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공덕’ 지으면 ‘천상의 행복’ 누려 남도 나도 기쁘니 ‘일거양득’

‘보시 공덕’ 지으면 ‘천상의 행복’ 누려 남도 나도 기쁘니 ‘일거양득’

게송 174) 이 세상은 눈이 멀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보는 사람은 드물다.

그물을 벗어난 새(가 드문 것)처럼, 천상에 가는 자 (또한) 드물다.

새김 : 눈멀었다(Andhabhu-ta:안다부따)는 단어는 정신적인 눈이 멀어있다는 뜻으로, 둔하고 어리석어서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눈먼 소경이 보지 못하듯이 실상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물에 잡힌 새가 그물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은 굉장히 드물다.

그처럼 고해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이 고해를 벗어나 행복한 곳으로 가는 자도 얼마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게송 177) 참으로 인색한 자들은 신들의 세계에 가지 못한다.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시를 기뻐한다.

그로인해 그는 저 세상에서 행복해진다.

새김 : 보시라고 한역된 다나(da-na)는 ‘베품, 자선, 분배, 선물, 너그러움, 인색하지 않음’의 뜻을 갖으며, 무언가 조건 없이 무상으로 남에게 주는 것을 뜻한다.

특히 부처님 당시 탁발로 살아가는 비구나 비구니 또는 승가 공동체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다나’라고 하였다.

남에게 준다는 행동은 인색한 마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것은 아까워서 조금도 주지 못하지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주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 모두에서 행복하다는 가르침이다.

보시는 불교에서 가장 큰 덕목 중에 하나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것, 필요한 사람에게 무언가 주어 나도 남도 함께 행복한 것이 보시의 큰 공덕이다.

물질의 보시인 재보시, 경전을 보시하거나 가르침을 전하는 법보시를 통하여 물질이나 가르침을 남에게 주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함으로써 많은 공덕을 쌓게 되면 그만큼 업장이 녹기 때문에 좋은 곳에 간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게송은 우주의 실상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과 인색하지 않게 보시의 공덕을 짓는 사람은 천상의 행복을 누린다는 가르침이다.

빠알리 경전에서 보시에 대한 예를 살펴보자. “어떤 이는 조금 있어도 베풀고, 어떤 이는 많아도 베풀지 않으니, 조금 있어도 베푸는 보시는 천 배의 가치가 있다.

주기 어려운 것을 주는 사람들, 하기 어려운 것을 하는 사람들, 옳지 못한 사람은 흉내 낼 수 없으니, 옳은 사람의 가르침은 따르기 쉽지 않네. 이들은 죽은 후 가는 곳이 다르니 옳은 사람은 좋은 곳으로 가고, 옳지 못한 사람은 나쁜 곳으로 간다네.” <상윳따 니까야> 1.4:2. “베풀면 좋은 결실을 얻지만 베품이 없으면 좋은 결실이 없다네. 도둑들이 훔쳐가거나, 왕들이 빼앗아 가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네. 모든 재산과 함께 이 몸도 끝내는 버려야하니, 지혜로운 이여 이것을 알아 자신도 즐기고 보시도 하세.” <상윳따 니까야>1.5:1-2 위의 가르침에서 보시란 어떤 것인지 간추려 보자. 1. 물질이 넉넉해야 남에게 베푸는가? 물질이 많은 사람이 남에게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 남에게 베푸는 것은 천 배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나누려는 따뜻한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2.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왜 어려울까? 누구나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 인색한 사람은 모으는 데만 바쁜 사람이니 준다는 것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3. 배품의 공덕은 무엇일까? 우선 남을 기쁘게 하니 큰 공덕을 지은 것이고 따라서 자신도 기쁘니 일거양득이다.

이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베푸는 사람, 그의 공덕은 밤낮으로 늘어날 것이다.

[불교신문 2751호/ 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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