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상태인지요?
-법륜스님-
비유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강도가 쫓아옵니다.
칼을 휘두르며 돈 내놓으라고 달려드니 두려워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도망을 가도 계속 따라옵니다.
돌아보면 뒤에 있고, 또 도망치다가 돌아보면 바로 뒤에 있고..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어 관세음보살을 간절하게 부릅니다.
살려달라고..
그랬더니 보살님이 숨겨줘서 살아나고..
‘아휴 살았다..’ 한 숨 돌립니다.
강도를 만나, 아무리 피해도 따라온다..
이게 우리네 세상살이입니다.
자식문제 해결하면 돈문제, 돈문제 해결하면 부모문제,
부모문제 해결하면 또 무슨 문제..
길거리에 두더지 게임처럼..
이거 때리면 저거 튀어나오고,
그거 때리면 또 다른 게 튀어나오고..
빨리 때리면 빨리 튀어나오고..
항상 문제가 꼬여 가는 것,
이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눈을 번쩍 떴더니..
꿈이야.
‘어 꿈이네~’ 알고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됐습니다.
강도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강도라는 게 없었고,
그러니 두려워 할 이유도 없고, 도망갈 일도 없고,
구원을 요청할 일도 없고
구원해주는 자도 없고, 고마워할 일도 없고..
이게 깨달음입니다.
▒ 그런 깨달음은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요?
자기를 한번 잘 살펴보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살펴보세요.
항상 내 문제를 걱정하는지..
돈 벌어야 하는데,
집 사야 하는데, 뭐해야 되는데, 뭐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친구가 도와줘야 되는데,
친척이 도와줘야 하는데, 부처님이, 하느님이 도와줘야 하는데..
그래서 바쁜 중에도 절에도 갔다가 교회도 갔다가..
부지런히 다닙니다.
이렇게 늘 내 문제만 걱정하고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서로 도와달라고 아우성이죠.
그런데 깨달은 자, 법(法)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어떠한가?
그는 일단 자기문제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물론 세수하고 밥 먹고 하지만, 그렇게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 일을 빼고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인은 할 일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할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선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는 무엇을 하고 사는가? 그는 세상에서 필요한 일들을 합니다.
세상과 이웃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첫 째로,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기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고
두 째로, 세상과 이웃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에
세상 사람들이 괴롭다고 하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재물로 도와준 것도 아니고..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온갖 것 다 가진 왕도 부처님을 찾아와 ‘괴로워 죽겠어요’ 하면
부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곤 하셨습니다.
▒ 어떤 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지요?
지금 자기 자신을 딱 보세요.
종교를 떠나서..
기독교다 불교다..
종교와 종파를 다 떠나서
결혼 했다 안 했다, 불교를 안다 모른다..
이런 걸 다 떠나서..
자기가 자신을 한번 하루 동안 쭉 관찰해 보세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면서 사는 지를
한번 관찰해 보세요.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가 잘 되면 시샘하고 배아파하고 그러는지 아닌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궁리를 하고 사는지,
실제로 무슨 행동을 하는지 한번 관찰해 보세요.
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지 아니면 괴로운지..
남을 도와주고 있는지..
뭘 물어서 가르쳐주는지, 도와주는지,
경제적으로 도와주는지, 무슨 일을 해주는지..
이렇게 남을 도와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남들을 불러다가 시키고 있는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러고 살고 있는지..
이럴 때, 도움 받는 존재에서 도움 주는 존재로의 전환..
이게 수행입니다.
괴로워하는 존재에서 괴로움이 없는 존재로
온갖 것에 속박받는 존재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제 멋대로 하는 존재에서 주위를 살피는 존재로
사랑을 못얻어 괴로워하는 존재(사랑고파병)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를 구하는 존재에서 이해를 하는 존재로
자기의 존재가 전환되어간다면 이걸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그래 해도 수행이고,
절에 다니면서 그래 해도 수행이고
불교 안 믿고 그래 해도 수행입니다.
참선 안 해도 그렇게 나아가면 수행이고
참선 해도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면 수행이 아닙니다.
참선하는 게, 염불하는 게 이렇게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면 수행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가 수행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살펴보면 알 일일입니다.
또 점검해봐서 ‘아이고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 내 상태가 이렇구나’ 하고 한 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서 가면 되고, 또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가면 되고..
넘어지는 걸 갖고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는 게 ‘잘 될 거다’ 이렇게 본다는 게 아니라
넘어지면 넘어진 것을 기초로 해서, 다시 출발한다 이 말입니다.
지난 일로 괴로워 하거나 오지도 않은 일로 근심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럴 녘에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간다..
이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