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정진의 힘으로 운명을 극복해라

정진의 힘으로 운명을 극복해라

-지광스님-

상대방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

삶의 중요한 법칙이 업業의 법칙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만상과 모든 존재들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업장소멸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입은 남을 아프고 쓰라리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입으로는 항상 좋은 말을 해야한다.

귀는 남의 이야기를 바르게 들어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눈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남에게 이바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량없는 세월을 윤회하면서 지어 온 업을 탕감하기 위해서 눈, 귀, 코,혀, 몸과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한다.

우주의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화살이 되어 반드시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

어떤 일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업의 법칙,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지금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을지라도 세월이 흘러가면 기어이 나에게 되돌아와 과보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한번 지은 업은 억겁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생기生起하는 것이 업의 법칙이다.

(경률이상)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여인이 젖먹이를 잠시 내려놓고 부엌에 갔다.

그 사이 이리가 달려와 그 젖먹이를 물고 달아났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이리는 한 사내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사내가 이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너는 왜 죄 없는 어린아이를 물고 가느냐?”

“이 아이의 어미는 내 원수요.

그녀는 5백 세 동안 항상 내 자식을 잡아 먹었기에 나도 5백 세 동안 그 자식을 물어 죽여 왔던 것이오.

만일 그녀가 원한을 버린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오.”

그때 거의 실성하다시피 한 어머니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에 사내가 그녀를 진정 시키며 말했다.

“원한을 버려야 당신의 자식을 살릴 수 있소.”

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는 이미 원한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리가 그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자 입으로는 원한을 버렸다고 하지만 속으로 는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는 두 사람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젖먹이의 목을 물어서 죽이고는 달아나 버렸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업의 과보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하나는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생에 지어서 내생에 받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금생이 지어서 삼생 뒤에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 가운데 삼분의 일은 이미 전생의 업에 의해 결정된다고볼 수 있다.

여기에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까지 합치면 우리 삶의 삼분의 이까지는 이미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리라.

이렇게 우리 삶의 아주 많은 부분은 스스로가 전생에 여러 가지 형태로 지은 것을 계속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운명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운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의지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체만상이 인연에 따라 연기緣起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 즉 원인이 되는 씨앗이 이미 심어져 있다 해도 그 씨앗에 어떠한 연, 즉 조건을 가하는가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또한 미래에 받을 과보의 원인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역시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미래의 어느 날 우리에게 닥쳐 올 일이 이미 지은 업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있다 해도 자기 마음의 크기에 따라 쉽게 넘어갈 수도 있고 어렵다 못해 발목이 잡혀 나뒹굴 수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양의 소금을 대야 크기 만큼의 물에 넣으면 마실 수 있지만, 한 컵 정도의 물에 넣으면 짜서 도저히 마실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령 몇 월 몇 일 어느 때 일어날 일이 정해져 있는 탓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해보자.

그동안 A라는 가정은 부부가 노력해서 저축도 하고 보험도 들어 놓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B라는 가정은 저축해 둔 것도 전혀 없고 보험도 가입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살던 집을 팔아서 사건을 해결하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스스로 갈고 닦아 쌓아 놓은 공덕이 운명을 쉽게도 만들고 견딜 수 없이 어렵게도 만드는 것이다.

공덕도 쌓지 않고 정진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미래는 누구라도 불을 보듯 뻔히 점칠 수 있는 법이다.그러나 열심히 노력하고 힘차게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운명도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은 바 업이 결정되어서 비록 어려운 상황이 기다린다 해도 그 동안 쌓은 공덕의 힘으로 쉽사리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업으로 인한 운명을 그대로 받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는 말대로 자신이 할 도리를 애써 다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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