라고 붓다는 주장했다.
무상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기(중도. 공이 다 같은 말임)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물.심)이 조건에 따라서 순간순간 생멸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근원적 괴로움, 이것이 4성제의 괴로움이다.
4고8고, 3성이니 하는 모든 것들, 즉 보편적 근원적인 고,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고의 표현이다.
이러한 근원이 비어있고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오온이 나라고 착각(오취온고)하고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즐기는 이러한 것들의 이면에 주관하는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고 취(取)하고 집착하는 데서 고통이 발생한다.
전생으로부터 금생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식(識, viññāṇa)’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나 금생에서 내생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는 ‘집착(取, upādāna)’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dukha의 성질을 알고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계.정.혜 삼학을 통한 탐.진.치 삼독을 소멸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길뿐이다.
붓다께서는 재가자에게 일시적인 방편으로 보시. 지계 生天을 주장하셨다.
허나 그것은 일시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밖에는 되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개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연기법은 그에 대한 설명이자 처방이다.
우리가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사성제를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목적은 행복의 실현, 즉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궁극적 행복)을 실현 하는 것이다.
궁극적 행복이란 성자가 되는 것이다.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시와 지계로 되지만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을 닦아서 존재현상을 온.처.계.근.제.연으로 해체해서 이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혹은 염오-이욕-소멸)가 성취됨으로써 실현된다.
우리는 고의 성질을 확실히 파악하고 고의 원인인 갈애 집착심을 일으키지 말고 팔정도를 실천하여 하루빨리 구경지를 얻어 모든 중생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팔정도의 윤리규범인 계는 붓다의 가르침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개념에 세워졌다.
붓다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비의 마음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한다.
여기서 자비는 사랑. 연민. 친절. 인내 등 정서적 측면의 성질을 나타내며, 지혜는 지적인 측면의 성질을 나타낸다.
지성적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선량한 마음의 바보가 될 것이다.
반면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냉혹한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불교도의 궁극적 목표이다.
–끝- 『상윳다 니까야』 「진리상윳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롭다.
이 세상은 형성(조건 지어져)되어 있기 때문에 괴롭다.
무너지기 때문에,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