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열반 ‘몸.마음의 실체 없음’ 깨달아야 참 평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덧없으니 진정한 즐거움은 苦樂 너머에
몸뚱이가 죽는다 해서 몸뚱이 착(着)이 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뚱이 착이 쉬어야 몸뚱이가 쉰다. 한 평생 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 개념은 그냥 가져간다. 이것이 바로 몸뚱이 착이다. 가까운 친지 중에 오래 전 돌아가신 분이 계셨다. 그런데 선산에 매장된 고인이 아들 내외 꿈에 종종 나타나 다리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나 지속되는 꿈이 너무 생생한지라, 고인의 무덤을 파헤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의 아카시아나무뿌리가 다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다리의 통증을 호소했던 것인가? 이미 살은 다 썩고 뼈만 남았건만, 아직도 몸뚱이 착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카시아나무 뿌리가 휘감은 다리가 아픈 것이다. 아직도 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리가 아픈 것이다. 사실 지옥에 가더라도 고통을 받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다. 몸은 이미 타버리거나 썩어가고 있음을 유념해야한다. 없는 몸을 아직도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지옥고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몸이 없다면 무엇이 고통을 받을 것인가? 오히려 마음이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천당에서 낙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낙을 받는 것이다. 몸이 없다면 무엇으로 낙을 받을 것인가? 낙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다만 마음의 분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당에서의 즐거움도 결코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몸과 마음은 결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고 싶어 하지 않지만, 결국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즐기는 낙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즐거운 것도 한 때이다. 또한 즐거움이 다 하면 괴로움이 닥쳐온다. 그야말로 물거품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즐거움은 고와 낙을 떠나서 몸과 마음이 무상함을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거니(諸行無常) 그 모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是生滅法) 생기고 없어짐을 다해 마쳐서(生滅滅已) 그것들이 가라앉는 것이 즐거움이네(寂滅爲樂)” 설산게라 불러지는 이 게송에는 설산동자의 아름다운 구법이야기가 전해온다. 설산동자가 깊은 산중에서 수행하는 도중, 게송의 앞 두 구절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들어보니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뒤의 두 구절이 궁금하다. 둘러보니, 다만 험상궂은 나찰이 눈에 띄었다.그에게 물었다. “뒤의 두 구절도 마저 들려줄 수 없겠소?” 그 때 나찰이 말했다. “그대는 자신이 바라는 것만 알았지, 남의 사정은 헤아리지도 못하는구만”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살과 피요.” “게송을 마저 들려주시면 저의 몸뚱이를 내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게송은 완성되었다. 기쁨에 찬 설산동자는 게송의 내용을 사방에 적어놓고 마침내 높은 나무에 올라가 몸을 던진다. 그 때, 나찰은 제석천으로 변하여 동자의 몸을 사뿐히 받는다고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어쨌든 설산동자 덕분에 우리는 이제 손쉽게 이 게송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즐거움은 몸과 마음의 즐거움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덧없기 때문이다. 이 몸과 마음조차 덧없음을 잘 깨달아야 참다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생멸이며,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스님
[불교신문 2251호/ 8월9일자]