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원을 지닌 사람은 그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원을 지닌 사람은 그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

법정스님

원을 지닌 사람은 그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나무들에 새 잎이 돋아난 것을 보니 마음이 싱그러워집니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니, 우리 마음속에서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 잎을 피울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이런 계절의 변화가 있다는 것은

그 속에서 우리 자신도 뭔가 변화를 일궈내라는 그런 소식일 것입니다.

말을 꺼내기도 끔찍합니다만, 얼마전의 중국 여객기 추락사고

소식에 큰 충격을 받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라디오를 통해 그 소식을 이틀 후에 들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게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방송을 통해 생존자 가운데 한 분이

인터뷰에서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바로 이웃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것도 120여 명이나 죽음을 당했으니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아마도 사는 일 자체가 꿈결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것이

이런 불행이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니란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 앞에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재난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라는 커다란 행성을 타고

태양을 중심으로 비행 중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65억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너나 없이 너무 낭비하고,

함부로 버리고, 마구잡이로 허물고, 더럽히고 있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 지 알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어떤 학자는

지금 이 세계는 가속도가 붙은 채 내리막길을 걷잡을 수 없이 달리고

있는 기차와 같다’고 비유하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모른 채 안전하게

뛰어내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불안에 떨면서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행운입니다.

단 그 행운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시적인 것임을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지금 살아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이지도 알아야겠습니다.

일찍 가버린 사람들과는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 때문에 아쉽고 슬픕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만남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한 때를 헛되이 보내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을 등지게 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옛 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지기 또 한 해,

한 평생 몇 번이나 둥근 달을 볼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보름달을 달마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달이 떴는지 마는지,

자연현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무슨 꽃이 피는지

전혀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고

보람있는 인생을 위해서 각자

어떤 삶의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온통 부정부패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 권력은 어찌 된 일인지 부패를 꼭 동반합니다.

절대 권력이므로 절대 부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권력 주변이

온통 부정부패 일색이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역대 정권이 하나같이 밟아온 길 입니다.

자유당 시절부터 5·16 군사정부 시절 그리고

이후 공화국 어느 때 할 것 없이 다 똑같이 밟아온 길입니다.

또 모든 권력은 집권 초기에 하나같이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깃발로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개혁의 주체인 자기 자신들은 개혁할 줄 몰랐습니다.

여기에 권력의 부패가 따른 것입니다.

자기 개혁 없이 어떻게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돌림병처럼 만연하겠습니까?.

정치하는 사람이나 공무원이나 양식을 지닌 인간으로써

삶의 철학에 그 질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너나 없이 우리 모두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남보다 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말입니다.

40평, 50평되는 아파트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웁니까.

월급만 가지고는 그렇게 호화롭게 채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보다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들입니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만족할 줄도 모릅니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할뿐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합니까.

30∼40년 전 우리가 어렵게 살던 그 시절,

연탄 몇 장 들여놓고 쌀 몇 말 들여놓던

그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서 탈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그때보다 행복해 합니까.

어렵게 살던 그 시절보다 지금이 행복한가 스스로 한번 물어 보십시오.

인간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하락 일로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할 정도로 아래로만 굴러 떨어지고 있습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결국 불행해 진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이고 집단이고 많이 가질수록 결국은 불행해집니다.

소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소유로 인해서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니 고마워할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우리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돈이나 재물이 사람의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사람은 스스로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소비사회는 늘 새로운 것을 숭배합니다.

현대 소비사회의 신전은

대형슈퍼마켓과 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세일 때 보면 눈에 쌍심지 켠 순례자들로 신전은 넘쳐나고

그 일대는 교통혼잡이 심각할 지경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결코 돈이나 물건,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돈과 재산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지닌

사람인가에 따라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내가 원한다고

담박에 일이 이뤄지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릇이 적으면 인연이 넘치고 맙니다.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그릇이 적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넉넉한 마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의 그릇이란 덕입니다.

덕을 닦아 자기 그릇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소수이지만 부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의 의지에 따라서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즉 부자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곧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세상에는 욕심 사나운,

아주 탐욕스러운 부자가 있기 때문에 도둑과 강도가 생깁니다.

회교도들의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도 이런 맥락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양심들이 공히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름의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들은 절제의 미덕을 알고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내어

과시하기보다는 안으로 맑고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지요.

이와 같은 절제의 미덕을 배우려면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삶도 하나의 기술입니다.

먼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영원히 빈 껍데기로 남을 것입니다

무엇이건 마음에 든다고

그 자리에서 성급하게 움켜잡지 마십시오.

움켜쥐면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목표를 향해서 곧바로 돌진하기보다는

돌아가는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고속도로가 빠르기는 하지만 한눈 팔 겨를이 없는 비정한 도로입니다.

그러나 국도나 지방도로는 천천히 가면서 꽃도 보고 신록도 보고

지나치는 동네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성급하게 곧바로 돌진하면 인생이 마멸됩니다.

여유를 갖고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눈앞에서 해결되니까 그리움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월의 무게를 지닌

어떤 낡은 것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상품이 나왔다고 해서 가지고 있던 것을 한 순간에 버리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가 쓰시는 동안

배어든 애틋한 마음이 스며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집의 얼이 거기에 스며 있습니다.

오래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세월의 무게를 지닌 낡은 것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을 최소한도로 갖고 그것을 소중하게 아끼며

사는 삶의 질서는 낡고 소극적인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생활태도는 오늘날 지구 생태계 위기 앞에서

새로운 뜻을 갖는 지혜로운 삶의 철학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구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너나없이 과소비하고 함부로 허물고 더럽힌다면

지구가 자정능력을 상실해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업’은 마치 마음의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후에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한 순간 우리들이 갖는 생각이나 염원은 소멸되지 않고

이 우주공간에서 두고두고 진동한다고 합니다.

남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면

그것이 그대로 내 영혼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고 자비스런 생각을 갖게 되면 또한

그 에너지가 내 영혼의 둘레에서 맴돌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우리를 형성합니다.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가

바로 그 인생을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모든 부처나 보살들은 간절한 원을 세웠습니다.

부처님만 해도 사홍서원이 있고

여래십대발원문 이라는 열가지 원이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 원은 부처나 보살이 되고 나서

세운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이미 세운 서원의 힘으로 부처와 보살이 된 것입니다.

원을 세우고 노력한 결과 부처와 보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명심하십시오.

가치의식이 뒤바뀌고 사람의 선

자리가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는 험난한 세상에서

모두가 자신의 처지에 맞는 원을 세우기 바랍니다.

그 원의 힘이 우리들 삶의 목표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추상적이고 막연한 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도 실현 가능한 원을 세우기 바랍니다.

원을 지닌 사람들은 그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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